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류연 對 공손일취!
-운명이 널 끌고 다니게 놔두지 마라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허름하고 지저분한 감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백의였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비류연이 눈을 뜨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깐 이름이…….”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이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그제야 사내는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백무영일세.”
“아! 그 팔가회의!”
비류연이 손뼉을 짝 쳤다.
“…구정회일세!”
애써 화를 억누르며 백무영이 대답했다.
“그 구정회의 문상님께서는 생각보다 조금 늦었네요.”
“늦었다고? 난 자네랑 만날 약속,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예상대로라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죠.”
“그럼 자넨 내가 뭘 하러 왔는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러자 비류연은 ‘자’ 하며 수갑이 채워진 양팔을 내밀었다.
“이건 또 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백무영이 반문했다.
“날 풀어주러 왔잖아요?”
당연한 걸 뭐 하러 묻느냐는 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만일 내가 자네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면 어쩔 텐가?”
백무영이 반문했다.
“풋! 그거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요?”
그런 허접한 협박을 협박이랍시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가상하다는 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아닐세, 그냥 단순한 심술일세. 두려움이라곤 전혀 없군. 자넨 두렵지도 않나?”
비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잖아요.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하죠?”
“그거야…….”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잘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 자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자신이 만들어놓은 운명이라면야, 자신이 장차 어떻게 될지는 뻔히 아는 게 당연하죠. 예를 들어 난 오늘 풀려날 거예요. 뭣하면 내기할래요?”
비류연의 말에는 한 점 의심도 서려 있지 않았다.
“아니, 내긴 사양하겠네.”
백무영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도대체 저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의 원천은 어디란 말인가?”
평소 주변에서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그 모습에 백무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는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군, 안 그런가?”
“물론이죠. 그 당연한 걸 이제야 아셨어요? 소문보다 머리가 나쁜 모양이네요.”
“마치 이 모든 일이 자네의 계획하에 일어났다는 투로구만.”
퉁명스런 어투로 백무영이 말했다. 그가 지금까지 만난 많은 유형의 사람 중에서도 비류연 같은 인종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생소함이 그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 다.
“당연하죠. 난 내 운명의 주인이니까. 운명에 끌려 다니는 녀석들에게 주어질 건 패배뿐이에요.”
비류연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아, 그거야 사업상 비밀이죠.”
비류연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러신가?”
백무영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네 말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깝군.”
철컹!
맞물린 열쇠가 돌아갔다.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수갑이 땅에 떨어졌다.
“아! 이제야 좀 홀가분하네.”
비류연이 기지개를 활짝 켜며 말했다.
“따라오게.”
“어디로 가는 거죠?”
“안다며?”
“확인차 물어보는 거죠.”
““관주 집무실! 어르신들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백무영이 퉁명스런 어조로 대답했다.
“어르신들? 하나가 아닌 건가?”
“따라와 보면 아네.”
똑똑!
“들어오게!”
“관주님, 분부하신 대로 데리고 왔습니다.”
집무실에는 도합 다섯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여기 계실 줄은 몰랐네요? 잘 지내셨어요?”
진소령과는 안면이 있었기에 비류연이 먼저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진소령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쪽은 처음 보는 분 같군요?”
비류연이 유은성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도 익히 들어봤겠지? 이분은 점창파의 검객으로 점창제일검이라 불리는 낙일검 유은성, 유 대협일세.”
“아하! 바로 그… 들어본 적이 없네요.”
비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심기 불편한 유은성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구석에 서 있던 남궁상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남궁상이야 그러든 말든, 비류연은 다른 쪽으로 시선 을 옮겼다.
장우양은 마진가가 붙여준 호위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간 이후였다.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은 바로 검존 공손일취였다.
“어, 할아버지도 오랜만에 뵙네요.”
역시 비류연은 겁이라는 것이 없어서 그런지 검존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크으으! 저놈이……!’
공손일취는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꼴 보기 싫다는 티가 역력했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건성이었다. 비류연도 그런 상대에게 열렬히 인사를 더
안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대충 두어 번 흔든 다음 그만두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마진가가 입을 열었다.
“음, 수고했네. 무영이, 자네는 그만 나가봐도 좋네.”
“그건…….”
백무영이 말끝을 흐렸다.
