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풍의 날개
-십삼혈 등장
“아직 저 안에는 중양표국 남창지국의 전력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만… 이 인원으로 충분하겠지요, 주군?”
윤이정이 마지막 확인차 물었다.
“걱정 마라! 이번엔 확실히 조력자도 있으니. 그 두 연놈만 없다면 이런 조그만 표국의 말살 처리 따윈 그들에게 누워서 떡 먹기지.”
누워서 떡 먹다가 목이 메어 체하는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들 말씀이시군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주위에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고 느껴지는 것은 그림자 아래에 몸을 숨긴 부하들의 기척뿐이었다.
“알고 싶나?”
이시건이 입가에 한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항상 피를 부르는 자리에 함께 있지. 바로 지금 여기에!”
이시건이 팔을 위로 번쩍 들어올리는 신호와 동시에 그의 뒤에 시립하듯 하나의 핏빛 그림자가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땅에서 피어나는 아지 랑이처럼 그것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아지랑이였다.
‘십삼혈인데 한 명?’
하고 윤이정이 의아하게 생각한 순간, 하나의 그림자가 좌우로 좌르륵 갈라졌다. 각각 여섯씩 정확히 열셋.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든 붉은 옷자락을 펄럭이며 열세 명의 사내가 이시건의 등 뒤에 도열했다. 그 모습이 마치 피를 불러오는 불길한 날개처럼 보였다.
“소개하지. 이번에 일을 함께하게 된 든든한 동지, 붉은 혈풍을 몰고 올 나의 핏빛 날개, ‘십삼혈이라네!”
그의 날개가 불러올 ‘피의 참극’을 상상하는 이시건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저들이 바로 그!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피를 부르는 미치광이들, 혈풍의 전조(前兆), 자신들이 조직에 충성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마음껏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살인광들! 저들이 나타난 곳에는 피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름대로 조직에서 한 부대를 이끌고 있는 윤이정이지만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놈들까지 몽땅 끌고 오다니. 오늘 주군의 각오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때 이시건이 배후에 도열해 있던 십삼혈을 향해 명령했다.
“셋만 남아 나를 지켜라. 나머지는 반으로 갈라져 한쪽은 열쇠를, 나머지 한쪽은 중양표국주 장우양을 비롯한 윗대가리들을 제거해라. 정보에 따르면 꼬마는 표국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모옥에 거하고 있다. 국주의 거처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존명!”
피에 물든 듯한 붉은 옷자락이 펄럭이자 이내 그들의 모습은 이시건의 등 뒤에서 사라졌다.
“장우양이 죽었다는 신호가 오면 그때 돌격한다. 그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어떻게 처분하면 좋겠습니까?”
처리 방법을 묻는 윤이정의 질문에 이시건이 상처 부위를 감싸 쥐었다.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아직도 관통당한 상처가 불에 덴 듯 화끈거리며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모두 죽여라!”
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맺혔다.
“끄응, 전날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갑작스런 요의에 노인이 약한 신음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술과 안주가 공짜로 무한정 제공되다 보니 보통 때보다 자작을 많이 하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뒷간이 어디더라……. 귀찮게… 내공으로 태워 버릴 수도 없고…….”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소피 보러가는 게 도무지 귀찮다고 삼매진화를 몸속에 일으켜 오줌을 증발시키는 방법을 시도해 봤던 녀석 하나가 있긴 있었는데 말야.”
모두들 실패를 예상했지만 그는 그 예상을 깨고 성공했다. 그리고 죽었다.
“그 녀석, 요독(毒)에 중독돼 죽었지 아마.”
아무래도 물에 녹지 않은 요독이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신장에 축적되어 그대로 썩어 들어갔고, 얼마 후 피오줌을 싸며 죽었다. 그 후로는 아무도 그 일을 시도 하려 들지 않았다.
“아함~ 정말 귀찮다니깐.”
노사부는 하품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뒷간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대형?”
십삼혈 중 다섯째인 오혈이 일혈을 향해 물었다.
“뭘 그런 걸 묻냐? 그냥 죽여라.”
살인, 살인, 살인!
그것은 그들의 유일한 장기이자 특기였다.
“옙, 하지만 절차는 밟아야죠.”
“번거롭게 뭘 그런 걸 묻냐? 우리가 언제부터 사람 죽이는 데 이런저런 절차를 거쳤다고 말야.”
