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0권 24화 – 와글와글 모여드는 군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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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0권 24화 – 와글와글 모여드는 군중들

와글와글 모여드는 군중들

-오늘은 운명의 날!

“거참! 대사형은 나서는 건 싫어하면서 판은 크게 벌이는 걸 좋아한단 말이야.”

드넓은 비무장과 그곳으로 운집해 들어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바라보며 노학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형이 그랬잖아. 어느 큰 부자가 말했다고. 생각 안 하고 살 거면 모르지만, 어차피 생각하고 살 거면 크게 생각하고 사는 게 좋다. 마찬가지로 기왕 벌일 판이 면 크면 클수록 좋다, 라고. 안 그래?”

현운 역시 이 규모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들 스스로 이것을 해냈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래. 그 때문에 괴로운 건 우리들이지만 말야.”

“것두 그렇군.”

계획은 대사형 비류연의 머릿속에서 나왔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현 부대는 주작단 자신들이었다.

“정말 힘들었지. 지난 일주일 동안 거의 한잠도 못 잤잖아?”

““잠이라…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긴 있었군. 할 때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막상 해놓고 보니 보람이 있는데?”

이런 게 성취감이란 것일까? 그 때문인지 자꾸만 더 좋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샘솟았다. 그러다 보니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여기저기를 세심하 게 훑어보게 되는 것이었다.

“음, 여기 빈 곳 위쪽에는 크게 현수막으로 ‘비무초친’이라고 써서 붙여놓으면 어떨까?”

비무장으로 들어오는 입구 위의 공간이 현운의 눈에 딱 걸렸다. 벽면 위쪽의 텅 빈 그 공간은 무언가를 걸고 싶도록 만드는 알 수 없는 매력으로 그를 유혹하고 있 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그건 아니지. 보통 그런 건 아리땁고 싱싱한 여성이 비무를 통해 강한 남자를 찾을 때나 거는 거라구.”

당삼이 말했다.

“요즘도 그거 하는 여성들이 있나? 그거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잖아?”

“하긴 좀 무모하긴 하지. 일신의 무공이 강하다 해서 다른 인격도 훌륭하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으니까 말야. 본인의 선택이라면 존중해야겠지. 하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지. 그건 돈이나 지위만 보고 인격은 보지 않은 채 결혼하는 거랑 같은 거잖아? 능력 하나만 보는 거니까.”

“그건 그래.”

당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늘 한 여인의 결혼이 걸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비무초친이라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금영호가 한마디 했다.

“그렇긴 해도 조금 다르지. 뭣보다 사람들이 진 여협이 신랑감 구하는 거라고 착각하면 어떻게 하겠나?”

“그것도 그렇군. 그건 좀 곤란하지…….”

현운이 다시금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이제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다.

“휘이~”

현운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어떤가? 삼성무제 결승전 같은 특별한 때나 쓰는 대연무장 비무대까지 빌려낸 나의 수완이! 굉장하지 않나?”

금영호가 뻐기듯 말했다.

“좋은 수완일세! 수고했어.”

“어떻게 빌렸는지 듣고 싶지 않나?”

“나중에!”

현운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참, 그 삼인방은 뭐 하고 있지요?”

남궁산산이 물었다.

“아, 투명 삼인방 말이지. 저쪽에서 배당판 관리하고 있어.”

단목수수가 대답했다.

“아, 그래서 안 보였군.”

“걔네들이야 맨날 그렇지. 하긴 옆에 있어도 입 한 번 벙긋 안 하는 사람도 있긴 있지만 말야.”

화설옥이 까까머리 땡중인 일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공은 편수반장으로 꾸벅 인사만 한번 해 보였을 뿐 다시 침묵 속으로 돌아갔다.

“진 소저는?”

“아직 안 보여요. 자기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궁상이 녀석도 안 보이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 모두 안 보였다.

“하긴 지금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가로지르고 있을 테죠.”

남궁산산이 이해가 간다는 투로 한마디 했다.

“음, 궁상이 녀석에게만큼 그녀에게도 오늘은 중요한 날이긴 하지.”

“결혼이냐, 결혼하기도 전에 과부냐 둘 중 하나로군.”

금영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그 무뇌아스런 한마디가 여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봐, 뚱땡이 양반! 그게 친구로서 할 말이에요?”

“오늘 같은 날 불길하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맞아, 맞아! 똥배 나왔으면 다예요? 생각이 없어도 정도가 있지.”

“에그, 저 입 하고는.”

“그냥 막아버려욧, 영원히!”

주작단의 여자들이 일제히 발끈해서 소리쳤다. 어떻게 남자들은 저렇게 때때로 아무 생각도 없이 말을 내뱉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 그녀들의 중론이었다. 수습 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다.

