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봉황이 빈 산 위를 날다
-무주공산
“여기가 중원표국 남창지국인가요?”
“그렇스…… 호곡!”
고개를 돌려 막 대답하려던 문지기 둘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평생 가도 한 번 보기 드문 절세미인이 느닷없이 나타난 탓이었다. 황송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 이었다.
“무, 무, 무, 무슨 용무로 오, 오셨는지요?”
풍 맞은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문지기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섬섬옥수 중의 손가락 하나가 정문을 가리켰다.
“무, 물론입지…… 아, 안 됩니다! 오늘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지기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을 바꿨다. 하마터면 상사의 명을 거역할 뻔한 것이었다.
“열어줄 수 없다는 건가요?”
나예린의 말에 말단 문지기 조강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명을 거역했다가는 마음이 아니라 몸뚱어리 중 한곳이 찢어질 위험이 있었다.
“안타깝지만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소저.”
“할 수 없지요.”
문지기 조강이 다시 한 번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정말 죄송…….”
그런데 나예린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직접 열고 들어가는 수밖에요.”
“예?!”
우스꽝스런 반문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지??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어! 어!’
사락사락!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나예린은 계단을 올라 정문 앞에 섰다. 손 끝으로 살짝 정문을 건드려 본 그녀는 만족했는지 신형을 돌렸다. 그냥 돌아가는가 보다. 조강은 그리 생각했다.
쉬익!
세발짝째 발을 떼던 그녀의 신형이 춤을 추듯 사르륵 회전했다. 동시에 그녀의 애검 ‘빙령’이 새하얀 백광을 내뿜었다.
지잉지잉지잉!
나예린이 자세를 바로 하며 검을 늘어뜨린 후에야 단단한 철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정문에 가느다란 선들이 종횡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우르르릉,쾅!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문은 열두 조각으로 나뉘어져 무너져 내렸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러시죠.”
완전히 넋이 빠져 버린 조강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이것이 꿈인지 생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지기를 뒤로한 채, 나예린은 정숙한 발걸음으로 무 너진 정문 더미 위를 넘었다.
“룡, 방금 저거 검강… 아니에요?”
“그, 그런 것 같소.”
뒤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효룡이 약간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래요? 마치 넋 나간 사람 같잖아요?”
사실 그랬다.
“서, 설마 그 정숙하고 조용하기로 소문난 나 소저가 저런 과격한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해서 말이오.”
“언니 지금 엄청 화났거든요.”
이진설의 대답에 효룡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화났다고요?”
“그래요. 나 언니가 저렇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 봐요.”
효룡의 고개가 또다시 갸우뚱 기울어졌다.
“저 모습 어디가? 나한테는 평소랑 똑같은 것으로 보이오만?”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효룡이 반문했다.
“쯧쯧, 이래서 남자들이란! 당신은 불처럼 뜨거운 분노보다 얼음처럼 차가운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도 몰라요?”
“모, 몰랐소.”
“그럼 지금부터라도 알아둬요. 특히 그 상대가 빙백봉 나예린이라면 더욱더!”
중원표국 남창지국을 가로지르는 나예린의 발걸음엔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땡땡땡땡!
의외의 사태에 얼이 빠져 있던 문지기들이 정신을 차렸는지 경종이 울렸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침입잔가?”
대기하고 있던 표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예린의 앞길을 막아섰다. 일류표국다운 재빠른 대응이었다. 그러나 침입자의 모습을 일견한 순간, 살기등등하던 표정 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모두들 나예린의 미모에 말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저… 어떡하죠, 강 표두님?”
표사 하나가 물었다.
“그, 글쎄…….?
부하들을 이끌고 나예린을 막아선 강 표두 역시 고민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침입자 확실한 거지?”
“아마도요.”
아무리 봐도 침입자 같지 않은 분위기에 즉각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딜 보더라도 침입자라기보다는 귀한 고객처럼 보였다. 저 여인을 공격하려는 자 신들이 오히려 불손하기 짝이 없는 죄인 같았다.
“비켜주시지요.”
무표정한 얼굴로 나예린이 말했다.
“그, 그럽지… 아, 아니지! 아, 안 됩니다, 소저! 비킬 수 없습니다!”
