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0권 14화 – 백 년 만의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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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0권 14화 – 백 년 만의 재현

백 년 만의 재현

-후예사일

“난 존재하지도 않나?”

공손절휘는 이시건과 남궁상, 그리고 그가 평생의 숙적으로 여기고 있는 모용휘조차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상대는 그를 적으로 간주 하지 않았고, 남궁상과 모용휘는 그를 전력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났다.

“이대로 무시당하고 있을 수야 없지!’

이 승부욕에 불타는 청년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감히 공손씨를 무시해……..

무시당하는 것은 그의 가문 사람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기다려라! 반드시 공손씨의 실력을 다시 보게 만들어주마!’

자신이 가장 극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한순간 이시건이 그에게 등을 보인 것이다.

‘이때다!’

공손절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존검법의 절초를 펼치며 적을 무찔러 갔다.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남궁상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유인책이야!”

‘뭣?’

그러나 이미 기호지세인지라 공손절휘는 초식을 물릴 수 없었다. 그는 아직 초식의 발출과 회수가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 었던 것이다.

‘걸렸군!’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시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위력적인 살초를 내뿜었다.

‘우선 한 놈 잡고!’

이럴 땐 약한 놈부터 때려잡는 게 최고였다.

서늘한 바람이 공손절휘의 코앞에서 휘몰아쳤다.

“이제 끝장인가…….?

공격을 방어로 돌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젠장! 끝이다!’

공손절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만일 그의 할아버지가 알았다면 위기를 극복할 생각도 안 해보고 너무 일찍 서둘러 포기했다고 경을 쳤을 일이었다.

그때 저 뒤편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만두시오, 진 소저! 위험……!”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광이 그의 앞에서 번득였고,

그리고 피가 튀었다.

“꺅! 사부니… 웁!”

몰래 숨어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유운비가 기겁하며 서둘러 그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조, 조용히 하시오, 유 소저. 그러다 들키겠습니다.”

“하, 하지만 사부님이…… 웁!”

항의하려던 유란의 말이 다시 끊겼다.

“우웁― 우우읍!”

유란이 항의했다. 유운비가 그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시오. 살짝 스친 것뿐이니까.”

“정말인가요?”

유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고말고요. 보시오!”

“윽!”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진소령이 오른팔 어깻죽지를 움켜쥔 채 뒷걸음질쳤다.

“어, 어떻게?”

이시건은 물론이거니와 도움을 받은 공손절휘도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랐다. 어디서 어떻게 무슨 수단으로 이렇게 홀연히 나타날 수 있었는지 그는 짐작 조차 할 수 없었다.

공손절의 위기를 발견한 진소령이 십수 장의 거리를 단숨에 압축하며 재빨리 검을 휘둘러 그를 보호한 것이다. 만일 그녀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공손절휘는 수십 토막으로 토막난 이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촉박한 시간상 그의 보호에 중점을 두다 보니 자신에 대한 방어가 소홀해져 상처를 입고 만 것이었다.

“진 소저!!”

진소령이 상처 입는 것을 본 유은성의 눈이 ‘홱까닥 뒤집혔다.

“감히!”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불꽃 같은 노호가 터져 나왔다.

“어이쿠!”

숨어 있던 달도 깜짝 놀라 튀어나올 만큼 거센 포효에 남궁상과 모용휘가 움찔했다.

취링!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유은성의 신형이 천벌받을 놈을 향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도약했다. 거리는 단숨에 좁혀졌다.

사일검법(射日劍法) 쾌속식(快速式).

첨돌(尖).

사우란지(射雨亂地) 폭우쾌섬(暴雨快閃).

파바바밧!

유은성의 날카로운 협봉검 끝에서 점창의 절기가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그 한여름의 소나기 같은 맹렬한 찌르기의 연쇄 공격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했다.

“뭐… 이딴…….?

먹구름 낀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마저 무색케 하는 그 빠르기는 이시건이 그동안 접해본 그 어떤 검초보다도 쾌속하고 위력적이었다.

그는 속으로 불평불만을 터뜨릴 시간조차 없었다.

“빠르군요! 점창의 찌르기가 쾌속무비하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마치 화살비가 쏟아지는 것 같군요.”

“그, 그렇군요. 과연 백부님의 무공은 대단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점창파 내에서도 저보다 빠른 찌르기를, 저토록 연속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난 언제나 되어야 저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는지…….”

저런 막강한 신위를 보여주는 백부가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도달하기에 아득히 먼 곳에 이미 도달해 있는 백부가 얄밉고 야속하기도 했 다.

“하지만 저쪽도 대단하군요. 아직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저런 맹공을 아슬아슬하게 모두 피해내고 있다니 말이에요.”

유란이 감탄하며 말했다.

“동감입니다. 하지만 백부님의 검은 집요하지요. 아마 시간문제일 겁니다. 점창의 찌르기는 적을 꿰뚫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유운비의 말대로 유은성의 검초는 속도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더 가속하고 있었다.

슉슉슉슉!

