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대떡을 부치는 법
ᅳ사신 접견
“관주님께서 늦으시는군요?”
화려하게 생긴 청년의 왼쪽 귀에 걸린 다섯 개의 귀걸이가 신경질적으로 흔들린다. “금방 오실 겁니다.”
매우 눈이 가는 중년의 남자가 이 나이 젊은 청년 사신을 향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 말, 꼭 다섯 번째니다.”
청년 이시건의 말투가 자연스레 날카로워진다.
“저런, 그거 죄송해서 어쩌죠. 그런 진부한 표현을 쓰다니요. 제 불찰이군요. 다음번에 또 물으시면 그땐 다른 표현으로 바꿔 드립지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중년 문사는 여전히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 말인즉슨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겨우겨우 현상 유지하고 있던 이시건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금방 나오실 겁니다’라는 말과 달리 그는 꽤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
부글부글 끓던 화가 마침내 폭발하려던 그 찰나에 대전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미안미안! 정말 미안허이! 노부가 좀 늦었지?”
문을 열어젖히고 팽팽한 긴장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 들어온 사람은 바로 천무학관의 관주 철권 마진가였다.
“미안하네. 나이를 먹다 보면 뼈마디가 쑤셔서 말일세. 발걸음이 자꾸만 굼떠진다네. 큰일이야, 큰일.”
지금 당장이라도 황소도 일격에 때려잡을 수 있을 것 같은 통나무 같은 팔뚝으로 그런 말 해봤자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시위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자네의 화려한 활약에 대해서는 이미 들었네. 우리 아이들하고도 벌써 인사 나누었다고?”
거구의 노인이 성큼성큼 힘찬 발걸음으로 대전을 가로질러 태사의에 앉으며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워낙 사람들과의 교제를 좋아하다 보니… 실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포권한 채 허리를 반쯤 숙이며 이시건이 대답했다. 그러자 굵직한 오른손으로 머리를 괸 채 비스듬한 자세로 노인은 손사래를 쳤다.
“아닐세, 아니야. 난 이제 앞으로 젊은이들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서로서로 교류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 그런 와중에 소소한 충돌이야 언제 나 있는 일 아닌가. 자네가 우리 두 곳의 우애와 협력을 일부러 해치려 할 만큼 경솔하고 악의적인 인물이라 생각하지 않네. 젊은 혈기에 그럴 수도 있지. 안 그런 가?”
이해하는 척하곤 있지만 뼈가 있는 말에 청년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며 맞장구칠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습니다, 관주님!”
“하지만 잘려진 그 아이의 팔목은 누가 보상해 준단 말인가! 안타까운 일일세.”
이시건은 속으로 뜨끔했다.
과연!
“저자가 바로 천무학관의 관주 일격무적 이권불요’의 철권 마진가인가?”
청년은 시선을 살짝 들어 태사의에 앉아 있는 거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강철의 성을 연상케 하는 초로의 사내는 아직도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듯 사람을 압도 하는 박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단한 위압감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화려한 차림의 청년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유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원래 사신이란 언제나 적진(敵陣)에 걸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심장이 약한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신의 목은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언제나 남이 거둬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신에게는 반드시 휴대해야 할 세 가지 필수 용품이 있으니 사신의 부(符)와 용무가 담긴 외교 서신, 그리고 유서(遺緖)였다.
창칼이 난무하지 않는다 뿐이지 이곳은 전장이었다. 그는 이런 팽팽한 긴장감이 좋았다. 다들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는 반증이기 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 사신의 부(符)를!”
이시건은 품속에서 분명 상대의 신경질을 잔뜩 유발시킬 목적으로 쓰여진 게 아닌가 의심되는 외교 서신과 함께 반쪽짜리 패를 하나 내밀었다.
세간에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쓰는 말 중에 부합符合)한다는 말이 있다. 부합이란 꼭 들어맞는다는 의미다. 부란 원래 하나의 패를 반으로 나눈 것을 가리킨다. 원래 하나였던 패이기에 둘을 붙이면 딱 들어맞는데 그것을 부합이라 한다. 만일 부합되지 않으면? 신분을 사칭한 죄로 재깍 사형이었다.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이
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고래로부터 넘칠 정도로 많았고, 이들은 언제나 골칫덩어리였다.
