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포효, 울려 퍼지다!
-호조습래(虎爪襲來)
“유대협! 유대협이 어떻게 여기에?”
진소령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예? 저, 저야 진 소저의 서찰을 받고 이렇게…….”
기대했던 것과 정반대의 반응을 접한 유은성은 당황하며 품속에서 고이 간직해 놓았던 서찰을 꺼냈다.
“서찰이라니요? 전 서찰을 보낸 적이 없는데요?”
“그, 그럴 리가요! 서찰을 보낸 적이 없다니요?”
유은성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그, 그렇다면.. .!!”
“서, 설마!”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
“왜 그러느냐? 경영아? 선아야? 무슨 무서운 일이라도 있느냐?”
윤이정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소년은 급히 여동생을 껴안으며 한밤중에 들이닥친 불청객을 향해 경계를 눈빛을 보냈다. 소년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안심하거라. 이 숙부가 왔단다. 여긴 너희들에게 너무 위험하다. 그러니 어서 나랑 가자꾸나. 이 숙부가 너희들을 지켜주마!”
한밤중에 몰래 방 안에 잠입한 윤이정의 목소리는 자상하기 그지없었다.
“숙부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선아가 따라가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유경영이 그런 동생을 즉시 막아섰다. 한때 숙부였던 사내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에는 강한 경계심 과 적개심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왜 그러느냐, 경영아?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윤이정의 자상한 한마디에 소년은 심하게 몸을 떨었다. 입가에 맺힌 그 미소가 미치도록 무서웠다.
“선아야, 속지 마! 따라가면 안 돼!”
이가 딱딱 부딪친다.
“저자는… 저자는…….”
사내를 가리키는 소년의 손가락이 위아래로 세차게 떨렸다. 말은 입 안에서 맴맴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저자는… 아버님의… 아버님의…….”
숨을 몰아쉬며 씨근거리던 소년이 마침내 외쳤다.
“아버님의 원수야!”
거의 발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순간 윤이정의 움직임이 딱딱하게 굳었다.
“흑흑, 어떻게 나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가…….”
윤이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연극을 계속하는가 싶었으나 어느새 고개를 든 그의 입에는 섬뜩한 미소가, 두 눈에는 흉포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더 이상의 시시껄렁한 연극은 필요없다는 판단이 든 모양이었다.
“아…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죠. 가문의 비전절기가 시전되면 그에 당한 상대가 어찌 되는지를요! 그때 드러난 오른 팔뚝의 상처, 그것은 분명 용린폭의 그것이었
습니다.”
“흐흐흐, 애비를 닮지 않아 몇 배나 똑똑한 녀석이구나. 그 재능을 오늘 이 자리에서 꺾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이 숙부도 마음이 아프구나.”
“흥, 여긴 중양표국의 한복판이라구요. 제가 소리치면…….”
“저런저런! 계집애 같은 말을 하는구나. 차라리 ‘어머머, 다가오면 소리치겠어요’라고 하지 그러느냐?”
그의 말에는 비웃음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걸 어쩌지? 이 방 주위에는 내가 쳐놓은 차음막(遮幕) 때문에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는 것을?”
“그, 그럴 수가…….”
소년의 얼굴에 창백한 공포가 떠올랐다.
“으흐흐흐, 이제야 포기할 생각이 들었느냐? 새로운 하늘을 위해 죽어줘야겠다. 하하하, 열쇠는 이제 우리의 것이다!”
두 남매의 아버지를 죽인 바로 그 칼날이 허공중에서 번뜩였다.
“으아아아악!”
유경영은 여동생을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두 남매의 목숨이 풍전등화(風燈)인 그때, ‘살랑’ 또 다른 바람 하나가 불어닥쳤다.
쾅!
굉음과 함께 방문이 산산조각나며 어떤 거대한 물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본 이시건이 깜짝 놀라 외쳤다.
“뭐, 뭐지?”
그것은 너무 크고, 너무 빨랐다. 나무 위에서 윤이정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이시건이 깜짝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도 고수인 지라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날아오는 물체의 위력을 반감시키며 그것을 받아냈다.
“큭!”
생각 이상으로 물체는 무거웠다.
부웅-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이, 이런!”
이시건은 이를 악물며 허공중에서 신형을 틀었다. 이대로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가는 자칫 치명상을 입을 위험이 있었다. 그는 몸을 두어 번 뒤집은 다음에야 간신히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헉!”
자신이 받아 든 물체의 정체를 확인한 이시건은 깜짝 놀랐다.
“이정…….?”
그것은 바로 방금 전 의기양양한 얼굴로 저 방 안에 들어갔던 윤이정의 몸뚱이였다. 그의 앞가슴에는 다섯 줄기의 기다란 상처가 밭고랑처럼 파여 있었고, 그곳으 로부터 뭉클뭉클 피가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대체…….”