“왜 그러나? 무슨 남은 용건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백무영 자신도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의 그런 바람은 말도 꺼내보기 전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잘 가요! 안녀엉!”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비류연의 미소가 자신을 꼴좋다고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용납할 수 없네!”
검존 공손일취의 대답은 단호했다.
“정말 안 돼요?”
비류연이 반문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후회하실 텐데요?”
왜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비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위협적이라기보다 딱하다는 듯한 한숨이었다.
“자네, 지금 날 위협하는 건가? 겨우 시험관을 못하게 했다고?”
그런 물의를 일으킨 놈은 승천무제 시험 감독관으로 임명할 순 없다는 게 공손일취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그럴 리가요! 동정하는 거죠.”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시험 감독관에서 하차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에 따른 부수입이 없어지는 것은 중대한 문제였다.
“뭐, 뭐라고! 이, 이놈이……!”
잘못하다가는 화병으로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저기 개인적으로 저 할아버지랑 대화 좀 나눠도 될까요?”
비류연이 마진가에게 물었다.
“하, 할아버지?!”
검존 공손일취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연이 물었다.
“상관없네.”
마진가가 대답했다. 감사의 답례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비류연이 검존을 향해 다가갔다. 비류연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긴 앞머리가 찰랑찰랑 다 가오면 다가올수록 공손일취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
“검존께서 왜 저러시죠, 유 대협?”
“글쎄요? 보아하니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군요.”
“검존 정도 되는 분이 일개 학생에게 저만한 농도의 감정을 내보인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요.”
검존이 겨우 학생 하나를 꺼려하다니 그것 자체가 매우 특이하고 특수한 경우였다.
“방 밖으로 나가긴 그렇고, 저쪽 구석에 가서 얘기 좀 하실까요?”
남이 들을까 무섭다는 듯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비류연이 속삭였다.
“노부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노부는 거리낄 게 없으니 여기서 말하게. 큰 소리로 말해도 상관없네.”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돌린 검존이 퉁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서요? 진짜로? 정말 괜찮겠어요?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군.”
비류연이 검존의 귀에다 대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여운 손자 분에 관한 건데도요?”
공손일취가 비류연을 향해 희번뜩한 두 눈을 부라렸다. 비류연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아, 이제야 날 바라보시는군요.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외면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아무리 나잇살 잡수신 높은 분이라 해도, 아니, 그런 분일수록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비류연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독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검존은 지금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쓸 여가가 없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절휘를….
그러잖아도 진즉 왔어야 할 기별이 단 하나도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분명 남창에 도착한 지 시일이 꽤 지났을 텐데도 말이다. 직접 만나러 오지는 않아도 안부 편지는 잊지 않고 보낼 아이였다.
‘서, 설마 이 흉악무도한 싸가지가 그 아이를 납치…….?
노인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만일 그 아이의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했다가는…… 그랬다가는 오늘 네놈은 검존의 검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노인의 망상은 이미 위험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었다. 벌써부터 살려달라는 손자의 처절한 비명성이 그의 귀에 울리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느닷없이 솟구 쳐 나온 검존의 살기에 방 안에 있던 모두가 흠칫 놀랐다.
“도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길래 저러지?”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이야기로 검존의 분노를 돋운 것일까? 비난의 화살이 유일무이한 용의자 비류연을 향해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비류연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직 본론은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이거야 원…….?
아무리 봐도 지금의 검존은 ‘문답무용(問答無用)’의 상태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방치한다 해도 망상의 폭주가 멈출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비류연 자신에게도 난 처한 일이었다.
이때 이미 공손일취는 머릿속으로 처참하게 죽어간 손자의 원혼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굳게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절휘야, 저 하늘에서 지켜보렴. 이 할애비가 네 원수를 어떻게 갚는지를!”
별이 된 손자를 향해 할아버지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저기요,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는 몰라도…….?”
비류연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받아라! 손자의 원수!”
그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였다.
쇄―액!
처절한 분노가 뒤섞인 대갈일성과 함께 검존의 검이 눈부신 속도로 비류연의 몸을 갈랐다.
“헉!”
이 느닷없는 사태에 사람들이 경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검존이 누구인가. 검성 모용정천과 ‘거의’나란히 동급으로 취급받는 검도의 고수였다. 그의 검에서 뿜어지 는 ‘지존검법’의 무궁한 변화에 적수란 거의 없었다. 본인은 그 거의’라는 수식어를 엄청 싫어했지만 말이다.
슈와!