“그럼!”
‘군사 겸 관주 보좌’의 자리에 있으면서 관주님은 금방 오실 겁니다’를 다섯 번 반복한 실눈의 사내 손문경이 이시건에게 다가가 공손한 자세로 사신의 부를 받아 갔다.
그걸 받은 마진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이시건은 마진가의 갑작스런 돌발 행위에 당황하지 않았다. 강철의 거인이 다가간 곳은 커다란 금고 앞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꽃과 나비와 벌과 난초가 새겨진 붉은 금고는 겉보기에는 성세 드높은 갑부 집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화려한 장 식장처럼 생겼지만 그 내부 구조물은 만년한철로 되어 있었다. 겉껍질을 둘러싸고 있는 화려하게 장식된 나무판은 만년한철로 만든 금고 위에 그것을 심미적으로 위장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찰칵!
찰칵!
이중으로 잠겨진 금고의 잠금장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윽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붉은 문이 서서히 두 팔을 벌리며 그 안에서 나타난 것은 수십 개의 잠겨진 비단 상자들이었다. 각각의 상자 앞에는 모두 표찰이 달려 있었는데, 각 표찰에는 무림맹, 무당파, 화산파, 무림맹 산서지부, 무림맹 호북지부, 제일감찰, 제 이감찰, 암행 등등이 적혀 있었다.
그중 마진가가 꺼내 든 것은 ‘마천각’이라고 표시된 상자였다. 비단으로 둘러싸여 있긴 하지만 그 안은 단단한 강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상자에도 역시 검고 단 단해 보이는 잠금장치가 되어 있어 이제 지겨울 정도였다. 이중, 삼중으로 된 봉인 상자 안에 든 것은 보석이 아니었다. 그 안에 엄중히 보관되어 있는 것은 하나의 반쪽짜리부符)였다. 얼핏 보기에 볼품없는 철패처럼 보이는 그것은 소중한 보물처럼 붉은 비단 보자기에 조심스레 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우악스런 손이 혹시 나 부를 부수지는 않을까 걱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신중한 동작으로 부를 꺼내 들었다. 큼직한 양손에 각자 하나씩 들린 부가 공중에서 서서히 합쳐졌다. 두 패의 절 단면은 꼭 들어맞았다. 그 위에 새겨진 그림과 글자 역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휘어진 활, 당겨진 시위, 그 사이에 메겨진 한 발의 화살, 그리고 그 밑에 적혀 있는 두 개의 글자.
대대(待對).
서로 대립하면서도 서로 의지한다. 마천각과 천무학관의 관계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는 표현은 없을 것이나 이제 그 사실을 아는, 혹은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정신 아래 모인 조직이라 해도 집단화되는 그 순간, 순수했던 정신은 집단의 이익 아래 욕망의 가위와 이기심의 바늘로 해체와 재구성의 재단 과정을 통해 잘나신 이념(理念)이 된다. 그리고 이념의 독은 서서히 이성을 마비시키고 지혜를 좀먹고 종국에 가서는 눈이 멀고 귀가 막히고 혀가 미쳐 날뛴다. 그때쯤 되면 사실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지금 천무학관과 마천각도 이와 다르지 않아 대대의 정신 따윈 뉘집 개가 물어갔는지 관심도 없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채 으르렁거리며 대립하고 있는 상태였다.
“틀림없이 부합(符合)되는군!”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부를 하나로 합쳐 진짜임을 확인하는 지극히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 상대의 신분을 정확히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마진가는 좀 전에 건네받 았던 서신의 봉인을 떼고 그것을 펼쳐 보았다.
“귀찮고 번거롭겠지만 이해하시게.”
마진가가 양해를 구하자 이시건을 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저희 마천각에서는 이보다 다섯 배는 더 복잡한걸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이해해 주니 좀 마음이 놓이는군. 하긴, 자네들의 보안 점검 절차는 신경질적인 걸로 악명이 높지.”
‘시… 신경질..
마진가의 얼굴이 활짝 펴지는 대신 이시건의 인상은 살짝 일그러졌다.
“안전불감증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지요.”
“자네 충고에 따라 다음부턴 우리도 좀 더 보안을 강화해야겠네. 안 그런가, 손 군사?”