그러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무슨 일이냐? 이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중환자인 윤이정을 세차게 흔들며 이시건이 물었다.
“쿨럭, 쿨럭! 도… 도…….”
““도’가 뭘 어쨌다는 거냐?”
이시건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도, 도망.. 태, 태양이…….”
‘도망?’
갑자기 웬 도망이란 말인가?
흠칫!
등 뒤에서 한겨울의 얼음처럼 서늘한 기운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뭐, 뭐지? 이 한기는??
이시건은 신경을 쭈뼛 세우며 조심스레 고개를 돌렸다.
번쩍!
방금 전 윤이정이 목격했던 것과 똑같은 두 개의 황금빛 태양을 그 역시도 목격하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그의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파바바바밧!
***
빠른 속도로 풀잎을 박차며 그들은 달렸다. 초록 풀잎에 매달린 밤이슬들이 무수한 방울이 되어 튀어 올랐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멀리 더욱 빠르게 도약 했다.
“지, 진 소저!”
진소령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표국이 위험해요.”
아미신녀 진소령과 낙일검 유은성은 중양표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부디 내가 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기를..
* * *
콰쾅!
천둥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 나무가 백무후의 일격에 박살났다. 이시건은 나무를 방패로 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의 왼쪽 얼굴 대부분도 아름드리 나무와 함께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크아아아아악!”
피가 튀었다. 뼈까지 닿는 큰 상처였다. 다섯 개의 발톱은 가차없었고, 그중 세 개의 상처가 가장 컸다.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내, 내 얼굴이… 내 잘생긴 얼굴이…….”
얼빠진 목소리로 이시건이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생명보단 그쪽이 더 우선인 모양이었다.
“도망쳐야 해!’
아픔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지배하고 있었다.
이시건이 자신의 일격을 피한 게 의외였는지 백무후가 다시 발톱을 치켜들었다.
“에잇!”
다급해진 이시건은 아직도 멍하니 안고 있던 윤이정을 냅다 던졌다.
퍽!
웬 파리가 날아오냐는 듯 백무후는 앞발을 가볍게 휘둘러 윤이정을 쳐냈다.
“꾸웨에에에에엑!”
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윤이정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이때다!”
잠깐 틈을 보인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미친 듯이 몸을 날렸다.
어쭈!
분명 백무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자신 앞에서 도망가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생각한 이 유능한 사냥꾼은 도망가는 사냥감을 잡기 위해 몸을 날 렸다.
이시건과 백무후의 차이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시, 십삼혈! 막아라!”
왼쪽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이시건이 외쳤다.
“대체 뭘?”
그러던 십일혈과 십이혈과 십삼혈의 눈이 금세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뭐지?”
그들도 자신의 눈을 한번 비벼보고 싶었다.
“뭘 꾸물거리는 게냐?”
이시건이 멀뚱히 서 있던 십이혈을 쾌속한 금나수법으로 붙잡더니 냅다 백무후를 향해 던졌다.
“으헉!”
방심하고 있던 십이혈은 기겁했다.
이건 또 뭐야?
꾸직!
십이혈은 단 일격에 납짝쿵 신세가 되었다.
“십이제!”
“십이형!”
형제의 죽음을 본 십일혈과 십삼혈이 분노하며 소리쳤다.
“네놈들도 가서 막아!”
이시건은 십일혈과 십삼혈마저 백무후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 해도 그의 무공은 십삼혈보다 위였다. “어어어…….”
그래도 이들은 그나마 십이혈보다 조금 형편이 나았다. 적어도 마지막 최후의 몸부림은 칠 수 있었기에.
“에잇!”
“한낱 미물이!”
아마 영물을 잘못 말한 것이리라.
“죽어라! 똥개!”
십일혈과 십삼혈이 동시에 허공중에서 혈혈십삼식(血血十三式)의 살초를 휘둘렀다.
까강!
“허걱!”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무후는 검기가 실린 그들의 살초를 발톱으로 가뿐하게 받아냈던 것이다. 절정고수의 공수입백인(空手入白刃)도 이보다는 못할 것 같았다. 무쇠도 자르는 그들 의 검초였지만, 백무후의 발톱은 자르지 못했다.
크르르르르!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면 아마도 감히 똥개라고 했겠다……’쯤 되겠다. 똥개라니! 이 우아한 숙녀 분께 터무니없는 모욕이었다. 숙녀를 모욕한 죄는 무거웠다. 챙강!
그녀가 발톱을 오므리자 그 안에 끼어 있던 두 자루의 칼이 그대로 동강이 나 부러졌다.
