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의 참사
-안개 낀 선착장에 물새가 날아오르다
희뿌연 새벽. 물안개에 휩싸여 고요히 잠들어 있던 선착장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허리춤이나 등에 제각기 병장기를 둘러멘 험상궂은 사내 다 섯 명이었다. 아직 약관이 채 안 되어 보이는데도 하나같이 어딘가가 어긋나거나 비뚤어진 인상이었다. 맹수처럼 살겠다고 맹세라도 한 듯 다들 눈빛들이 흉흉했다. 이들은 아직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폭행, 강간, 강도, 살인까지 안 해본 것이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부모들은 똑같은 범죄들을 통해 돈까지 벌어들여서, 그렇 게 번 돈으로 이런저런 생떼를 다 받아주며 이들을 귀하게 길러낸 자들이었다. 결국 필연적으로 인간 말종이 되어버린 사내들의 눈에는 방금 전에 안개를 헤치며 나 타난 백의여인과 그녀의 두 시녀 역시 먹음직스러운 먹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혹여 칼에서 피가 마를세라 조바심 치며 온갖 악행을 끊임없이 저질러 온 이들에 비해, 백의여인은 너무도 이질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깨끗하고 선량한 얼 굴은 얼핏 순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들은 바로 영령과 몽무, 환무였다.
“어때?”
악당들 사이에서 재빨리 전음이 오갔다.
“삼삼하군.”
“어떡할까? 아직 시간도 있는데.”
“여가 선용인가. 좋아! 난 찬성!”
“나도 찬성.”
대세가 정해지자 누군가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근데 셋밖에 안 되잖아? 모자란데.”
“새삼 뭘? 자원 부족이야 항상 있어왔던 문제 아냐?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자고.”
누군가가 타개책을 제시하자 다섯 명의 악당들은 재빨리 뜻을 모았다. 전원 찬성이었다.
원래 대인은 대인과 통하고 소인은 소인과 통하는 법. 오늘 모인 사내들은 모두 한 지역에서 온 떨거지들로, 다 같이 허리에 붉은 띠를 차고 있었다. 강남의 유명 흑 도문파 ‘철심장(鐵心莊)’을 이끄는 다섯 장주의 후계자들, 통칭 ‘강남오소귀’라 불리는 골칫거리들이었다. 그들은 부모들의 비호 속에 아쉬울 것 하나 없이 안하무 인의 생활을 해왔는지라, 여자는 무슨 쓰다 버리는 노리개 정도로만 취급했다.
그러다가 요 며칠 마천각 시험 준비로 바빠 여자 맛을 제대로 못 봤던 터에, 눈에 확 띄는 미인들이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건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는 벼락 맞을 생각을 하며 그들은 슬금슬금 영령과 시녀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금세라도 침이 질질 흐를 것 같은 입, 탐욕으로 달뜬 눈이 한결같이 발정난 수캐를 연상케 했다.
“크흐흐흐!”
“고것들 참. 아흐!”
“자자, 가만있어. 지금부터 듬뿍 귀여워해 줄 테니.”
“천국으로 보내주마. 케케케.”
“맛있게도 생겼네. 스읍!”
딱 보기에도 정신이 나간 기분 나쁜 사내들이었다. 보아하니 여자는 무조건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고 믿고 살아온 모양이었다.
“환무야, 이것들은 대체 뭐냐?”
언제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주는 믿음직스런 시녀 환무를 향해 영령이 물었다.
“보시는 대로 인간 말종들입니다, 아가씨!”
환무의 대답은 짧고 정확했다.
“역시 그런가 보네?”
“진짜 그런가 봐요, 아가씨. 이제 어쩌죠?”
몽무가 두려운 듯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글쎄 어쩔까. 대화로 해결될까?”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랬습니다, 아가씨.”
무뚝뚝하고 간결한 환무의 말에 악당들은 눈에서 불을 뿜어냈다.
“이 계집이 말하는 뽄새 좀 보소! 이것아, 서방님들을 잘 모셔야지!”
“그래그래, 이제부터 네년들을 귀여워해 줄 어르신들께 감사드리진 못할망정!”
“그 버르장머리없는 입술을 곧 지그시 눌러주마!”
