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의 월담자
-달의 그림자
해가 그림자를 만들 듯 달도 그림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간과하고 지나친다. 다만 밤의 어둠 속에서 그녀[月]가 만든 어둠이 그리 돋보이지 않을 뿐 인 것을.
스스스슥!
달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와 밤의 어둠이 중첩된 곳, 높고 긴 담벼락을 따라 길게 덧씌워진 어둠에 묻혀 두 개의 그림자가 은밀히 내달린다. 달빛의 온정마저 거부 당한 이곳을 바람처럼 달리는 두 인영(人影)의 발에는 침묵이 덧신겨져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정문이었다. 여타의 장원들처럼 그 정문 위에는 편액이 걸려 있을 것이고, 그곳에는 중양표국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오른쪽 기둥 에 달린 편액에는 남창지국이라고 적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곳에 사람들이 드나들라고 만들어놓은 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정문이 란 것을 이용하는 것을 사회에 만연한 관습에 자신들의 정체성이 매몰되는 행위로 간주하고, 그것에 적극 저항하기로 했다.
그들의 결심은 매우 바람직하게도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졌다. 원래 들어오지 말라는 거부의 목적으로 설치된 물건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 환이었다. 그러나 이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은 월담이라는 비교적 식상한 행동으로 전환됨으로써 허무한 종말을 맞이했다.
선두에 선 남자가 검지로 조용히 입을 가리더니 먼저 담 위로 뛰어올랐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뛴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무척 가뿐하게 담 위에 몸을 올 려놓았다. 두어 번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핀 첫 번째 남자가 왼손을 두 번 움직여 두 번째 남자에게 신호를 보내자 아래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마지못한 듯 도약했 다. 그러자 기다란 끈 하나가 어둠 속에서 뱀처럼 출렁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기다란 끈 하나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 남자는 이것을 통해 신호를 보냈던 것 이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릴 듯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기 두려운 듯 두 사람의 운신은 지극히 조심스럽고 정숙했다. 곧이어 둘은 담 옆에 일 마장 쯤 떨어져 심어져 있던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도약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저기군!’
첫 번째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표한 곳을 찾았다. 그들이 찾는 곳은 이 야심한 시각에도 아직 불이 켜져 있을 터였다.
“저기가 바로 국주 집무실…….’
비록 임시라고는 하나 이 두 사람이 목표하고 있는 곳은 바로 저곳이 분명했다.
두 침입자가 막 몸을 움직이려 할 바로 그때였다. 비상(飛翔)하기 위해 가지를 박차다가 실패한 새처럼 두 사람의 신형은 도약하려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 다.
“움직이지 마라!”
‘헉!’
비록 한밤중에 등 뒤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울려 퍼진 여인의 목소리였다고는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덜미 옆에서 달빛을 머금은 채 요요히 빛나고 있는 길고 가느다란 날붙이는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이런!”
첫 번째 남자의 움직임이 봉쇄되자 그 즉시 두 번째 남자는 자신의 처지도 망각한 채 신형을 뒤로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 역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게! 뒤통수에 구멍나고 싶지 않으면!”
남자의 목소리가 채 울려 퍼지기도 전에 어느덧 날카롭고 뾰족한 무언가가 밤의 한기를 모은 차가운 냉기를 그의 골수 속까지 저릿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뒤통수 가 시큰했다.
“자자, 가만히 있게. 난 담이 작아서 사소한 일에도 깜짝깜짝 잘 놀라거든. 만일 자네가 움찔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너무 놀라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를지도 모르고, 그럼 자네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사람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나? 나도 이런 야심한 밤에 검에 묻은 피나 닦고 앉아 있긴 싫다네. 그건 너무 처량한 노릇 아니겠나?”
눈 깜짝할 사이에 기척도 없이 두 번째 남자의 배후를 점한 남자스스로 소심하다고 주장하는ᅳ의 목소리는 태연하다 못해 일말의 장난기까지 섞여 있었다. “검은 집어넣어라.”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어느새 첫 번째 남자의 검이 달빛 아래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한 치만 더 나아갔다면 출검하여 검기를 사방에 흩뿌렸으리라. 앉은 자세 그대로 검병을 쥔 오른손은 그대로 둔 채 왼손으로 검집만을 뒤로 잡아 빼 검을 뽑으려 한 남자의 발검술은 매우 고명했지만, 아쉽게 한 치 차로 간파되고 말았다.
“자네는 그냥 손만 떼면 되겠군.”
