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의 여인
-승천무제(昇天武祭)
유운비의 본선 시험 담당은 화산파의 윤준호였다.
‘정말 유약하게 생겼네.’
척 보기에도 윤준호는 정말 약해 보였다.
“저렇게 약한 놈이 어떻게 이런 큰 시험의 시험관이 될 수 있었지??
선배에 대한 존경심 따윈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의외로 별거 아닐지도!’
싸우기도 전에 이미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유운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어어?”
시험 내용은 윤준호의 십 초를 적절하게 막아내는 것, 그리고 중간중간 기회를 봐서 다섯 번의 초식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누워서 떡 먹기지!’
그런데 그토록 유약해 보이던 윤준호의 검은 의외로 끈질겼다. 바람에 흔들리는 매화나무 가지마냥 낭창낭창 휘감겨 들어오는 통에, 유운비는 검의 궤적을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 부드럽지만 결코 꺾이지는 아니 할 ‘유(柔)’의 경지가 서려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꼴불견을 만회하기 위해서 사일검법의 절초를 필사적으로 연달아 시전했으나, 자신하던 찌르기 는 매번 구사할 때마다 빗나가기 일쑤였다.
짝짝짝!
“와아아아! 정말 대단한 찌르기였어요. 이게 바로 소문난 점창의 찌르기군요.”
윤준호가 박수까지 치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지금 저 사람 날 놀리는 건가?”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그 웃음이 너무 천진했다.
“전 불합격입니까?”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니, 합격인데?”
“예?”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내 십 초를 못 받아내더라고. 통과한 건 자네까지 이제 겨우 다섯 명일걸? 움직임들이 너무 굼떠서 봐줄 수도 없던데, 혹시 다 들 몸이 아팠나? 설마 집단 식중독은 아닐 테고…….?”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천진한 얼굴로 윤준호가 말했다.
떠헉!
유운비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유란의 시험 감독관은 윤준호처럼 긴장감없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상대는 바로 나예린이었다.
“일 초만 막거나 피하면 된다.”
***
나예린의 조건은 훨씬 간단했다.
승부는 눈 깜박할 사이에 났다. 어느새 턱 앞까지 다가온 검날에 유란은 검을 휘둘러 보기는커녕 겨우 반보 뒤로 물러난 것이 전부였다.
‘틀렸어!’
유란은 속으로 낙심했다. 바보처럼 얼어붙었던 자신이 그렇게 한심스러울 수가 없었다.
“합격이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예? 왜요?”
유란의 반문은 외침에 가까웠다.
“뭔가 불만이라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유는 알고 싶어서요.”
“반보 움직였으니까.”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예?”
유란에게는 당연히 해설이 필요한 대답이었다.
“발뒤꿈치만 들 수 있어도 합격이다. 하긴, 반보나 움직인 건 네가 처음이구나. 추가 점수를 주마.” 막거나 피하는 것 따윈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머ᅳ 어ᅳ 엉~
당연하지 않은 것을 지극히 당연한 듯 말하는 모습에 유란은 그만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잊고 말았다.
***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공손절휘는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때가 온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영원히 오지 않길 바라던 시간. 그의 담당 시험관은 다름 아닌 칠절신검 모용휘였다.
“우린 구면이군.”
모용휘는 이시건을 유인하기 위한 계책에 휘말리는 바람에 공손절휘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공손절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검을 차고 서 있는 모용휘의 모습에는 한 치 흔들림도 없었던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이구나!’
그때는 언뜻 본 것뿐이었지만, 이렇게 비무 상대로 마주 서고 보니 박력이 달랐다. 저 젊은 나이에 이만한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니. 시샘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었 다. 하지만 그동안 몰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며 갖은 대책을 다 세워온 터.
“오늘이야말로 모용휘를 쓰러뜨리고 공손세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말리라!’
공손절휘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와 모용휘의 실력 차는 컸다. 시험이 시작되고 모용휘의 검초가 날아오는 동안 공손절휘는 피하는 데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반격할 실마리 를 찾다가는 바로 당할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가문의 검법을 펼쳐 보려 했지만, 모용휘의 교묘한 공격에 막혀 번번이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이, 이런!’