하마터면 그러십시오, 라고 대답할 뻔한 강 표두는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자신의 입이 자신의 의지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할 수 없군요. 비키시지 않는다면 강제로 지나가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나예린은 망설임없이 걸음을 떼었다.
“어, 어쩌죠, 강 표두님?”
당황한 목소리로 표사가 또 물었다.
“에잇, 썅! 그런 걸 왜 자꾸 나한테 물어?”
참다못한 강표두가 버럭 소릴 질렀다.
“그야 여기서 제일 높으니깐요.”
표사가 찔끔하며 대답했다.
“끄응, 할 말이 없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막아야지.”
“정말 괜찮을까요?”
“몰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그들이 티격태격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그들과 나예린 사이의 거리는 극도로 좁아져 있었다.
“에잇, 마, 막아라!”
마침내 강표두가 지령을 내렸다.
“에… 예!”
엉거주춤한 자세로 표사들이 움직였다.
한가로이 나예린의 뒤를 따라오던 이진설이 어쩐지 기뻐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먼저 가세요. 여긴 우리가 치울게요! 문제없죠, 효룡?”
“어? 아! 뭐… 물론이오.”
휙!휙!휙!휙!
퍽!퍽!퍽!퍽!
역시 고수의 싸움은 양보다는 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광경이었다. 십수 명의 표사들이 포위망을 형성해 덤벼들었으나, 다들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두 사 람의 손짓에 차례대로 이리저리 내던져졌다. 검도 쓸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먼저 지나가겠습니다.”
연신 막고 흘리고 던지는 와중에도 나예린의 발걸음은 결코 멈춰지지 않았다.
그녀가 그 다음 문에 다다랐을 때쯤, 멀쩡하게 서 있는 표사는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표두 강씨만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그럼 실례!”
나예린은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중문을 열고 내원으로 발을 옮겼다.
내원에 들어서자 일단의 무리들이 무기를 빼어 든 채 나예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도는 외원을 담당하던 이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들이야말로 중원 표국의 정예라 할 만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이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대표사 천정원이었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중요한 손님이 와계신 판국에!”
언성을 높이며 윤이정이 뛰쳐나왔다. 그의 두 부하인 오가 형제를 이끌고서였다. 하지만 기세등등하던 그의 기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가진 않았 다. 그 역시도 나예린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말을 잊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 따윈 관계없는 모양이었다.
“소저께선 여기 무슨 일로 오셨소이까?”
윤이정이 물었다.
“한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여긴 그런 청탁을 받는 곳이 아니오만……..”
“찾는 사람은 이곳에 있으니 달리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대체 누굴……?”
“이시건이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 이름 석 자에 윤이정의 몸이 불시에 칼 맞은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 그걸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심복밖에 모르는 극비사항을 어찌 저 여인이 알 수 있었는지 윤이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은 이곳에 없습니다, 소저. 장소를 잘못 찾아오신 모양이구려.”
그 사실만은 절대 함구해야만 했다.
“그 말 사실인가요?”
나예린이 두 눈을 맑게 빛내며 물었다.
“물론 사실이오.”
망설임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거짓말이군요.”
확신에 찬 어조로 나예린이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윤이정은 속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변명이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거, 거짓말이라니? 어찌 그렇게 장담할 수 있소?”
“그게 진실이니까요. 방금 전 말씀하신 중요한 손님이란 누군지 무척 궁금하군요.”
나예린의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짓으로 흐려지기에는 너무도 투명해 보였다. 윤이정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 다.
“그래도 여전히 시치미를 떼실 생각인가요?”
“모두 물러가랏!”
윤이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예?”
의외의 명령에 다들 주춤했다.
“듣지 못했나? 여긴 모두 내가 책임진다. 다들 물러가라!”
“하지만 윤 대표두님……..”
누군가의 조심스런 반문은 터져 나온 노성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시끄럽다! 물러가라면 썩 물러가!”
윤이정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불쌍한 표두는 몸을 차렷자세로 경직시키며 대답했다.
“예… 옙!”
더 이상 윤이정을 자극하면 필시 재미없는 일이 일어날 판국이라 표사들은 부랴부랴 물러나기 시작했다. 뜰은 곧 텅 비었다.