“그럼 다녀옵죠.”
“조용히 끝내라.”
“걱정 마십쇼, 대형.”
“녀석, 벌써부터 피가 고픈가 보군.”
저 노인네도 곧 이승을 하직하겠군. 일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그는 곧 그 확신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응??
갑자기 일혈의 눈이 크게 떠졌다.
노인의 뒤를 잡으러 몰래 접근해 들어간 오혈이 갑자기 풀썩 땅에 쓰러지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지 계속해서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나갔다. “칠제, 저게 어찌 된 일이냐?”
당황한 일혈이 물었다.
“아, 아무래도 오형이 죽은 것 같습니다, 대형.”
“죽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죽어? 저 노인이 뭔가 수작이라도 부렸단 말이냐? 삼제, 넌 봤냐?”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대형.”
삼혈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제(九), 넌?”
“저 역시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그럼 대형께서는 뭔가 보셨습니까?”
구혈이 되물었다.
“아니, 나도 못 봤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오제가 지병이라도 있어서 갑작스레 쓰러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심장마비 같은 것 말입니까? 설마 그럴 리가요. 저번에 살인하러 갈 때까지만 해도 팔팔했잖습니까? 몇십 명 때려잡고도 멀쩡했는데요? 평생 살인을 일삼으며 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 아니었습니까? 저토록 쉽게 갈 사람이 아닙니다.”
칠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마 저 노친네가?”
어슬렁어슬렁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어가는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일혈이 중얼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요?”
칠혈이 부정했다.
“맞습니다. 뭔가 수작을 부렸다면 우리들이 눈치 못 챘을 리가 있겠습니까?”
구혈 역시 부정했다.
“역시 그렇겠지.
칠혈과 구혈의 적극적인 부정에 일혈도 동의했다.
“정보대로라면 진가 년과 유가 놈은 모두 표국 밖으로 유인했다고 했잖나? 저 노인은 그럼 누구냐?”
“요인 정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니 그냥 평범한 노인네 아닐까요, 대형?”
“글쎄다… 모르는 일이지. 이번엔 삼제랑 칠제, 구제, 너희들이 합공해 보거라.”
일혈이 지시했다.
“저런 비척거리는 노인넬 상대로 천하의 십삼혈이 세 명씩이나 가세해야 합니까? 우리 세 명이면 일이백 명짜리 어지간한 중소문파 하나쯤은 하루 반나절 만에 전 멸시킬 수 있습니다요.”
삼혈이 불만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유비무환이다. 잔말 말고 준비해라. 어차피 혼자서 살인하나 셋이서 살인하나 똑같은 살인 아니냐. 저 노인네를 제거하고 국주 장우양을 찾아 지국주 장우경과
함께 최우선적으로 제거한다. 물론 나머지 놈들도 다 죽여야 하고. 오늘 우린 바쁘단 말이다. 더 이상 이곳에서 지체할 수는 없다.”
“그 청룡은장의 꼬맹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건 이제(弟)와 다른 동생들이 맡을 거다. 그러니 그쪽은 걱정할 것 없다, 삼제.”
“흐흐, 오랜만의 대량 살인이군요. 벌써 피가 뜨거워집니다. 제가 칠제랑 구제와 함께 후딱 다녀옵지요.”
삼혈이 포악한 미소를 지으며 전음을 보냈다.
“그때까지 참고 있겠다. 다녀와라, 삼제.”
이때 노인은 막 뒷간 문을 열고 들어간 참이었다.
“이런! 구린내 나는 곳에 들어가 버렸군. 저런 데서 뒈지면 꽤 꼴사나울 텐데?”
삼혈이 안됐다는 투로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똥통에 빠져 버리면 어디 시체라도 수거하겠습니까, 삼형.”
“칠형 말이 맞습니다. 그냥 밖에서 찌르고 끝내죠.”
“그게 좋겠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찌르세.”
“좋죠.”
합의가 끝나기 무섭게 셋은 뒷간의 뒤와 좌우 양옆에 포진했다. 물론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다.
“모두 준비됐나? 하나… 둘…….”
“셋!”
약속대로 셋은 동시에 칼을 내질렀다.
수욱—!
날카로운 칼날이 소리 하나 없이 나무판을 뚫고 들어갔다.
“성공이군!’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혈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기우(杞憂)였나?”