단 한 번도 반격다운 반격을 못해본 채 패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다소 무리한 수를 써서라도 공격해야만 했다. 공손절휘는 바싹 붙어 있는 지금 상태에선 승 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지면을 박차며 모용휘로부터 떨어졌다.
“이, 이 정도 거리라면!”
모용휘는 뒤쫓지 않았다. 실력을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압!”
낭랑한 기합 소리와 함께 공손절휘의 검끝에서 지존검법의 절초가 펼쳐졌다.
지존검법(至尊劍法) 비기(秘技).
지존무상(至尊無上).
공손절휘의 검끝에서 화려한 검기가 폭출했다.
“스스로 간합(合)을 만들었으니 십 점 가산!”
모용휘가 말했다.
“하지만 초식에 낭비가 심해 이십 점 감점일세.”
화려하고 위력적으로 보이는 초식이었지만, 모용휘가 보기엔 너무 낭비가 많고 번잡했다. 표적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요소 이외의 부분에 너무 과도한 내 공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런 건 고수들의 싸움에서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네.”
굳이 별다른 초식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모용휘는 이리저리 검을 몇 번 움직여서 그것들을 막아냈다.
“내 친구 녀석이 그러더군. 아껴야 산다고. 좀 더 자신의 움직임을 절약해 보도록 하게.”
어느새 공손절휘의 면전까지 다가온 모용휘가 충고했다.
“어어…….”
챙!
공손세가의 상징과도 같은 보검이 핑그르르 돌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굳은 결심과 의지만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격차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었다. 오장가량의 높이까지 치솟은 보검은 그대로 나가떨어져 땅에 푹 박혔다.
“과연 공손세가의 자제답군. 대단한 실력이었네.”
모용휘는 빠르고 간결한 동작으로 다시금 납검하면서 감탄을 표했지만, 그의 칭찬은 공손절휘에게 조롱과도 같이 들렸다.
“놀리지 말아주십시오. 전 졌습니다. 그럼 불합격입니까?”
적의 어린 목소리로 공손절휘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만큼 날 많이 움직이게 했던 사람은 없었네.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기 전에 모두들 자멸하는 걸로 끝나고 말았거든. 자넨 합격일세. 축하 하네.”
그러나 그의 귀에 모용휘의 축하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처량히 땅에 꽂힌 보검을 빼 든 공손절휘는 넋 나간 자의 발걸음으로 회장을 빠져나갔다.
“왜 저러지?”
분명 합격이라 했는데도 기가 꺾여 축 처진 공손절휘의 등을 바라보며 모용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자신이 극복해야만 하는 벽이 너무 높아 그곳에만 신경 을 쓰느라 공손절휘의 승부욕이나 도전 의식 같은 것은 통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 무심함이 공손절휘에게 더욱 큰 상처가 되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넋 나간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공손절휘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자 이내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어린애처럼 울었다. 한참을 울고 있던 그의 몸 위로 넓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를 책망하기라도 하듯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이 사라지자, 공손절휘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무릎 사이에서 빼꼼히 내민 얼굴 앞에는 아름다운 손에 들린 한 장의 손수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막아주고 그늘을 드리워준 것은 면사가 드리워진 칠흑처럼 검은 우산. 그 묵빛 우산의 주인은 흑단(黑緞)으로 지은 옷 을 걸치고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게 서 있는 여인이었다.
“덥죠?”
여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마치 당신의 얼굴이 엉망인 것은 더워서 땀이 흐른 탓이겠죠. 전 눈물 같은 것은 보지 못했으니 괘념치 말고 어서 받으세요’라고 말하 는 듯했다. 용수철이 튕기듯 공손절휘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긴장해서 직립부동자세를 취한 채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뛰어들어 가고 싶었다.
“부끄럽다니요. 살다 보면 눈가에 땀이 좀 맺힐 수도 있지 않겠어요? 유독 눈가에 땀이 잘 맺히는 일이 여자들만의 특권인 건 아니잖아요?”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해주면서 위로까지 더해주니, 그 깊은 배려에 공손절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하, 하지만.”
우산 주위에 드리워진 면사 뒤로 여인이 생긋 웃는 것 같았다.
