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0권 28화 – 출발하는 젊은이들 (20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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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0권 28화 – 출발하는 젊은이들

출발하는 젊은이들

―연비(燕)

“정말 괜찮겠나?”

걱정스런 얼굴로 효룡이 물었다.

“뭐가?”

태평스런 얼굴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정말 몰라서 묻나?”

효룡은 자신이 왜 당사자보다 더 화내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 난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겠나, 류연? 자네 혼자만 빠지게 되는 걸세. 나 소저 떠나면 아마 일 년은 보지 못할걸? 게다가 자네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도 이번에 거의 떠 나지 않나?”

끝내 비류연은 이번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물의를 빚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제재로서 비류연의 마천각 교류 사절단 명단에서 뺀다’는 공고가 나붙었을 때도 놀라는 사람은 그와 가까운 몇몇뿐이었다. 그 몇몇이 놀란 이유도 그 공고의 내용보다는 비류연이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데 있었다. 이 음모의 화신이자 술책의 귀재라 불리는 인간이 이번 일을 막기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룡룡, 그럼 내가 가지 말라고 울고불며 자네들 옷깃이라도 부여잡아야 속이 좀 풀리겠어?”

고개를 갸우뚱 꺾으며 비류연이 물었다.

“그… 그… 누가 그런 끔찍한 악몽을 원하겠나. 하지만…….”

효룡은 뒤에 이을 말이 없었다.

“내 걱정일랑 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이번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으니깐 말이야.”

“정말 안 갈 건가? 자네가 만일 생각이 있다면 우리들도 나설 준비가 되어 있네. 자네가 꾸민 음모에 동참해 주겠다 그 말일세.”

그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음모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나. 내가 시도 때도 없이 음모나 꾸미고 다니는 사람으로 보이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는 비류연의 말에 효룡은 입을 봉했다.

“……”

때로 침묵은 긍정과 같다.

“난 괜찮아. 것보다 이번에 그 말괄량이 아가씨랑도 함께 가게 됐다면서? 잘 갔다 와.”

순간 효룡의 안색이 무척 어둡게 변했다.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지…….”

자신이 자라난 곳,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하던 형을 잃어버린 그곳. 이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도 되는 걸까? 그곳에 가서도 자신은 여전히 효룡일까? 아니면 또 다 른 내가 될 것인가?

‘과연 그러고 나서도 자신은 이들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효룡은 그 점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야, 룡룡.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네.”

왠지 치렁치렁한 앞머리 저편에서 비류연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에 효룡은 문득 불안해졌다.

“뭔가?”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자넨 언제부터 애꾸가 되었나?”

효룡은 흠칫 놀라며 오른쪽의 안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 이거 말인가? 그냥 그럴 만한 사연이 좀 있었다네.”

그때 이진설에게 찔린 눈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던 것이다. 효룡은 그 순간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나마 찔리는 순간 재빨리 눈을 감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무시무시한 참사가 벌어졌을 게 아닌가!

“흠, 거 굉장히 수상하군. 머리도 산발이고 말이야. 오른뺨에도 할퀸 듯한 자국이 있고 말이야…….”

“헉, 보였나?”

“산발로 가리려 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설마 그 눈도… 그 말괄량이 아가씨 소행인가?”

핵심을 정통으로 꿰뚫린 효룡은 휘청거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군.”

“에휴, 말하자면 사연이 길다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류연에게 그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마음은 결코 없었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비류연이 재깍 말했다.

“흐흠, 그렇다면 다음에 꼭 이유를 물어봐야겠군.”

어떤 폭탄이 숨어 있을지 무척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어허, 꼭 그러지 않아도 된대도 그러나 어흠, 난 이만 가보겠네. 이로써 한동안 못 보겠군. 몸조심하게.”

“자네야말로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군.”

사실 얼핏 보면 전혀 효룡이라고 짐작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네.”

작별 인사를 하며 효룡은 떠났다.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면 비류연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정체를 감추려 하다니……. 역시 돌아가는 게 두려운 건가?”

