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낚시
-두건이냐, 수갑이냐
“뉘쇼?”
공손절휘가 경계심이 섞인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냥 평범한 낚시꾼일세. 월척을 잡기 위해 먼저 미끼를 잡으러 온.”
남궁상의 말은 다르게 들으면 공손절휘의 가치를 매우 평가 절하하는 모욕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미끼밖에 안 되는 그런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거요?”
분노한 목소리로 그가 반문했다. 예상대로였다. 그처럼 아직까지 한 번도 좌절을 맛보지 않은 젊은이는 그 알량한 자존심에 작은 불씨 한 조각만 던져 줘도 산불처 럼 타오르게 마련이다. 자신도 한때 그랬던 적이 있었었다. 그것은 미숙함의 또 다른 증거이건만 이들은 절대 그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좋아, 일단 불은 붙여놓았고…….?
여기까지는 의도대로였다.
“쉽군. 나도 많이 늘었는걸.,
계획은 맥빠질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만큼 단순하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마는 것이다.
많이 당하다 보면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남궁상은 손가락의 관절을 풀면서 여기에 오기 전 푸석푸석해 보이는 창살을 사이에 두고 비류연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오늘이냐?”
“예, 반드시 나타날 겁니다. 일단 학관 밖까지는 둘이서 나갔다가 순찰은 저 혼자 돌 겁니다. 분명 노리고 있을 겁니다.”
“정말 멍청이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그럴 거라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역시 그렇죠? 오일이나 똑같은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싸죠. 하지만 지난 사 일 동안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했으니 오늘만 예외로 삼으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듭니다.”
“마침 잘됐네. 이번 기회에 ‘그걸’ 한번 시험해 봐라.”
“예에? ‘그걸’ 말입니까? 하지만. ….”
“왜?”
“그건 아직 미완성입니다.”
망설임이 가득한 대답에 비류연은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바보냐? 미완성이니까 시험해 봐야지. 이미 완성됐다면 뭣 하러 귀찮게 실험 따윌 하겠어?”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그것도 그렇군요.”
“그런 거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 부려도 되는 걸까요?”
여전히 안심이 안 되는지 남궁상이 재차 질문했다.
“여유?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하는 게 좋을 거다. 아마 그게 사실일 테니까 말이야.”
“그런 겁니까?”
“그런 거야.”
비록 마지막 말이 매우 미덥지 못하긴 했지만 남궁상은 비류연의 말에서 깨친 바가 있었다. 실전에 앞서서 확인을 위한 예행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한번 해볼까?”
남궁상은 결심의 끈을 더욱 확고히 조이기 위해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조용히 속으로 되뇌며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큰 비무를 앞두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확신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바람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일전에서 상대와 맞붙어 이기면 그는 자신감이라는 크나큰 선물을 얻 게 되고, 그 선물은 그의 마음을 굳건히 지키는 방패가 된다.
“아마 이자도 그런 생각으로 이 일을 벌인 거겠지.’
어느 정도 같은 입장이 된 지금에야 비로소 그는 상대의 심리를 일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저쪽도 누군가 쓰러뜨릴 상대가 있는 것이다. 목표가 있다. 그 목 표를 향해 저자는 검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남궁상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건가, 아니면 자업자득(自業自得)? 설마 대사형은 거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남궁상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냐, 그냥 우연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했다. 이 이상 대단해지면 매우 곤란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현실에서 일단 잠시 눈을 돌리고 있기로 했다.
“이보게, 자네! 한 가지 충고해도 되겠나?”
마침 신경을 딴 데 분산시키기에 그만인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말해보시오.”
사내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두건, 벗는 게 어떤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남궁상의 말마따나 이 사내는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물론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필요없소!”
안 벗겠다는 이야기였다. 예상대로의 대답이었지만 그냥 수긍할 생각은 없었다.
‘서로 의견이 안 맞는다 해서 그냥 포기할 수야 없지!”
섣부른 포기는 잠시 접어두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 의사 조율의 과정을 거쳐야만 올바른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침 그의 허리에는 유사시의 의견 조율을 위한 훌 륭한 도구가 매달려 있었다.
“그건 곤란하군. 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참지 못해서 말이야. 그리고 이건 사실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세. 그 시꺼먼 장신구는 정말 자네한테 안 어울린다 그 말일세. 이참에 다른 장신구를 찾아보는 게 어떤가? 음, 이를테면… 검고 단단하고 무거운 팔찌 같은 것 말일세. 일부 사람들은 수갑이나 족쇄라고 멋없이 부르 기도 하지만 해놓고 보면 꽤 볼만할 걸세! 어떤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해 가는 남궁상의 이죽거림은 이제 꽤 경지에 올라 있었다.