갈수록 지저분해지는 폭언에 영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잡스런 피는 묻히고 싶지 않았거늘… 하지만 짖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구나!”
뻑!
“크아아아악!”
‘…없구나’라는 말과 ‘뻑’ 소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울렸다. 번개처럼 내질러진 영령의 검집이 첫 번째 사내의 입을 박살 냈다. 피와 함께 이빨이 몽창 날아가며 비명이 울려 퍼졌다. 너무나 급작스런 공격에 나머지 사내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욱!”
입이 박살난 사내가 다시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고꾸라졌다. 어느새 날아든 환무의 팔꿈치가 도리깨처럼 날카롭게 복부를 강타했던 것이다.
“어어…….”
부상품쯤으로 여겼던 시녀들 역시 한가락 실력이 있음을 안 사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딜 봐?”
그새 두 번째 사내 뒤로 돌아간 몽무가 그의 오른팔을 돌려 꺾으며 왼쪽 어깨를 사선으로 비스듬히 내리눌렀다. 사내의 면상이 대번에 바닥으로 직격했다. 몽무는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무릎으로 상대의 얼굴을 가차없이 차올린 후, 비틀어 잡고 있던 오른팔을 주저없이 마저 꺾었다. 인정사정없는 능숙한 관절기였다.
“끄아아아아악!”
“이, 이년들이!”
당황한 사내들이 우왕좌왕했다.
“입만 살았군.”
세 번째 사내의 코앞에 불쑥 나타난 환무가 눈부시게 빠른 솜씨로 손을 휘둘렀다. 세 뼘 길이의 가늘고 날카로운 침이 사내의 왼쪽 귀밑에 꽂혀서 목을 관통, 경추 사이를 지나 오른쪽 귀밑으로 뚫고 나왔다. 죽지는 않았지만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사내는 입을 쩍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환무는 손도 대기 싫다는 듯 발로 차 넘어뜨리고는 뒤로 물러서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입냄새 난다, 이상!”
어느덧 허리에 붉은 띠를 차고 서 있는 사내들은 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튀, 튀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그들에게, 바닥에 쓰러진 ‘옛 친구 따윈 이미 염두에도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친구’란, 좋은 시절만 함께하고 나쁜 시절엔 모른 척하는 존 재. 그리고 이제 좋은 시절은 끝나지 않았는가!
“어딜 가시려고?”
돌아선 두 사내의 앞에는 싸늘한 표정을 한 영령이 서 있었다. 검집이 씌워진 검이 두 사람의 머리통 사이를 열두 번 왕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내들 의 눈앞에 별들이 번쩍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영령이 막 검을 거두려던 그때, ‘퍼걱’ 소리와 함께 두 사내의 눈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만큼 커졌다.
“꾸웨에에에에에엑!”
처절한 비명이 고요한 새벽 호숫가를 진동시키자, 놀란 물새들이 수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사내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무너져 내렸다. 영령은 그중 한 명의 다리 사이에서 몽무의 발바닥을 발견하고 이내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몽무, 그게 무슨 짓이냐! 여자가 조신해야지 어딜 함부로 발길질이냐. 불결하게!”
환무가 영령 대신 몽무를 힐난했다.
“흥,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환무, 네 손에 든 그 몽둥이는 뭔데? 아까 보니 나보다 더 무지막지하던걸 아예 작살을 낸 것 같은데?”
영령은 어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짝 돌려 옆을 흘깃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쓰러진 사내의 뒤로 환무가 어디서 난지 모를 나무 몽둥이 하나를 들고 서 있었 다.
“난 신체가 직접 닿지 않았으니 괜찮아. 난 내 소중한 신체의 일부로 그런 불결한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환무가 문제 삼았던 것은 사용한 도구의 종류였던 모양이었다.
“어흠, 이제 둘 다 그만 하지 그러니?”
영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해댔다.
“나머지 세 놈도 똑같이 만들어주고요, 아가씨, 친구끼리 싸우지 않게 하려면 공평하게 해줘야죠.”
“꼭 그래야 할까?”
떨떠름한 얼굴로 재고의 여지를 묻자 몽무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럼요. 멀쩡해 봐야 민폐밖에 안 돼요.”