뭐 그건 앞으로 효룡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자신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럼 이제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비류연은 자물쇠가 잔뜩 달린 전용 옷장을 열고는 몇 가지 물건들을 꺼내었다. 마지막 물건은 그가 특별 제작한 특수 금고 안에 들어 있었다. 가느다란 홈이 옆면 의 테두리를 따라 패여 있고, 앞쪽의 문에는 손잡이 대신 엄지 손톱만 한 구멍 열 개가 원형으로 뚫려 있는 금고였다. 구멍들 역시 속이 막혀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중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듯했다. 비류연은 옆면에 난 홈을 따라 손톱으로 몇 군데를 순서대로 누른 후, 문에 뚫린 구멍들 중 세 곳에 순서대로 손가락을 끼웠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작은 금속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금고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비류연은 금고에 손을 넣어 마지막 물건을 꺼내 들었다. 빛이 바랜 조그만 상자였 다. 상자를 쓰다듬는 손길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비류연은 필요한 물건들을 세심하게 점검한 후 경대 앞에 앉았다. 남자 기숙사에도 경대 정도는 갖추어져 있었다. 여성용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사용하는 데는 전 혀 문제가 없었다. 보통은 중증의 결벽증을 앓고 있는 모용휘가 자신의 흐트러짐을 필사적으로 찾기 위해 종종 사용하곤 하는 물건이었다.

비류연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돌아보면 언제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고마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딱히 그에 감사하고픈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앞으로도 별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거울 속의 나’와는 별다른 친분이 없는 터였다.

스윽!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비류연은 오른손을 들어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려보았다.

거울 속에 낯선 얼굴이 비춰졌다. 분명 자신의 모습일진대 어쩐지 생소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이다, 너?”

‘거울 속의 나’가 미소 지었다.

“하긴 진짜 오래됐네. 그동안 잘 지냈어? 얼굴 잊어먹겠는걸.’

거울 속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다시 ‘그 모습’이 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러게. 동감이야! 하지만 살다 보면 예측 불가능한 일도 있어야 재밌는 것 아니겠어??

“그것도 그렇군.”

비류연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 방법뿐이겠지?”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하는 것도 시간과 체력과 심력의 낭비였다.

드르륵!

경대의 서랍을 열자 쇠로 만든 하얀 가위 하나가 보였다.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잠시 망설이던 비류연은 이내 결심한 듯 가위를 들어올렸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그는 가위를 들어 길게 드리워져 있는 앞머리 쪽으로 서서히 가져갔다.

철컥!

벌어져 있던 가위가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웅….

지금부터 너의 머리를 시험해 보겠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진설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넣을 것은 많고 상자 안의 공간은 한정되 어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운영진 측은 여자들의 섬세함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규칙은 규칙. 표국을 통해 실어 나를 짐은 상자 하나로 한정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휴대하기 위한 봇짐 정도가 고작이다 보니, 아직 싱그러운 젊은 나이의 한창 꾸미고 싶어하는 처녀가 그 짐의 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거울, 향첩, 향낭, 갈아입을 옷 최소 열 벌… 버선, 당혜, 에또… 에또…….”

“크아아악! 역시 너무 작아!”

이진설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런 이진설 옆에서 나예린은 묵묵히 자신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의 물품은 거의 다 백색 일색이었다.

그 모습을 한번 힐끗 훔쳐보고 나서 이진설은 다시 자신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후우~”

끙끙거리며 짐을 싸던 이진설이 갑자기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쉽겠어요, 예린 언니.”

“뭐가 말이냐?”

그 무심한 대답에 이진설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이 참! 비공자 말이에요, 비 공자! 이번에 함께 못 가게 됐잖아요.”

“그렇구나.”

여전히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짐을 싸던 그녀의 손길 역시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묵묵히 짐만 쌀 거예요?”

쀼루퉁한 목소리로 이진설이 외쳤다.

“이번 길은 한두 달로 끝날 짧은 여정이 아니지 않느냐? 짐이 많은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건 알아요. 그래서 단체로 짐을 운반해 줄 표국도 하나 섭외해 둔 상태잖아요?”

“그러니 싸둘 수 있을 때 싸두거라, 잊어버린 물건 없게.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너도 잘 챙겨두거라.”

그 말을 끝으로 나예린은 다시 짐 싸기에 열중했다. 그 모습을 본 이진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비 공자가 같이 가지 않는 것 때문에 화가 나 있는 건가??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자로서의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냐?”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예린이 한마디 했다.