“이제 다시 얘길 시작해 볼까요, 소저?”
입가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말했다. 여차하면 입막음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그러나 나예린은 그런 위협에 대단히 둔감했다. “제 요구는 하나뿐입니다.”
변함없는 목소리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이시건, 그자가 어딨는지만 알려주면 족합니다.”
‘그게 되겠냐!’
그것은 자신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었다.
“그건 무척 곤란하오만.
바로 그때였다.
“이야, 이야! 아니,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하신 백도제일미 빙백봉 나예린 소저가 아니신가?”
방문을 열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이시건이었다.
“고, 공자!”
예기치 않은 이시건의 등장에 윤이정이 식겁하며 외쳤다.
“됐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는 윤이정을 제지하며 이시건이 말을 이었다.
“이런 절세가인이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애써 예까지 찾아왔다는데 사내대장부가 꼭꼭 숨어 있을 수야 없지.”
“저 사람 지금 제정신인가요?”
몰래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진설이 어이없는 표정을 하며 효룡에게 물었다.
“수많은 남자들이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으니, 딱히 저 친구 하나만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긴 힘들다고 보오.”
“쯧쯧, 남자들이란……..”
이진설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두 사람은 효룡의 입장상, 그리고 목격자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외원의 표사들을 처리한 후 내원의 담벼락에 올 라앉아 있었다. 거대한 버드나무 덕에 적당히 그늘이 드리워진 사각지대였다.
“흐흐흐, 마침 잘됐소.”
음험한 미소를 한껏 지으며 이시건이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용건이 있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주다니! 수고를 덜지 않았겠소.”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은 이시건 자신도 짐작 못한 일이었다.
‘흐흐흐, 설마 먹이가 제 발로 올가미 안으로 걸어 들어올 줄이야!’
그렇잖아도 어떻게 하면 나예린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다지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던 참에 나예린 자신이 직접 찾아온 것이 다. 이런 횡재가!
이시건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저께선, 돌아가실 생각을 안 하는 게 좋겠소.”
이시건의 눈이 뱀처럼 빛났다.
하도 여러 번 겪는 상황인지라 나예린은 동요하지 않았다.
“과연 댁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까요?”
나예린의 검이 새하얀 백광을 내뿜으며 이시건을 향했다.
“물론!”
갈고리처럼 구부린 오른손을 들어올리며 이시건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주마!’
이시건의 두 눈에서 욕망이 이글대며 불타올랐다.
‘설마 그 기술을 쓸 일이 생길 줄이야……. 살인술도 아닌 포박술 따윈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배울 때만 해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었다.
“그럼 조심하시오!”
자운(雲) 암풍暗風).
비기(秘).
주박인(呪縛刃).
보이지 않는 실의 그물이 나예린을 사로잡기 위해 어둠 속에서 요동쳤다.
“이제 넌 내 거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시건이 외쳤다.
스르륵!
그러나 그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나예린을 포위하려는 찰나, 그녀의 몸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흐르는 물처럼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그 우아한 움직임이 끝나자 어느새 나예린은 포박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어, 어떻게…!”
이시건이 경악하며 외쳤다. 자신의 기술이 간파당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역시 사검이었군요. 하지만 그 정도 기술은 다소 평이해 보이는군요.”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평이하다고?”
자존심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이시건이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당신보다 월등히 사검을 잘 쓰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에 비하면 당신의 실력은 그저 그렇습니다.”
자존심 빼면 시체인 이시건에겐 심장에 비수를 꽂는 말이었다.
““거, 거짓말!”
그딴 걸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군요. 사실입니다.”
나예린의 태도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해 봐도 좋습니다. 직접 증명해 드리죠.”
“오냐! 과연 네년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 두고 보자!”
이성이 날아가 버린 이시건이 외쳤다.
“상처 없이 잡으려고 봐줬더니 기어오르는구나! 과연 이 초식도 받을 수 있을까?”
이시건의 양손이 거칠게 교차했다.
자운(紫雲) 암풍(暗風).
살식(式).
추살령(追殺令).
눈이 뒤집힌 이시건은 살인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자존심은 상처받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정도로는 소용없습니다.”
