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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9권 6화 – 밀담

밀담

-비밀 통로

“휘유~”

방을 한 번 둘러본 이시건은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평상시 왜 그렇게 엄중하게 잠가놓는지 한눈에 이해가 갔다.

맨 처음 이 방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방 안 가득한 비싼 유리등 바깥으로 빛나는 불빛에 반사되어 사방에서 빛나는 황금빛에 눈이 부셔서 함부로 눈을 뜰 수가 없 을 지경이었다. 이곳은 바닥과 기둥, 벽까지 모두 연한 분홍빛이 도는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다. 대리에서 나는 돌에 대해서 그렇게 박식하지는 않지만 직감적으로 새하얀 것보다 더 비싼 놈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희소성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리고 그 대리석 위에 장식된 장식품과 그릇들은 거의 대부분 황금으로 된 것 들이었으며 은은 황금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며 모두 얼굴을 들이대면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만큼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광택이 났다. 한겨울의 순수하고 깨끗함을 연상케 하는 설화라는 이름과는 어느 한곳도 매치되는 곳이 없는 그런 방이었지만 그 황금빛에 압도당한 이는 그런 의문을 품을 잠시의 짬도 얻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쉽지만 한 가지가 부족했다. 문득 그 부족한 텅 빔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이토록 호화스럽게 꾸몄는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시건 역시 가슴속에 그런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녀가 빠졌군!”

물론 그가 원하기만 하면 청홍루는 언제든지 그에게 절세의 미녀를 공급해 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오늘 그에게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일만 없었어도…….?”

이시건은 후일을 기약하며 왼쪽 벽에 달린 세 번째 황금 촛대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그런 다음 오른쪽 벽으로 돌아가 네 번째 황금 촛대를 왼쪽으로 돌렸다. 그런 다음 침상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그르르릉!

원래라면 점원을 부를 종소리가 나야 하는데 무거운 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다. 곧 이시건의 눈앞에 비싼 대리석이 열리며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아직 미련을 다 버리지는 못했는지 아쉬운 듯 방을 한 번 둘러본 후 이시건은 통로 안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근로 의욕을 저 하시키는 데 있어 이 방은 최고의 환경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더 오래 머물러 있다가는 발걸음을 떼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날 시험에 들게 하는구나!”

만일 이곳이 수하들의 인내심과 성실도를 시험, 평가하기 위한 장소라면 이 황금의 낙원은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었다. 그가 물론 기녀를 불러 흥청망청 즐기는 것을 꺼려하기는커녕 오히려 즐기는 성격이었지만 공사를 구분할 줄은 알았다. 이 구분에 실패하게 되면 조직으로부터 결코 좋은 평을 받을 수 없었다. 그건 곤란했고, 그 곤란함은 그에게 앞으로 발을 내디딜 힘을 주었다.

곧 어둠이 이시건의 몸을 먹어치웠다.

통로 안은 올빼미의 눈으로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맸다. 이야기에서 그리 자주 나오는 흔하디흔한(?) 값비싼 야광주는 천장을 눈 씻고 훑어봐도 없었다. 한 알에 수만 냥에서 수십만 냥까지 호가하는 그런 고가품을 이런 별달리 특별하지 않은 비밀 통로에 박아놓았다가는 재정이 못 견디는 것은 물론이고 한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이상하게 행방불명되는 야광주를 다시 메워놓지 않으면 안 될 터였다. 그러니 아예 아무것도 없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었 다.