“아, 아니에요. 뭘 넣어야 될지 자꾸만 고민이 돼서요. 아하하하하하! 자, 그럼 나도 빨리 정리를 해볼까?”

이진설은 억지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자신의 짐을 어떻게 꾸릴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짐이 모두 꾸려질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예린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집어 든 것은 아주 조그맣고 낡은 상자였다. 빛바랜 붉은색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족히 십 년은 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표면 에 새겨져 있던 정교한 봉황 무늬 조각도 지금은 그 선이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나예린은 세월의 때가 묻은 그 상자를 매우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딸깍!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리운 두 개의 물건이 그녀를 반긴다. 한 자루의 은빛 단검과 칠채(七彩)로 빛나는 화려한 보요(步搖).

“……”

아련함이 그녀의 눈동자 속을 스쳐 지나간다.

“언니, 그게 뭐죠? 처음 보는 건데?”

불쑥 옆구리 쪽으로 고개를 들이민 이진설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예린이 상자를 닫으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히잉…….”

울상을 지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탁!

마지막 상자를 끝으로 나예린은 짐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는 서서 한참을 그대로 기다렸다. 이진설의 짐 싸기가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꽤 필요했던 것이다. 한참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나예린은 비로소 이진설의 기나긴 결단이 끝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휴, 다 끝났어요.”

이진설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말했다. 나예린은 작게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럼 가자꾸나.”

나예린은 먼저 짐을 든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네, 언니… 아, 잠깐만요!”

막 문을 나서려는 나예린을 이진설이 급히 붙잡았다. 뒤돌아보는 나예린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녀의 가라앉아 있는 눈에는 책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마치 너는 왜 그리 굼뜨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진설도 그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 이대로는 물러날 수 없었다.

“저…….”

이진설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별 시답잖은 일이라면 용서치 않겠다고 벼르고 있는 언니의 눈동자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가련한 이진설은 더욱 용기를 북돋 운다.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도망치면 안 돼!’

마침내 고개를 번쩍 든 그녀의 손가락이 한쪽을 가리킨다.

“저… 검은 가지고 가셔야죠, 언니.”

그 다음 펼쳐진 한순간의 광경은, 꽉 막힌 방 안에 갑작스레 불어닥친 한줄기 바람이 보여준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진설은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의 고운 물결 밑에서 황혼을 담아놓은 듯 붉게 변하는 얼음 조각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때는 이미 나예린의 등밖 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나예린은 결코 그녀에게 섣불리 앞을 내주지 않았다. 물론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마터면 주인과 생이별할 뻔한 애검 ‘빙령’을 집어 든 나예린은 침묵을 유지한 채 무거운 상자를 가뿐히 들고는 방문을 나섰다.

“같이 가요, 언니!”

이진설은 서둘러 봇짐을 든 다음 큰 짐을 덜어놓았다는 듯한 밝은 목소리로 동경하는 나예린을 부른 다음 그 뒤를 따라나섰다.

세계가 더욱 확장되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꽤나 험난한 여정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대로 한가운데에 성공이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법은 없습니다. 남이 가기 힘든 길을 헤쳐 나갔을 때 비로소 남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법입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다 해도 저는 여러분이 그 고난을 극복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이 천무학관의 긍지 높고 자랑스러운 관도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학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해 줄 것을 마지막으로 당부합 니다. 그럼 출발!”

길고 지루하고 독창성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었던 마진가의 연설을 끝으로 천무학관 사절단은 각자에게 지급된 말을 몰고 그들을 배웅하기 위해 활짝 열린 정문을 나섰다. 선두에는 빙검과 염도가, 그 뒤로 진소령과 유은성이 따르고 있었다. 이들 무리의 관도 대표로는 당연하다는 듯 용천명이 뽑혔다. 부대표는 마하령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이 ‘강철의 처녀’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조부에게 최근 몰래 수업을 받고 있었지만 아직 승부 를 낼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도성의 무학은 너무 넓고 깊어 일조일석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 했다. 용천명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그녀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물론 그녀가 분을 참은 데는 그때가 부친 마진가의 앞이었다는 사실도 크게 한몫하긴 했다. 학생들이 반반으로 갈라져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 상심할 것이 분 명하기에, 자식된 도리로서 차마 그걸 눈앞에서 보여줄 수는 없었다. ‘잘 부탁하오’라는 용천명의 말에 그녀는 가볍게 새침한 표정을 지어준 정도가 전부였다. 그 리고 그 뒤를 남궁상과 진령을 앞세운 주작단이 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떠나는군요.”