“검토해 보겠습니다, 관주님!”
그런 충고 한 적 없다고 항변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신분 사칭과 경력 사칭이 가장 손쉬운 사기 수단이었던 시대이다. 통신이라고는 손으로 쓴 편지가 전부인 시대. 그나마 가장 빠른 전달 수단이 말이며 전서응은 소 수의 특별한 사람들만이 전유(有)하고 있던 이 시대에 상대방의 신분을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공사를 떠나 크나큰 화두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중앙에서 변방으로 향하는 군사용 서신을 다루어야 되는 병부(兵部)는 이 부분에 대해 거의 신중하다 못해 정신질환에 걸릴 지경이었다. 종이 위에 달랑 찍힌 도장 한 개만으로는 적이 안심이 안 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 병부의 정신질환자 발생 빈도 수를 줄여주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이 ‘부’란 것이었다.
“과정이 다소 복잡하고 지루하긴 하지만 절차려니 하고 이해해 주니 고맙군. 요즘 누가 갑자기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해코지를 할지 알 수 없는 세상이 아닌가? 조심해서 해(害)될 거야 없지 않겠나? 얼마 전에는 믿고 있던 친구의 동료 하나가 갑자기 악질 방화범으로 돌변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네. 다행히 불 길은 진압했지만 그 상처와 피해는 상당했지. 해서 그 후로는 매사에 이중, 삼중으로 조심하고 있지. 남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슬픈 세상이라 생각지
않나?”
말투는 부드럽고 타락해 가는 세상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남을 공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연검(軟劍)도 검은 검이었다. 언제든 상대 를 상처 입힐 수 있는 검이었고, 그것이 실질적인 목적이었다. 이유제강을 걸고넘어질 것도 없이 부드러움이란 연검에게 있어 최고의 장점이자 최대의 무기였다. 이시건은 자신의 목전에서 피륙(肉)으로 벼리어진 연검이 매섭게 팔랑거리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설검(劍)을 휘두른 것은 비단 마진가뿐만이 아니었다.
“마천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저런 어린 친구를 보내다니 말이야. 이번 사안의 중대성을 알고나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요!”
“맞습니다. 우린 우롱당한 겁니다!”
여기저기서 힐난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귓속말인 척하면서 충분히 당사자의 귀에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가 가미된 돋보이는 소곤거림이었다. 요약 하자면 ‘넌 애송이, 그런 애송이에게 중책을 맡겨 보낸 마천각은 뇌도 덜 자란 생각없는 바보 얼간이’, 뭐 대충 그런 뜻이었다. 아직 새파란 애송이 초보 외교관에게 심리적 압박을 열심히 가해줘서 중천(中天)에 뜬 태양 아래에 널브러진 지렁이처럼 쪼그라들게 만들기 위한 친절한 외교적 배려였다.
짝짝!
그때 느닷없이 두 번의 박수 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왁자지껄, 이제는 공개적으로 보란 듯이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주위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박수를 친 사람은 군사 겸 관주 보좌인 손문경이었다.
“자자, 진정들 하시지요! 아니,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쪽도 바보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유명한 그의 가는 실눈으로 사람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말했다.
“아니, 그럼 바보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군사?”
격분이 아직 채 가라앉지 않은 한 노사가 마치 세기의 대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큰 소리로 외쳤다.
“어허, 그럴 수가…….”
“잘못 안 것 아닙니까, 군사?”
믿기 힘들다는 반응이 연달아 그 뒤를 따랐다. 다분히 의도적인 반응이었고, 그 의도는 생각 이상으로 잘 먹혀들어 갔는지 이시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폭발 일 보 직전이었다. 원래 인내하고는 담을 쌓고 살던 그에게 이 자리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자, 다들 그만들 하십시오. 젊은 친구 앞에서 체통을 생각하셔야지요.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 듣습니다.”