그런데 그렇다고 통로를 밝히는 횃불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이시건은 그 사실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협소하고 환기도 안 되는 폐쇄된 공간에서 일 장 간격으로 횃불을 달아놨다가는 통로를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질식사하기 십상이리라.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달아놓은 게 왼쪽 벽면에 사람 허리 정 도의 높이로 달려 있는 기다란 밧줄이었다. 이거라도 붙잡고 어둠 속의 등불로ᅳ비록 빛은 안 나지만ᅳ삼으라는 뜻인 모양인데 전혀 의지가 되지 않았다. 혹은 조 직이 정해준 이 유일하고 옳은 길을 벗어나면 안전은 보장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어차피 어느 것이든 그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것에 관 해 의심하는 것은 그만둔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는 망설임없이 미리 쳐놓은 줄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통로는 예상보다 길었다. 그리고 일직선도 아니었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고 나서야 이시건은 어두운 비밀 통로의 끝에 도달할 수 있었다. 통로 왼편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줄을 잡아당기자 그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니 창이 없었다. 다만 좌우 벽에 매달린 등불과 커다란 탁자 위의 촛불만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촛대 위의 주홍빛 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바람은 없다는 이야기. 아무래도 지하 같았다.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탁자에는 세 명이 앉아 있었는데 석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시건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겁난혈세(劫亂血洗)! 혈신재림(血神再臨)!”

그러자 이시건이 마지막 말을 이었다.

“천천하(天天下)!”

마지막 확인이 끝나자 사내는 비로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공자님을 뵙습니다.”

이시건의 시선이 나머지 두 사람보다 반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중년 사내를 향했다. 허리에 기다란 도를 차고 있는 것이 이 남자가 이들 셋 중 우두머리임이 분명 했다(눈가에 난 상처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자네는?”

이시건이 물었다.

“예, 이곳 중원표국 남창지국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윤이정이라 합니다!”

현재 이시건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중원표국 남창지국 지하에 위치한 밀실로 이 비처(秘處)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는 이곳 남창지국 안에서도 오직 다섯 명에 불 과했다. 즉,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셋을 제외하면 둘밖에 남지 않는데, 그중 하나는 이곳 남창지국의 지국주였고 나머지 하나는 부국주였다. 둘 모두 표국 업무상 급 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상태였으나 조금 전 윤이정이 강조한 ‘실질적인 책임’이란 말을 미루어볼 때 표면적인 위계와는 다른 위계로 운영되고 있는 듯했다. 하 긴, 저 풍마도 윤이정이 지니고 있는 ‘금강십이벽’이란 직위는 중원표국 내에서도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상징적인 면에서 지국주의 권위를 능가한다고 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이시건은 윤이정을 최고책임자로 생각하고 일을 진행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탁한 물건은 준비해 두었나?”

“네,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윤이정이 오른손을 살짝 치켜들자 오른쪽에 서 있던 무인 하나가 재빨리 큼지막한 상자 하나를 대령했다. 윤이정의 소개에 의하면 그들은 오가 형제로 단도술의 명수인데 잠입과 정보 수집에도 수완이 뛰어난 그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한다. 왼쪽에 서 있던 이가 형인 오영, 지금 막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있는 이 가 바로 동생인 오기였다. 윤이정은 공손하게 상자의 뚜껑을 연 다음 상자를 돌려 이시건이 잘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자, 확인해 보시지요. 두 달 동안 목표를 면밀히 관찰하여 얻어낸 결과물들입니다.”

상자 속에 든 물건들은 보기보다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비싸 보이지도 않는 검은색 무복 한 벌,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가발 하나, 마지막으로 둘둘 말린 종이였다. 종이를 펼쳐 보자 그곳에서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것은 초상화였다. 아니, 용모파기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몰랐다. 이 그림에는 애초부터 대상물에 대한 애정은 결핍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참 희한한 머리 모양이지요? 이런 머리 모양으로도 앞을 분간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시야가 가려지지 않는지 말입니다.”

“나도 아네. 얼마 전에 직접 만난 적이 있거든.”

그 말에 윤이정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그놈이 이놈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었지만 말일세.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 지독한 악연 말일세.”

이시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이자에 대한 주변의 평은 어떤가?”

“상당히 독특한 괴짜인 건 확실합니다만 얼마나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인지는 상당히 의문스럽습니다.”

“그건 왜 그런가?”

“주변을 탐문해 본 결과 거의 대부분의 학관생들은 그자의 실력을 극구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단순한 쓰레기, 혹은 그 이하라는 평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자 를 왜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지…..”