아무래도 오제의 사인은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나 정도의 고수가 못 알아챌 정도의 움직임이란 게 있을 수가 있나! 아니, 분명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어. 그건 확신해! 설마 전설 속에나 나오는 마 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지도 아닐 테고 말야…….?
심살(心殺)의 경지라니. 그런 건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얼토당토않은 꿈같은 얘기였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근데 왜 이리 조용해?”
뒷간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칼을 찔러 넣은 동생 세 명도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삼제, 칠제, 구제, 지금 뭐 하고 있는 게냐? 분뇨 냄새가 기분 좋아 그러고 있는 게냐? 빨리 돌아들 와라.”
그러자 미약한 삼제의 전음성이 들려왔다.
“대, 대형, 뭐, 뭔가 이상…….”
그러나 삼혈의 목소리는 허공중으로 사라진 것처럼 감쪽같이 끊겼다.
“이봐, 삼제! 삼제!”
열심히 전음으로 불러보았지만 삼혈은 물론이고 칠혈과 구혈까지도 대답이 없었다. 자신 정도의 고수에게 저 정도 거리는 전음을 보내는 데 있어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건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음이 끊겼다는 것은 동생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였다.
끼이이이익!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내며 굳게 닫혔던 뒷간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보일 리가 없는데도 일혈은 무의식중에 몸을 긴장시켰다. “아함~”
여전히 졸린 눈을 한 노인 한 명이 거나하게 기지개를 켜며 그곳으로부터 걸어나왔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문 쪽은 피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텐데?”
조금 전 동생 세 명이서 동시에 칼을 찔러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의노인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으하아암! 그럼 다시 자볼까…….”
하품을 한 번 크게 한 노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숙소를 향했다.
끼이이이이익!
멀어져 가는 노인의 등 뒤에서 뒷간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다. 동시에 칼을 내뻗은 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사내 세 명이 풀썩 마른 짚단처럼 바닥 에 쓰러졌다.
“아, 아우들아!”
일혈이 다급한 경악성을 터뜨리며 평생 의좋게 살인을 일삼자며 혈주血酒)로 맹세했던 동생들을 향해 날아갔다. 서둘러 맥을 짚어보았으나, 아우 셋의 맥들은 모 두 싸늘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식지 않은 약간의 온기만이 싸늘한 죽음의 기운과 뒤섞여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왔다. 넷 모두 사인은 같았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상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으으으으으!!”
일혈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눈앞에서 아우 네 명이 어이없이 횡사하자 눈이 뒤집혀져 버린 것이었다.
“내 이 늙은이를!”
이성적 판단을 상실한 그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노사부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복수심뿐이었다. 잠의 여운에 취해 있는 노인의 발걸음은 느릿느릿했기에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단 한 발짝만 도약해서 칼을 내려치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가 가진 가장 강한 그 비장의 초식 일초라면 죽이지 못할 인간은 없었다. 노인의 등 뒤는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받아라!’
혈왕살!
일혈은 자신이 다종다량의 살인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익혀두었던 초식 중 최강의 초식을 전력을 다해 발출했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났다.
“어? 뭐, 뭐지??
그것은 일혈이 노인의 텅 빈 등을 향해 살기를 모두 개방했을 때 일어났다. 마치 지옥의 입구가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 심연 깊은 곳에서 뭔가가 튀어나와 그를 향 해 달려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두렵고 살기등등했으며, 또한 잔인했다. 자신이 그동안 죽였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아 마치 대군세가 진격하는 듯했다. 그 희생자의 대군세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이는 바로 그가 죽였던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었다. 그의 몸은 마치 마비된 듯 얼어붙어 있어 그 대군세가 자신을 난도질하며 지나쳐 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그들의 칼이 그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것처럼 고통이 엄습했다.
환상인지 아닌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끔찍한 고통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이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두려움 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일혈이 두려움에 떨며 마지막으로 본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혼백(魂魄)을 때리는 그 충격을 이 기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리고 노사부는 한 발짝 막 들어올렸던 발을 내려놓았다.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그 일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응? 뭔 일 있었나?”
잠시 멈춰 서서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던 노사부가 혼잣말처럼 한마디 했다.
“뭐야, 사소한 일인가?”
평소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주의를 지니고 있는 노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은 후 다시 잠을 청 했다.