“맞습니다. 그전에 삭초제근(朔草除根)해야 합니다.”
환무의 맞장구에 재고의 여지는 없어졌다.
“그 말, 어째 오늘따라 무섭게 들리는구나.”
“아가씨, 여긴 흑도입니다. 여자는 생리상 언제나 약자의 입장. 참으면 더 더욱 당할 뿐 동정해 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특히 이런 쓰레기들은 반성이란 걸 모르 니, 기회가 될 때마다 경각심을 심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른 여성들마저 애꿎은 피해자가 될 뿐입니다.”
영령은 환무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럼 난 뒤돌아 있을 테니 빨리 끝내렴.”
“예, 아가씨.”
뒤로 돌아서자 확 뚫린 동정호가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영령은 그 순수한 대자연의 모습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 했으나, 곧이어 들려온 이런저런 소음들이 그녀의 마음을 무척 산란하게 만들었다.
퍽!
무시무시한 소리에 이어 찰나의 정적. 뭔가가 들썩이다 잠잠해지는 소리.
“빌려줄까? 난 다 썼는데.”
“아냐, 이미 버린 몸. 이걸로 계속 가지 뭐.”
퍽! 부르르.
나루터의 진동이 발밑에까지 느껴졌다. 영령은 귀를 막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주인으로서 조금은 의연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앗, 또 하나는 어떻게 하지?”
“음, 할 수 없지. 동시에 가자.”
“좋아. 하지만 내 발 때리면 안 돼!”
“문제없다. 쓸데없는 걱정 마라, 이상.”
퍼퍽!
연속음과 함께 찾아든 무시무시한 정적 속에서 영령은 고심했다.
“근데 난 언제 고개를 다시 돌려야 하는 걸까??
영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몽무의 외침이 들려왔다.
“앗, 배다! 배예요, 아가씨!”
시선을 약간 위로 든 채 아래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영령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호수 위에 잠들어 있던 희뿌연 안개 속을 가르며 흑선이 나타났다. 위로 솟구친 두 개의 넓은 돛과 좌우로 열두 개의 노가 달린 큰 배였다. 돛대 위에 걸린 붉은 깃 발이 새벽 호수 바람에 사납게 펄럭였다. 아직 채 안개가 걷히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수천 번을 왕복한 듯, 좌우 총 스물네 개의 노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흑선은 마치 미끄러지듯 가볍게 호수 위를 가로질렀다. 이러다 부딪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접근하던 흑선은 익숙한 솜씨로 속도를 늦추더니 미세한 노의 움직임을 이용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나루터 옆에 그 큰 몸을 붙였다. 놀랍도록 정교한 솜씨였다. 그러나 배는 유령선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조용하네요, 아가씨.”
“그렇구나. 말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다니, 마치 유령선 같구나.”
배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몽무는 그런 침묵이 싫었다.
“어때요? 무공 상태는 많이 회복된 것 같아요, 아가씨?”
잠시 동안 배 위에서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자 영령의 왼쪽에 시립해 있던 몽무가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물었다.
“저런 허섭스레기를 상대했는데 제 실력이 발휘됐겠니? 준비운동거리도 안 되는 쓰레기들인데.”
영령의 오른쪽에 시립한 환무가 회의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것도 그렇네.”
그래도 여전히 몽무의 두 눈은 기대로 차 있었다.
“글쎄, 환무의 말대로 아직 완전하진 않아도 한 오 할에서 육 할 정도는 회복된 것 같구나.”
몽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에요, 아가씨. 지난번 싸움으로 큰 상처를 입어서 자칫 잘못하면 무공이 전폐될 뻔했잖아요. 지난 삼 개월 동안 가문의 비전검법을 회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하셨어요.”
“하지만 아직 검법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익숙지가 않구나. 정말 내가 크게 다치긴 크게 다쳤었던 모양이다. 빨리 회복해야 할 텐데…….”
아직 자신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않은 영령이었다. 아무리 지난번 싸움의 후유증이 크다고는 하나 생각 이상으로 증세가 오래가고 있었다. 자기 몸이 아닌 듯한 그 런 불편한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게 다 그 ‘검각 년들 때문이라니깐요.”