맹주 집무실의 한쪽 벽에 사선으로 길게 금이 그어졌다. 검기가 벽 전체를 베고 지나간 것이다.
“주, 죽었나?”
유은성으로서는 그게 가장 논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러나…….
“이야! 이 의자 좋은데요? 푹신푹신하고. 자단목에 물소 가죽이면 값도 꽤 나가겠는걸요?”
긴장감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린 쪽은 맹주석이었다. 어느새 비류연은 맹주 전용 의자가 자기 것인 양 그곳에 앉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으잉? 피, 피했네?”
“지, 진짜네요?”
“어, 어떻게…….”
검존 자신도 믿을 수 없는 모양인지 눈을 끔뻑거렸다.
부스스.
잘려 나간 비류연의 머리카락 몇 올이 하늘거리며 떨어졌다.
‘쳇, 완전히는 못 피했군.’
비류연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강호의 누군가가 지금의 그 불평을 들었다면 경악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머리카락 몇 올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명백한 살의가 깃든 검존의 일섬을 그는 받아낸 것이다.
‘질문 있습니다’라는 기세로 비류연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이유나 알고 생명의 위기에 처했으면 하거든요?”
“시침 뗄 셈이냐! 그 아이를 네가… 네가…….”
감정이 복받친 검존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깐 그 아이가 누군데요?”
비류연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모른단 말이냐? 네 손으로 직접 납치해서 네 손으로 이런저런 끔찍한 고문들을 한 다음, 이런저런 끔찍한 방법을 다 동원해 죽인 그 아이, 내 손자 공손절휘를 모 른단 말이냐!”
공손일취의 피를 토하는 듯한 말에 중인들은 경악했다.
‘아무리 간이 부었기로서니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것은 죽음을 자청하는 것과 같았다. 근데 뭔가 조금 석연치가 않았다.
‘그런데 ‘이런저런’ 게 뭐지?’
비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
“난 아직 한마디도 안 했다고요. 게다가 ‘이런저런 게 뭔지 두루뭉술하기만 하고 구체성은 하나도 없잖아요. 더군다나 난 그동안 구금되어 있었는데 무슨 수로 그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이리저리 저지른단 말입니까?”
비류연이 조리있게 요목조목 따지며 항의했다.
‘그것도 그렇네.’
설득력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집무실은 복수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죽긴 누가 죽었단 말입니까?”
“시끄럽다! 네놈 말은 아무것도 듣지 않겠다!”
‘꽉 막힌 노인네 같으니라고.”
아무래도 자신이 더 이상 뭘 해도 이 정신적 귀머거리 노인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 같았다. 자신의 말은 노인의 망상 속에서 제멋대로 비틀리고 왜곡된 채 재해석 되고 있는 듯했다. 이럴 때는 침묵조차도 그 안에서 왜곡되고 만다. 대화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상대로 입을 놀리는 수고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비류연은 한곳을 향해 손짓했다.
휙휙, 좌우를 둘러본 남궁상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가리키며 입을 벙긋했다.
“네? 저요??
꿈쩍거리는 눈과 벙긋거리는 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비류연이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좌우를 한 번씩 두리번거린 후 다시 남궁상을 향해 고개 를 조금 쑥 내밀었다.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그런 뜻이었다.
남궁상의 어깨가 바람이 빠지기라도 한 듯 축 늘어졌다.
“에효!?
한숨의 의미였다.
툭툭!
옆에 있던 유은성이 그의 등을 두 번 두들겼다.
“아무래도 자네보고 오라는 것 같은데? 가보지 그러나?”
그런 뜻이었다.
“에효~ 가기 싫은데~’
다시 한 번 남궁상은 고개를 푹 떨궜다.
저런 무시무시한 살기가 넘치는 곳에 가고 싶어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비류연이 다시 말없이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조금 있다가 두 개째가 들 렸다.
‘하나, 둘, 셋, 넷…….’
혹은,
‘한 대 맞고 올래, 두 대 맞고 올래.’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가긴 가야 했다. 남궁상은 떼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야만 했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무사히 다녀오게’, ‘행운을 비네’ 그런 의미였다.
‘거봐! 말이 없어도 대화가 가능한데 왜 이 할아버지는 말이 있어도 대화가 안 되는 거지?”
비류연으로서는 그 점이 도저히 불가해했다.
“부르셨습니까, 대사형?”
