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9권 20화 – 청천벽력(靑天霹靂) (19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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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9권 20화 – 청천벽력(靑天霹靂)

청천벽력(靑天霹靂)

-한 사람의 죽음, 그리고…….

“오빠~ 경영이 오빠~ 우리 시장에 놀러 가자!”

“안 돼!”

소년은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그러나 여섯 살 어린 여동생에게는 소년의 거절이 통하지 않았다.

“아이~ 가자아~”

여동생이 다시 졸랐다. 소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영이 오빠아~ 가아자아~”

“안 돼! 지금은 이곳에 있어야 안전해!”

소년 유경영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여아는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볼은 발갛게 익은 사과처럼 잔뜩 부풀어 있 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안 나갔잖아!”

그것은 사실이었다.

“미안, 미안! 하지만 안 돼!”

“왜? 숙부님도……..”

“그만!”

숙부라는 호칭에 유경영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꺼내기는커녕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화제였다. 사실 이곳 중양표국에서 죄수처럼 갇혀 있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 때문이었다. 그날 시장통에서 윤이정과 조우한 이후로 유경영은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윤이정을 만난 날, 그는 가문의 가업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두려웠다. 죽을 만큼 두려웠다. 가장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유일하게 남겨진 신뢰가 무너져 내렸을 때 소년이 맛본 끔찍한 공포는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아직 어린 여동생은 자꾸만 나가자고 조른다. 그러나 감시의 눈길이 번뜩이 고 있을지 모를 저 문밖을 유경영은 결코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누구와 상의해야 하지??

믿을 수 있는 것이 모두 무너졌는데 누구와 상의한단 말인가? 또한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상의해서 무엇 하겠는가? 상대의 조언을 듣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그런 상의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러니까…….

“으아아아아아앙!”

그때 그의 옆에서 커다란 울음이 터져 나왔다. 느닷없이 내지른 고함에 깜짝 놀란 탓이리라.

소년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 소년은 일단 사과부터 했다.

“미안, 미안. 그만 뚝 그쳐. 오빠가 잘못했어. 조금만 참아. 며칠 안으로 시장에 데려가 줄게. 맛있는 것도 사주고.”

유경영은 급한 김에 거짓말로 여동생을 달랬다.

“정말?”

“정말.”

거짓 약속에 대해 유경영이 다짐했다.

“약속!”

여아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던 유경영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손가락을 내밀었다. 여아는 신나게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덩달아 유경영의 팔이 위아래로 팔랑거렸다.

“그럼 이제 우리 계약(契約)한 거야?”

여아가 해맑은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뭐, 계약? 그 말은 어디서 배웠니?”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년이 되물었다.

“아빠가!”

“아버지가?”

“응, 아빠가 그러는데 계약은 신의(信義)로 지켜 나가는 거랬어. 신용이 없는 장사꾼은 망한대. 그런데 오빠, 신의가 뭐야?”

유경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이 방금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지? 자신은 방금 잠시 잠깐의 도피를 위해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거짓된 계약을 맺으려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신의를 지켜야 할 고객이자 여동생인 사람에게. 그래서는 상인으로서 실격이었다. 그래서는 아버지를 볼 낯이 없었다. 소년은 소녀를 반드시 시장에 데려가 주겠다고 결심했다.

소년이 상인의 길에 한 발짝 더 다가서고 있을 바로 그때 그것을 축복이라도 하듯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깜짝 놀란 유경영은 하마터면 동생과 함께 벌러덩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그만큼 문이 열리는 소리는 크고 요란했다. 누군가가 습격해 왔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문짝이 부서져 나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진 소저! 진 소저!”

벌컥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점창제일검 유은성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얼굴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 막강한 내공이 실린, 다급하지만 위력적인 발길질에도 문짝은 부서지지 않았다. 어지간히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물건인 듯했다.

“음?”

그제야 그의 시야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는 아이들이 들어왔다.

“아, 경영이구나. 혹시 진 소저께서 어디 계신지 보지 못했느냐?”

“뒤쪽 연무장에서 사사 중이십니다.”