몽무가 씩씩거리며 외쳤다.
“그들을 가만두면 안 됩니다, 아가씨. 피에는 피를. 반드시 복수해야 합니다, 아가씨!”
환무도 맞장구쳤다.
“그건…….”
그때 드르륵 소리가 나며 기다란 나무 계단 하나가 내려와 배와 선착장 사이에 놓였다.
“그 얘긴 나중에 하자꾸나.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지.”
“예, 제가 입이 너무 가벼웠던 모양입니다.”
환무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나무 계단이 고정되자 등롱 하나가 배 난간 위에서 반짝 빛을 발했다.
“오늘은 당신들 세 명뿐이오?”
안개가 감도는 배 난간 위로 불쑥 얼굴을 내민 사내가 물었다. 뺨에 기다란 상처가 나 있는, 꽤 연륜있어 보이는 사내였다. 평범한 수부는 아닌 듯 보였다. 사내의 물음에 영령은 시선을 여전히 약간 위로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저희들뿐인 것 같네요.”
“좋소. 타시오.”
“고마워요.”
영령이 답례한 후 두 시녀를 쳐다보았다.
“그만 배에 오르자꾸나.”
“예, 아가씨.”
마침내 영령과 몽무, 환무는 마천각으로 향하는 흑선에 올랐다. 다섯은 이미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고, 배에 타는 사람은 오직 그녀들 세 명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접수처의 흑의서생에게 물경 황금 열 냥을 주고받았던 표식을 보여주고 배에 오르려 하는 영령의 발걸음은 남자에 의해 그만 저지당하고 말았다. 남자가 한 쪽 손을 내밀었다.
“이게 뭐죠?”
영령이 물었다. 어이없어한 쪽은 오히려 사내 쪽이었다.
“당연히 뱃삯이지, 다른 게 뭐가 있겠소?”
“또 돈을 내야 한단 말인가요? 뱃삯도 어제 접수비에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닌가요?”
어제 황금 열 냥을 털린 영령이 황당한 듯 물었다.
“어허, 이 아가씨가 이상한 소릴 다 하는군. 이봐, 아가씨. 그럼 아가씬 이 배를 공짜로 탈 생각을 했단 말이오? 이 배를 움직이기 위해 지금 몇 사람이나 새벽잠을 설치며 움직이고 있다 생각하시오? 최소 서른 명이 이 배를 움직여 지금 댁들을 태우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잠도 못 자고 용쓰고 있는 거요. 그리고 물 위에 나무만 잘라 띄워놓으면 배가 되는 줄 아쇼? 이 큰 배를 현 상태로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금액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오?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공짜로 탄다는 말은 못 하지. 암, 못하고말고.”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사내의 언변은 청산유수였다.
“그… 그런.”
상대가 이렇게 나오자 영령도 더 이상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좋아요. 내죠, 내면 되잖아요. 얼마죠?”
사내가 영령의 어깨 너머에 있는 몽환쌍무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한 사람당 황금 한 냥이니 세 사람이면 황금 석 냥이오.”
영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 막 황금 열 냥이라는 거금을 소비한 터였던 것이다. 그런데 또 황금 석 냥을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 바가지 아닌가요?”
“싫으면 내려도 상관없소. 다만 이 배 이외에 ‘섬’에 갈 수 있는 배는 없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사내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전혀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는 그런 말투였다. 사실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독점상회’의 횡포였다.
“이 애들은 제 시녀예요. 그런데도 황금 한 냥씩이나 받는단 말이에요?”
“어허, 이상한 말을 다 하는 아가씨로구려. 남자든 여자든, 귀족이든 노예든 간에 물 위에서 한 근당 배를 누르는 압력은 같은 법이오.”
어떤 의미에선 매우 철저한 평등주의인 사내가 다시 주위를 에둘러 가리키며 말했다.
“자,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시오. 다들 군말없이 뱃삯을 냈고 아가씨만 남았소. 아가씨를 기다리느라고 출발하지 못하고 있는 거요. 죄책감이 든다고 생각하지 않으 시오? 낼 거요, 내릴 거요?”
아무런 의문 없이 현실을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현실을 바꾸려 해도 아직 그녀에게는 힘이 부족했다.