“이봐, 자네. 빨리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생매장당하기 전에 말이야.”

현운이 팔꿈치로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툭툭 치며 소곤거렸다.

“우리 오늘 시체 하나 묻어야 할지도…….”

당삼이 남은 왼쪽 옆구리를 힘껏 가격하며 속닥댔다.

“그, 그게.

미, 미안하오. 내가 말을 잘못했소. 그러니 용서해 주시오. 내가 참말로 죽일 놈이요. 이 조동아리가 웬수요, 웬수!”

찰싹찰싹!

더 이상 주변의 등살을 견딜 수 없었는지 금영호가 자신의 주둥이를 때리며 사과했다.

“그럼 죽어욧!”

여인들의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인심을 쌓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쉬운 법이었다.

한편 장홍과 효룡은 객석 한 켠에 자리를 튼 채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준호도 옆에 있었다. 이런 세기의 대결을 놓친다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었 다. 그들은 친구를 ‘잘’이라고 하기엔 껄끄럽지만, 어쨌든 하나 둔 덕에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과연 아미신녀의 인기는 대단하군요. 여기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미신녀의 모습을 보러 온 것일 테죠, 장 형?”

효룡이 복작복작거리는 관객들을 바라보며 감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겠지!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남궁상, 그 친군 그저 무대 소품 정도랄까.”

진소령의 존재 때문에 이 대결에 쏠린 주위의 관심은 지대했다.

“아까, 좀 전에 애소저회의 종신회장인 비연태 회장을 만났는데 흥분해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더구만. 화가(畵家)들도 잔뜩 불러 모으고 말야. 무려 여덟 명이나 되 더군.”

“그 사람 아직도 졸업 안 했습니까?”

장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유급인 모양일세.”

“또요? 작년에도 유급이었잖습니까?”

“그랬지.”

“근데 그 많은 화가들을 다 어디다 쓴답니까?”

효룡이 반문했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신녀의 모습을 팔방에서 다각도로 잡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과연 용의주도하군요.”

비연태답다면 답다고 할 수 있었다.

“쯧, 누가 비연태 아니라고 할까 봐…….”

장홍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런데 장 형, 과연 누가 이길까요?”

“글쎄, 아무리 제약이 있다 해도 역시 아미신녀 쪽 아니겠나? 단 한 가지 초식만 쓴다고 했다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 단 하나의 초식이 바로 이기어검(以氣御劍)이 라던데?”

“이기어검요? 정말로요?”

“정말.”

“그럼 역시 아미신녀의 승리겠군요?”

효룡이 이런저런 식으로 계산을 굴려봤지만 답은 하나였다.

“왜? 설마 자네 남궁상에게 건 건 아니겠지?”

“아, 아니요. 설마 그럴 리가요. 하하하!”

그 당황하는 모습을 보곤 장홍이 불쑥 한마디 했다.

“건 모양이군.”

“어때요, 류연?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으로서는 반반 정도 되겠군요.”

“반씩이나요?”

“왜요? 아닌 것 같아요?”

“같은 여자라서가 아니라 저분의 기도는 굉장히 출중해요.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지는걸요, 한 자루 검과도 같은 기운이.”

“확실히 대단하긴 해요. 하지만 그에 대한 안배는 충분히 해놨다고 생각해요. 나머진 저 친구 하기 나름이죠. 문제는 소심함인데… 주눅이나 들지 않았으면 좋겠 군요. 그랬다간 죽도 밥도 안 될 테니 말이에요.”

“그게 과연 가능할까요?”

“두고 봐야죠.”

이제 모든 건 남궁상이 하기 나름이었다.

“대단하군.”

도성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동감일세. 이런 큰일을 학생 자치로 해내다니, 누군지 몰라도 그 수단이 대단하군.”

검성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게요. 누군지 몰라도 상당한 실력이군요.”

검후도 동의했다.

이 비무회를 주최한 이의 명단 그 어디에도 비류연의 이름은 없었다. 때문에 이들 천무삼성은 비류연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한번 걸어볼까요?”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검후가 말했다.

“그것 좋지. 한번 해보자고.”

“검후 당신은 당연히 소령이한테 걸 테고…….”

“당연하죠.”

“도성, 자넨 어디다 걸 텐가?”

“음… 고민되는군.”

“이긴 사람이 밥 사는 거죠?”

“물론이오. 아무리 대박이 나도 밥값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오…….?

검성이 뒷말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했죠?”

“아, 아무것도 아니오. 아무것도. 그, 그렇지 않나, 도성?”

“응? 아, 그, 그렇지, 그렇고말고! 하하하하!”