“고맙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은성은 서둘러 뒤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피융’ 하고 파공성이 일어날 듯한 그런 발걸음이었다. 금세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유은성의 등을 바라보는 유경영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일일까? 저렇게 급히 서두르시다니? 천무학관에 불이라도 났나?”

유경영의 말대로 진소령은 연무장에 있었다. 막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유은성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현재 제자 유란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중 이었다. 그 순간을 방해해도 되는 것인지 결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심득을 전수받는 순간은 배우는 자에게 있어서는 물론 가르치는 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 깊은 순간이었다. 가치로는 환산할 수 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고, 한마디 말로 인생 그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 중대한 순간에 개인적인 판단으로 개입 해 함부로 방해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자 지나친 월권행위였다. 그는 일단 지켜보기로 결심했다.

“네가 왜 패배했는지 알겠느냐?”

진소령이 물었다. 남궁상에게 패배한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자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틀렸다.”

“예? 틀렸다고요?”

약하다는 것 말고 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패배에 그것 이외에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 진소령은 제자의 그런 마음 상태를 알아차렸다.

“패배는 하나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리고 약하다는 것은 본질적인 원인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자리하는 과정일 뿐이다. 결과에 선행한다 해서 모두 원인 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실패하는 게 나쁜 게 아니다. 실패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게 나쁘지. 누구나 실패는 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오직 성공만으로 점철된 인생이란 있을 수 없다. 가장 최악은 실패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실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것이지. 그런 좌절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실패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려 하 지 않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는 이들만이 좌절하지 않고 실패를 극복할 수 있다. 명심하거라. 좌절이란 스스로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삶을 영위함에 있어 좌절은 금지였다.

“실패를 통해 배워라! 하지만 그렇다고 교훈을 얻기 위해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것도 알아두거라. 기왕이면 자신의 실패보다 남의 실패를 통해 배 우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이란 게 어려운 게 아니다.”

해주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너는 방금 약하기 때문에 졌다고 했다. 그럼 약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저 강해지기만 하면 되느냐? 그렇게 대답하면 간단할진 모르지. 그러나 아 직 의문은 남는다. 어떻게 하면 강해질 수 있느냐? 어느 것을 더욱 강하게 단련해야 하느냐? 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준비해 놓고 있느냐? 단순히 강해져야 한다고 해서 올바르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냐? 자신의 부족한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고치면 결과가 바뀔 수 있는 것. 네가 네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은 바 로 그것이다. 지금 너를 최단시일 안에 바꿔줄 수 있는, 그리고 너 스스로도 단시간에 바꿀 수 있는 그것 말이다.”

“제자가 우둔하여 아직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하교해 주십시오.”

유란이 가르침을 청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사부님이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건 네 안목(眼目)이 부족해서다.”

“안목이요?”

“그래. 상대를 살피는 안목이 부족한 것이 네 패배의 원인이다.”

진소령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안목이란 무엇입니까?”

유란이 물었다.

“모든 이의 사고방식이 각기 다르듯 각자의 실력에도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현실적인 실력 차는 어쩔 수 없지. 모두 동일한 실력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이 현실이라 불리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세상, 같은 것은 환상일 뿐이다. 똑같아서도 안 된다. 높낮이가 있기에 물이 흐 르고 바람이 불고 별이 도는 것이다. 모두 똑같다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진보도 없다. 또 그만큼 지루한 세상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 인 물이 썩듯 언젠가 썩고 말겠지. 그 차이를 파악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안목이다.”

“……”

“요리사가 되지 않아도 맛은 평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수가 되지 않아도 고수의 무공을 평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고수의 평가와 하수의 평가가 같지는 않다. 전혀 다른 분석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기 마련인 법.”

유란은 숨을 죽인 채 진소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수들에게는 고수만이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있다. 깨달음을 통해 체득(體得)한 것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 불려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것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식이기 때문이지. 왜, 이해가 안 가느냐?”

제자의 표정에 역력히 나타난 고심의 흔적을 바라보며 진소령이 물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사과할 것 없다. 역시 말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더 낫겠구나. 저기 쟁반에 놓인 사과 두 개를 가지고 오너라.”