퍽! 퍽!
뭔가 깨지는 소리와 처참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숙녀를 모독한 죄로 그들은 앞의 형제들만큼 편안하게 죽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시건 하나뿐이었다.
십일혈과 십삼혈의 발악이 너무 순식간에 끝나 버리는 바람에 이시건은 미처 도망갈 시간을 벌지 못했다.
“병신 같은 놈들! 시간 벌기용도 안 되나!”
이시건의 입에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그는 다시금 백무후를 마주 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황금빛 태양이 어둠 속에서 호박색 빛을 발했다.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죽는다!”
한낱 미물로 취급하기에는 그 존재감이 너무나 컸다. 오히려 이쪽이 무시당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절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비로소 공포란 것이 무엇인지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크어어어어어엉!
엄청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살아 있는 생물의 절대적 복종을 강요하는 포효의 위엄에 이시건은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이제 끝장이다!”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하고 말았다.
쉬익!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빡!
어디선가 날아온 목침은 정확히 백무후의 콧잔등에 명중했다. 깜짝 놀란 백무후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꾸허어엉!!
구멍 뚫린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그 속에서 버럭 호통이 터져 나왔다.
“시끄럽다! 잠 좀 자자! 잠 좀!”
범인은 바로 노사부였다.
깨갱! 끼잉~
덕분에 사람들은 전설의 백무후가 울상 짓고 침울해하는 굉장히 특이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풀렸다!’
마치 주박에 걸린 듯 굳어 있던 이시건의 몸이 움직였다.
“이때다!”
이시건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지금 그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도망가자!’
필사적으로 줄행랑치는 그의 뇌리에 이미 부하들은 안중 어디에도 없었다.
‘도, 도망가야 해! 어서 빨리!’
한시라도 이 악몽 같은 곳에서 빠져나가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한 길은 오직 그 길뿐이었다. 이미 자존심과 오기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긁적긁적!
꾸우우웅!
코가 아파서 앞발로 긁느라 바쁜 백무후는 자기 일에 바빠 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덕분에 이시건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크허어어엉!
백무후가 울부짖었다. 제왕의 울음소리이자 진정한 승리자의 포효였다.
그날 남창의 모든 주민들이 이 포효를 듣고 전율에 떨었다. 놀란 달이 떨어지고 새벽이 밝아왔다.
앞으로 전설이 될 새벽이었다.
이 일로 인해 이후 중양표국의 이름은 사해만방으로 퍼져 갔고 단숨에 신화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계약이 쏟아져 들어온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중원표국은 중양표국의 급속한 성장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크허어어어엉!
포효 소리는 밤을 진동시키며 낮을 깨우고 전 남창 전체에 울려 퍼졌다. 천무학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미파 출신의 제자들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서로의 몸을 꼭 껴안거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 소리가 가장 미약하게 들린 곳은 아무래도 지하 감옥 쪽이었다. 지상과 같을 수는 없었다. 때문에 희미한 잔흔만이 조금 전달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비류연은 자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 방금 그게 무슨 소리였지?”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어디선가 많이 들은 듯한 익숙한 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 같은데……. 그러나 그것은 지금 사천 어느 곳 에 사는 놈이라 이런 도시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환청인가? 설마 그럴 리가……..”
저번의 악몽 건도 그렇고 이번의 환청 건도 그렇고 요즘 왠지 자신답지 않은 일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었다.
“뭔가의 전조인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수면 부족일까……..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별일 아니면 좋겠지만…….”
민감하게 발달된 예감이 자꾸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자자.”
비류연은 다시 바닥에 몸을 뉘었다. 형편없는 잠자리였지만 잠을 자는 데 있어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방해자를 용서치 않는다는 것이 그가 사부로부터 배 운 법도였다. 피로는 회복할 수 있을 때 회복하는 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에 유리했다.
지금은 고민해 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둘러 중양표국 남창지국에 도착한 진소령과 유은성은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표국 전체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긴 했지만 싸움의 기척은 전혀 느껴지 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정문을 지키는 표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긴장된 표정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으로 들어간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어린 두 남매가 서로를 꼭 껴안고 있는 광경이었다.
“너희들…….”
진소령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해진 여아가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앙! 아줌마!”
일곱 살배기 선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와 진소령의 품에 와락 안겼다.
‘아, 아줌마…….?’
곁에서 그 호칭을 들은 유은성은 정신적 충격으로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만큼 그 호칭은 그의 귀에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그래그래! 울지 말거라, 선아야. ‘아줌마’가 왔으니 이제 안심해도 된단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마지막 질문은 유경영을 향한 것이었다.
“진 여협, 그러니깐 그게…….”