손문경은 관주 보좌라는 직책보다는 군사라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그 칭호가 그의 병법과 용병술을 업무 수행 능력과 실무 처리 능력보다 더 높게 평가했 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군사라는 칭호가 관주 보좌보다 더 짧다는 단순 명쾌한 이유 때문에 그 칭호는 다른 한 칭호보다 더 자주, 더 널리 쓰였다. 그러나 역설적 이게도 실제로 그가 수행하는 일은 군사적인 업무 처리보다 실무 처리가 더 많았다. 지금은 일단 평화시였고—그 사실에 동의하는 이는 거의 없지만―조직과 조직 의 격돌이 없는 이상 그의 군사적 재능이 쓰일 경우는 무척 적었다.
‘과연 저자가 바로 은목(隱目) 손문경인가?”
마천각에 있을 때부터 귀 따갑게 들어봤던 그 이름의 주인공을 이시건은 무표정의 가면 뒤에 흥미로움을 감춘 채 힐끗 쳐다보았다. 과연 소문대로였다. 그러나 그 렇다고 그가 장님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직선 두 개가 가로로 약간의 단절을 가진 채 그어져 있는 듯한 그런 인상이었다.
‘저러고도 보인다니 신기할 따름이군.’
그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보통 이런 거대 조직의 군사쯤 되면 그 별호도 거창하기 마련이다. 천기자, 천뇌, 만박자, 만박뇌, 제이의 공명, 재래공명, 재림공명, 부활공명 등등등. 그러나 백만 자의 문장과 십만의 지혜를 항시 휴대하고 다닌다는 이 남자는 그저 조금 특이한 그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단순히 ‘실눈’이라고 불릴 뿐이었다. 물론 정식 명칭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지식과 지혜와 지위에 경의를 표하며 붙여준 숨겨진 눈, 즉 ‘은목’이라는 별호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실눈’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 았다. 그러나 그의 눈을 볼 수 없는 것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가 이 두 칭호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가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은 자기 눈뿐이라 불리는 희대의 천재. 이시건은 안광을 날카롭게 빛내며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면면을 구석구석 뜯어보기 시작했다.
“과연… 소문이 사실이었군.’
소문은 항상 팔 할의 허풍을 포함하고 있다는데, 가끔은 온전히 전해지는 경우도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오랜 관찰 끝에 얻은 약간의 좌절을 대가로 이시건은 그것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아도 어떻게 저렇게 작을 수가! 그 명성 그대로 천무학관 군사의 감추어진 눈은 손문경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그 누구도 그의 얇고 가느다란 두 줄기 직선 뒤에 감추어진 눈동자를 읽어내는 것을 불허하고 있었다.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젊은 사신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과연 저자는 무슨 말을 할까?
손문경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분노했다.
“이건 제 추측이긴 합니다만 그들도 지난겨울 한파에 뇌가 얼어붙지 않은 이상 충분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 하며 또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는 하나 이런 간단한 이치까지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마천각은 무식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습니다. 전 우리가 이제부터 마천각이 알면서도 왜 이런 식의 대응을 해왔는지 그 숨겨진 의도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면서도 그랬단 말이오? 그건 모르면서 한 것보다 더 나쁜 것 아니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에 한 노사가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음…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렇게 음흉할 수가…….”
웅성웅성웅성!
너도나도 질세라 사방에서 마천각의 음흉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비난의 포화는 이시건을 향해 소나기처럼 쏟아 부어졌다. 그러나 그가 뭐라 변명거리를 찾기도 전에 노사들은 그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세계로 다시 되돌아가 버렸다. 다시 한 노사가 말했다.
“그럼 일단 그들이 바보가 아니라고 가정합시다. 제가 보기엔 여전히 바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인지 군사께서는 짐작 가시는 것이 있습니까?”
“약간이라면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다.”
“오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과연 군사!’라는 감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 이 늙은 개뼈다귀들이!’
이시건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만방자하기로 정평난 그라 해도 이곳에서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을 속으로 삼키는 게 고작이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들의 흉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숨겨진 의도는 어느새 흉계가 되었다. 사람들은 다들 마천각이 그 흉계를 꾸미기 위해 백 년 동안 암중모색하고 심모원려했다고 믿기 시작하고 있는 참이었다. “음, 오해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냉정하게, 차분히…….”
“우린 모두 차분하오!”
씨근덕거리며 노사들이 대답했다.
“음… 전… 그들이 일부러 그 일의 중대성을 훼손하려고 하는 의도를 가진 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즉…….”