나예린의 눈이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질풍의 궤적이 그녀의 눈 안에 들어왔다. 그녀는 살기가 지나가는 길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좀 전의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위력적인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죠.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피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나예린은 서서히 용안의 능력을 개방해 나갔다. 모든 것이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예린의 발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수류보(水流步).
물이란 틈만 있다면 어디든지 스며들 수 있다. 그녀가 보기에 이시건의 기술은 여기저기 빈틈투성이였다.
“소용없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다. 자운의 살풍도 그녀에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하, 한 번도 아니고… 두, 두 번이나…….”
자만하던 기술이 연달아 두 번이나 파훼당하자 이시건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이제 순순히 따라오겠습니까?”
나예린이 다시 물었다.
“흥, 웃기는 소리!”
이시건이 코웃음 쳤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패배? 지금 누구더러 패배했다는 거냐?”
분을 삭이지 못한 이시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여기 있나요?”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이시건의 얼굴이 피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흥! 네년에게 한 수 재간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난 패배하지 않았다!”
이시건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말끝마다 년년년이네, 기분 나쁘게! 이래서 남자들이란! 자기가 질 것 같으면 여잘 깔보려 든단 말이에요. 안 그래요?”
숨어서 지켜보던 이진설이 씩씩거리며 한마디 했다.
“그, 그러게 말이오.”
같은 남자라는 사실이 찔리는지 효룡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했다.
“졌으면 졌다고 인정할 것이지, 추하게 말이에요. 안 그래요?”
“그, 그러게 말이오.”
그 한결같은 반응이 이진설의 화를 돋우었다.
“그러게 말이오, 그러게 말이오. 효룡, 당신은 그 말밖에 할 줄 몰라요?”
“그, 그러게 말이오.”
“……”
그 변함없는 반응에 이진설은 그만 털썩 힘없이 어깨를 떨구고 말았다. 필시 효룡도 부끄러웠으리라.
“아직도 자신만만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군요. 비장의 한 수라도 남아 있다는 건가요?”
“흥, 이래서 계집들이란! 봐줬더니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 드는군.”
남성 우월주의에 가득 찬 말투였다. 하긴 지금까지 여자를 노리개 이상으로 본 적이 없는 인간에게 그 이상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면 무리였다. “설마 오늘 이걸 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스윽! 스윽!
이시건이 양팔의 소매를 걷자 팔뚝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토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컹철컹!
토시답지 않은 소리를 내며 그것들이 떨어져 나왔다.
“자, 그럼 이제 이회전을 시작해 볼까?”
쿵! 쿵!
묵직한 연속음이 땅을 울렸다.
“철토시인 모양이군. 저 녀석, 설마 저런 걸 차고 있었을 줄이야…….”
지켜보던 효룡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언닌 괜찮을 거예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진설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켰다.
“흐흐흐! 어떠냐? 놀랐느냐? 뭐 이 몸의 무한한 능력에 경악하는 것도, 훗! 무리는 아니지.”
그러나 나예린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놀라긴요. 그 정도로 식상한 행위에 놀랄 만큼 견문이 좁지는 않습니다.”
“뭐, 뭣! 식상하다고!”
평이함 다음은 식상함이었다.
“그건 몇 근이죠?”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나예린이 물었다.
“듣고 놀라지 마라! 하나에 무려 열 근이다!”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펴며 이시건이 말했다.
“겨우 열 근이었군요.”
시시하다는 어조로 나예린이 한마디 했다.
“뭐, 뭣!”
그 태도에 이시건은 또다시 상처 입었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이 청년에게 상대의 저런 무심한 태도는 가장 참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울며불며 애걸복걸하게 만들어주마!”
분을 참지 못한 이시건이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엄청난 살기…….?”
멀리서 지켜보던 효룡과 이진설의 피부까지 따끔따끔 자극할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좀 전의 투기와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역시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요.”
흔들림없는 눈동자로 나예린이 선언했다.
“패배를 인정하게 해드리죠, 전력으로!”
나예린이 검을 뽑자 주위가 백설이 내린 듯 하얀빛으로 뒤덮이는 것 같았다.
“언니, 진심인가 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소저?”
