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0권 17화 – 두 장의 서찰(書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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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0권 17화 – 두 장의 서찰(書札)

두 장의 서찰(書札)

-꿈은★이루어진다

틱틱틱틱!

빠르게 움직이는 발이 이슬 맺힌 풀잎을 스친다. 풀들은 그 무게에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했으나 자신의 연약한 목을 짓누르던 발이 사라지는 순간 이내 다시 고개 를 치켜든다. 몇 방울의 이슬만이 자신을 박차는 반동에 튕겨 올라 밤공기 속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다급한 듯 인영의 호흡이 거칠다.

“헉헉!”

풀잎 위를 걸으면서도 아래 풀이 상하지 않는다는 초상비의 경지를 펼쳐 보이는 인물은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풀잎 위를 질주하는 그녀의 왼손에는 꽃과 봉 황 무늬가 돋을무늬로 새겨진 벽옥색 옥비녀를 힘껏 움켜쥐고 있었다. 희미한 달의 파편과 별빛이 여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밤의 장막을 살짝 들어올렸다. 바로 아미 신녀 진소령이었다.

풀잎 위를 다급히 박차며 나는 제비처럼 달려가는 그녀의 오른손에는 한 장의 서찰이 와락 구겨진 채 들려 있었다. 검도의 높은 경지에 올라 부동심을 익힌 그녀였 지만, 현재 그녀의 얼굴은 마치 시간에 뒤쫓기기라도 하는 듯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술시(오후 9시) 경에 도착한 한 장의 서찰 때문이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놓아두었는지 모를 그 서찰이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막 잠자리에 들 채비를 하던 차였다.

전략(前略).

그제는 신세가 많았소. 당신의 사랑스런 조카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 자정까지 서문(西門)삼십 리 밖에 있는 관제묘로 오시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고 혼자 와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예쁜 조카 아 이의 안전과 미모는 보장할 수 없소. 혹시 믿지 못할까 봐 여기에 증거 하나를 동봉하오. 물론 오지 않아도 상관없소. 그대 조카의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인 후 상자에 담아 그대에게 보내는 것도 하나의 훌륭 한 복수가 될 테니 말이오. 안 그렇소? 육체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오래간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소. 그럼 기다리겠소

-풍류공자.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그녀는 닫힌 성벽을 뛰어넘어 벌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서찰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녀는 밤이 뒤덮인 벌판을 달렸다. 어차피 지금 사람을 보내 알아본다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서찰을 보낸 이는 그 시간까지 계산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설혹 구 할 구 푼 구 리의 안전이 보장된다 해도 나머지 일 리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는 마찬가지로 이 길을 달렸을 터였다. 어떻게 키운 아인데! 혹시 덮쳐 왔을 지 모를 위험을 두 눈 뜨고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를 위협하기 위해 감히 조카 아이인 진령을 이용한다는 발상을 가진 놈들 자체가 이 하늘 밑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기다려라, 령아! 이 고모가 반드시 구해주마. 만일 그 아이에게 티끌만한 상처라도 하나 입힌다면…

그것은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

탁탁탁탁탁!

진소령은 경공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마음이 흐트러지면 덩달아 기도 흐트러지는 것이 순리. 통제가 느슨해진 기는 낭비되게 마련이다. 그녀는 자신이 빠른 속도 로 지쳐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만일 이것이 함정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안 미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유은성이 있었다.

전언 한마디 남기지 않고 온 것이 걱정이긴 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후회였다. 그럴 경황은 없었다.

지금은 그를 믿고 자신은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야심한 밤.

근엄한 얼굴로 방문을 나선 유은성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정원 한가운데 잠시 발을 멈춰 선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주위 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캄캄한 어둠, 들리는 것은 귓가를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 그 외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같은 동작을 세 번 더 반복하고 나서 야 그는 이 정원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제야 비로소 유은성은 몸을 살짝 비튼 다음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는…….

“큭큭!”

두 번 웃었다.

“!”

한번만으로 참을 수 없었는지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즉시 원래의 근엄한 모습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다시 세 발짝을 걸은 후 똑같은 동작으 로 몸을 비틀고는 ‘쿡쿡’ 두 번 더 웃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조심스레 두 번 훑어본 다음 품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것을 꺼내 진지하고 심각한 시선으로 그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장의 서찰이었다. 중요한 점은 그 서찰이 바로 그리도 그가 일편단심으로 사모하던 한 여성이 보낸 편지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 야심 한 밤에.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아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더 이상은 자제할 수 없었다. 긴장한 얼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마치 표정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헤벌쭉 웃음이 나오 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볼이 발그레해진다. 눈이 가자미눈이 되어 곡선을 그린다. 침이 떨어지지 않는 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들썩들썩, 벌써부터 어 깨를 덩실거리는 몸은 춤을 추고 싶어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었다.