“예, 그들은 화산에 있었던 그 일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고 싶었는데 다른 이들이 열렬히 원해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알려준다는 투로 손문경이 대답했다.
‘어떻게든 숨기고 싶은 게 있다는 겁니다.”
손문경은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대전에 모인 나머지 모두는 그 숨겨진 말을 들었다.
사신이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데도 직접 화법으로 속내를 말하는 것은 외교 관례에도 어긋나는 무례한 행위였지만 이시건은 이 건에 대해 항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오리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뒤가 구리기에 그렇게 학~앙~문에 힘쓰는 거요??
그런 말이나 들을 게 뻔했고, 되려 그가 몸담고 있는 곳의 평가 항에 ‘음흉, 흉악, 주의 촉구’라는 문구만 더 추가될 뿐, 별무소득일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대로 가 만있는 것 역시 불리하긴 매한가지라는 판단을 내린 이시건은 다시 대화의 주도권을 되찾기로 했다.
“그건 모두 여러분의 오해입니다. 화산지회의 참사에 대해서는 각주께서도 실로 유감이란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종류는 달라도 유감은 분명 유감이었기에 그는 그 안에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진가는 그 말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운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유감이라고? 이번 화의 주범이 누구인지 잊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이시건은 그 말 안에 담긴 송곳을 느꼈다.
“물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 마천각의 사람이었죠.”
“그리고 바로 제 못난 사형이기도 합니다’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남의 식사거리가 되기에 자신은 아직 너무 젊고 창창했다.
“잊지 않고 있어줘서 고맙다고 하지는 않겠네. 다만 아직 망각하고 있지 않다면 그에 대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말뿐인 유감은 필요없다. 그 유감에 대한 행동을 보여라! 마진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미 나올 것을 예상한 질문이었기에 그는 준비해 온 답을 꺼내놓았다.
“현재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마진가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동시에 그의 거구로부터 무시무시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아직 조사 중이라?”
예상했던 반응이긴 하지만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엄청난 압력…….?’
당장이라도 그의 주먹이 자신의 대가리를 부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만큼 엄청난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조직의 최고위에 거의 삼십 년 가까이 앉아 있는 이의 분별력에 신뢰를 가지기로 했다.
“그렇습니다, 관주님.”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시건은 쉴 새 없이 자신을 두드리는 압박감과 싸워야 했다. 그는 자신의 무기를 빼어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의를 억눌렀다. 잠 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직 붙잡지 못했다는 이야긴가?”
마진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쉰 다음 태사의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강호는 너무 넓습니다. 강호가 아닌 곳까지 합치면 그 방대함을 감히 짐작조차 하기 불가능하지요. 그에 비해 저희 쪽 인원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 행적을 필사적 으로 추적 중이긴 하지만 쉽사리 발견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수사입니다. 일조일석에 끝날 문제는 아니지요.”
이시건은 자신의 머리가 무사한 것에 대해 자축했다.
“나는 자네들이 필사적으로 그 행적을 숨기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게 걱정이네.”
여전히 마진가의 질문은 날카로웠지만 그를 짓누르던 압력이 많이 사라진 탓에 이시건도 조금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하하, 저희들이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피해가 천무학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희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뒤에 숨겨진 배후가 드러나는 게 두려울 수도 있지 않겠나?”
마진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시선의 몸 이곳저것을 헤집었다. 단 한 마디의 실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공짜로 관주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니라 이건가…….?
젊은이들은 쉽게 연륜을 노쇠의 다른 말로 치부하려 하지만 장시간 쌓인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연륜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의심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천부당만부당한 의심이군요. 그것은 기우(杞憂)입니다.”
이시건은 자신의 말에 확신이 담기도록 애쓰면서 힘있게 말했다.
“기우라……. 하긴 보통은 하늘이 무너질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겠지. 하지만 난 많은 이들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하늘이 무너질지 안 무너질 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네. 그 하늘이 우리 쪽 하늘이 아니라도 말일세.”
그 하늘의 이름이 마천(魔天)이라고 한다는 말이 그곳에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이시건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제 갑자기 무너져 내릴지 모를 그런 수상쩍은 곳에 우리 아이들을 보내야 하나 그것이 걱정일세. 걱정이야.”