“괜한 참견 마시오. 정 그렇게 죽을 정도로 남의 옷맵시를 바꾸고 싶다면 말보다 실력이 어떻겠소?”
“힘으로 해보라 그건가? 그것 좋군.”
남궁상은 그 말에 엷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의견이 일치한 모양일세.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으니깐!”
비류연과 만난 이후 그는 이미 세상이 자기 생각대로 순순히 돌아간다는 몽상은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백 마디 말, 천 번의 기도보다 한 번 움직이는 게 더 낫다는 것이 비류연의 입버릇이었다.
“그럼 떼러 가겠네.”
친절한 예고와 함께 남궁상은 편안한 발걸음으로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어, 어…….”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사내는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올 줄은 알았지만 저런 식으로 느긋하게 오리라고는 예상치 않았던 것이다. 폭풍처럼 매섭게 공격해 들어올 줄 예상하고 있던 그는 온몸의 긴장이 일시에 풀려 버릴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수작인 거지??
그는 다시 풀어지려는 긴장의 끈을 팽팽히 잡아당겼다. 상대방이 자신의 두건을 정중히 떼러 올 리는 만무했다. 그도 남궁상을 향해 마주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상대적으로 존재하던 공간이 두 존재의 움직임에 따라 점점 더 짧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오른쪽 어깨와 남궁상의 오른쪽 어깨가 일직선이 되 자 줄어든 거리에 반비례해 긴장감은 더욱더 높이 증폭됐다. 공간이 사라지자 시간 또한 사라진 것 같았다.
다음 걸음을 내딛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느리게 다가왔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둘의 머릿속으로 수백 가지 공격 초식과 그에 대응하는 같은 수의 방어 초식이 섬전 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둥!
두 사람의 왼발이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여전히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궁상은 검의 손잡이를 향해 움직이는 자신의 손등에 나 있는 미세한 잔털 하나 하나까지 셈할 수 있었다. 그가 털들을 이백오십 개 정도까지 셌을 때쯤에야 겨우 그의 손이 손잡이에 가서 닿았다.
남궁상은 매우 천천히 뒤돌아섰다. 눈앞에서 상대의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과 명장(明匠)의 힘찬 담금질 아래에서 제련된 훌륭한 보검이었다. 푸른
한기가 감도는 잘 연마된 칼날은 물론 장식 또한 흠잡을 데 없었다. 틀림없이 이름 높은 명검일 것이다.
‘저 정도 보검이면 분명 한 집안의 가보쯤 될 것 같군. 우리 남궁세가에도 저만큼 뛰어난 보검과 견줄 수 있는 검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자루밖에 없어! 그렇다 면…….’
꽤 명망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은 쉽사리 추측할 수 있었다.
‘역시 팔대세가 중 한곳인가? 그런데 저런 귀한 물건을 이런 잡한 일에 쓰다니! 아무래도 대사형의 추리대로 철이 덜든 도련님이 틀림없는 모양이군.’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자 그제야 남궁상은 한 가지 까먹고 있던 일을 생각해 냈다.
‘아참, 검이 날아오고 있는 중이었지!’
지루한 시간 속을 열심히 용쓰면서 날아온 검은 이제 그 끝이 거의 그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특급 보검이다 보니 스치기만 해도 깊은 상처를 입을 위험이 있었다.
“우선 피해야겠군.’
남궁상은 천천히 생각하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찔러 들어오는 검은 굉장히 느린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몸이 빨리 움직이지는 않 았다.
‘어라? 왜 이러지?”
다가오는 검의 느릿한 속도만큼이나 그의 동작 역시 굼떴다. 자칫 잘못하면 시간을 못 맞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행히 남궁상은 천천히 그 검을 딱 일 촌의 거리를 두고 살짝 피했다.
두건 위로 빼꼼히 나와 있는 사내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진다. 속눈썹 개수를 다 셀 때쯤 그의 눈이 다 떠졌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군. 쯧쯧쯧, 남궁상은 혀를 끌끌 찼다. 좁쌀만큼 조그맣던 허점이 갑자기 깊은 구덩이처럼 커졌다.
‘쯧쯧, 평정을 잃으면 안 되지. 마음이 겉으로 다 드러나잖아?”
남궁상은 혀를 차며 검을 뻗었다. 검이 두건 밑으로 파고든다. 어, 저기서 더 커질 수도 있나? 사내의 부릅떠진 눈은 이제 거의 찢어질 듯하다.
숨통을 끊을 기회는 충분했다.