검후는 높은 망루에 서서 말을 탄 나예린의 모습이 무리들과 함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자의 실력은 익히 인정하는 바였지만 위태 로운 마음이 아직은 걱정스러웠다.

‘그 녀석도 없다는데 괜찮을까??

만일 안 괜찮은 일이 생긴다면 나중에 반드시 그 죄를 묻고 말겠다고 검후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별일없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

검성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평상시 같으면 걱정을 안 할 텐데 시국이 시국인만큼 걱정이 되는구만.”

도성도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손녀딸도 저기에 끼어 있었군 그래. 그러니까 마 관주 딸아이 이름이…….”

검성의 기억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쯧, 이 친구, 드디어 치매구만. 치매야. 하령일세, 마하령! 치매라서 어차피 곧 잊을 거지만 일단 기억해 두게.”

짝!

“아, 맞다! 마하령이었지. 지난겨울 내내 자네가 한 수 가르쳐 준다며 붙잡고 있던 그 아이 말이지. 자네랑 만나려다 얼굴은 몇 번 봤는데 이름까진 기억을 못했 “네.”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할 것 아닌가? 내가 붙잡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귀여운 손주 녀석이 날 붙잡은 게지. 난 할애비로서 못 이긴 척 잡혀준 거고. 그 아이의 그런 강렬한 눈빛은 내 생전 처음 봤다네.”

“그랬나?”

“암, 그렇고말고. 집념과 의지가 가득 찬 독기 어린 눈빛이더군. 아직도 그때 그 기억이 생생하다네. 내가 제대로 안 가르쳐 주거나 뭉그적뭉그적 발뺌하면 자결이 라도 할 기세였다니깐. 나도 그땐 진땀 꽤 뺐다네.”

도성의 엄살에 검성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아무리 천하의 도성이라 해도 하나뿐인 손녀에겐 약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군 그래.”

도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나뿐인 손주 녀석이니 어찌 안 귀여울 수 있겠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리 분별 없이 봐주면서 가르칠 생각은 없지만 말야.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귀엽다고 노상 모든 일에 편의를 봐주는 것은 오히려 손주를 망치는 길이지.”

“누가 그걸 모르나!”

기왕 손녀나 자식이 귀엽다면 그 가능성에 날개를 달아줘야 했다.

“어미 새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대신 날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쯤은 나도 아네.”

나는 연습을 하지 않은 새는 단지 추락할 뿐이었다.

“진전은 있었나?”

검성의 질문에 도성이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누구 손녀딸인데! 뚜렷한 목표를 가진 의지 강한 이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법이지. 그리고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만다네.”

도성은 아직도 갑작스레 불쑥 자신의 방을 찾아온 손녀의 의지견강(意志堅强)한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할아버님! 부디 절 단련시켜 주세요. 전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돼요. 도성의 손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난겨울 천무학관에 머무는 동안 계속 마하령 곁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의지로 가득 찬 손녀는 예 전과 다르게 열성적으로 배움에 임했고 가혹한 일정에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르치는 즐거움’이었지.”

도성의 입가에 자연스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아이도 그곳 홍매곡에서 무언가를 얻어온 모양이군. 우리 손자 녀석이 그랬지. 비록 천무봉이 불의의 화겁으로 인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전소되긴 했지 만, 아이들의 마음에는 무언가를 남긴 모양일세.”

팔짱을 낀 채 검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그 아이들이 새로운 싸움터로 가는군요. 다들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검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마천각은 보이지 않는 위험 변수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거기까지 따라가서 뒷바라지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오? 미래는 과거를 넘겨받아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 스스로 여는 수밖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줬소. 과거를 현재로 전승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지. 이제 나머지 미래를 열어가는 것은 오롯이 저 아이들의 몫이 

“야.”

도성이 한마디 했다.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빌어보세.”