마진가가 애석함과 걱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시건은 갑자기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게 되자 뒤통수가 근지러웠다. 개중에 성격 급한 몇몇 사람이 자신의 머리통을 열어본답시고 달려들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계속 수세로 몰리고 있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그는 일단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기로 했 다.
“수상쩍다니요? 아니, 수상쩍을 게 뭐가 있습니까? 보시는 그대로인 것을요? 아니면, 따로 근심하고 계시는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시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던진 그의 말은 무척이나 먹음직스런 빌미였다. 혹 떼려다 혹 붙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사건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들의 공격과는 그 성격도 목적도 다르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네.”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자네, 빈대떡 먹어봤나?”
뜬금없는 질문에 이시건은 눈을 꿈쩍였다.
“못 먹어봤나?”
“물론… 먹어봤습니다.”
“그럼 부쳐 봤나?”
“직접 부쳐 보진 못했습니다.”
그는 이 노망난 할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안타깝군. 그럼 대충 그 과정을 알려주겠네.”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마진가는 정중히 그 청을 거절했다. 어린 친구를 괴롭힐 기회가 온 것을 그는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과정에 대해 밀의 씨앗을 뿌리는 부분부터 상세하고 세세하면서도 자세하고도 지루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시건이 하품을 두 번째 삼킬 때쯤 마진가는 드디어 물에 갠 전분과 야채농부들이 뙤약볕 아래에서 병충해와 싸우며 길러낸 바로 그 야채였다―와 조개─해 녀들이 갯벌에서 캔 다음 장대한 거리를 여행한 바로 그 조개였다―와 문어ᅳ노회한 어부가 거친 바다에서 사나운 파도와 싸우며 잡아낸 그 엄청난 역사의 문어였 다. 장대한 거리를 여행한 것은 물론이었다―를 썰어 넣고 약간의 물과 함께 혼돈 속에서 뒤섞은 모종의 그 범벅을 불에 달군 넓적한 냄비—대장장이들이 망치를 들고 불과 철의 연합과 맞서 싸운 결과인 바로 그 요리 도구ᅳ위에 기름물론 많은 이들의 노고가 듬뿍 들어간—을 치고 그 위에 국자로 덜어 평평하게 펼치고 있 는 중이었다.
“내 얘기가 재미없나?”
“아흠, 읍… 아, 아닙니다.”
세 번째 하품을 하던 입을 황급히 다물며 대답했다. 그 일견 무례해 보이는 반응을 마진가는 책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다음에 잘 익혀야 한다는 말이지.”
“음, 그렇군요.”
당장 뱃속에서 회가 동한다는 표정으로 이시건이 대답했다.
“그런데 너무 한쪽만 익히면 어떻게 되겠나?”
속으로 앞으로 삼 년 동안 그 빈대떡이라는 놈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시건이 대답했다.
“타겠지요.”
상식적인 선에서 그는 대답할 수 있었다.
“바로 그걸세! 그게 바로 다른 점이란 걸세!”
뭐가 그거고 뭐가 다른 점이란 건가? 지나치게 지리하고 상당히 하품나고 황당하게 장황하면서도 끝내주게 장대한 서론과 달리 느닷없이 비약 도출된 결론에 이 시건은 어제 먹은 빈대떡이 체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진 건 아닙니까 하는 표정으로 마진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에?”
속된 말로 벙쪄 버린 그의 황당함은 아주 짧은 문장을 통해 대변되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그는 빈대떡과 천겁우 사이에 존재하는 광활한 상실을 메울 만큼 풍부한 상상력과 비약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제 나머지 한쪽 면을 부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일세.”
마진가가 할 수 없이 그 사이를 대신 메워주기 위해 나섰다.
“뒤집는단 말씀입니까? 강호를?”
분별력있는 청년답게 그는 뜨거운 판이라고 하지 않았다. “훼까닥!”
마진가가 점잖게 부연해 주었다.
이시건은 ‘예, 정답입니다!’ 하며 짝짝짝! 박수라도 쳐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곧 그만두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짜를 가짜 같게, 가짜를 진짜 같게 혼란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깃털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그건 너무 큰일인데 그들에게 그 정도 역량이 있을까요?”
매우매우매우 의심스러우니 당신도 좀 의심해 보는 게 어떠냐는 어조로 이시건이 말했다. 열심히 의혹을 부채질하여 써놓은 정답을 오답으로 고치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다.