“전 아직까지 예린 언니가 전력을 다하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하지만 오늘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드네요.” “빙백봉 나예린의 전력이라…….”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걸 아느냐? 이미 네 주위는 나의 손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넌 이제 거미줄에 걸린 나비에 불과해!”
그의 말대로 나예린의 주변은 종횡으로 펼쳐진 사검으로 빽빽하게 잠식당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선 한 발짝을 떼는 것도 위험했다. “자, 이래도 과연 계속해서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이시건이 비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팅!
거미줄처럼 둘러쳐진 사건들이 그 울림에 반응하며 움직였다. 그러자,
사락!
나예린의 백색 치맛자락 한쪽이 살풋 베어져 나가며 그녀의 뽀얀 허벅지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어머, 어떻게 저럴 수가! 사내가 수치도 모르고!”
이진설이 분노하며 외쳤다.
“그, 그러게 말이오, 꼴깍!”
눈을 휘둥그레 뜨며 시선을 한곳에 못 박은 효룡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요!”
“네?”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효룡이 반문했다. 딴 곳에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못 들은 탓이다.
“그 눈 감아요! 콱 찔러버리기 전에!”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이진설이 위협적인 갈고리손을 효룡의 눈앞에 가져갔다.
“네, 넵! 감겠습니다. 감고말고요!”
자신의 눈이 도려 파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효룡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어떠냐? 이제 이 몸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알겠느냐?”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이시건이 소리쳤다. 이렇게 자신의 우위를 확인할 때마다 그는 항상 쾌감을 느끼곤 했다.
“불쌍한 사람….”
“뭐, 뭐라고?”
전혀 동요하지 않은 나예린의 시선이 똑바로 이시건을 향했다.
“남을 학대하고 깔보고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자신의 우위를 확인할 수 없다니, 당신도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군요.”
“뭐, 뭣이!”
이시건의 얼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졌다.
“조금 전의 말은 정정하겠습니다.”
나예린이 말했다.
“무슨 말을?”
“전력을 다하겠다는 말, 취소하도록 하죠. 당신은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니까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 가장 혹독한 판결이었다.
“뭐, 뭐라고!”
분명히 자신의 우위가 분명할 텐데도 이시건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뭐, 뭐냐? 이 더럽고 찝찝한 기분은? 난 분명 이기고 있어! 내가 최고라고!’
그러나 물밀듯 밀려오는 패배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나예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잘려 나간 허벅지 부위의 치마를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는 이시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고 이겨 드리지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자 이시건의 알량한 자존심이 폭발했다.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그 심원한 눈동자를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주마! 그때도 그런 눈으로 날 볼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자운(雲) 암풍暗風).
살식(式).
삭풍참살인(朔斬殺刃).
내원에 거미줄처럼 포위망을 펼치고 있던 자운사가 일제히 나예린을 향해 덤벼들었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나예린도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용안(龍) 개방(開放).
억누르고 있던 용안의 힘이 개방되자 엄청난 정보가 그녀의 눈을 통해 물밀듯 흘러들어 왔다. 그것이 제아무리 복잡한 움직임이라 해도 지금 그녀가 읽지 못할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비설보(飛雪步) 오의(奧義).
현란무답(眩亂舞踏).
바람에 흩어지는 눈꽃처럼 그녀의 신형이 눈보라 같은 잔영을 남기며 흩어졌다.
“뭐, 뭐지?”
나예린의 신형이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시건이 당황하며 외쳤다.
“주, 주군!”
이시건의 등 뒤에 홀연히 나타난 나예린을 먼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오가 형제였다. 사라진 그녀의 형상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정신없이 둘러보던 그들의 눈에 나예린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포착된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위험합니다!”
평소 그다지 충성심이 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나예린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란다면 우선은 이시건이 무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참(斬)!
나예린의 검이 설광처럼 번뜩였다. 상습 부녀자 강간범에게 줄 측은지심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꾸엑!”
돼지 멱따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피가 분수처럼 하늘 높이 뿜어져 올랐다.
“이런!”
수족처럼 부리던 오가 형제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것을 본 윤이정이 재빨리 풍마도법의 살초를 전개했다.
풍마도법(風魔刀法 비기(秘技).