“뭔가 분한 일이라도 있었던가요?”
“그,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험에 떨어지는 것 같은?”
이곳에서 그것 말고 울 이유는 별로 없었다.
“아, 아닙니다. 합격했습니다.”
비록 지긴 했지만 일단 합격은 합격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분한 일이란……?”
“그… 그건 패배하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풀 죽은 목소리로 공손절휘가 대답했다.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진 것은 진 것이었고,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중대한 승부였나요?”
여인이 물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문의 숙원을 걸고.”
주먹을 불끈 쥐며 공손절휘가 대답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그토록 반드시 승리해야 할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칠절신검 모용휘입니다!”
“아! 그 결벽…….?”
“예?”
“음,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겠네요, 그 정도 상대였다면. 질 때도 있는 거죠. 아직 젊으시니까, 요는 포기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예요.” “그, 그렇지만?”
“한 번의 패배로 좌절하다간 평생 아무것도 못해볼걸요. 게다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합격했으니, 앞으로 몇 번이라도 도전해 볼 기회가 있는 거잖아요?” “그것도 그렇군요.”
“앞으로 일 년이고 이년이고 계속 만회할 기회가 잔뜩 있으니 너무 상심해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그렇죠?”
“화, 확실히 그렇군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져도 된다고,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말해준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저… 소저의 방명을 물으면 실례가 될는지…….”
공손절휘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글쎄요. 실례일지도 모르죠. 후훗.”
현의여인의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흔들리는 방울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공손절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여인은 그에게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만. 좋은 성적 내길 바라겠어요.”
여인의 말이 끝났을 때는 어느새 어떻게 받았는지도 모를 손수건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공손절휘가 당황해하는 사 이, 여인은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우아한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저, 저기…….”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을 때는, 그녀가 이미 검은 양산을 쓴 채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그는 신비한 현의여인의 그림자라도 붙잡아보려는 듯 무심코 손을 뻗어보았으나, 손 안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는 뭔가에 홀린 듯한 멍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자넨 보법이 너무 형편없어. 아직 검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면서 용케도 본선까지 진출할 수 있었군 그래?”
바닥에서 꼴사납게 뒹굴고 있는 수험생을 굽어보면서 남궁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 그럼?”
대답은 이미 일초를 내뻗은 그 시점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불합격일세.”
“으아아아아아앙!”
눈물을 뽑으며 한 수험생이 시험장을 뛰쳐나갔다.
“또 울려 버렸군! 하지만 사내 주제에 겨우 이 정도 일로 질질 짜다니…….”
이게 도대체 몇 번째란 말인가? 심약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 정신 상태로 승천무제에 도전할 생각을 품다니, 그 무모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다음!”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남궁상이 외쳤다.
스르르륵.
한 여인이 어깨에 칠흑처럼 검은 우산을 걸친 채 미끄러지듯 우아하게 걸어 들어왔다.
‘웬 우산?”
재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흑진주처럼 광택이 흐르는 검은 바탕에, 금사와 은사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매화나무를 수놓은 우산이었다. 황금빛 매화 가지는 가늘 고 유려하면서도 당당한 절조와 의기를 품고 있었고, 눈부시게 피어난 은빛의 꽃잎들은 보는 이의 마음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남궁상의 시선은 이내 자연 스레 우산의 아래쪽으로 향했으나, 둥근 테두리를 따라 면사가 둘러쳐져 있어서 여인의 얼굴은 반이 넘게 가려져 있었다. 다만 그나마 가려지지 않은 단정한 코끝과 미려한 입술, 갸름한 턱 선을 보면 상당한 미인인 듯했다. 더구나 여인은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흐르는 부드러운 흑단 현의를 걸치고 있어서, 버들가지처럼 호리호리 한 몸매와 백옥처럼 하얀 피부가 더욱더 돋보였다.
“잘 부탁드려요.”
여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 잘 부탁하오.”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남궁상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시험 내용이 궁금하군요.”
칠흑 우산을 비스듬히 든 현의의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지? 이 박력은??
남궁상은 시험 감독관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내심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그가 시험한 여타의 잔챙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설마 내가 압도당하고 있는 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고요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인의 기세는 놀라울 정도였다.