중양표국에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내온 과일들이 은쟁반 위에 수북이 담겨 있었다. 거절해도 소용이 없어서 한구석에 놔두었는데 유란이 들고 온 사과는 방금 그 곳에 놓여 있던 것이었다.

“잘 보거라!”

진소령이 사과를 가볍게 위로 던졌다. 다음 순간 섬광이 번쩍였고, 어느새 사과는 그녀가 빛살처럼 빠르게 내뻗은 검끝에 올려져 있었다. 유란은 사부의 검이 언제 뽑혔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자, 이 사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저… 네 조각으로 쪼개졌습니다.”

“그럼 난 검을 두 번 휘두른 것이겠구나?”

“그, 그렇습니다, 사부님.”

“과연 그럴까? 고수들도 과연 너처럼 대답할까?”

“그건..”

사실 검이 어떻게 휘둘러지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했기 때문에 유란은 자신의 대답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 안목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희뿌연 안개 속을 꿰뚫고 진짜 상(象)을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한다. 그 러면 자연 확신이 들 것이다. 보거라.”

진소령이 손가락으로 검을 가볍게 튕기자 검끝에 올려져 있던 사과가 자로 잰 듯 정확히 여덟 조각으로 갈라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껍질은 돌려 깎기를 한 것처럼 한 줄로 예쁘게 깎여 나갔다는 것이다. 즉, 진소령은 먼저 껍질을 둥글게 깎은 다음 알맹이를 여덟 조각 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이럴 수가…….?”

유란은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빨랐느냐? 그럼 이번엔 다르게 한번 해보자꾸나. 남은 사과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거기에 서 있거라.”

유란이 그 말대로 하자 진소령은 검을 천천히 내뻗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매우 느릿느릿한 속도였다. 반 장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서 있던 유란이 저 검은 언제 쯤이나 이곳에 닿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검끝이 살짝 사과 끝에 가서 닿았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아주 살짝 와서 닿았을 뿐이다. 모기에 물려도 그것보다는 더 셀 것 같았다. 진소령은 검을 내질렀을 때처럼 천천히 검을 회수했다.

“자, 이번엔 어떠냐? 좀 천천히 했으니 잘 보였겠지? 뭐가 좀 보였느냐?”

“저… 사과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게 정말이냐는 듯 진소령이 반문했다.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정말 네 말에 확신할 수 있느냐?”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아두듯 강한 목소리로 진소령이 물었다.

“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유란이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또 틀렸다.”

진소령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지풍(指風)을 내쏘아 사과에 조그만 구멍을 뚫었다. 유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지풍 때문이 아니었다. 빨 간 사과에 난 조그만 구멍으로부터 졸졸졸 노란 물 같은 것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즙이었다.

“어떠냐? 이래도 아무 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

“…….”

이미 말문이 막혀 버린 유란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아주 미세하게 잘 갈아진 사과즙은 한참을 나오고서야 비로소 멈추었다. 그런데도 사과의 모양은 그대 로였다.

“안을 한번 보겠느냐?”

진소령이 다시 한 번 가볍게 검지를 튕겼다. 그러자 사과는 마치 날카로운 칼로 쪼갠 것처럼 두 조각이 났다.

•지풍검(指風劍)……..

그저 송곳처럼 구멍을 뚫는 보통의 지풍보다 급수가 한 단계 위의 고급 기술이었다. 일반 지풍과는 다르게 지풍을 선풍처럼 회전시켜 물체를 벨 수 있는 기술로 ‘지선풍(指旋風)’이라 불리기도 했다. 생각 이상으로 익히기가 까다로워 고수라 이름난 사람들 중에서도 익힌 이의 수가 의외로 많지 않은 그런 기술이었다.

“이, 이럴 수가…….”

다시 한 번 유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과 안은 깨끗하게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종잇장처럼 얇은 사과 껍질만이 간신히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는 내 검의 속도가 느린 것을 보고 별다른 위력이 없을 거라 판단했다. 내 말이 틀렸느냐?”

“…아닙니다.”

풀 죽은 목소리로 유란이 대답했다.