“나도 몰라.”

이시건의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얼마 전에 재수없이 우연히 마주치기 전까지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인물일세. 그전에는 본 적도 없고. 이자에 대한 정보는 단지 건너 건너 들은 몇 마디 말도 안 되는 평가들뿐이지. 다들 주관이 개입되어 그 정보의 진정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왜곡된 진실의 산물들뿐이란 말일세. 그러니 그때까지 내가 뭘 가지고 이 자식을 평 가할 수 있었겠나?”

윤이정은 침묵한 채 그의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명령이었네. 그래서 난 따르기로 한 것일세. 그 인물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조직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난 조직의 명령에 따 르는 걸세. 저 윗선에서는 자네와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자네가 보지 못한 부분을 본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뭐, 자네가 상관보다도 뛰어난 안목을 가 졌다고 주장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속하가 어찌 감히…….”

윤이정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난 이자를 직접 만났고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채도 생겼으니 말일세. 빼앗아오고 싶은 것도 있고.”

“그, 그러십니까?”

“그런 걸세. 너무 과분한 것을 가지고 있더군.”

“그게 무엇입니까?”

“절세가인.”

윤이정은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럼 이 계책은 이견없이 그대로 실행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또 다른 질문 있나?”

“저… 보고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중요 사안인가?”

“최우선 상황입니다.”

그의 단호한 대답에 이시건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최우선? 모든 것을 배제하고 가장 먼저 취급해야 할 만큼 시급한 사안이란 말인가? 내가 맡은 임무보다?”

“속하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상관에 대한 무례임을 알면서도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니 그 내용이 궁금해지지 않을 재간이 없다.

“무엇에 관한 이야긴가? 이번에 있었던 자네의 뼈아픈 실책?”

치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자신의 이번 실패가 벌써 이시건의 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윤이정은 약간 움찔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심적 동요를 더 이상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며 되도록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깁니다. 바로 열쇠에 관한 일이니까요.”

그 순간 이시건의 몸 주변은 한순간 시간이 정지한 상태로 변했다. 잠시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은 숨을 두 번 정도 들이마실 정도가 흐른 이후였다. “열쇠?”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내심 바라면서 이시건이 되물었다.

“예, 바로 그 사라진 열쇠의 행방을 알아냈습니다.”

누가 들을까 봐 겁난다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이시건은 귀를 기울였다.

“자네의 짧은 생각, 들어보겠네.”

허락을 득한 윤이정은 사천에서 자신이 겪은 일부터 소상히 아뢰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자신이 이번 일을 얼마나 매끄럽고 유연하게 처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자신이 조직을 위해서는 한때 의형제를 맺었던 인물이라도ᅳ비록 그 의식부터가 가짜였다고는 해도―얼마나 망설임없이 손을 맵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해 자랑했다. 그는 자신의 지극한 충성심을 자랑하 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런 충정으로 가득 찬 자신에게 본의 아닌, 즉 그의 책임이 눈곱만치도 개입되지 않은 재난(자연 재해)이 일어난 것은 자연의 농간 이외 의 다른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의 긍지 높고 견줄 데 없는 충성심은 이런 재해에도 꺾이지 않았다. 어떤 알 수 없는 천재지변에 의해서 불가항력적으로 실수가 발생했으나 자신이 얼마 나 애써 자신의 부하가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려고 애썼는지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이야기는 점점 더 실책은 작게, 공은 크게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갔 다. 그리고 마침내 부하의 실수를 한 몸에 떠안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던 윤이정이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천신만고 끝에 열쇠의 행방을 찾게 되는 대목에 이르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열에 들뜬 듯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는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지는 이미 오래였다.

“그런데 왜 회수하지 않았나?”

장황한 이야기 속에서 이시건이 궁금한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게…”

윤이정이 말을 끌었다.

“꼬마들의 뒤를 쫓던 일조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생존자는 전무. 믿기지 않지만… 전원 사망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누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저… 그 꼬마들은 현재 중양표국에 체류 중입니다.”