“혹시 그냥 서 있기만 하면 합격인가요?”
현의여인이 재차 물었다. 우회적인 힐난이었다.
“아, 미안하오. 내용은 간단하오. 내 십 초를 모두 막거나 피해낸다면 합격이고, 동시에 나의 옷자락을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추가 점수가 있소.”
“아, 그래요? 간단하군요.”
현의여인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
‘글쎄, 과연 그렇게 간단할까?”
여태껏 그 요건을 충족시킨 수험생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봐주면서 해서 그 정도였지, 그러지 않았으면 턱도 없었다.
“아참, 한 가지 더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남궁상이 쾌히 승낙했다.
“옷자락을 건드린 사람은 지금까지 모두 몇 명인지요?”
그 질문에 남궁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단 한 명도 없었소.”
여인은 그 대답에 놀라기는커녕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제가 첫 번째 사람이 되겠군요.”
저 알 수 없는 자신감의 원천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남궁상은 시험 감독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유쾌해졌다.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남궁상이 패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건드리는 방법은 어떤 수단이든 괜찮나요?”
“물론!”
“…시원시원한 분이군요.”
다시 한 번 여인이 소매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살짝 웃었다. 그 순간 남궁상은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뭐, 뭐지? 이 서늘한 기운은??
느닷없이 뒷골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착각인가?’
아무래도 좀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최근 들어 너무 무리를 하긴 했었다. 어서 끝내고 쉬었으면 좋겠다. 남궁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오시지요.”
여인이 청했다.
우산을 든 채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여인의 모습은, 마치 빙상에서 춤을 추는 무희 같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우산을 들고 있는데도 자세에 흐 트러짐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남궁상의 검초는 위력적이었으나, 현의여인은 정원을 산보하는 사람처럼 여유롭고 능숙한 솜씨로 요리조리 피해냈다. “대, 대단하군! ‘
남궁상은 여인의 실력이 이 정도인 줄은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느꼈던 차분한 박력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느 문하일까?”
과거에 비하면 이제 견문이 꽤 넓어졌다고 자부했지만, 여인의 무공 내력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시 아직은 수업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생사결이 아니라 해도, 비무 도중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히 빈틈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여인은 그 커다란 틈을 못 본 척할 만큼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괜찮다면야, 되도록 시원하고 화려한 한 수를 선보이겠다고 여인은 마음을 굳힌 듯했다.
부웅!
묵빛 우산이 위로 떠오르자, 남궁상은 순간이나마 우산의 궤적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차!’
평소라면 절대 없었을, 마음의 나태가 부른 화였다. 그러나 이미 후회하기엔 늦은 때였다.
빈틈을 꿰뚫는 현의여인의 손속은 가차없었다.
쿵!
여인은 단호히 진각을 밟았다. 동시에 세찬 반탄력을 팔꿈치에 실어 남궁상의 옆구리를 날카롭게 강타했다.
“쿠웩!”
남궁상은 무시무시한 충격 속에 옆구리가 반 조각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피를 토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지독한 고통이었다. ““방심하셨군요.”
남궁상의 옆구리에 통한의 일격을 가한 여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우아한 자세로 서서히 떨어져 내리는 우산을 받아 들었다.
빙글 돌아선 여인은 여전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는 남궁상을 굽어보며 생긋 웃었다.
“역시 시험 감독관 분들도 가끔은 이것저것 생각하실 게 많은가 보죠?”
남궁상은 입 안에 거품을 물고 있느라 그 말에 답해줄 수 없었다.
“자,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합격인가요?”
부글부글부글!
“부……? 저는 불합격인 건가요?”
다급해진 남궁상은 있는 힘을 몽땅 쥐어짜내어 그 질문에 겨우겨우 대답해 줄 수 있었다.
“하, 하, 합격이요.”
아직도 그는 이승과 저승을 번갈아가며 헤매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기를..”
인사를 마친 여인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시험장 한복판에는 정신이 반쯤 나간 남궁상만이 입에 흰 거품을 문 채 쓸쓸히 남겨졌다. 아미신녀마저 이겼다던 남자의 씁쓸한 퇴락(頹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