“바로 그 점이 핵심일세. 달궈진 판을 뒤집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요리사입니까?”
마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을 기술적으로 뒤집으려면 구심점이 있지 않으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빈대떡이 사방팔방으로 몽땅 다 흩어져 버리지 않겠나?”
또 빈대떡인가? 이제는 충분히 먹어 신물난다는 표정을 가면 뒤로 감추며 이시건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 요리사가 나타났다는 겁니까? 그동안은 불만 땐 거구요?”
“지금 나타난 건지, 그동안 있었지만 손 놓고 익어가고 있는 것만 구경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네.”
“누가 감히 그런 큰 책무를 맡을 수 있을까요? 강호를 입맛대로 요리해서 때에 맞게 뒤집는다니요? 그만한 역량을 지닌 인물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리는 없지 않 습니까? 그들의 뒷받침해 줄 절대자는 아직도 여전히 죽은 채로 있습니다.”
그리고 보통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그는 또다시 마진가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의 말을 끊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참사의 배후에 거대한 조직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네.”
“거대한 조직이요? 설마 백 년 전의 그들은 아니겠지요?”
그 조직은 공식적으로는 이미 괴멸된 조직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이 있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 걸세.”
물론 이시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깃털들 말씀이시군요?” 마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바로 천겁우라 불리는 놈들이지.”
그 깃털들만 생각하면 이성보다 분노가 앞서게 되는지 마진가의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몸통도 없는 주제에 그들이 그동안 무림에 입힌 피해는 집요하고도 막대했다.
“그렇네. 우리는 그동안 천우의 잔당들이 이런저런 방해 공작을 펼쳤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 할 때가 아닌가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네. 그들은 행방불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그’의 시체를 본 사람도 아무도 없고 말 일세.”
그 사실 하나만으로 무림은 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신경쇠약 증상 환자들을 양산해야만 했다.
“어쨌든 지금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백 년이나 넘게 주인 없이 유지될 정도로 든든한 결속력으로 뭉쳐져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떤 열부도 열의가 식을 만큼 백 년은 긴 시간입니다.”
짝!
갑자기 마진가가 박수를 쳤다.
“바로 그거네!”
“예?”
느닷없는 박수 소리에 놀란 이시건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들이 절대로 열부가 아니라는 게 바로 문제라는 거네.”
“제 기억상실증 회복에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그들이 열부가 아니기에 더더욱 그들의 정조를 지키도록 강요하는 인물이 있다 이 말일세. 감시자라고 하긴 그렇고, 관리자라고 하면 되겠군.”
“천혈신의 엄청난 존재감과 지배력을 대행할 만한 존재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공상일 것 같은데요?”
대명사가 실명, 아니, 실 별칭(?)으로 바뀌자 여러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얼마나 강력한 존재감을 지녀야 될지 생각하면 아득할 정돕니다.”
그는 묘하게 실감나는 그 감각 때문에 무의식중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감각은 실재로 그의 육체와 정신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진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사천멸겁’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이시건은 자신의 몸이 침묵 속에서 고요히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천멸겁(劫)!
공포와 죽음의 대명사로 등장한 천겁혈신 옆에서 함께 죽음을 몰고 다니던 네 명의 죽음의 사신들, 천겁의 그림자! 그들은 절망을 뿌리며 공포와 함께 군림했었다. 그들은 오직 단 한 사람의 명만 들었으며, 대부분의 주요 결정은 그들 손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한다.
다들 동(銅:청동)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 정체를 아는 사람은 생사부의 주인인 지옥의 염왕(閻王)과 현세의 죽음인 천겁혈신 단둘뿐이지만 그 강대함 은 전율과 공포, 피와 죽음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그 이름 위에는 백 년 동안 쌓인 먼지가 수북이 앉아 있었다. 천겁령의 패배 이후 그 이름은 망각의 먼지 구덩이 저편에 던져졌고, 누구도 그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전 마진가는 그 먼지를 털어내고 백 년 전의 유물을 꺼내 든 것이었다.
“그, 그들은 백 년 전 그때 모두 죽지 않았습니까?”