두 번째 남자의 뒤통수에 검극을 갖다 대고 있는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위협적인 기색은 전혀 없었다.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지 는 그런 태도였다.
두 번째 남자는 겨우 왼손 엄지로 검을 조금 밀어 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이런 작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 사람의 실력 차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둘 다 제압당하기
는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첫 번째 남자의 목을 썰기 바로 일보 직전인 듯한 여인이 잠시 짬을 내어 차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며칠 전부터 이 주위를 서성거리던 놈들이 바로 자네들인가?”
“…..”
대답이 없자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중년 사내가 낮지만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신녀의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대답해라!”
그는 여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 성의가 부족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놈들이 감히!”
침묵은 중년인의 화를 더욱 돋구었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 동안 정체불명의 자들이 주위에 어슬렁거려서 수상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밤에도 푹 잘 수 없었지! 하나 오늘 너희들을 붙잡았으 니 오늘부터는 숙면을 취할 수 있겠구나. 그런데 너희 둘이 그토록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 번거롭지만 직접 알아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성가셔 하는 기색이 역력한 말투였다.
“두 사람 다 천천히 돌아서라! 단,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어떤 꼴을 당할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자, 돌아서라! 어서!”
쭈뼛쭈뼛 몸을 긴장시킨 채 두 사람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자루의 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압력은 두 사람을 질식시킬 정도라 허튼수작은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모두 돌아섰다.
그러나 둘 모두 두건을 쓰고 있던 탓에 여전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벗어라!”
그러자 첫 번째 남자가 매우 수줍어하는 동작으로 앞섶의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거기 말고!”
중년인이 당황하며 외쳤다. 그의 시선이 급히 여인을 향했다. 차라리 쳐다보지 말 것을. 남자는 후회막급한 마음만 안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을 특이한 취미의 소유자로 의심하고 있는 여인의 시선은 그에게 살인하고 싶은 충동과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사내는 그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 을 벌여야만 했다.
“에잇, 누가 옷을 벗으라 했느냐! 두건을 벗으란 말이다! 두건을! 니놈들 낯짝을 가리고 있는 그 빌어먹을 놈의 두건 말이다!”
중년인의 입에서 평상시라면 입에 담지 않았을 거친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내의 일갈에 움찔하긴 했어도 계속 머뭇거리며 명령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왜 그러느냐? 뭐라도 숨기는 게 있느냐? 무슨 비밀이 그리도 많다고 망설이는 게냐? 어서 벗어라!”
그리고는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두건 말이다, 두건!”
그러나 붙잡힌 둘의 행동은 여전히 굼떴다.
빠직!
중년인의 인내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벗고 싶지 않으면 벗지 않아도 된다. 의지를 투철히 관철시킨 그 상으로 자네들은 검이 사람을 베는 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안계 를 넓힐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중에는 두건 벗기기 같은 기술도 있을 수 있겠지.”
첫 번째 남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천천히 두 손을 두건으로 가져갔다. 이윽고 두건의 그림자 속에 감춰져 있던 어둠이 달 빛 밖으로 끌려 나왔다.
“헉!”
진소령의 입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녀는 즉각적이고 신속하고 강력한 퇴마행(退魔行)을 결심했다. 가까이 있던 유은성이 가까스로 말리지 않았다면 그녀의 검은 두건을 벗은 첫 번째 사내의 몸을 정확히 이십칠 등분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조카는 결혼하기도 전에 과부가 되고 말았으리라. “네, 네가 어떻게……?”
두려움을 모르는 이 철의 여인도 목소리를 떨 때가 있었다.
“분명 죽었을 텐데?”
그녀는 죽었어야 할 자의, 비석에 새겨지는 것 이외에 목적을 상실했어야 할 그 이름을 불렀다.
“…남궁상! 네가 어떻게 여기에……?”
두건 속에서 나타난 얼굴은 다름 아닌 며칠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남궁상이었다.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깜짝 놀란 진소령이 비전문적인 퇴마행을 결심한 것도 충 분히 납득 가는 처사였다.
“그게 저…….?
사실 남궁상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로 아미신녀 진소령만한 최악의 선택은 따로 없었다.
“자네가 지금 날 희롱한 건가?”
그녀의 경악이 분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불초소생이 감히 어찌…….”
남궁상은 정말로 억울했다. 그러나 그런 변명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난 항상 죽은 자가 부활하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했었다. 어디 임사체험기를 들어볼까, 아니면 염라전 탈출기라 해도 상관없다.”