풍마귀혼(風魔歸魂).
거칠고 사나운 도풍이 나예린의 전신을 쇄도했다. 오가 형제랑은 비교할 수 없는 위용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끝까지 침착했다. 지금 그녀는 이 좁은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까지 속속들이 읽어내고 있는 그 녀에겐 풍마의 난동조차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다.
사라라락!
나예린의 검이 춤을 추듯 허공중에 휘저어지자 사납던 바람은 어느새 잔잔한 미풍으로 돌변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나의 도세가!’
여인의 가벼운 손놀림에 자신의 자만하던 도초가 무위로 돌아가자 윤이정은 경악하고 말았다. 경악은 틈을 낳고 틈은 피를 낳았다.
스팟!
그의 빈틈을 정확히 파고든 나예린의 검이 윤이정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큭!”
다급히 나려타곤의 초식으로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지 않았다면 이듬해 오늘은 그의 제삿날이 되었을 터였다.
핏빛 눈보라, 피의 설풍이 휘몰아쳤다. 피의 꽃이 일제히 흩날린다. 그 핏빛 꽃잎의 눈보라 속에서 표표히 움직이는 나예린의 백의에는 단 한 장의 꽃잎도 떨어지 지 않았다.
“강하군요. 정말 강해요. 이 정도로 강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이진설은 거의 넋을 잃은 표정으로 나예린의 신위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차갑고, 그러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검무 안으로 혼이 빨려 들 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게 말이오.”
어느새 눈을 뜨고 그 광경을 넋 나간 듯 보고 있던 효룡이 맞장구쳤다.
“빨리 다시 감아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이진설이 경고했다.
“네, 넵!”
찔끔한 효룡이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왜! 왜! 왜! 통하지 않는 거냐!”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무기력함을 체험한 이시건의 외침은 악에 받쳐 있었다.
““당신이 ‘그 사람’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검무를 멈추지 않은 채 나예린이 대답했다.
“그 사람?”
이시건은 서둘러 양손을 교차시키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자운사를 그물처럼 얽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어차피 당신은 그 사람 흉내밖에 낼 수 없는 가짜에 불과합니다.”
그제야 이시건은 ‘그 사람’이 누군지 감 잡을 수 있었다.
“비류연, ‘그 녀석’을 말함이냐?”
핏대 선 목으로 이시건이 고함쳤다.
“인정하는 거군요?”
나예린의 날카로운 반문에 이시건은 아차 했다.
“엉성하군요, 그 방어!”
나예린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검을 꽂아 넣었다. 빛살처럼 빠른 찌르기는 이시건의 수비를 뚫고 그의 목젖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틀렸다!’
이시건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한동안 기다려도 자신의 목을 꿰뚫는 차가운 감촉이 없자 이시건은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나예린의 검은 그의 목 바로 한 치 앞에서 실낱같은 근소한 거리만을 남겨둔 채 멈춰 있었다.
“아직 당신에겐 들어야 할 증언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하단 이야기였다.
“내가… 내가… 졌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데구르르르!
주먹만 하게 생긴 동그랗고 시커먼 구체 하나가 나예린의 발치로 굴러왔다.
‘설마 폭탄?”
그걸 본 이진설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피해요!”
나예린이 재빨리 몸을 뒤로 날리는 순간,
쿠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눈부신 섬광이 번쩍였다. 너무나 밝고 환한 빛에 나예린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귀가 멍멍했다.
겨우 시야가 회복되었을 땐 이미 윤이정도, 이시건도 없었다. 폭탄이 터진 자리는 멀쩡했다. 파괴 위주의 화탄이 아닌 소리와 섬광으로 사람의 감각을 혼란시키기 위한 일종의 섬광탄이었던 것이다.
“놓쳐 버리고 말았군.”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저 상것들이 감히 도망을! 효룡! 효룡?”
급히 효룡을 부르던 이진설은 이상스레 허전한 무반응에 고개를 홱 돌렸다.
“효… 룡?”
없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효룡의 존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설마 그놈들 뒤를 쫓으러…….”
자신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몰래 갔다는 사실이 얄미웠으나, 이를 눈치 채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역시 이성과 감성은 움직이는 영역이 다른 법이었다.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지?”