마진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식 발표는 그렇게 되어 있지. 하지만 대부분의 공식 발표와 마찬가지로 이 발표 역시 많은 것을 그 뒤에 감추고 있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 르신들께 나중에 듣고 나서야 진실을 알게 되었지. 직접 죽음이 확인된 것은 무신(武神) 그분의 홍도청검(紅刀靑劍)에 의해 열십자로 해체된 ‘남천(天)’과 무신 마 그분의 굉천도에 의해 아홉 조각으로 절단난 ‘동천(東天)’뿐이었다고 하더군.”
“서천(西天)과 북천(天)은 어찌 되었는지 아는 바가 없으십니까?”
“천무삼성께서 연합 합공으로 서천(西天)을 궁지로 몰았으나 안타깝게도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네. 악을 근절하지 못했다는 생각은 삼성 세 분께 천추의 한을 안겨주었고. 그리고 사천멸겁의 최고수로 알려진 북천의 행방은 대전 이후 오리무중이라네. 혹자는 그가 죽음을 가장하고 그 모습을 감추었다는데, 아무도 그 행방 을 아는 이가 없고 그 소문을 확인시켜 줄 사람도 없네.”
“그럼 지금 이렇게 그들을 과거의 망각 속에서 되꺼내시는 이유가…….”
비록 묻기는 했지만 그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마진가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네.”
역시! 이시건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뿐이라면 차라리 안심할 수 있을지 모르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떠오르더군. 그 강대한 자들이 죽음의 장막이라는 가장 훌륭한 위장으로 자신을 숨긴 채 어디론가 스며들어 주요한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끔찍한 생각 말일세.”
그러면서 마진가는 날카롭게 빛나는 검은 눈으로 이시건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라는 창을 뜯어내고 그 내면이라도 들여다보겠다는 그런 예리한 기세였다.
그 조직의 이름이 석 자라는 데에 이시건은 전 재산이라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들은 자신들이 추리해 낸 바를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떠들어대고 있는 것일까? 마치 자신들이 알아낸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이시건은 자신의 동요를 나타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저것은 돌이다. 의도적으로 호수에 내던진, 일부러 파문을 불러일으키기 위 한…….
자랑이라고? 그럴 턱이 없다. 그런 시시한 이유로 특급기밀에 해당하는 일을 부외자에게 시시콜콜하게 떠들지는 않는다. 방금 나온 말에 안색이 창백해지는 노사 들도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사실들은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기밀임이 분명했다. 분명 그 사실들은 외부로 유출되었을 때 많은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기밀을 마구 까발리는 속내는 무엇인가?
식은땀으로 인해 등이 흥건하게 젖었다. 소름이 그의 피부 위를 맹렬한 속도로 질주했다. 그러나 그는 피복 바깥에 있는 부분 중 위쪽 방향에 달린 얼굴 쪽은 평온 을 유지, 아니, 가장하려 애썼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눈가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네 개의 눈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중 두 개는 모종의 강제적 조치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지닌 공포를 희석시키지는 못했다.
두렵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후는 회담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자신의 입은 열심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잘 떠들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자도 자각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자동 반사 인형처럼 마진가의 질문에 기계적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래서 숙소는 어떻게 하겠나? 사신 전용 숙소를 마련했으니 그곳에서 여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나?”
마진가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에야 이시건은 비로소 대충 회담 ‘사신 접견’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멍한 귀로 마진가의 굵은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 다.
“왜? 이곳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나?”
뭔가 대답을 하긴 해야 했다.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알아둔 곳이 있습니다. 어깨 위의 짐도 내려놓을 겸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마진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이시건을 불쾌하게 했다.
“원하는 대로 하시게. 이곳이 답답하다면 하는 수 없지 않겠나.”
“후의(厚意)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곳에는 잠시라도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본심이었다. 왠지 모를 패배감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직 웃고 있었다. 아직 해야 할 말이, 연기해야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럼 다음 접견 때 뵙겠습니다.”
오랜만에 천무학관을 방문한 공식 사절이었기에 그가 해결해야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내키지 않는다 해도 그는 다시 이 자리나, 혹은 비슷한 자리에 다 시 서야만 한다.
“그런데 오늘 뭔가를 해결하긴 한 건가?”
그는 신뢰를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