야습
– 유인책
밤, 달, 별, 그리고 사냥감.
모두 최근 들어 그가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걸 그만둔다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공손절휘의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사유(思惟)를 방기하고 판단을 유보한다. 그냥 한 다. 그리고 그 행위와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책임지지 않는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물론 기술의 숙달과 익숙해지는 것 사 이에는 차별을 두어야 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숙달 쪽에게 너무 억울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익숙해진 덕분에 바쁜 육체에 비해 마음은 한결 편해질 수 있었다. 그의 육체는 일일이 머리의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듯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이든 다 그렇겠지만 첫 번째가 가장 어려웠다. 처음 해보는 경험은 언제나 불안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가져오기 마련인데, 그것들은 커다란 심리적 압박감이 되어 사람의 정신을 짓누른다. 때문에 그는 당황했고, 다섯 초식이나 더 쓰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단 한 수에 끝내 버리고 싶다고 다급하게 마음먹은 것이 패착(敗着)이었다. 초조함에 평정을 잃은 마음은 그의 몸 전체를 무디게 만들었다. 때문 에 별로 강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한 번이면 충분할 것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말았다.
두 번째는 훨씬 나았다. 이미 한번 경험해 봤기에 마음의 대비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당황한 마음이 평정을 잃으려 할 때 그것을 억지로 제 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네 초식이나 쓰고 말았다.
세 번째는 훨씬 할 만했다. 이미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기에 대처법 또한 준비되어 있었다. 두 번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전체 과정을 수정하고 세부 사항을 미세 조정할 수 있는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약간의 거리낌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때 발생할 망설임을 다시 자신이 제어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 두 과정을 생략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전 과정을 그림 그리듯 계산할 수 있었고, 이미 두 번이나 반복 실습해 본 이후였다. 어느새 그의 손은 떨림을 멈추고 있었 고, 정신적 수전증이 사라진 손은 다루기가 매우 수월했다. 그래도 세 초식이나 쓰고 말았다. 아직 부족했다.
네 번째에는 어느새 그의 마음속에서 거리낌이 사라져 있었다. 망설임도 없었다. 오로지 상대를 꺾을 기술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한 초식 만 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까? 하지만 기술에 대한 생각이 너무 많았던 탓인지 한 초식을 더 쓰고 말았다.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것은 감성적인 부분만이 아니었다. 이성적인 부분도 정도가 지나치면 육체의 움직임에 방해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실전을 통해 깨달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었 다.
그리고 다섯 번째인 지금 그의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밤 산책의 차이를 그는 별로 구분할 수 없었다. 달밤에 잠시 운동 좀 하는 게 특이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거기에서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제처럼 오늘도 승리는 일상처럼 그의 곁을 찾아오리라. 오늘만큼 성공을 확신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늘로 이 심야의 산책도 끝이다. 차가운 밤바람과 새벽녘의 이슬과도 오늘부로 작별이다. 그리고 이제 난 그를 쓰러뜨릴 것이다.’
마음에 품은 칼날은 지난 다섯 밤을 통해 충분히 날카롭게 벼리어져 있었다. 오늘은 칼날을 벼리는 것이 아니라 그 첨예한 예기(氣)를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의 식이었다. 자신의 칼날이 모란을 꺾을 만큼 충분히 날카로워졌다는 사실을 선언하기 위한 의식!
눈앞에 현실화한 직접적인 증거는 그의 자신감을 더욱더 고양시켜 줄 것이고, 그 자신감은 그의 기세를 더욱 강하게 북돋아주리라. 공손절휘는 들뜬 마음으로 오 늘의 의식에 바쳐질 제물을 바라보았다.
“매화라……. 모란을 꺾기 전에 연습 삼아 꺾어보기에 나쁘지 않은 꽃이군.”
심야 속을 걷고 있는 순찰자의 복식에는 화산파 특유의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그저 최근 만들어진 일상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니까.
“나는 무적이다!”
공손절휘는 기척을 지운 채 황금 완장을 찬 화산파 제자의 등을 향해 접근했다. 앞의 연속적인 성공에 도취된 청년은 이번에도 역시 상대가 자신의 기척을 알아채 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물론 등 뒤에서의 기습 같은 실용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것 정도야 상관없지 않을까? 그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눈앞의 상대를 기겁시킬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등이 뒤돌아섰다. 등이 등을 보이자 어처구니없게도 앞이 되었다.
“좋은 밤!”
빙글 돌아선 그 남자는 활짝 웃으며 검(劍)으로 인사했다.
번쩍!
달빛을 머금은 한줄기 검광이 어둠에 한줄기 빛의 상흔을 남겼다. 화산파의 복식을 입은 이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화려하기로 유명한 화산파의 독특한 검기 가 아니었다. 그를 덮쳐 온 것은 뇌전처럼 빠른 쾌검이었다.
“헉!”
공손절휘는 단숨에 자신의 허리를 두 동강 낼 것 같은 그 무서운 쾌검 일식에 기겁하며 몸을 뒤로 날렸다.
쉬익!
섬광은 그의 허리 앞을 머리카락 하나 차이로 쓸고 지나갔다. 그동안 몸에 새겨놓았던 수련이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옷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의 고급스런 비단 무복은 날카로운 검기에 의해 깨끗하게 절단되었던 것이다. 비록 비싼 옷이었지만 목숨보다는 쌌다.
“당신, 화산파가 아니군?”
공손절휘는 자신의 옷을 마름질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씨익 웃었다.
“자기소개가 늦었군. 남궁세가의 남궁상이라 하네.”
달빛처럼 환하게 빛나는 그런 웃음이었다.
“반갑네! 도련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