식은땀을 흘리며 두 사람은 극구 부인했다.

“흠, 그래요?”

딴청 피우는 두 사람을 검후가 매서운 눈으로 흘깃 쏘아보았다. 천하의 천무삼성 중 과반수 이상에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같은 삼성인 검후 한 사람뿐이었다.

“하아…….”

수많은 군중들에 둘러싸인 비무대 위에 선 남궁상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무장 한 켠에서 안목 품평에 참가하기 위해 쌈짓돈을 푸는 인간 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현재 사람이 제일 북적거리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승률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자신의 압도적인 불리!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상식인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이라…….?

“하아~”

남궁상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상식을 깬다. 정말 대사형이 좋아할 만한 구도구나…….?

현실적으로 상식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자신이 천하오검수의 일인인 진소령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점은 남궁상도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니 다들 승부에서 이기고 싶다면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진소령 쪽에 돈을 걸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돈을 걸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은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 다. 돈을 잃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의 인기는 폭락하고 그에 반비례해서 배당은 폭등한다. 그래 봤자 너무 위험이 크다. 말 그대로 도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사형 비류연이 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기존의 상식을 깨고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떤 의미에선 세상을 한 번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돈을 몽땅 자기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아무리 그것이 예외적인 일이라 해도, 예외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번 일만 봐도 그렇지…….”

원래는 이길 수 없는 상태에서 이길 수 있는, 비록 그것이 만분지 일의 확률이라 해도 마련해 놓지 않았는가. 자신이 짊어져야 할지 모를 고위험을 분산시키기 위 해, 그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진소령의 능력을 제한하고 그에 대비한 자신의 능력을 단기간에 강화시켰다.

“덕분에 죽을 뻔했지만…….’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 할 만큼 지난 이 주간의 훈련은 혹독했다. 그 덕에 거의 무(無)에 가까웠던 절망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솟아났다. 물론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희망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비무대에 오르기 바로 직전, 대사형 비류연이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야, 궁상아! 너 내가 지는 도박에 돈 거는 것 본 적 있냐? 없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넌 이번에 이겨. 왜냐하면 내가 거기에 돈을 걸었으니까. 그리고 난 언제나 이기니까.”

세상의 진리는 오직 그것뿐이라는 듯한 자신감이 서린 말투였다.

“그건 좀 다른 문제 아닌가요? 인과의 순서가 왠지 모순된 것 같은데요?”

소심한 남궁상이 소심하게 소심한 의구심을 드러냈다.

“시끄러!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마. 내가 돈을 잃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 안 했을 리가 있겠냐? 그러니깐 떨지 좀 마라. 긴장 풀고 자신감을 가져. 내 돈을 짊어진 녀 석이라면 좀 더 강인해야 하지 않겠냐?”

그 묘한 자신감과 응원을 가장한 괴상한 협박에 남궁상은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아미신녀 진소령이 주작단주 남궁상을 이기는 게 당연한 상식이라고? 그럼 가서 그 상식을 깨고 와. 내 사제라면 그렇게 해야 해!”

“그, 그런 억지가…….”

“억지면 어때서? 그런 게 바로 일탈의 묘미라는 거다. 상식에 따라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세계는 정체된 세계야. 죽은 세계라고! 이 세계가 한 번이라도 정체되는 것 봤냐? 없지. 있을 턱이 있나! 그럼 뭣 때문에 자꾸만 달라지는 걸까? 귀찮게 말야.”

“그, 글쎄요…….”

“그건 항상 예외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세상의 정체를 거부하는 교란. 명심해라! 반복된 세상의 정체된 흐름에 과감히 교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만이 세계를 변 화시킬 수 있는 법이란 것을. 변화에 휩쓸리기보단 기왕이면 변화의 중심에 서야 되지 않겠냐? 그래야 뭐가 됐든 되는 거고, 돈도 벌 수 있는 거지.”

비류연이 남궁상의 마음에 마지막으로 일침을 박았다.

“상식은 단지 거들 뿐, 그것이 전체는 아냐. 어차피 미래의 가능성은 무한대라구. 입맛대로 고르는 건 자신의 의지야. 상식의 굴레에 속박될 것인지, 그 굴레를 깰 사람이 될 건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다. 넌 죽었다가 부활까지 한 몸이잖아. 자신을 가져! 가서 세계 좀 변화시키고 와라, 지겹지 좀 않게!”

“예, 대사형! 다녀오겠습니다.”

이미 비류연의 능수능란한 언변의 술책에 넘어가 버리고 만 남궁상이 씩씩하게 대답하며 비무대로 향하는 입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빛을 뚫고 나가자 우레와 같은 환호가 그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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