뭔가 이상했다. 시키는 대로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그녀는 안심했다. 자신이 잘못 알았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이다.
“저기… 여긴 저희들밖에 안 탔는데요?”
사내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철썩 때렸다.
“아참, 그랬지. 미안하오! 그만 습관이 되어놔서.”
“스, 습관…….”
영령이 입을 쩍 벌렸다. 말버릇이었단 말인가! 그런 말이 입에 밸 정도라면 아무래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패한 적 있나요?”
돈을 못 받은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없소.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요.”
사내의 의지는 명확했다. 더 이상의 실랑이는 시간낭비일 것 같았다.
“알았어요. 내면 되잖아요, 내면.”
마침내 영령이 백기를 들었다.
“잘 생각했소. 이런 사소한 일로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야 앞으로의 일들은 어떻게 처리하겠소? 빨리빨리 내시오.”
“아직도 돈 낼 일이 더 남았다는 건가요?”
사내의 말속에 바늘처럼 감추어진 불길한 낌새를 알아차린 영령이 되물었다.
“가보면 아오. 곧 알게 될 테니.”
사내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 그런데 저들은 안 데려가나요? 분명 응시비는 냈을 텐데요?”
여전히 새벽 나루터 찬 바닥에 몸을 누인 채 부르르 하고 꿈틀꿈틀하며 움찔움찔하는 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령이 물었다.
“뭐야, 아직 살아 있었군.”
시시하다는 듯한 한마디.
“일없소. 본 각에 패배자는 필요없으니까.”
싸늘한 두 마디였다.
“쳇, 가보면 안다니… 아가씨, 저 사람 무슨 뜻으로 그런 신경 쓰이는 말을 한 걸까요?”
사내의 말이 마음 한 켠에 걸렸는지 고개를 빼꼼 반쯤 뒤로 돌려 사내를 다시 한 번 쳐다본 후 몽무가 물었다.
“그것도 모르냐? 앞으로 돈 쓸 일이 계속 있을 거라는 얘기다. 이상.”
환무가 냉정한 어조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더 보탤 말이 없구나.”
영령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출발!”
사내의 지시와 동시에 다리가 올라가고 노가 뒤로 움직이자 배가 나루터로부터 멀어져 자신을 든든히 받쳐 줄 깊은 물을 향해 나아갔다.
“야, 환무! 너 그 몽둥이 왜 아직도 들고 있니? 아까 그것 아냐?”
“응?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제야 눈치 챘다는 듯 환무가 말했다.
왠지 모를 미묘한 대화에 갑자기 선장이 움찔했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였다.
“그 끔찍한 물건, 버려주지 않겠나? 아니, 이왕이면 던져 주게. 되도록 멀리.”
약간 방어적인 자세로 다가온 선장이 정중한 어조로 부탁했다. 그 평범해 보이는 몽둥이에는 무의식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죠. 수질 오염이 우려되지만 갖고 있을 수도 없으니.”
환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갑자기 몽무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음. 뭐 꼭 버릴 필요도 없겠는걸. 단단해 보이니 치한 방지용으로 쓴다던가, 아니면 날짜라도 새겨 넣어서 기념품으로…….
몽무는 어느새 환무에게서 몽둥이를 받아 들고 장난치듯 숫자를 새겨 넣는 시늉을 했다.
“그, 그딴 건 빨랑빨랑 버려 버리시오!”
선장이 외쳤다.
“맞소, 빨리 버리시오!”
어디선가 유령처럼 나타난 선원 하나가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 갑판 위에는 꽤 많은 수의 선원들이 나와 있었다.
“왜요? 아깝잖아요.”
몽무가 몽둥이를 휘적휘적 돌리며 반문하자 남자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딱!
“그만 해, 이것아!”
환무가 몽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그런 건 빨랑 물에 버려. 불결하다.”
“내 생각도 같구나.”
조금 전부터 일행이 아닌 척 외면하고 있던 영령이 기회를 잡자 한마디 했다.
“쳇, 재밌을 텐데.
몽무는 마지못한 얼굴로 몽둥이를 호수 저 멀리에 던져 버렸다. 여기저기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몽무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입을 삐죽거렸 다.