검성은 손자를, 도성은 손녀를, 그리고 검후는 후계자를 전송하고 있었다. 앞으로 가장 위험해질지 모르는 그곳으로 아이들을 보내는 그들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 았다.

“으음… 하지만 역시 과거는 과거대로 굳건하게 버텨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검성이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돌아가서 아직 미완성인 ‘바다 가르기’나 완성해야겠네.”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의 말투가 도성의 심기를 심히 거슬리게 했다.

“흥, 그 개꿈, 아직도 안 버렸나?”

바로 핀잔이 돌아왔다.

“개꿈인지 길몽인지는 두고 봐야지.”

검성이 태평스런 어조로 한마디 했다. 검후도 지고 싶지 않은지 앞으로 나섰다.

“저도 천 마리를 이천 마리로 늘릴 방도를 찾아봐야겠네요.”

남해 조류계에 비상이 걸리고도 남을 발언이었다.

“다음번엔 반드시 나도 그럴듯한 것 하나 내보일 테니 기대하게.”

왠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아 도성은 기분이 나빴다. 그에게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눌 친구라고는 이 두 사람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든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우린 아직 현역이야.”

검성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백 살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애 같은 무구한 웃음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늙다리 노(老)폐물로 취급당해서야 체면 문제지.”

도성이 가슴을 탕탕 치며 큰소리쳤다.

“어머, 이제 시작 아닌가요? 아직 가보고 싶은 곳까지 반도 못 가봤는걸요. 이, 삼백 년은 더 살아야죠.”

이미 나이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얼굴을 가진 여인이 태연스레 말했다. 그들은 백 살이 넘은 작금에도 자기 연마를 게을리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들은 아마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자신을 갈고닦으리라. 도성도 한마디 안 하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드디어 요괴가 될 결심을 굳힌 모양이구려.”

초감각으로 단련된 검후의 귀는 무척 밝았다.

“뭐예요? 지금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차! 도성이 사색이 되어 손을 가로저었다.

“아, 아니오. 그냥 헛소리였소, 헛소리! 아하하하하!”

반드시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젊은이들의 한계가 되어주기 위해서, 천무삼성의 벽은 여전히 강호에 높게 드리운 채 만인을 굽어보는 보다 찬란히 빛나는 장벽이 될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그들이 다른 젊은이들의 벽이듯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벽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가의 모습이 아침부터 안 보이더군요. 어디로 가셨죠?”

검후가 물었다.

“아무래도 저 아이들을 따라가신 것 같소.”

“그래요? 쓸 만한 아이를 찾았다더니 그 일 때문인가? 어때요, 자신의 손자가 선택된 소감이?”

자초지종을 대충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검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그게 그렇게 좋지만은 않소. 그 녀석에게 나의 무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는 게 미안할 뿐이오. 대형께선 칼을 더욱 깊은 곳에 감추셨더군.” 검성이 감탄조로 말했다.

“혹은 버렸는지도 모르죠.”

“수중무검(手中無劍) 심중무검心中無劍)의 경지란 말이오?”

검성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심중무도(心中無刀)일세. 이래서 ‘검(劍)잽이’들은 안 된다니깐.”

도성이 단호한 목소리로 잘못을 정정했다. 늘상 있어왔던 일이기에 검성은 가타부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대신 허리춤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 ‘은하’를 툭툭 두들 기며 말했다.

“이 녀석을 손에 넣은 이후로는 한판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타깝군.”

어느새 그 벽은 조금 더 먼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럼, 검후께선 포기했소?”

검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했다.

“물론 안 했죠. 반드시 그 두 분을 넘어서자는 게 ‘그때’ 우리가 한 약속이었잖아요. 하지만 그 약속을 잊지 않은 건 나만인 줄 알았죠. 어쨌든 백 년이나 된 낡은 약 속이니까요.”

그들에게도 당연히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 약속은 이미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그 시절에 나눈 것이었다.

“시간 속에 퇴색되는 것은 진정한 약속이라 할 수 없소.”

검성이 단언했다.

“그럼 그 약속도 함께 기억하고 있겠구먼. 비무에서 대형에게 이긴 사람에게 임자가 시집오기로 한 그 약속 말이야. 그 약속도 아직 유효하겠지?”

이것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어조로 도성이 말했다.