급히 신형을 옮기던 이시건과 윤이정의 발걸음이 우뚝 멎었다. 워낙 강력한 섬광탄을 사용한 탓에 장원 주위를 감싼 연막이 아직까지도 완전히 걷히기 전이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라!”
이시건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머리에 녹색 건을 교차해서 두르고 등에는 쌍검을 맨 청년이 연막 속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이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 녀석은… 설마 효룡?”
효룡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네 녀석이 어떻게 여기에?”
의외의 사태에 이시건은 잠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오. 당신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효룡은 평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반문했다. 이시건의 한쪽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사형이라고 해야겠지, 사형(師兄)! 안 그런가, 사제?”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이시건이 말했다. 그는 효룡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했다.
“당신 같은 사람은 내 사형이 아니오.”
“우리 삼공자님께서 무척 매몰찬 말씀을 하시는구만 그래. 같은 동문끼리 말이야.”
명백한 비아냥에 효룡의 검미가 분노로 꿈틀거렸다.
“난 겁쟁이 도망자 따윌 사형으로 둔 기억이 없소.”
예전부터 그는 저 이시건이란 인간이 생리적으로 싫었다.
“거, 겁쟁이? 누구더러 감히 겁쟁이 도망자라는 거냐! 이번엔 그냥 물러나 준 것뿐이야. 그년의 실력으로 이 몸에게 감히 상처라도 하나 입힐 수 있을 것 같나?” 흥분한 목소리로 이시건이 외쳤다.
“이미 입혔는데?”
손가락으로 이시건의 한쪽 뺨을 가리키며 효룡이 말했다.
“뭐?!”
급히 오른쪽 뺨에 손을 가져다 댄 이시건은 깜짝 놀랐다.
“어, 어느새…….?”
뺨을 가르는 기다란 자상傷)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이고 눈치도 못 챈 모양이군.”
효룡은 코웃음을 치며 조소를 터뜨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소. 왜 이런 일을 저지른 거요? 지금 마천각이 굳이 천무학관과 척질 일은 없을 텐데?”
“네 녀석 따위에게 알려줄까 보냐? 정 궁금하다면 스스로 알아봐라.”
“설마 그것이 각주님의 의사는 아니겠지?”
“글쎄, 과연 어떨까?”
이시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시건!”
효룡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시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흥, 사형이라 불러라! 이 무례한 놈아! 당장 훈계를 내리고 싶다만 지금은 너랑 노닥거릴 시간이 없구나. 오늘은 바빠서 이대로 물러난다만 다음에는 용서없다.” 이시건은 마음이 급했다. 저 버르장머리없는 사제 녀석하고 입씨름할 여가 따위 단 일각도 없었다. 당장 가서 응급처치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잘생긴 얼굴에 흉터가 남잖아!’
그런 일은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못 봤소.”
오늘은 떠보려고 온 것이지 부러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었다.
“두고 봐라. 두고 보면 알게 된다. 아참! 재회의 선물로 좋은 걸 알려주지. 다시는 돌아올 생각을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이미 네가 있을 장소 따위 그곳에 없으니 말 이야.”
“닥치시오!”
효룡이 외쳤다.
“아하하하하하!”
이시건은 폭소를 터뜨리며 담을 넘었다. 효룡은 뒤쫓지 않았다.
“어떻게 됐어요, 효룡?”
터벅터벅 걸어오는 효룡을 발견하고 이진설이 반색하며 물었다.
“놓쳤소. 미안하오.”
풀 죽은 말투로 효룡이 답했다. 그의 머릿속은 조금 전 있었던 일들로 매우 복잡했다.
“할 수 없지요.”
이진설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혹시나 하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 탓에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상심한 모습을 보자 효룡은 괜시리 미안 해졌다. 물론 그의 미묘한 입장 때문이긴 했지만, 이시건의 추격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 여길 뜰까요? 별 도움도 안 됐는데 얼굴 비추기도 그러네요.”
몰래 따라온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와달라고 요청받은 처지였지만, 기실 체면치레를 할 만한 공적은 하나도 세우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구경꾼에 목격자일 뿐이 었다. 그렇게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별다른 활약도 못하고 석상처럼 멍하니 서 있었더니, 나예린을 만나기가 왠지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 고 싶었다.