배는 동정호의 푸른 물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호수 위에 걸린 아침 해에 안개도 어느 정도 걷혀가자 시야가 점점 더 넓어졌고, 덧칠된 안개 덕 에 흐릿했던 상이 점점 더 또렷해졌다. 자신감의 표현인지 자신들이 어디를 향하는지 궁금해하며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막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 정호란 곳이 원체 넓어서 물길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특정할 수 없었다. 그건 영령도 마찬가지였다.
한 반 각쯤 노를 저었을 때 여기저기서 하나둘씩 작은 깃발을 선미에 꽂은 순라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인 일조로 구성된 순라꾼들은 다들 허리에는 갖가지 병 장기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물의 침입을 막아주고 헤엄치기를 수월하게 해주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색 피수의를 입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언제든 대비할 수 있는 철두철미한 편성이었다.
“저기가 바로 그대들이 들어가길 원하는 마천각의 둥지, ‘자죽도(竹島)’요.”
“자죽도? 자줏빛 대나무 섬이라…….”
그때 옅어진 안개 사이로 작은 섬 그림자가 나타났다.
“어머? 생각했던 것보다 작군요.”
나타난 섬의 음영은 의외로 조그마했다. 너무 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리 크지도 않았다.
“맞아요. 너무 쬐끄마해요, 아가씨.”
몽무가 대실망했다는 투로 맞장구쳤다.
그 안에 많은 시설들이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건물 세 채 정도가 들어가면 꽉 들어찰 것 같았다.
“동의한다. 이상.”
환무도 이의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 했다.
“어딜 보고 있는 거요? 지금 그대들이 보고 있는 건 본섬에 붙어 있는 네 개의 작은 섬 중 하나일 뿐이오. 그 뒤를 보시오.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잘 안 보였지만 이 제 곧 나타날 테니.”
그 뒤에 나타난 그림자는 앞의 그림자의 족히 열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크기였다. 산 하나가 호수 위에 불쑥 솟아 나오기라도 한 듯한 그런 모양이었다. 아침 해 가 점점 더 높이 올라가며 안개를 밀어냄과 동시에 섬의 모양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섬은 온통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섬 윗부분도 아랫부분도 온통 푸른색 대나무 천지였다. 심지어는 물 위에도 대나무가 자라 있었다. 게다가 섬 주위는 푸른
장벽으로 빙 둘러쳐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생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죽책이었다. 십 장은 족히 되는 기다란 대나무들의 잔줄기와 잎은 모두 떼어낸 다음 윗 부분을 날카롭게 자른 후 그것들을 틈새 없이 붙여놓았다. 대나무는 자생 상태로 보아 저런 죽책이 여러 겹 있을 것 같았다.
“저기가 바로 마천각의 본거지 자죽도요.”
사내의 설명이었다.
“정말 대나무가 많군요.”
“여기서 대나무는 뭐든지 된다오. 무기, 성벽, 함정, 집기 등등 그 쓰임이 무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거요.”
푸른 대나무로 만든 죽책이 보이고 그 뒤에 숨겨진 성벽, 중간 크기의 섬들이 옆에 붙어 있다. 나무 기둥들이 박혀 있는 곳은 암초가 있다는 곳이다.
“행여나 뛰어들 생각 마시오. 당장 꼬치구이 신세가 될 테니.”
사내가 퉁명스런 어조로 한마디 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얕은 물 여기저기에 대나무 끝을 날카롭게 베어 꽂아놓았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태어나서 계속 산에서 자란 탓에 헤엄에는 별 취미가 없으니깐요.”
“그런 것치고는…….”
사내가 말을 끌었다.
“왜요?”
“아니오. 그냥 그런 것치고는 배 타는 것에 익숙해 보여서 말이오. 뱃멀미도 안 하고. 그냥 느낌일 뿐이었소. 신경 쓰지 마시오.”
신경 쓰였다.
섬을 따라 빙 둘러쳐진 죽책을 따라 이동하자 입구가 나타났다. 두 개의 커다란 기둥이 거대한 들보를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었다. 수백 년 묵은 아름드 리 거목만큼이나 두껍고 거대한 쇠기둥을 무슨 수로 만들어 어떻게 이런 물 위에다가 박아놓을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쪽이 이상한 일이었 다. 그 엄청난 역사에 절로 압도되는 힘을 그 구조물은 지니고 있었다. 쇠기둥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 기둥 양옆에서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 은 내용이었다.