‘안심해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죽은 미끼는 미끼로서의 가치가 없다. 그런 사태는 피해야 마땅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보람이 없지 않은가.
두건 밑으로 파고든 검이 사내의 볼 쪽으로 빠져나온다. 손목을 살짝 흔들자 두건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꽤 준수한 얼굴. 아직 어리군. 젊다고 하 기보다 어리다. 열아홉에서 스물 정도? 분명 입관 희망자겠지. 이 정도 실력이면 굳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될 텐데? 저 어린 친구의 목표가 천무학관 입관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에 놀란 청년이 다시 헛손질한 검을 몸 앞으로 끌어들이며 제이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싸디비싼 검끝에서 밤 처럼 짙은 살기가 일렁인다.
오래된 강호의 격언(?) 하나가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에이, 설마 아니겠지? 잠시 회의하고 있을 때를 틈타 다시 이격이 발출되었다. 첫 번째보다 훨씬 사납고 흉포한 일격이었다.
“너무 놀라 이성이 마비됐나? 어쨌든 죽을 수야 없지.’
아, 물론 죽긴 죽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검병을 틀어 사내의 검끝을 교란시켰다. 남궁상의 검신에 미끄러진 검이 방향을 잃고 표 류한다.
파바바밧!
궤도가 비껴난 검이 부르르 진동했다. 이윽고 검영이 흐릿해지며 검의 개수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중 좌측 상단 왼쪽에 있는 것과 우측 하 단에 있는 변초 두 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허초…….?”
남궁상은 검을 날래게 움직이며 분화된 검들과 차례로 맞서 나갔다. 상대만 느린 게 아닌지라 움직임에 있어 낭비란 용서될 수 없었다. 그는 세 개의 검을 향한 가 장 짧은 직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가장 짧고 효율적인 동선을 상정했다. 거리가 부족하다면 몸을 움직여 부족한 거리를 채우면 된다.
어차피 공간이란 상대적인 것! 절대 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아!’
아마 대사형의 말이었지?
‘하나!’
쨍!
그는 우선 심장을 향해 다가오는 첫 번째 검을 막아냈다. ‘둘!’
두 번짼 배를 향해 날아오는 검격을 막을 차례였다.
‘세 번짼 넘어가고!”
꼭 검으로 막아야만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요는 몸에 꽂히지만 않게 하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쉽지!’
남궁상이 왼쪽 다리를 뒤로 천천히 빼자 그의 몸이 뒤를 향해 반원을 그렸다. 간발의 차로 검날이 그의 배를 비껴갔다.
‘계산대로군!’
한번의 운신으로 상대편 검과의 거리는 급속도로 단축되어 있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남궁상은 검을 조금 뻗었다. 검끝에 실려 있던 검력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서 남궁상은 잠시 고민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어디를 만져 줘야 할지 매우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잠시 잠깐 대사형의 평소 고충을 이해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묘수(妙手)보다는 정석(定石)을 택하기로 했다. 그가 택한 곳은 무릎과 발 사이로 보통은 정강이라 불리는 곳이었 다.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항상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부친의 말을 되새기며 남궁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사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뻑!
사내의 입이 매우 천천히, 그러나 고래의 그것처럼 큼직하게 벌어졌다. 남궁상은 마치 깊고 거대한 동굴의 어두운 내면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잠시 사로잡혔다. 그는 그 안에 있는 치아의 개수와 혀의 돌기까지 볼 수 있었다. 잘하면 목구멍의 깊이도 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비명이란 것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잘 안 들렸다. 때문에 그는 인간의 입에서 인간 같지 않은 소리를 끌어냈다는 사실에 대해 별로 양심의 가 책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서야 남궁상은 비로소 나른하면서도 몽환적인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는 생각이란 걸 해보았다. ‘어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쓸모없는 생각이었다. 기껏 해봤는데. 남궁상 역시 뭔가 꿈을 꾼 것 같았다.
“어라라라?”
아무리 다시 떠올려 보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몽롱하고도 꿈결 같으면서도 왠지 나른하고 조금은 지루한 그 감각을 다시 재생할 수 없었다. 아무리 다시 떠올려 보고 재현해 보려 해도 모든 기억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휘발된 이후였다. 이제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몸뿐이었다.
“언젠가 그걸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갈증이 그의 목을 잠식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미지의 경지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바로 열린 시야라는 건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과 초절정고수들이 보고 있는 시야가 전혀 다른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잠시 그 세계를 맛보기만 겨우 해본 수준이었다. 여 전히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눈높이를 높여라. 안그럼 끝장이다.”
아미신녀와의 결투를 위해 특훈을 하던 그에게 비류연이 했던 말이었다.