“음냐음냐,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 사소한 일들보다는 숙면이 훨씬 더 중요했다.
“정보대로라면 꼬맹이들이 머무는 곳은 바로 저곳 서쪽 끝에 있는 별관이다.”
이혈이 손가락으로 이층짜리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혈이 이끄는 네 아우들이 장우양과 장우경을 맡는 동안 꼬맹이들의 신변을 확보하고 열쇠를 찾는 것 이 그들 다섯의 임무였다. 물론 그 임무 안에는 대량 살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육제, 우선 네가 야경꾼이 있나 없나 가서 살펴보거라.”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육제, 왜 대답이 없나?”
이혈이 약간 신경질적인 어조로 재차 말했다.
“저기 이형, 육형은 여기 없습니다.”
팔혈이 대답했다.
“뭐라고? 왜 없어?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다른 아우들만 있을 뿐 육혈은 없었다.
“이상하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따라오고 있었지 않았느냐?”
“예, 저도 육형이 함께 있는 걸 분명히 봤습니다.”
십혈이 대답했다.
“소피 보러간 게 아닐까요?”
팔혈이 의견 하나를 내놓았지만 반응은 썰렁했다.
“아니면 다른 먹음직스런 사냥감을 찾았다거나…… 특히 부녀자 같은…….”
부녀자를 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하는 게 육혈의 취미였다.
이혈이 버럭 화를 냈다.
“임무 중에 딴 데 새지 말라고 그렇게 누누이 강조했건만! 누군 살인하기 싫어서 안 하고 있는 줄 아나? 형제는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만 재미를 보려 하다니. 나중 에 돌아가면 혼찌검을 내주겠다.”
“좋은 생각 같습니다. 육제는 취미 생활을 즐기는 데 있어 너무 무분별할 때가 많습니다. 한번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혈은 어린 소녀들만 골라 죽이는 데 집착하는 변태 중의 변태 살인마였다.
“쳇, 할 수 없군. 십제, 네가 갔다 와라.”
또 대답이 없었다.
“십제, 넌 또 왜…… 응?”
없었다. 또 없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까지 코앞에서 말하고 있었는데도 기척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놈은 또 어디로 샌 거야?”
잠시 고개를 돌린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이놈들… 혹시 짜고서 날 골탕먹이려 하는 거 아냐?”
공사를 혼동하는 거야 항상 하는 것이니 그렇다 치고, 평소 그들 사이의 의리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럴 땐 일단 당황하기보다 십삼혈의 이 인자로서 의연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옆으로 새기만 하고. 할 수 없지! 사제, 자네가 다녀오게. 애들 군기는 나중에 잡고.”
“알겠습니다, 이형.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별다른 낌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기에 사혈 역시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했다. 작전 중에 장난치는 것도 그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다 해도 그들에게 긴장감이 없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임무는 대부분 섬멸전이었고, 그 임무 대부분을 그들은 완벽하게ᅳ중간중간 취미 생활도 즐기면서ᅳ완수해 왔던 것이다.
이혈의 명에 따라 사혈이 별관을 향해 어둠 위로 조용히 몸을 날렸다. 혼전과 대량 학살전이 일어나기 전에 우선 열쇠를 확보해 놓는 것이 이번 작전의 요체였다. 열쇠만 손에 넣으면 나머지는 그들이 바라던 바대로 피의 축제가 이어질 터였다. 그렇게만 되면 한동안 피에 고파했던 열세 자루의 칼들이 조금은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잠시 후,
“어라? 사제가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
별관을 정탐하러 갔던 사혈로부터도 소식이 끊어졌다. 시간상 이미 돌아와 상황 보고를 끝마쳤어야 정상이었다. 그제야 이혈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장난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름 끼치는 가정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이 내밀었다.
“팔제, 조심해라! 팔제……?”
지독히 불길한 예감에 이혈이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없었다. 또 사라진 것이다.
‘파, 팔제마저.
이제 남은 것은 이혈 자신 혼자뿐이었다.
그는 잔뜩 긴장해서 촉각을 곤두세운 채 조심스럽게 별관을 향해 다가갔다. 무슨 기척이든 나기만 하면 칼을 휘두를 준비를 마친 채였다. 툭!
그때 오른쪽 나무 위에서 뭔가가 툭 떨어져 내렸다. 깜짝 놀란 이혈이 질겁하며 칼을 빼 들었다.