빠르기만이 아니었다. 속도가 곧 힘이라는 것을 그의 쏟아지는 일초일초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섬광의 창, 그 끝에 실린 그 관통력은 무시무시했다. 한 번 수세에 몰린 이시건은 어떻게 해도 초반의 불리함을 만회하고 흐름을 바꿀 수가 없었다.

“젠장!”

그는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파바바밧!

슈슈슈슉!

“감히! 그녀의 옥신에 상처를 입힌 무엄, 그 목숨으로 사죄하라!”

눈 뒤집힌 중년 남자의 일격은 무시무시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강렬했다. 부글부글 들끓는 분노, 이글이글 타오르는 격정 속에서도 그의 검초는 냉정하고 정 확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미 수천 번도 더 꼬치구이 신세가 되었으리라.

이시건 역시 특별히 전수받은 비전의 신법이 없었다면 이미 예전에 벌집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맹렬히 공격을 퍼붓던 유은성도 그 점에서만큼은 꽤 놀란 듯 보 였다.

“꽤, 하는구나! 쫄래쫄래 도망가는 실력 하나만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후읍!”

깊은 숨을 들이마신 후 검끝을 앞으로 향한 채 오른팔을 최대한 뒤로 당긴 유은성의 전신 근육이 당겨진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서, 설마……!!”

유은성이 취한 독특한 자세를 본 유운비의 눈이 부릅떠졌다.

“왜 그러시죠, 유 소협?”

그러나 유운비는 유란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마치 얼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설마… 저 특유의 자세는…….”

“저 자세가 뭐 어때서요?”

지금 그의 귀에 유란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지난 백 년 동안 아무도 성취한 바가 없다는 사일검법 최후의 절초…….”

유운비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경악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후.예.사.일!”

당겨진 시위에 걸린 화살처럼 뒤로 뻗어 있던 검이 그가 갈 수 있는 가장 짧은 거리를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사일검법(劍비전기(秘傳技).

최후절초(最絶招).

후예사일(日) 낙일일시(落日一矢).

오늘날의 점창을 있게 해준 점창파의 독문기명검법에 이름을 붙여준 그 초식이 백 년 만에 한 전인의 손을 빌려 다시 시현되었다. 피육!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날아온 한줄기 검광이 이시건의 어깨를 꿰뚫었다.

“으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의 정적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죠?”

“나도 못 봤소.”

“나는 그렇다 치고 유 소협, 당신은 점창파 문인이잖아요? 점창파 사람이 자기 사문의 검초 하나 제대로 못 봐요?”

“볼 게 있어야 보지요.”

점창의 전설적인 검초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가 더 정확한 평이었다. 그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유은성의 오른팔이 뒤로 팽팽히 당겨져 있던 그 순간까지였다. 그 후에는 뭐가 어찌 된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이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순간, 이미 이시건의 오른쪽 어깻죽지 는 붉은 선혈을 내뿜으며 땅바닥을 뒹굴었고, 유은성은 재빨리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등짝을 발로 밟은 후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댄 이후였다.

“저, 저것이 바로 후예사일.

보고 있는 이들에게 감상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쾌속무비함. 쾌의 절정. 유운비는 문파의 전설이 현현하는 광경을 직접 목도했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초식이 완성되기 전, 백부님의 실력은 분명 천하오검수의 아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오의가 완성된 지금 그 누구도 그분을 천하오검수의 아래에 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유운비가 말했다.

“축하드려요, 유 소협. 기쁘시겠네요.”

“나도 축하하네.”

““감사…… 응?!”

제삼의 축하에 깜짝 놀란 유운비와 유란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자자, 가만히들 있게.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으면 말일세.”

“어, 어느새…….?”

유란이 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

“아무리 관전도 중요하지만 주위 경계를 소홀히 하면 쓰나.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안심하게. 그리 쉽사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너희들은 소중한 인질이거 든. 한 사람의 목숨과 맞교환할 소중한.”

눈가에 상처가 있는 남자가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칼은 그들의 목덜미에서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번쩍이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점창파 최후의 절초라는 후예사일인가! 처음 봤다…….?”

남궁상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저도 처음입니다. 아마 지난 백 년 동안 저걸 본 사람은 우리가 처음이었겠죠.”

“전설의 부활… 이란 건가…….”

확실히 저것은 그렇게 불릴 만한 자격이 있었다.

“저 위력! 저 빠르기! 소문 이상이로군요.”

모용휘 역시도 같은 검객으로서 그 초절한 위력에 적절한 경의를 표했다.

“휘, 자넨 봤나?”

“아뇨. 중간까지밖에 못 봤습니다.”

“나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네.”

“직접 상대한다면 위험하겠군요. 막는 것은 불가능하겠습니다.”

“그래. 미리 피하는 것밖에 달리 수가 없겠어.”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응책이겠지요.”

남궁상과 모용휘가 자신의 검초를 가지고 나눈 토론 따위는 지금 유은성의 귀에는 단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분노가 너무도 거대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배후를 캐낼 생각도, 심문할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자, 그럼 이제 죽어라!”

분노에 눈이 먼 유은성은 다짜고짜 검을 내리찍으려 했다. 애당초 용서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즉결처분뿐이었다.

“안 돼요, 유대협! 검을 멈추세요! 먼저 그의 배후를 캐내야 합니다!”