“노친네가 주책은. 그건 약속이 아니라 농담이었죠. 그 두 가지를 착각하지 말아요. 도성, 이 노망난 할방구야!”

검후가 한마디 쏘아주었다.

“끄응~”

도성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뵌 대가가 정정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비실거리는 노인네에게 이겨봤자 기쁘지도 않고 진짜 실력도 입증 안 될 테니 말이에요. 완벽한 상태에서 의 승리, 그것만이 가치가 있어요.”

“동의하오. 맞는 말이오.”

“뭐, 내가 보기엔 앞으로 백 년도 더 살 것 같더구만.”

“바다 가르기를 연구하는 의미가 있겠어.”

검성이 바다 가르기를 연구하는 이유도 ‘강 가르기’로는 대형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검후도 도성도 아직 수련과 연마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은 모두 뚜렷한 목표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저주이자 축복이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아 그들의 약함을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그것은 저주였고, 그들 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킬 목표이자 원동력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축복이었다.

“아직 당분간은 정정할 것 같으니 가서 수련을 계속해야겠어요. 대가를 가장 먼저 쓰러뜨리는 것은 바로 나 검후예요.”

“아니, 나야, 나!”

“아니지, 그건 날세.”

“아니, 그러니깐 그건…….?”

잠시 옥신각신 말다툼이 오갔다. 적어도 강호의 거두들이 나눌 만한 수준의 대화는 아니었다.

“잠깐!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네.”

검성이 말다툼을 저지했다.

“그만 하세. 두고 보면 알 일 아닌가?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지.”

“그게 좋겠어요.”

어차피 그들은 오늘도 그 벽을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검과 도를 극성까지 연마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저 아이들은 이제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을 보러 가는군요.”

떠나가는 무리들을 지긋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검후가 한마디 했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 정(正)과 반(反), 빛을 알고 어둠을 알며 겉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 둘을 모두 받아들여 하나로 합할 수 있을 때 저 아이들은 진정한 무인으로 거듭나겠지요.”

“편협한 시선으로는 백년천년이 지나도 대성을 이룰 수 없는 법! 선입견을 깨뜨릴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저 아이들도 단 두 가지 범주로 나누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할 것이오.”

이 여정은 그러기 위한 여정이었다. 위험을 동반하고 있지만 그만큼 소득도 많을 터였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 소득을 바란다는 것은 뻔뻔한 짓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봐 주는 것뿐이군.”

지금 이들이 천무학관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그들은 조금 더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

나예린의 주위는 마치 섬과 같았다. 모두들 그녀의 곁에 서고 싶은 욕망에 불타면서도 서로 견제하느라 감히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 돌출됐다가 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주위의 질시와 비난을 암중으로 받아야 하는데 그걸 감내할 만큼 뱃심이 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태연히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비류연뿐이었었다. 그러나 그는 지난번의 불미스러운 사건과 그에 대한 반발로 그만 참가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번 사절단 구성에서 특이한 점은 막 학관에 입관한 관도들에게 참가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입관 시험에서 사(四)등 안에 들 것.

네 명인 이유는 원형으로 합격자 명단을 게시하는데, 이때 동서남북 사방을 장악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우수한 순서대로 북, 동, 남, 서의 방 향으로 정해지며 각각 명칭도 있었다. 북원, 동원, 남원, 서원이 각각 그것이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에게 많은 경험을 시키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부려먹을 후배가 생긴다는 생각에 다들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놀라운 점은 그 넷 중 두 명이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아미신녀 진소령의 제자인 유란이었다. 다행히 유운비도 사등으로 가까스로 합격해 이 대열에 동참할 수 있었다. 나머지 남자 한 명은 바로 공손절휘였다.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은 고도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없던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는 시험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류연에게 약점이 잡힌 이상 그의 앞날도 그리 밝을 것 같지만은 않을 것이 라는 게 남궁상의 견해였다.

서로를 견제하느라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금역. 그곳에 칠흑빛 주단(紬緞)처럼 윤이 흐르는 흑마가 탐스러운 갈기를 찰랑거리며 발을 들이밀더니, 곧장 나예린의 백마 곁으로 접근했다.

“저 여인은..”