비류연의 곁에 선 남궁상이 전음으로 물었다.
“그래, 불렀다. 왜 떫냐?”
소태 씹은 듯한 남궁상의 표정을 보며 비류연이 전음으로 대꾸했다.
“긴요! 이런 스산한 살기를 접하면 누구나 이런 표정이 되게 마련입니다.”
아직도 검존은 검을 든 채 스산한 살기를 뿌리는 중이었고, 그 살기가 비록 비류연을 향하고 있다 하나 남궁상 역시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살기의 찌꺼기가 이 정도라면 도대체 대사형을 향한 살기의 농도는?”
고수면 고수일수록 살기를 일점에 집중하는 ‘기()’가 뛰어난 법이다. 그러한데 상대가 어디 보통 고수인가! 별호부터가 검존이라 불리는 최절정의 고수였다. 겨 우 살기의 잔재, 혹은 ‘여파’ 정도에도 몸이 저절로 위축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비류연을 향한 살기는 얼마나 강력할까?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저 검존하고도 저렇게 맞먹다니…….’
비류연은 검존의 무력시위 앞에서도 조금의 꿀림도 없었다.
‘하긴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저 정도 일로 주눅 들겠는가.’
새삼 비류연의 저 막무가내라 해야 할지 초지일관이라 해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태도가 대단해 보이는 남궁상이었다.
“네가 사정을 좀 저 귀머거리 할아버지한테 말해줘라. 내 말은 들으려고 시도조차 않고, 말해봤자 믿지도 않을 것 같다. 그러니 네가 대신 내 입이 되어라.”
“알겠습니다. 근데요…….”
“왜?”
“여기, 움직이기가 진짜 힘드네요.”
등을 짓누르는 살기는 만근의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뭘 배웠냐? 또 특별 수련 목록 짜줄까?”
사제를 생각하는 대사형의 상냥한 말에 남궁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닙니다. 갈게요. 가고말고요.”
어느새 발걸음이 떨어지고 있는 남궁상이었다. 검존에 대한 공포보다 특별 수련에 대한 공포가 더했던 모양이다.
“진작 그럴 것이지… 굼뜨기는.”
자신을 향한 살기를 교묘히 흘려보내며 비류연이 중얼거렸다.
곧이어 남궁상이 집무실 밖으로 나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 인물을 본 검존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절휘야! 네가 어떻게…….”
“하, 할아버님.
공손절휘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휴~ 간신히 무마시켰군.”
마진가가 진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검존께서 납득해 주셔서요.”
진소령이 말했다.
“글쎄, 과연 납득하셨는지는 의문이지만… 납득하지 않을 수도 없었겠지. 그분도 진퇴양난이셨을 걸세.”
“하마터면 가문의 굴레가 손자의 인생을 망칠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실을 그분도 그만 자각하셨으면 좋으련만…….”
“자네 말이 맞네. 그런 비정상적인 승부욕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지. 하지만…….”
그 뒷말은 진소령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겠지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고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 자신이 틀렸다는 것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장님귀머거리도 아닌데 귀를 닫고 눈을 가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진소령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분’은 정말 대단했던 것 같다.
“음, 그건 그렇고 범인의 정체는 밝혀졌지만 포획에는 실패했으니 곤란하게 되었군.”
마진가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어조로 아쉬워했다.
“아직도 곤란한 일이 남아 있습니까, 관주님?”
유은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황이 매우 애매하게 되었어. 자네라면 이해가 가겠지?”
마진가가 비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대충은요.”
비류연이 대답했다.
“끙, 그것참 곤란하게 됐단 말일세. 자네 누명을 완전히 벗기는 데 실패해 버렸으니 말이야.”
풀려나기 위한 조건은 범인을 생포해 오는 것이었는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골칫덩이죠?”
“사실 그래서 우리도 무척 곤란하게 됐단 말일세.”
“증인만으론 부족하다 이건가요?”
“바로 그걸세. 상대는 사자로 온 사람이야. 이쪽 증인 몇 명만으로 체포할 순 없지. 그랬다간 바로 외교 문제가 될 걸세. 그렇잖아도 마천각하고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데 거리를 더 벌릴 수는 없네.”
마진가에게도 마진가로서의 고충이 있었다.
“그 사자란 사람은 지금 어딨죠?”