흥분한 유은성을 진정시킨 것은 진소령의 목소리였다.

“지, 진 소저, 괜찮으십니까?”

진소령의 무사함을 확인한 유은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금 전 야차(夜叉)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네, 괜찮습니다. 단지 스친 것뿐이에요.”

그제야 유은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입니다. 만일 진 소저께 무슨 일이라도 있다면 전..

장황해지려는 유은성의 말을 진소령이 다시 제지했다.

“그보다 저자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내는 게 우선입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분부대로 시행합지요.”

유은성의 고개가 다시 자신이 밟고 있는 이시건에게로 돌아갔다.

“자, 이제 네 녀석이 뭐 하는 녀석인지 술술 불어보실까?”

“크윽…….”

조금 전 관통당한 상처가 다시금 불에 덴 듯 아파오자 이시건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어. 천하의 내가 이런 볼품없는 꼴을 당하다니.

일 대 일이라면 결코 천하오검수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의 자존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렸다.

‘난 인정 못해!’

아무리 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놈들이 한꺼번에 덤비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당하진 않았어.’

그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미루었다. 자신이 이기지 못한 것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다른 데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쉽게 말할 것 같지가 않군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진 소저?”

“우선 연행해 가도록 하죠. 심문은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고요.”

“좋은 생각입니다, 진 소저. 저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유은성이 허리를 굽혀 막 이시건을 포박하려던 그때였다.

“잠깐 멈추시오!”

흠칫!

유은성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웬 흑의복면인 하나가 한 손엔 칼을, 다른 한 손엔 조카 유운비를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날카로운 칼날 은 조카의 목젖 바로 위에서 싸늘한 한광을 발하고 있었다.

“운비야!”

깜짝 놀란 유은성이 외쳤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방해될까 봐 놔두고 온 아이들이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아이들이었다.

“배, 백부님.”

유운비의 얼굴이 단박에 울상이 되었다. 그는 부끄러워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흑의복면인이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젊은이들의 혈기를 누르려고만 해서야 쓰겠소? 반항이 빠진 젊음을 젊음이라 부를 수야 없지 않겠소? 그런 거요.”

반항이 젊은이의 특권이라 해도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일쑤였다. 어떻게 하는 반항이 제대로 된 반항인지 그들은 모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자기 몸을 망가뜨리는 게 반항의 유일한 방식인 줄 아는 멍청이도 많았다.

“네, 네 녀석이…….”

걱정과 분노가 한데 섞여 버린 유은성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하나가 아니니!”

“뭐라고?!”

또 다른 흑의복면인 하나가 나머지 한 명을 데리고 나왔다.

“유란아!”

이번에는 진소령이 깜짝 놀랄 차례였다.

“사, 사부님…….?”

그녀 역시 사부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진소령이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잠시 너의 성격을 잊었었구나……. 얌전히 기다리라 해서 기다릴 네가 아닌 것을. 나의 실책이다.”

사부의 회한 섞인 긴 한숨에 유란의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사부님…….”

유란의 두 눈에 금세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혔다.

“자자, 두 분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시길 바라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손이 떨려 이 두 사람의 목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니 말이오.” 기회를 엿보며 조금씩 몸을 움직이던 두 사람의 신형이 그대로 멈추었다. 저쪽이 그들의 움직임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어떡하시겠소, 유대협?”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윤이정이 재차 물었다.

“요구는 물어보나마나겠지?”

“너무 뻔한 얘기에 굳이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소?”

“크으으”

부드득 이를 가는 유은성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잡힌 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중요 참고인임이 분명했다. 그것도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확정적으로 높은. 사사로운 정에 매달려 저 아이들을 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의를 위해 읍참마속泣斬馬謖)해야 하는가. 이미 피해자가 속출한 이후였다. 만일 이대로 놓아 보내준다면 도대체 무슨 면목으로 그 희생 자들을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진 소저?”

방금 그가 한 행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비겁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그녀와 죄를 나누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그로서는 그런 세세한 점까지 따지고 들 겨를이 없었다. 남궁상도 모용휘도 공손절휘도 이 일엔 감히 끼어들 수 없었기에 그들은 졸지에 방관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반항에도 항상 책임이 따르는 것을.

남궁상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것은 모용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에 책임질 각오가 없으면 반항 따윈 꿈도 꾸지 말아야 하거늘.

이제 유은성과 진소령이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그 부채를 당사자 대신 떠안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스승 된 자로서의 도 리였다.

마침내 진소령이 결심한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할 수 없군요. 놔줄 수밖에.”

다 잡은 고기였다. 그물은 펼쳐졌고 고기는 그 안에 걸려들었다. 이제 손을 뻗기만 하면 종료였다. 그러나 얄궂은 운명은 구멍 없는 그물에서 고기를 빼내가고 말 았다.

세게 나가면 저쪽도 어쩔 수 없었을 터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사적인 정에 얽매여 객관적인 판단력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데려가라!”

분노를 억누른 채 유은성이 내뱉었다.

“잘 생각하셨소이다.”

복면 밑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윤이정이 대답했다.

남궁상과 모용휘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외면했다.

다시 제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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