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령, 접수하다
-정체불명의 흑의서생
다음날 아침.
몽무와 환무, 두 사람은 객점에서 짐을 지키도록 놔두고 영령은 혼자 거리로 나왔다. 두 사람이 시중들어 주면 편하긴 하지만 때때로 감시받거나 속박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 가슴이 묘하게 답답해지곤 했다. 혼자 있고 싶어졌고, 구실은 널려 있었다. 그중 적당한 것을 하나 골라잡은 다음 그녀는 혼자 밖으로 나왔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동쪽 선착장이라고 했지, 아마?”
그 여인의 말에 거짓이 없다면 그곳에 마천각으로 통하는 길이 있을 터였다. 호수 바람도 쐴 겸 우선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영령의 예상대로 마천각은 육지에 있지 않았다. 그곳은 물 위에 있었다. 때문에 보통 마천각이 어디냐고 물어도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정호 안에 있 습니다’ 같은 건 대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방의 작은 나라는 그 안에 통째로 쏙 들어갈 정도로 동정호는 넓고 거대했다. 그 큰 동정호 내 어딘가에 위치한 마천각의 소재를 찾으라는 것은 바다 위를 해도 (海圖)도 없이 항해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인 요구였다.
뱃사람들 사이에서 그곳은 용왕성이라 불리었다. 그곳으로 가는 배는 한정되어 있었다. 다른 고기잡이배들은 살해당할까 두려워 감히 그 근처로 접근하지도 못한 다. 하지만 금역을 침범하지만 않으면 그들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매우 잘 따른다. 단 한 곳의 선착장에서만 마천각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그 선착장의 초입 에 쳐진 조그만 간이 천막 안에는 작은 책상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그 옆의 깃발에는 간결하게 ‘접수처’라고만 적혀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아가씨?”
조그만 접수처에 혼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종이 위에 붓을 들고 무언가를 쓰고 있던 흑의서생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심한 눈빛으로 영령을 바라보았다. 이십대 후 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고 준수한 얼굴이었는데 눈이 마치 고요하게 가라앉은 밤 호수처럼 보였다. 깊고 어두워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그런 눈이었다. 표정 역 시 감정의 편린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 말투만큼이나 무뚝뚝했다. 평소 안면에 피나 제대로 돌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당연히 마천각의 입각 시험에 응시하려고 왔죠.”
당연한 걸 뭣 하러 묻느냐는 투로 영령이 대답했다.
“아가씨 같은 처녀가 말이오?”
흑의서생이 미심쩍다는 듯 반문했다.
“어머,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네요. 처녀면 어떻고 유부녀면 또 어때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게 강호의 상식 아닌가요? 틀렸나요?” 영령이 매섭게 쏘아붙였지만 흑의서생의 대응은 차분하고 간결했다.
“틀렸소.”
흑의서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 틀렸죠?”
조금 황당해진 영령이 반문했다.
“아가씨의 주장은 아직 이 강호에서 비상식이기 때문이오. 강호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오. 상식이란 보다 다수에게 통용되는 것을 가리키오. 그러니 아가씨의 주장이 상식이 되려면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쯤은 더 기다려야 할 거요. 물론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소. 그러니 틀렸다는 거요.”
“그, 그건 궤변이에요!”
왠지 분해진 영령이 외쳤다.
“당신은 억지요.”
흑의서생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뭐, 뭐라구요! 말 다 했어요?”
영령은 왠지 더 더욱 분해졌다. 그의 이죽거림이 왠지 일리있고 조리있게 들려서 하마터면 납득할 뻔했기 때문에 더욱더 분하고 원통했다.
‘뭐, 이딴 남자가 다 있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태연하게 앉아 있는 사내를 보자 왠지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화가 치밀었다.
“이름이 뭐요?”
툭 던져진 흑의서생의 질문은 너무나 갑작스러웠기에 영령은 잠시 당황했다.
“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물음이었다.
“접수시켜 주겠다는 거요. 그러려면 먼저 이름을 알아야 할 거 아니오.”
흑의서생이 벼루에 붓을 두어 번 찍으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영령이에요.”
“성(姓)은?”
“몽(夢)씨예요.”
“나이는?”
“스물… 넷이에요.”
“응? 스물넷이면 조금 늦었구려. 보통 이 나이 때는 입각을 포기하는데 말이오.”
“사고가 있었거든요.”
한쪽으로 길게 드리워져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영령이 대답했다. 안대는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녀의 왼쪽 눈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흑의서생은 잠시 그녀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무심하게 서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출신은 어디요? 사문이든 가문이든 뭐든.”
다시 붓을 먹물에 찍으며 흑의서생이 물었다.
“몽환산장이에요.”
영령이 대답했다.
“몽환산장? 그런 곳도 있었나?”
“있어요. 제가 그곳 출신이니깐요. 절 보면 알 수 있잖아요?”
“위치가 어디쯤이오?”
“그건 비밀이에요.”
“모르는 건 아니고?”
흑의서생이 지나가는 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지금 시비 거시는 거예욧? 제가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모르긴 왜 모르겠어요. 원래 흑도에선 문파의 위치나 거점 같은 건 함부로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것 아 닌가요? 마천각만 봐도 그렇잖아요?”