“오늘 내막이라도 은근슬쩍 캐볼까 하고 호출해 봤는데, 갑자기 지병이 발작해서 거동을 못한다는 회신이 돌아왔다네.”
“꾀병이군요.”
비류연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겠나? 하지만 손쓸 도리가 없네.”
“참으로 안타깝군요.”
진퇴양난의 사태에 유은성은 그만 탄식을 터뜨렸다.
“그러게 말일세. 청룡은장의 멸문지화에 관여한 것으로 확인된 중원표국의 금강십이벽 풍마도 윤이정이 그의 수하였던 것을 보면 그자를 문책하면 더 많은 정보 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진가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사방을 얼어붙게 만드는 엄청난 살기가 그의 말을 멈추게 했던 것이다.
파르르르르!
진소령과 유은성의 검이 마치 주인에게 경고를 발하듯 바르르 떨렸다. 이 지독한 살기의 진원지는 바로 비류연이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지옥의 최하층에서나 울려 퍼질 듯한 그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동안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노장 마진가조차 흠칫하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농후 한 살기였다.
“음, 풍마도 윤이정이 그자의 수하였단 얘기 말인가?”
“아니, 그전에 말입니다.”
“그럼 청룡은장의 멸문지화를…….?
살기가 더욱 짙어지자 마치 눈에 잡힐 듯했다.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겠군.”
왜 저 친구가 저리도 분노하지? 마진가는 순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말을 붙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놈들이 감히… 나의 복리(複利) 이자를……..
항상 능글능글하고 평정심이 지나치단 소릴 듣던 비류연의 입에서 증오에 찬 울림이 새어 나왔다.
“서, 설마 자네 그곳에다 돈을 예치시켜 놨었나?”
비류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설마 전 재산을?”
비류연은 침묵으로 일관한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설마요. 위험 분산을 위한 자금 분할은 상식이죠, 상식! 세 곳에다 나눠서 넣어놓긴 했지만.
“그건 그나마 다행이로군.”
도대체 얼마나 들어 있었길래 저렇게 분노한단 말인가? 마진가로서는 그 액수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얼말 넣어놨길래 그러나?”
“액수도 액수지만 그건 차후 문제죠.”
“그럼?”
“망할! 그곳 이자로 노후 연금이 나가고 있었는데…….”
“연금? 누구한테 말인가?”
“…..”
그 질문에 비류연은 그만 입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내 마법 같은 복리 수익도 함께 날아가 버리고 말았죠.”
“복리?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복리라 함은 원금에 이자를 붙인 금액을 다시 원금으로 하여 이자가 붙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당연히 중요하죠. 청룡은장의 예금이율은 연 일 할 팔 푼! 백 냥을 예금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 년 뒤엔 백십팔 냥, 이 년 뒤엔 백삼십구 냥, 삼 년 뒤엔 백육십사 냥, 사 년 뒤엔 백구십삼 냥, 거기서 두 달만 더하면 이백 냥을 돌파! 즉, 계속 묻어둘 경우 사 년마다 제 원금은 두 배씩 늘어나게 되죠.”
“그, 그런 건가?”
“그런 겁니다.”
“자네가 그렇게 분노하는 이유도 알 만하군. 자네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얻게 되리라 예정되어 있던 미래 가치까지 손실을 입게 된 것이니까 말일세.”
“바로 그렇습니다. 이해가 빠르시네요. 보통 강호인들은 머리에 근육만 차 있어 이런 쪽으론 거의 문외한인데 말이죠.”
“한 조직을 이끌다 보면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제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죠. 눈덩이처럼 불어나야 될 이익 대신에 말이죠!”
그게 그의 분노의 핵심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번에 중양표국이 청룡은장의 재건을 위해 발벗고 나선다고 했으니 말일세. 우리 천무학관도 진 빚을 생각해서 그 재건을 최선을 다해 도 울 작정이네.”
비류연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중양표국이 말입니까? 아직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만?”
“최근에 결정된 일이라네. 며칠 되지 않았지. 하옥 중이던 자네가 아무 얘기도 못 들었다 해도 큰 흉은 아니지.”
“그렇군요. 중양표국이…….”
비류연은 잠시 생각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아직 정확한 배후는 모르는 거군요?”
“그렇네. 확신은 있지만 증거가 없어서 말일세.”
마진가가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크, 그때 그 녀석을 붙잡기만 했어도……..