남궁상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 늘씬한 흑마를 사뿐히 올라타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가 시험 때 담당했던 신비의 현의여인으로, 지금도 예의 그 흑단 현의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두 발을 가 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흑마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왜요, 상? 아는 사람이에요?”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던 남궁상은 진령의 질문을 놓쳐 버리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히야… 설마 저 정도의 미인이었을 줄이야…….”

“상, 방금 말을 못 들었나요?”

남궁상은 갈수록 업보가 쌓여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금 진령의 말을 놓쳐 버린 채 상념에 젖어들었다. 면사가 드리워진 우산을 쓰고 있어서 시험 때에는 미처 확인 할 수 없었던 얼굴. 은사와 금사로 매화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묵빛 우산. 그러고 보면 지금도 햇빛 가리개용으로 그 우산을 쓰고 있지만, 얼굴을 가렸던 면사는 치 워진 상태다.

‘도대체 누구지??

“끝내주는 미인인데?”

남궁상뿐 아니라 뭇 사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산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고는 해도, 언뜻 보이는 눈매와 이목구비에서 충분히 미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호리호리하고 늘씬한 데다 가느다란 허리, 움직이는 동작 하나하나가 무희의 그것처럼 우아했다.

남궁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 저 여인과 그때 말고도 언제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기분이…….”

그러나 그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남―궁―상!”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린 남궁상은 질겁했다.

“히에에에에엑!”

지옥의 업화를 몸에 감싼 수라(修羅)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 어디서 한눈을 파는 거예욧!”

빠악!

분노의 ‘이문정주’가 남궁상의 옆구리를 직격했다.

“쿠에에에엑!”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어, 어찌 이리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곳을……!?

진령의 팔꿈치가 강타한 곳은 얼마 전 현의여인의 팔꿈치가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남궁상의 의식은 그 시점에 그만 뚝 끊어지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나예린의 곁에 다가온 검은 옷의 여인이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누구시죠?”

나예린으로서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심연(深淵)의 눈동자……..’

여인은 이마로 흘러내리는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자연스레 오른쪽으로 넘기고 있었다. 오른쪽 눈은 엷은 면사처럼 드리워진 비스듬한 앞머리에 살짝 가려져 있었 으나, 반대편으로 드러난 왼쪽 눈에는 마치 보석과도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다. 검다기보다는 짙은 빛깔의 마노처럼 다채로운 고동색을 띤, 보는 이를 빨아들일 것 같은 심연의 눈동자.

그런데…….

“이, 이럴 수가!’

갑자기 나예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이 여인은 누구지?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

현의여인이 소매로 입가를 가린 채 살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린!”

‘린’이라는 호칭에 나예린의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인은 쓰고 있던 묵빛 우산을 서서히 치웠다. 햇살이 여인의 얼굴을 비추자 나예린은 깜짝 놀랐다. 고동빛 마노처럼 짙고 깊은 눈동자가 햇빛을 받으면서 서서히 영롱한 금빛으로 물들어갔던 것이다. 저 눈동자와 유사한 보석을 나예린은 본 적이 있었다. 빛의 각도에 따라 고동색에서 갈색, 갈색에서 다시 황금빛으로 변하는, 가히 형언하기 어려운 빛을 발하는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있는 보석! 그래 바로.

‘마치 호안석(石) 같아!’

그렇게 생각한 나예린은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지금과 똑같은 말을 예전에도 한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서, 설마…….”

묻혀져 있던 아련한 과거의 기억이 화살처럼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침묵이 이어졌다.

호안(虎)의 여인이 다시 생긋 웃었다. 이제는 기억해 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너무 섭섭한데요.”

무척 상심했다는 투로 여인이 말했다.

“설마 잊어버린 거예요, 린?”

현의의 신비여인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어떻게 내가 잊을 수 있겠어요, 내 생명의 은인을.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육신의 생명과 함께 마음의 생명까지도 지켜주었던 이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나예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십여 년 동안 묻어두었던 그리운 이름을 꺼냈다.

“여, 연비(燕飛)!”

현의여인은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뭔가를 들어올렸다. 낯익은 보요(步搖:떨잠)가 길고 긴 기다림을 마치고 눈부신 빛의 물결을 일으키며 소리없이 전율했다.

“다시 한 번… 오랜만이에요, 린! 십 년 만이군요.”

<『비뢰도』 제21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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