“대사형도 조금 전의 그런 세계를 보고 있었던 걸까?”
“네가 그런 비전을 장시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시계는 막대한 정신력 소모를 초래한다. 아직 너에게는 무리야.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 장 시간은 무리겠지만 잠시 잠깐이라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문제는 자신이 원하던 때에 스스로의 의지로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 너는 순간적으 로나마 그 시계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 네가 그녀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길뿐이다.”
스르륵!
둘의 신형이 교차했다.
서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 후에도 여덟 발자국을 더 간 다음에야 남궁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경악하고 있는 공손절휘의 얼굴을 바라보 았다.
“어떤가?”
그의 손에는 어느새 벗겨냈는지 모를 두건이 들려 있었다.
“그 편이 훨씬 보기 좋군.”
“믿기 힘들군.”
몽롱한 눈빛을 한 채 나른하게 이어진 남궁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중 진소령이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신뢰하기 힘든 기억에 의지하고 있는 주장이었다.
“그건 자네 주장이고… 우선 기억도 못한다면서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나?”
유은성이 지적했다.
“감(感)입니다!”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남궁상이 대답했다.
“오늘 세상의 감이 다 떨어지겠군. 이보게, 자네. 이 친구 말이 사실인가?”
당사자에게 물어봤자 헛수고라고 생각한 유은성은 생각을 바꿔 공손절휘를 향해 진위 여부를 물어보기로 했다.
“모릅니다.”
공손절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제가 졌다는 것뿐입니다. 느릿느릿하다니요? 그것은 바람보다도 더 빠르고 번개처럼 신속한 공방이었습니다.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품이 나오는 그런 결투는 벌인 적이 없습니다.”
공손절휘는 잠시 매서운 눈으로 남궁상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의 의식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군.”
“다만…….?
공손절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제가 기억하는 것은 검광이 어지러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저 사람은 뭐가 그리 좋은지 몇 번이고 실실실 쪼갰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언제…….”
그때 진소령이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언쟁을 중지시켰다. 그녀의 손짓 하나에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현재 상황의 주도권과 권력 서 열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그 젊은 나이에 자신이 벌써 ‘심안(心眼)’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진소령이 남궁상으로서는 생각도 못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이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더욱 신빙성이 떨어졌다.
“예? 심안이라뇨?”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남궁상이 반문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남궁상으로서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자넨 자신이 다다른 곳이 어딘지도 모른단 말인가?”
진소령은 이런 한심한 놈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는 투로 질문했다.
“그럼 그게 진짜로…….”
남궁상이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진소령은 갑자기 한숨을 내쉬고 싶어졌다.
“그건 분명 심안의 경지일세.”
진소령마저 인정하자 남궁상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 그 경지 안에 완전히 들어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잠깐 백일몽처럼 체험해 본 것뿐이고 다시 재현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궁상 스스로도 잘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별로 위급하지도 않은 순간에 그런 경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놀랍네.”
잠시 뜸을 들인 진소령이 다시 운을 뗐다.
“자네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전 사과받을 일 없는 것 같습니다만..
불안한 목소리로 남궁상이 대답했다. 어째 감이 안 좋았다.
“아닐세. 그동안 자네의 실력을 내가 너무 무시했던 것 같군.”
“그런 건 굳이 사과하지 않으셔도…….?”
그러나 진소령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자네의 실력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이번 비무에서 전력을 다하겠네. 조금 봐주려고 했던 내가 안이했네. 사과하겠네.”
“아니, 진짜 사과 안 하셔도 되는데…….”
남궁상은 울고 싶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감이 잘 맞는단 말인가!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보게. 다 들으면 정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정말 아닌데… 그러시면 안 되는데.
남궁상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
“드디어 미끼도 갖추어졌고… 분위기도 슬슬 고조된 듯하니 이제 함께 그물을 던질 사람 한 명만 더 있으면 되겠군.”
비류연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허공중에 이리저리 휘저으며 말했다.
“그게 누군가?”
장홍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얼른 물었다.
“있어, 그런 사람. 나한테 빚을 몇 번씩이나 진 녀석이지.”
비류연은 짧게 대답했다.
“쯧쯧, 자네 같은 사람을 빚쟁이로 삼다니… 누군지 몰라도 그 친구 인생도 참으로
기구하군.”
“남 말 하지 마요. 아저씨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으잉? 그게 누군가?”
“있어. 바른생활 청년에 깔끔 청결하고 용모 단정한 게 신붓감으로는 안성맞춤인 그런 친구야.”
짚이는 데가 있었다.
“설마 모용휘 그 친구인가?”
비류연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그 녀석 말고 또 누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