“뭐, 뭐지??
그것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간 이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백 번의 살인으로 마비된 그의 심장이 덜컹하고 강하게 맥동쳤다.
“육제…….?”
맨 처음 사라졌던 육제의 시체였다. 그것도 목이 삼분지 이 이상 떨어져 나간 끔찍한 모양새였다. 그의 여섯째 동생은 더 이상 부녀자를 겁탈한 후 살해하는 즐거 움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이게 무슨……!’
그러나 그의 사고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툭!
이번에는 오른쪽 나무였다.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이혈은 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십제…….”
이번에는 목 부분이 아예 통째로 뜯겨 나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맹수에게 물어뜯긴 상처 같군.’
병장기로는 절대로 낼 수 없는 상처였다.
하지만 어떤 맹수가 이리도 거대하단 말인가? 게다가 어떻게 그런 커다란 맹수가 이렇듯 아무런 기척도 드러내지 않은 채 쥐 죽은 듯 조용히 움직일 수 있단 말인 가?”
그는 가능성을 따져 보기보다 있을 수 없는 일, 불가능한 일로 치부해 버렸다.
때문에 그는 나무 꼭대기에서 어둠에 묻힌 채 반짝이는 두 개의 황금빛 태양 같은 호안(眼)을 눈치 채지 못했다.
인간들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의 육감이 더 발달하게 마련이다. 말을 얻음으로써 느낌을 소홀히 하게 된 인간들과 달리 야생동물은 여전 히 살기를 감지하는 데 무척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야생의 사냥꾼은 사냥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살기를 죽일 수 있어야 했 다. 그리고 백무후는 가장 뛰어난 사냥꾼 중 하나였다. 천하를 통틀어도 그녀보다 뛰어난 야생의 사냥꾼은 찾기 힘들 터였다.
허접한 인간들과는 경력부터가 달랐다. 혹독한 자연과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 속에서 이백 년 이상을 살아남아 온 그녀와 인간을 애초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례 였다.
아무리 피에 전 미치광이들이라는 별칭을 지닌 십삼혈이라 해도 대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토끼처럼 무력했다.
‘귀, 귀신인가…….?
이혈이 생각하기엔 이런 일은 귀신의 조화가 아니고서야 도저히 일어날 리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번쩍!
그때 그의 등 뒤 머리 위에서 두 개의 태양이 번쩍 빛을 발했다. 오싹 돋는 소름에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떨리는 몸을 억누르며 돌아섰다.
그러자 그곳엔 ‘그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보았다.
“왜 아무런 신호도 올라오지 않는 거지?”
손가락으로 반대쪽 팔뚝을 톡톡 치며 자리를 어슬렁거리는 이시건의 목소리엔 짙은 초조감이 배어 있었다. 조금 전의 자신만만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치 장원에 집어삼켜지기라도 한 듯 월담해 들어간 열 명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다고 비명 소리나 싸움 소리나 경계 소리가 울려 퍼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침 묵의 늪에 가라앉기라도 한 듯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상하긴 이상하군요. 지금쯤 무슨 신호가 있어야 정상인데 말입니다. 설마 실패한 것은…….”
윤이정의 말에 십일혈이 반대하며 나섰다.
“그럴 리가 없소. 우리 십삼혈은 지금까지 맡은 임무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소.”
“맞소. 십일형 말대로요. 우린 무적이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난 그저 조심하자는 것뿐일세.”
윤이정이 불쾌함을 참으며 말했다.
“행, 누가 있어 감히 우리 십삼혈 중 열 명을 소리 소문도 없이 없앨 수 있단 말이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놈이 있다면 그게 미친놈이지.”
십삼혈 중 막내가 냉소하며 말했다.
‘저런 시건방진 놈을 봤나. 말하는 뽄새 좀 보게나! 제발 별일 좀 있었으면 좋겠군. 그래야 저놈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지는 꼴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윤이정은 갑자기 그 표정을 꼭 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군? 더 이상 기다려 봤자 소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혈풍을 부른다는 십삼혈도 오늘 밤은 살랑거리는 미풍밖에 안 되는 것 같고 말입 니다. 불었는지 안 불었는지 모를 그런 미풍 말입니다.”
그 말에 이시건은 하마터면 울화통이 터질 뻔했다.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너희들은 나의 뒤를 따라라.”
마침내 이시건이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