아직 공포가 가시지 않았는지 몸을 떨면서 유경영은 자신이 목격했던 바를 하나씩 이야기해 나갔다. 소년에게서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진소령은 아연실색하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 백무후가…….”
소년의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이야기군요, 진 소저!”
유은성이 경탄 반 의심 반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만큼 신비로운 이야기이기도 하죠. 과연 아미산의 주인이라 불릴 만한 신위군요. 우리 인간은 좀 더 자연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겠어요.” 한때 아미파에서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 누군지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제자들을 동원해서 백무후와 그 무리들을 토벌하자는 의견이 나왔던 적이 있다는 것을 그녀 는 잘 알고 있었다. ‘산을 빌려 쓰는 임대인 처지에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행위며 그것은 반드시 자연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 다’라는 한 원로의 강력한 주장에 다행히 그 의견이 기각되었지만, 만일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그 결과의 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휴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표국 사람들이 그 우렁찬 포효 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났을 때는 모든 일이 끝난 후였어요. 그리고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죠. 하얀 뇌광이 한 번 번쩍였다가 사라진 것 같았어요.”
날아온 목침에 쫄아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진실을 말해놓고 거짓말쟁이 취급당하는 것은 사양이었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해도 어린애의 말이라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어른들의 습성을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꿰고 있었다.
“너희들이 고생이 많았구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이렇게 마음 써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소년의 어른스런 말에 진소령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현 청룡은장주답게 늠름하고 어른스럽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며 유경영이 대답했다. 그런 면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흠, 그런데 적의 수괴인 듯 보이는 자를 놓친 게 아쉬울 따름이군요.”
“저도 설마 중원표국의 대표두이자 금강십이벽의 한 사람이 그런 파렴치한일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진 소저.”
이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좋다, 내가 너희들을 내일 철권 선생님께 데려가 주마.”
진소령이 장담하며 말했다.
“저기… 철권 선생님이 누구시죠?”
처음 듣는 별호에 유경영이 되물었다.
“누구긴 누구겠니? 천무학관의 현 관주이신 마진가, 마 대협이지. 그분이 전에 내 은사님이셨단다.”
“정말입니까, 진 여협? 드디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드디어 꿈에도 염원하던 천무학관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유경영은 날 듯이 기뻤다.
“물론이지.”
그 모습을 보고는 진소령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노사부님은 어디 계시느냐?”
진소령의 물음에 유경영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그게 저… 아직 주무세요.”
그 말에 유은성이 펄쩍 뛰며 반문했다.
“뭐라고? 표국이 발칵 뒤집혔는데도 아직도 팔자 좋게 주무신단 말이냐? 그분도 참 어째서 이런 때에!”
유은성은 노사부의 그런 태도를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그냥 주무시게 놔두시죠?”
진소령이 옹호하고 나서자 유은성은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중년의 질투는 젊은이들보다 수배는 더 무서운 법!
“아닙니다. 제가 지금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노사부의 숙소를 향해 보무도 당당히 걸어갔다.
“저, 저기요…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 대협.”
소년 유경영의 말에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경영아?”
고개를 살짝 돌린 그의 얼굴은 의아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저… 다치실까 봐서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유경영이 대답했다.
“하하하, 겨우 자는 사람 깨우러 가는데 다칠 일이 무에 있겠느냐? 걱정 말거라.”
유은성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저… 위험한데…….”
거의 들리지도 않는 체념한 목소리로 소년은 중얼거렸다. 역시 어른은 아이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리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똑똑!
“안에 계십니까, 노사부님?”
“……”
똑똑!
덜컹덜컹!
“계십니까? 점창의 유은성입니다. 일어나 주십시오. 밖에 일이 생겨서 그럽니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기척이 없자 유은성은 하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로 했다. 노사부가 머무는 숙소는 유씨 남매의 거처랑 같은 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문고리를 잡는 그의 모습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끼이이익!
경첩이 내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조금 열렸다.
“실례…….”
뻑!
느닷없이 울려 퍼진 ‘뻑’ 소리에 어린 남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속이 꽉 찬 소리… 기억에 있는 소리였다.
“…..”
정적이 찾아왔다. 소년이 용기를 내서 질끈 감았던 눈을 빼꼼 들어올렸다. 그러자 단단한 박달나무 목침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서서히 뒤로 기울어져 가는 유은 성의 모습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어어어어어…….?
쿠당! 탕!
점창제일검이라는 명호가 무색하게 유은성은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진소령 역시 이 돌발적인 황당 사태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길래 다치신다고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진심이었는데도 그 진심 어린 경고를 농담으로 치부한 것은 소년이 아니라 어른 쪽이었다.
쾅!
열렸던 문이 저절로 다시 닫혔다.
아무도 다시는 그 문을 열어보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