동정호를 붉게 물들인다 해도 이 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배는 그 출입구에 멈추어 섰다.
두 기둥 양편 위쪽에는 보초를 서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푸른 대나무를 여는 것은 무엇인가?”
망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화였다.
“그것은 오직 호반을 물들이는 붉은 노을뿐.”
사내가 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시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개문(開門)!”
‘자죽책’의 입구가 열리자 배는 미끄러지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초승달 모양으로 파인 넓은 곳이 나타났다. 곶 전체는 놀랍게도 돌로 쌓은 높은 성벽으 로 둘러싸여 있었다. 입구는 중앙의 철문 단 하나였다. 철문은 무척 거대해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양옆에는 귀신이 웃고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귀면(鬼面) 청동상 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지옥문을 지키는 파수꾼이라 해도 믿음이 갈 만큼 소름 끼치고 불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몽무의 눈이 휘둥그레졌 다.
“앗! 아가씨, 저기 보세요. 사람이 물 위에 떠 있어요!”
몽무는 한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한 나머지 팔짝팔짝 뛰었다.
“이름값 한다고 새벽부터 꿈꾸니? 어떻게 사람이 물 위에… 정말이네.”
몽무가 분명히 착각했으리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환무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로 작살처럼 생긴 긴 병장기를 등에 멘 사람이 물 위에 떠 있었다. 배는 없었 다. 게다가 한 명이 아니었다. 오 장 정도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 명의 흑의인이 검은 망토를 흩날리며 물 위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아, 저들은 바로 마천각의 입구를 지키는 열 명의 수문장 ‘귀문십장(鬼門十將)’이오. 물 위에서든 물 아래에서든 물에서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수공의 고 수들이지요. 어느 누구도 그들의 허락 없이는 입구로 들어갈 수 없소.”
선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평상시에도 내공만으로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고수란 말인가요?”
몽무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글쎄…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알아도 가르쳐 줄 수 없고.”
함부로 많이 떠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는 자제할 줄 아는 남자였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무리 저들이 고수라 해도 하루 종일 내공의 힘으로 물 위에 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말뚝들이 저 아래에 무수히 많이 박혀 있을 것이다. 다만 수면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겠지.”
사내는 영령의 설명에 감탄했다.
“호오, 대단한 눈썰미요! 그것을 단 한 번 보고 대번에 파악해 내다니.”
선장은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감탄했다.
“부정하시지 않는군요?”
“그걸 뭐 하러 부정하겠소. 그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저들은 여전히 물에서 무적일 테니 말이오.”
비록 수면 밑에 말뚝이 박혀 있다고는 하나 그 말뚝들의 위치는 저들밖에 모른다. 그것의 위치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것은 저들뿐이다. 게다가 그 위를 이리저리 뛰어가며 싸우려면 적지 않은 훈련이 필요했다.
“저기가 바로 마천각의 입구, 통칭 ‘귀문(鬼門)’이오.”
불길하게 생긴 철문을 가리키며 사내가 말했다.
“누가 지었는지 상당히 악취미군요.”
설마 여기가 동북 방향? 지남철이 없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약한 태양의 위치로 미루어볼 때 엇비슷하긴 했다.
‘귀신이 될 각오가 된 자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그런 뜻인가?”
안개와 연기에 휩싸인 섬뜩한 귀신 문양이 새겨진 검은 철문은 정말로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곳은 얕지 않았다. 성벽과 바로 붙어 있는 곳도 상당히 깊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배를 대기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설마 저 섬뜩한 문양이 새겨진 철문 옆에 바로 붙이는 건가?”
죽책의 출입구와 귀문 사이에는 푸른 호수 이외에는 아무런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데도 배는 똑바로 가지 않고 비스듬하게 항로를 잡았다.
“왜 암초나 별다른 장애물이 보이지 않는데 이런 식으로 운항하는 거죠?”
영령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냥 본인의 취미요.”
“취미가 아니란 얘기군요.”