남궁상이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자네의 실수가 아니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내 책임이지. 내 제자 아이의 미숙함이 초래한 불행한 결과였으니 말일세. 난 그 아이의 사부로서 이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통감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이번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생각이네.”
“진 소저, 사실 그건 그 바보 같은 운비 녀석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유란이는 그저 말려든 것뿐이지요.”
유운비가 들었으면 억울해했을 법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군요.”
진소령의 한탄을 들은 유은성의 마음은 헤벌쭉해졌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우리’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었다.
“험험, 그럼 진 소저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표정 관리를 위해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유은성이 물었다.
“그놈의 뒤를 쫓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붙잡아 오겠습니다. 그것이 진짜 책임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그렇다는 것은 마천각으로 가신다는…….”
“그렇습니다. 단신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진소령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안 됩니다, 진 소저!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유은성이 두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오, 유 대협께서 뭐라 하셔도 전 갈 겁니다. 제자의 미숙함은 곧 그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나의 미숙함,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서도 그 미숙함을 메 워주지 못한 나는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미신녀라 불리는 진 소저라 해도 단신으로 마천각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전 쳐들어가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방문하겠다는 이야기만 했지요.”
유은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방문이 곧 싸움이 될 테니 같은 말입니다. 좋습니다. 진 소저가 가신다면 저 유은성도 그 자리에 함께하겠습니다.”
사실 평생 함께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유은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꿈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안개 속의 꿈 으로.
“굳이 유 대협까지 그러실 필요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그 일에서 운비 녀석의 잘못도 크니까요. 제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책임을 함께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둘이 가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네.”
마진가가 지적했다.
“마천각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지. 그 안에 어떤 독계가 숨겨져 있을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네. 천무학관의 관주인 나 자신조차도 실체를 파악하긴커녕 피상적인 정보들을 취합하는 것이 고작이었네. 그나마 그것도 간신히 얻어낸 자료들이었지.”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진소령과 유은성과 마진가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비류연이었다.
“무슨 묘수라도 있는가? 만일 있다면 한번 들려주게.”
유은성이 재촉했다. 비류연은 그에 말에 대꾸하는 대신 마진가 쪽을 쳐다보았다.
‘저놈이 왜 날 쳐다보지?”
처음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더니 보면 볼수록 속을 알 수 없는 놈이었다.
“관주님, 얼마 안 있으면 마천각으로 사절단이 출발하죠?”
비류연이 물었다.
“응? 그렇지. 입관 시험이 끝나면 바로일세.”
“거기에는 인솔 노사가 딸리게 되고요.”
“아이들끼리 보내기에는 많이 위험한 곳이야, 마천각은. 올해는 특히 더 그러하고.”
때문에 그의 고민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죽어도 가기 싫어하는 홍까지 거의 읍소하다시피 하여ᅳ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주장하겠지만ᅳ딸려 보내려고 까지 하고 있는 참이 아니던가.
“그게 몇 명 정도죠?”
“인솔 노사 말인가? 한 오륙 명 정도 선에서 결정될 걸세. 그 이상 딸려 보내고 싶지만 그러면 저쪽에서 싫어할 테니 그럴 순 없거든. 우리도 무사부급의 고수 열댓 명이 어슬렁거리면 신경 쓰이고 말일세.”
“다 정해졌나요?”
“아닐세. 빙검 관 노사와 염도 곽 노사에게는 이미 부탁해 두었지만 나머지는 아직 미정이라네. 이번엔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말일세.”
인선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도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마진가였다.
“그것 때문에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네. 자넨 이 눈 밑의 기미가 안 보이나?”
“글쎄요, 피부가 워낙 거무튀튀해서 별로 티도 안 나는데요?”
비류연의 솔직한 감상에 마진가는 상처받은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민감한 영역이었거나. 이럴 땐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았다.
“어쨌든 그럼 다행이군요. 바로 여기서 두 사람이나 당장 구할 수 있으니깐요.”
“그게 무슨… 아!”
그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 마진가가 손뼉을 쳤다.
“과연 그런 수가 있었군!”
마진가가 감탄했다. 그런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는데도 다른 데 신경을 쓰느라 그만 지나치고 만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런 거죠.”
비류연이 나중에 꼭 이 건에 관련된 상담비 명목과 문제 해결 명목의 조언비를 청구하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된 모양이에요.”
진소령은 이해했다.
“그, 그런가요?”
유은성은 이해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