스릉!
진소령의 검이 남궁상의 턱 끝에 가 닿았다.
“그… 그러니깐… 그게… 저…….”
쿠당탕탕!
남궁상이 일생일대의 위기에 몰려 있을 바로 그때 느닷없이 문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과격하게 임시집무실 방문을 박차고 나온 장우양이 양손을 가 로저으며 달려오면서 외쳤다.
“앗!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벌새의 날갯짓만큼이나 분주한 팔만큼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
“그분들은 침입자가 아닙니다!”
겨우겨우 네 사람이 모여 있던 나무 밑에 당도했을 때 장우양의 숨은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럼 뭐란 말입니까, 장 국주?”
약간 의심 섞인 어조로 유은성이 물었다.
“그분들은… 헥헥!”
장우양은 잠시 고상하게 두 번 심호흡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유은성이 그를 진정시켰다.
“가, 감사합니다.”
야생마처럼 날뛰던 숨을 겨우 진정시킨 장우양이 다시 외쳤다.
“이, 이분들은 그러니까… 제 손님들입니다!”
진소령과 유은성은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손님?”
유은성은 비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참으로 독특한 방식으로 들어오는 손님이군요, 장 국주.”
게다가 그중 한 명은 지금 지하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어야 할 처지였다.
“손님이라 함은 이들이 이 시각에 이곳에 올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진 여협!”
장우양이 식은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진소령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남궁상을 향했다. 남궁상은 자신을 해부하는 듯한 그 심원한 눈빛에 가슴이 뜨끔했는지, 아니면 켕기는 게 있어선지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외면했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귀신이라……. 그럼 그 죽은 귀신의 동반자가 누구인지 한번 보도록 할까요?”
그녀의 검끝이 두 번째 남자를 향했다. 검끝의 날카로움만큼 진소령의 목소리도 싸늘했다.
“얼굴을 보여라!”
두 번째 남자 역시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천천히 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그러자 그 밑으로 약간 앳돼 보이지만 준수한 용모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이쪽은 모르는 얼굴이로군.”
그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수치스러운지 미간을 찡그린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직 감정 조절이 미숙하다는 증거였다.
“이름을 대라!”
“절… 절휘라 합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성(姓)은?”
다시 청년은 머뭇거렸지만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손씨입니다.”
진소령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강호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에 비해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견문이 넓은 유은성은 그 성씨에 짚이는 점이 여럿 있었 다.
허리에 매달린 검을 볼 것도 없이 청년은 검객이었고, 그것도 그 나이 또래에서는 짝을 찾기 힘들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저 정도의 젊은 신진고수를 배출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문파나 가문을 세는 데는 열 손가락이면 족했다. 복식으로 보거나 검으로 보거나 신태로 보건대 귀한 집 도련님 티가 역력했다. 엄격한 단체 생활을 하는 대문파의 제자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검존 그분과는 어떤 관계냐?”
청년은 유은성의 물음에 흠칫하는 것 같았으나 존재의 뿌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 조부님 되십니다.”
공손절휘는 사실대로 고했다.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유은성은 나직하게 읊조렸다. 장우양은 깜짝 놀랐다. 그는 유은성만큼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 젊은 청년 역시 상당한 거물이었던 것이다.
“젠장.
장우양은 자신의 인맥을 이토록 넓혀준 어느 한 사람을 향해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런 식으로 연관돼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손절휘의 신분이 탄로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소령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이 청년의 족보 탐색은 전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현재 그녀 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의문뿐이었다.
“자, 죽었다던 남궁상 군! 지금 자네가 죽음의 권능을 부정하며 화려하게 부활한 게 아니라면 이제 자초지종을 들어볼까?”
거부를 용납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도 듣고 싶군. 게다가 무슨 일이 두 사람 사이를 그렇게 끈끈한 인연으로 묶어놨는지도 궁금하다네.”
남궁상과 공손절휘의 팔목에 묶여 있는 가죽 끈을 가리키며 유은성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게… 저…….”
자신의 변명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을 경우 자기를 놀라게 한 대가를 매우 알뜰살뜰하게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한 그녀의 서늘한 안광을 정면으로 받으 며 남궁상은 감히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깐 그게 말이죠…….”
목숨은 아직 아까운 관계로 사건의 핵심이자 몸통이자 원인이자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비류연의 이름은 쏙 뺀 상태에서 남궁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