이런 사실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 배후에 중양표국이 있다?”

이시건의 반문에 윤이정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중양표국이라는 데가 그렇게 대단한 곳이었나? 최근 사천에서 이름을 조금 얻고 있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이름도 볼품도 없는 표국이었지 않나? 언제부터 중원표국이 사천(四川) 촌구석의 이류 표국을 염두에 두었나? 게다가 현재 열쇠를 가지고 있는 유씨 꼬마는 자네의 현질이 되지 않는가? 그런데도 화중지병(畵中之 餠)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무슨 속셈인가?”

“중양표국이 이류였다는 것도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사천에서만은 중원표국의 자리까지 넘보는 맹수로 자랐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감히 사천제일표국이 라 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공자님께서 나서신다면야 제까짓 것들이 어찌 감히 항거할 수 있겠습니까?”

무한한 신뢰를 이시건에게 보내며 윤이정이 대답했다.

“흐흠, 그래서 나에게 열쇠를 양보하겠다?”

“그렇습니다. 그 물건은 저 같은 놈보다 공자님께 더 잘 어울리는 물건일 것입니다.”

“그래, 무슨 속셈인가? 그냥 공짜는 아닌 것 같은데?”

이시건은 윤이정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힘 조절을 하며 물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아무리 상사라 해도 반감을 사기 마련인 것이다. 지위 고 하가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반항과 불손을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소, 속셈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단지 전 그 열쇠를 손에 넣기에 저보다 적합한 분을 알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윤이정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시건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자신이 혼자서도 열쇠를 탈환할 수 있었지만 이시건을 위해 기꺼이 양보했다고 주장하고 있 는 듯했다. 그는 생색은 낼 수 있을 때 많이 내두자는 신조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해했네.”

확실히 이시건은 이해했다. 이 일의 겉 표면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 이면까지도 말이다. 자신이 어떻게든 직접 처리해서 자신과 자신의 부하가 잔뜩 저지른 실 패를 만회하려고 했으나 예기치 않은 장애물을 만나 고전하고 있던 차에 마침 그 장애물을 대신 치워주기에 적합한 인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바꾸어 말하면 장애물을 처리할 만한 능력이 없으면 속수무책, 말짱 도루묵이란 이야기였다. 자신이 없으면 윤이정은 그림 속의 만찬을 보며 침이나 흘려야 할 처지였다. 그렇게 되면 그는 실패의 만화책을 눈앞에 뻔히 두고도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리라.

마음속에 약점을 가진 인간은 강해지는 데 한계가 있다. 남아 있던 약점이 자신감에 미세한 균열을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는 어차피 큰소리칠 만큼 강한 입장은 못 된다는 것만큼 좋은 소식은 없었다. 주판을 모두 퉁기고 나서야 이시건은 고개를 들어 윤이정을 바라보았다.

“일이 녹록치 않은 모양이군. 이제 슬슬 사실을 이야기해 보게. 곤란한 일이 있다면 힘을 빌려주겠네.”

비꼬는 말투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이시건이 물었다. 자신이 그의 속셈을 완전히 간파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윤이정은 이시건이 자신의 의 도를 지나치게 많이 이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숨기는 것은 오히려 불리했다.

“그게… 장애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나 장애는 있지.”

대수롭지 않다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좀 더 편안히 털어놓으라는 배려였다. 안에 숨긴 걸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숨통을 틔워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 장애는 보통 장애가 아닙니다.”

“얼마나 큰 장애이기에 유능하기 짝이 없는 자네의 엉덩이를 의자에다가 붙여놓았나?”

“그게… 강적입니다.”

윤이정은 갑자기 말을 조심해서 고르기 시작했다. 강적이란 표현은 여러 가지 선택 중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인 듯 보였다.

“강적? 내가 신경 쓸 만한 자인가?”

“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강호에서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그것참, 더 더욱 궁금해지는군. 아무래도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 저어하는 모양인데 망설일 것 없네. 누군지 말해보게.” 그 확답을 듣고서야 윤이정은 비로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찌 된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중양표국 남창지국에는 점창제일검 유은성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뭐라고?! 낙일검 유은성?”