말해줄 수 없다는 대답만으로도 어느 정도 대답이 되었다.
“보이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보여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무언가가 있다, 그런 뜻인가요?”
영령의 물음에 사내가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소저는 정말 눈썰미가 비범하구려. 다시는 돌려보내기 싫을 정도로 말이오. 원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게 되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소? 바로 그렇소. 마천 각에서는 배를 전복시키고 싶은 사람만이 똑바로 운항하오.”
정말 곳곳에 전투시를 위한 용의주도한 안배가 첩첩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삼엄하기가 양산박도 이보다는 못할 것 같았다.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요? 상대는 관(官)?”
“공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거요. 갑작스럽게 관군들이 쳐들어오면 곤란하니 그때를 대비하고 있는 것뿐이오.”
정말 믿기 힘든 대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참에 배가 멈추었다.
마천각의 입구 좌우에는 쇠로 주조된 이마에 긴 뿔이 달린 귀신 얼굴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두 눈과 입이 모두 어둠 속으로 뻥 뚫려 있어 더욱 섬뜩한 모습이었다. “지옥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가 누구인가?”
“끼아아악!”
귀면에서 튀어나온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놀란 몽무가 자지러지며 영령에게 달라붙었다. 마치 귀신이 외치고 있는 듯한 그런 형상이었다.
“진정해라. 겁주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저 위의 누군가가 쇠통을 통해 말하고 있겠지. 저 심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는 그 탓이다.”
일부러 방문객의, 특히 시험 희망자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적인 연출이 분명했다.
“피를 대가로 힘을 원하는 자요.”
사내가 귀면의 뚫린 입에다 대고 대답했다.
그것이 약속된 암호였다.
“소속은?”
“제일귀령선의 선장 해대경, 방금 마천각 입각 희망자를 데리고 돌아왔소.”
“잠시 기다리시오.”
그리고는 성벽 위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나루터를 올려라!”
‘아니, 나루터를 올려?”
그때 응답하듯 아래쪽에서 복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루터를 올려라! 부상(浮上)!”
“부상!”
몽무뿐만 아니라 모두가 한참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말로 나루터가 올라왔다. 거대한 도르래에 쇠사슬이 감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그것은 수면을 헤치 며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정말로 올라오네!”
몽무가 입을 쩍 벌리며 감탄했다.
“정말 신기하구나.”
놀라기는 영령도 마찬가지였다.
“쓸데없는 짓을.”
오직 환무만 냉소했을 뿐이다.
“이것 역시 관군들이 함부로 배를 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요. 유사시엔 함정으로도 쓸 수 있고 매우 유용하다오.”
해대경의 친절한 설명이 끝나자마자 배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계단이 내려졌다. 그가 앞장서서 내리자 영령과 몽무, 환무가 그 뒤를 따라 내 렸다.
그는 거대한 철문 앞까지 걸어가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당장이라도 귀신의 무리들이 뛰쳐나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형상이 그 철문에 조각되어 있었다.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아직 여기서도 검문을 받고 통과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이 지옥을 찾는 자는 누구인가?”
문 오른편에 붙어 있는 청동 귀면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를 대가로 힘을 구하는 자, 귀신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수라의 길을 걸으며 피를 흩뿌리고자 하는 자요.”
해대경이 대답했다.
“얼마의 피를 흘릴 셈인가?”
“한 방울의 피와 두 방울의 물을 흘리고자 한다.”
응시자 한 명에 시녀 둘이라는 뜻이었다.
“절차 한번 되게 복잡하네.”
“시끄러워. 조용히 하고 있어.”
몽무의 투덜거리는 전음에 환무가 핀잔을 주었다.
그그그긍!
마침내 묵직한 소리를 내며 귀신의 문이 열렸다. 아마 지옥에 문이 있다면 이런 소리를 내며 열렸을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해대경이 몸을 돌리며 두 손을 활짝 폈 다.
“어서 오시오, 현세의 지옥에! 지옥은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각오가 되어 있으면 들어가라는 말에 영령은 망설이지 않았다.
“가자!”
영령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시녀 두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어둠이 완전히 그녀들을 삼켰다.
그그그!
철문은 다시 요란한 포효를 내뱉으며 굳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