‘아, 안 돼!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아이들도 보고 있을지 모르는데…….?

그러나……

“쿡쿡쿡.”

이 서찰을 볼 때마다 입이 귀에 걸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이십 년 순정이 드디어 결실을 맺으려 하는지도 모르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이성으로 엄격히 통제되던 마음의 뚜껑이 열리자 감정이 용천수처럼 터져 나왔다.

“크크크! 쿡쿡쿡! 음풋풋풋!”

그는 한참을 더 소리 죽여 웃어야만 했다.

뎅뎅~

그때 술시 말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렸다.

“음,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분명 자정까지라고 했지. 서둘러야겠다.”

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유은성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약속 시간에 늦을 수야 없는 일이었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유 대협?”

정문을 지키던 표사 둘이 다가오는 유은성을 발견하고는 포권하며 인사했다.

“아, 자네들 야밤에 수고하네. 잠시 밖에 볼일이 있어 그러는데 나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다녀오십시오.”

보초를 서고 있던 표사 둘이 서둘러 정문 한 켠에 달린 야간 통행용 보조문을 열며 대답했다.

“그래, 고맙네. 그럼 다녀오겠네. 자네들도 수고하게나.”

표국 문을 나선 유은성의 신형은 곧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는 조금 전 품속에서 꺼낸 서찰 한 장이 고이 모셔져 있었다.

***

달은 얇게 휘어진 채 밤하늘에 쓸쓸히 걸려 있었다.

중양표국 역시 단잠에 빠져 있었다. 몇몇 보초만이 순번에 따라 긴장감없는 번을 돌고 있을 뿐이다. 표국 정문 앞에서 타오르는 두 개의 화톳불은 다만 정문 주위 의 어둠과 밤의 이슬을 쫓아내 줄 뿐 하늘과 땅에 가득 찬 어둠을 몰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밤의 냉기를 쫓아주기에 중양표국의 보초 두 명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아무 일도 없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곳으로부터 십장 밖, 화톳불의 열과 빛이 미치지 않는 나뭇가지 밑에서 어둠이 꿈틀거렸다. 전신에 검은 야행의를 두르고 얼굴에 복면을 쓴 사내의 가슴에는 ‘겁(劫)’ 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로 윤이정이었다.

오늘은 청룡은장을 멸문시켰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외곽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공격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런 큰 시가지의 한복판 에 존재하는 표국을 암습하기 위해서는 요란함이 철저히 배제된 은밀함이 필요했다.

유은성의 모습이 거리의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시건은 비로소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윤이정을 쳐다보았다.

“자네의 예상이 들어맞았군. 훌륭하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진가 계집은 어떤가?”

“반 시진 전에 이미 담장을 넘어 날아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빠른 속도라 더 이상 뒤쫓지는 못했습니다만…

“상관없다. 안에 없는 것만 확인한 걸로 충분해.”

그의 기준에서 그 나머지는 모두 염두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럼 이제 저곳에 유유히 걸어 들어가 열쇠를 손에 넣는 일만 남았군.”

이시건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그 연놈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그 후라도 늦지 않습니다, 주군.”

윤이정이 곧바로 맞장구쳤다.

저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어져 있던 무력의 균형은 그 상태를 유지하던 큰 무게 추 두 개가 동시에 빠짐으로 인해 이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의 입가에 맺힌 야비한 미소는 그 사실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요리는 끝났고, 이제는 젓가락으로 편히 집어먹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남은 것은 소소한 뒤처리 뿐.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중양표국 남창지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유경영 남매의 미래도 지금 이 순간 차가운 운명의 낫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 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세상은 광대하고 광활하기 때문에 인간의 인지로 그 세계를 완벽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작과 끝조차 알 수 없는 우연이 만 들어낸 교란 현상은 때론 말도 안 된다는 표현이 무색할 만한 우발적인 사건들을 종종 만들어내곤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완벽히 쌓아 올렸다고 자부한 이성과 이지의 장엄한 금자탑을 거대한 해일이 지나간 후의 초라한 해변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예측을 불허하는 잔혹한 운명의 교란은 최선의 선택이 되었어야 할 것을 최악의 선택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업(業)의 그물이 너무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탓에 그 궁극적인 원인을 정확히 집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 실이었다. 때때로 그냥 어쩌다 보니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이 사람이나 세계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역사 속에서 사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일이 틀어진 것은 이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비록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이들이 무능한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를 악업에 대해 정말 최 선을 다했다. 그들이 자신의 기량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도 그것이 실패한 이유를 굳이 따지고자 한다면 하늘의 뜻―이라 쓰고 변 덕이라 읽는―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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