의외의 이름에 이시건의 엉덩이가 잠시 들썩거렸다.

“점창파 백 년 연공의 결실이라는 그?”

그 이름은 그의 마음속에 간직된 신경 써줘야 할 영향력있는 무림인 명단에도 기재되어 있었다.

“예, 구대문파이면서도 사천에서 제대로 기를 못 펴던 점창을 사천제일로 도약시킬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인물로 점쳐지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유은성이라……. 확실히 인재는 인재지. 하지만 이 몸이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젊은 청년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상당히 광오한 발언이었지만 이시건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윤이정 역시 그 말에 별다른 반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 았다. 그는 조직의 힘을 믿었다. 그러나 이번의 문제는 문제가 그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그 한 사람만이라면 속하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녀를 보고 속하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 다. 만일 그녀만 없었다면……..”

윤이정은 말끝을 흐렸고, 이시건은 그 말 중에 나온 한 단어에 흥미가 동했다.

“그녀? 여인이 나에게 기쁨이 되는 일은 있어도 장애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풍류남아이신 공자님께서도 이번만큼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실 수 없을 겁니다.”

그의 관념을 깨부수게 되어 무척 기쁘다는 표정을 가면 뒤에 감추며 윤이정이 대답했다.

“무척 특별한 여인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여인들 중에 특별하지 않은 여인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이 여인은 확실히 조금 더 특별하지요.”

“누군가?”

“천하오검수의 일인인 아미신녀 진소령입니다.”

흠칫!

그 이름은 아무리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이 청년이라도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눅 들지도 않았다. 그가 잠시 흠칫한 것은 그 이름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이었다.

“그녀씩이나 되는 존재가 왜 중양표국 따위엘? 그다지 연고도 없을 텐데? 게다가 아미파는 근처에라도 있지, 아미에서 한참 떨어진 점창파 사람인 유은성은 또 왜 거기에 함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저도 의문입니다.”

지금은 이유 따위에 상관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두 사람이 지금 현재 이 시간에 중양표국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을 성사시키는 데 있어 매우 귀찮은 장애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시건은 다른 한편에서 지금 이 사실에 대해 열렬히 흥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형이 참패하다시피 한 일을 자신의 손으로 성사시킨다는 것은 말도 못하게 감미롭고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두 사람이 장애물이지만 일단 뛰어넘기만 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훈장이 될 터. 장애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이 돋보여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미 그는 그 유혹을 이겨낼 어떠한 수단도 방치해 버렸 다.

“재미있군.”

“예?”

순간 윤이정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내일 의원에 예약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 다음 말이 들려왔다.

“새로 얻은 ‘자운(紫雲)’의 위력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야!”

아무래도 그의 귀는 정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이 말썽이었다. 이시건이 기쁜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 두 사람이라면 자네와 자네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할 수 있겠지.”

다 알고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암시를 살짝 준 다음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만일 본인이 힘을 빌려준다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걸세. 그러면 불안한 자네의 미래 역시 구원받을 수 있겠지. 하지만…….” 갑자기 이시건은 윤이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

“내가 자네를 위해 내가 맡은 임무까지 방기하며 그 일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까지 찾을 수가 없군. 솔직히 자네와 나는 조직이라는 큰 틀에 묶여 있긴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단지 그것뿐인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나? 내가 자넬 위해 그걸 해줄 의리는 없다는 것일세. 나 같은 거야 어차피 자네에게 있어서 여기저기 널려 있 는 수많은 상관 중 하나에 불과할 테니 말일세. 안 그런가?”

“그… 그건…”

이시건의 오만한 시선이 윤이정을 향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어찌할 텐가?”

선택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그 눈빛은 그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운명 앞에서 도망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시건 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가 형제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저 윤이정, 이공자님만 믿고 의지하며 열과 성을 다해 충심으로 따르겠습니다. 저의 충성을 받아주십시오. 그리하여 이공자님의 오른편에 서서 함께 싸울 수 있 는 영광을 주십시오.”