“물론 속도는 힘이다. 빠른 것은 강하지. 그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느리다고 해서 무조건 약한 것은 아니다. 고수들은 빠른 것은 더욱 빠르게 만들 뿐만 아니라 느 린 것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는 사람이 바로 고수라는 존재이다. 그러니 고수의 눈이 범인의 눈과 같을 수 없음은 당연한 일. 고 수들은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면도 함께 보는 사람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범인과 다른 고수의 안목이다. 때문에 그들은 남과 달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다. 그들이 비록 다수의 입장에 서 있지 않고 소수의 입장에 서 있다 해도 자신의 결정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런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란은 이제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안목을 기른다는 것은 곧 지혜를 기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그 지혜를 전승해 줄 수 있다. 이 전승을 통해 제자의 안목이 더욱 높은 경지에 이 르기를 스승들은 기원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한 초식 같은 수박 겉 핥기 식의 지식이 아니라 그런 안목을 높여주는 일임을 스 승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이번 패배에는 내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너의 안목을 그 정도밖에 키워주지 못한 것은 스승인 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털썩!

유란은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차마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불초한 제자 때문에 사부님께서… 사부님께서…….”

감정이 복받쳐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 유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의 추태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눈물로써 쓰디쓴 현재를 도피하고 싶지 않았다. 동 정받고 싶지 않았고, 동정해 주지도 않으리라. 그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눈물을 통한 감정의 정화가 아니라 와신상담의 독기 서린 각오였다.

“일어나거라.”

유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거운 책망이 그녀를 찍어 누르고 있어서인지 무릎은 얼어붙은 듯 펴지지 않았다.

“그것이 어찌 너만의 잘못이겠느냐. 나는 이번 일에 나의 책임이 있음을 안다. 나는 그 책임에서 눈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

“물론 전승만으로 완전한 심득을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로 통하는 심득은 그 전달 과정 중에 상당 부분 이상의 정보를 소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실된 심득만이라도 받아들이기에 따라 엄청난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스승 밑에 있다고 해서 훌륭한 제자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제자들 이 스승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게다가 안목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보니 대중 심리에 휩쓸리기도 쉽다. 그런 파고를 이겨내고 스스 로의 안목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

“그러니 안목을 더 키우도록 해라. 인생의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 이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너는 그 너머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부님의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 제자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넣겠습니다.”

유란이 큰절을 올리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기다리게 했군요, 유 대협!”

“아닙니다. 좋은 가르침, 잘 들었습니다.”

“부끄럽군요. 유 대협께 그런 말을 듣다니. 그런데 무슨 용무이신가요? 굉장히 다급해 보입니다만?”

그제야 유은성은 자신이 가져온 용건이 생각났다. 진소령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은 후유증이었다.

“아차! 깜빡했군요, 진 소저! 그 중요한 일을 잊다니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입니다. 진 소저, 혹시 진 소저께서 며칠 뒤에 비무하기로 한 이가 남궁세가의 셋 째 남궁상이라는 청년 아니었습니까?”

“예, 그래요. 그 아이랑 싸우기로 했지요.”

이유는 단 하나. 진령과 결혼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유은성도 그 사실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얘기를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러 웠다. 그러나 어차피 알 일, 숨겨둔다고 해서 능사는 아니었다.

“저…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왜 저렇게 뜸을 들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유 대협께서 그리 뜸을 들이시는지 궁금하군요. 말씀하세요. 놀라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유은성은 자신이 가지고 온 놀랄 만한 소식을 조심스레 전했다. 그리고 유은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진소령은 경악하고 말았다.

“예에? 지금 뭐라고……?”

사부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인 것은 제자 유란 쪽이었다. 그녀 역시 유은성이 가지고 온 소식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하기 힘든 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지독한 악 연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소식의 주인공 덕분에 존경해 마지않는 스승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하신 거죠, 유대협?”

여전히 혼란스러운 와중에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며 진소령이 반문했다. 하는 수 없이 유은성은 한 번 한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그… 남궁상이란 청년이… 피살(被殺)당했다고 합니다!”

<『비뢰도』 제2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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