“그것도 그렇구려. 어서 이 자리를 뜹시다.”
여기 계속 머물고 싶지 않은 것은 효룡도 마찬가지였다.
나예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딜 가려 하니? 이제 그만 나와도 괜찮다.”
잠시 뜸을 들이는 사이 이진설과 효룡은 몰래 빠져나갈 기회마저 잃고 말았다.
“헤헤! 미안해서 어쩌죠, 언니! 내가 도울 건 하나도 없었네요.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 말이에요.”
숨어 있던 곳에서 효룡과 함께 걸어나오며 이진설이 실망스런 어투로 말했다.
“그걸로 충분했으니 상심할 것 없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었고, 나 이외의 증인이 필요했던 것이니까. 지금은 소용없어졌지만. 이시건이 도망간 이상,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중원표국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요?”
현 무림맹주의 금지옥엽이 중원표국 남창지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크나큰 문제로 번질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저들도 찔리는 게 있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겠지. 그 이시건이란 인물이 왜 이곳에 머물러 있었는지 설명해야 할 테니까. 그리고 만일 문제 삼는다 해도…….”
“해도?”
“이미 각오한 바다.”
예전의 나예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면모에 이진설은 깜짝 놀랐다.
‘무엇이 언니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은 것일까?”
오늘 일들은 무엇 하나 쉽사리 납득되는 것이 없었다.
“효 공자께 괜한 폐를 끼쳤군요.”
“아, 아닙니다. 폐라뇨… 그런 황송한 말씀을…….”
잘려진 치마사이로 드러난 나예린의 눈부신 각선미에 시선을 몽땅 빼앗겨 버린 효룡이 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딜 봐욧!”
쐐애애액!
이진설의 두 손가락이 매의 발톱처럼 쾌속하게 효룡의 두 눈을 찍었다.
“크아아아아아악!”
한 남자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미안해요, 류연.”
나예린이 시선을 낮추자 긴 속눈썹이 투명한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니, 뭘요?”
비류연이 아연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 사람, 사로잡으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 놓치고 말았다. 정말 아까운 일이었다.
“….설마 직접 움직인 거예요?”
나예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비류연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성공이네요.”
무척이나 밝은 목소리였다. 나예린은 문득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자신은 실패했고 그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걸까. 비류연은 마 치 자신의 처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예린이 직접 움직였잖아요, 몸소. 아마 적극적으로 세상에 대응하기로 한 거겠죠?”
범인을 잡기 위해 나예린이 몸을 움직인 일은 수많은 규칙을 무더기로 내던져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어쨌든 실패는 실패였다.
“괜찮아요. 나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은 없으니까. 그에 비하면 그런 피라미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어요. 이미 손도 써놨고…….”
사실 나예린이 직접 움직이는 일이야말로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뭔가를 해주고 싶었어요.”
나예린이 보일 듯 말 듯 살짝 얼굴을 붉히자, 비류연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번쩍!
그때 좋은 생각이 비류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요? 그럼 잘됐네요. 오직 예린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거든요.”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그게 뭐죠?”
“그건 바로…….”
“……?”
“사식!”
“사식?”
비류연이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 손수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요.”
지금껏 그 누구도 감히 꺼내볼 생각을 못했던 말을 비류연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꺼냈다. 만일 여기에 빙백봉 나예린의 추종자가 있었다면 거품을 물고 기절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그건…….”
나예린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설마 그런 부탁일 줄은 상상도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다시 이시건을 잡으러 가는 게 더 편할지도…….?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사실 한 번도 해본 적이……..”
“괜찮아요. 누구든 뭔가를 하려면 처음이란 걸 겪어야 하잖아요? 이번처럼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용기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예린은 이미 용기를 갖추고 있으 니 문제없어요. 내가 보증할게요.”
비류연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왠지 정말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정말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날 믿어요.”
주변에서 가장 신뢰받고 있지 못한 이의 말이었다.
“그럼 한 번…”
아직은 망설임이 남아 있는 어조로 나예린이 중얼거렸다.
‘작전 완료!’
비류연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