윤이정은 이 열쇠를 찾는 이가 이시건 본인이 된다면 그의 입지는 매우 튼튼해질 것이며 자신은 그 과정을 위해 헌신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음에 대해 이야기했 다. 그는 지금 이시건의 파벌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파벌은 존재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벌은 후계자 후보의 휘하 파벌들이 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후계자는 오직 한 사람뿐이며 자신은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이 자신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이 를테면 엎어지면 코 닿을 데ᅳ있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했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 자신은 매우 유용하며 많은 부분에서 활용할 수 있으며, 특히 현재 이시건이 속한 곳을 내단이라 한다면 외단 격인 곳에 소속된 자신을 휘하에 넣을 수 있다면 손해 볼 일은 없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 라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 중년 표사는 자신의 가치를 적절하게 과장할 줄 아는 재주가 있었다. 물론 대신에 이시건은 그의 실책은 상당 부분 누락시켜 주고 그의 성공만을 부각시켜 주는 등의 조치를 취해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일일이 꼼꼼하게 계산을 때려봐도 이시건으로서는 나쁜 조건 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원하는 바였다.

이시건은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이정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아니, 이거 왜 이러나? 일어나게. 굳이 그렇게 거창하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네. 우린 이제 함께 싸우고 함께 즐거워해야 할 한 식구가 아닌가.”

이시건은 특히 한 식구라는 말을 강조했다. 동고동락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들은 이제 운명공동체가 된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윤이정의 운명은 이시건의 운 명에 속박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이시건이 날면 그 자신도 날고 이시건이 추락하면 그 역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에는 여전

히 변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주군(主君)!”

여러 가지 의미가 이 단어 하나에 고도로 함축되어 표현되고 있었다. 호칭이 바뀌면 덩달아 지위와 입장이 바뀌게 된다. 아니, 지위와 입장이 바뀌었기 때문에 호 칭이 바뀌는 것인지도 모른다. 윤이정은 이시건에 대한 호칭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고, 마지막 남은 희망은 이시건뿐이었다. 그는 이 젊은 주인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한 것이다. 물론 이 표현은 기회를 노리며 세력을 모아 조직 내에서 차근차근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이시 건을 기쁘게 했다. 그가 흥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자, 그럼 다시 회의를 재개해 볼까? 어떻게 하면 열쇠를 되찾을지 의논해야 하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물론이고말구요.”

윤이정이 반색하며 대답한 다음 서둘러 다시 자기 자리에 가서 앉았다.

“나한테 한 가지 생각이 있네.”

이시건은 아까부터 머릿속에 굴리고 있던 생각을 조금 전에 막 생각해 낸 것처럼 머릿속에서 꺼냈다.

“경청하겠습니다.”

“일을 처음부터 시끄럽게 벌일 필요는 없네. 조용하게 해결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지. 그래서 일단 한번 미끼를 던져 볼 셈이네. 반응을 한번 본 다음 에 결정하도록 하지. 내일 한번 방문하는 게 어떻겠나?”

첫 지시는 느닷없는 정면 돌파였다.

“예? 누가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겠나? 바로 자네지. 자네만큼 적합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을까?”

중원표국의 이름있는 대표두이자 중원표국 남창지국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그는 비록 경쟁 상대라고는 하나 같은 동종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중양표국의 대문을 마음껏 두드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없습니다.”

“그럼 결정됐군. 게다가 그 아이들, 일단 자네의 숙질 되는 셈 아닌가? 숙질의 고통을 위로해 주는 것이 숙부 된 도리 아니겠나?”

그 말 안에 틀린 말은 없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적용되는 사람이 문제였다. 윤이정은 꽤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다음 사안으로 넘어가 볼까? 나도 일단 일은 해야 되니까 말일세.”

다음 사안으로 넘어갔다. 드디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이 빛을 발할 차례였다.

“그 얄미운 놈에게 이 몸을 조롱한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해줘야지!”

이시건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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