“일리있소. 반박할 말이 없군.”
그러면서 흑의서생은 다시 위치란에 ‘불명(不明)’이라고 큼지막이 적어 넣었다. 그러나 그러고도 종이 위에는 아직 빈 공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저 종이 쪼가리 한 장으로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가 한마디 했다.
“그 나머지 빈 여백에 또 뭘 적어 넣어야 하죠? 제 인생을 그 안에 담기에는 무척 부족해 보이는데요?”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오. 그리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더 낫소. 적어도 근거 하나는 늘어나니까.”
흑의서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결혼은 했소?”
“아직 미혼이에요.”
영령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럼 연인은 있소?”
무심한 듯 무덤덤한 어조로 묻는 그 질문에 갑자기 영령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 무슨 질문이 그래요? 시험이랑 연인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런 사적인 질문을 하는 거죠?”
“그냥 적으라고 하기에 묻는 것뿐이오. 혹시 연인이 있다면 거기에 정신이 팔려 수련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 않소. 있소, 없소?”
자신은 알 바가 아니라는 듯 흑의서생이 반복해서 질문했다.
“어, 없어요, 아직은요…….”
“아직이라… 그럼 혹시 짝사랑하거나 마음에 두고 있거나 노리고 있는 사람은 없소?”
“좀 집요하시네요.”
“만전을 기하자는 것뿐이오.”
흑의서생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마음에 품은 분이라면 있어요. 제 목숨은 그분 것이에요.”
대답하는 영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 마음은 진정 진심인 거요?”
흑의서생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아하게 드리워져 있던 영령의 오른쪽 아미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지금 제 진심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불쾌해진 영령이 한마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혹시 거짓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러나 흑의서생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은 다 해야겠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진심이에요, 틀림없는. 그리고 거짓없는! 어떻게 자신이 자기 마음을 모를 수 있죠? 어떻게 이 애틋한 마음이 거짓일 수 있는 거죠?”
“그건 천만의 말씀이오. 소저가 잘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잘 모르오. 그리고 마음은 형체가 없는 만큼 진심으로든 거짓으로든 빚 어질 수도 있는 거요. 그 왜 최면 효과라는 것도 있지 않소?”
“지금 제가 최면에라도 걸렸다는 건가요?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영령이 빽 소리쳤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소. 넘겨짚지 마시오.”
영령의 분노 앞에서도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을 뿐이다.
‘뭐, 이딴 인간이 다 있어! 무례한 것도 정도껏이지!”
영령은 기가 막혔다. 그게 어디 첫 대면에 대놓고 할 말인가?
“아무튼 전 진심이에요. 이 이상 그 얘기를 계속하면 저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겠어요.”
그러자 흑의서생은 항복했다는 듯 두 손을 조금 들어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지금 그 마음 잊지 마시오. 당신이 그 마음을 진심으로 여기는 이상 그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진심일 테니 말이오. 그럼 그 남자도 행복할 거요. 그 남자가 누군지 부럽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거나 혹은… 가장 불행한 사람일 거요!”
무뚝뚝하던 흑의서생의 입에서 살짝 감정의 파편이 얼음에 비친 햇빛의 깜빡임처럼 잠시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당황하고 있던 영령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또 다른 필요한 사항은 없나요?”
“없소. 원래 흑도는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않소.”
“좀 전에 시시콜콜 물었던 건 자잘한 일 아닌가요?”
영령이 샐쭉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우리 마천각에 입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두 가지요. 그중 하나는 물론 실력이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내는 대답 대신 손바닥을 불쑥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이 손바닥은 뭐죠?”
하늘이라도 받칠 듯 펼쳐져 있는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영령이 물었다.
“내시오.”
“뭘 말인가요?”
영령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했다.
“그것도 모르고 이곳에 응시했소?”
“몰라요.”
흑의서생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더니 퉁명스레 가르쳐 주었다.
“응시비!”
“응시비? 그런 것도 있나요?”
“물론이오. 영업도 못하고 이 짓에 며칠이나 묶여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잖겠소? 세상엔 공짜가 있을지 몰라도, 흑도엔 공짜가 없소.” 진리를 말하는 고승 같은 표정으로 흑의서생이 말했다.
“얼마죠?”
흑의서생이 손가락 다섯 개를 활짝 펴 보였다.
“은화 다섯 냥이요?”
그러자 사내는 손을 한번 쥐었다가 다시 폈다.
“아니오. 금화 열 냥이오.”
“예? 금화 열 냥이라고요? 너무 비싼 거 아닌가요?”
그 어마어마한 액수에 눈이 휘둥그레진 영령이 거센 어조로 항의했다.
“원래 흑도의 자제는 돈이 많소. 돈이 없는 흑도방파는 무능한 방파요. 그 보통 무능한 방파는 무능한 제자를 배출하기 마련이오. 우린 무능한 놈은 필요없소. 그러 니 이 정도 가격이 책정되어도 무방하다 생각하오.”
“돈으로 실력을 측정하는 게 가능하다는 건가요?”
“어느 정도 가능하오. 특히 개인의 윤리 의식 따윈 그저 거치적대는 물건 정도로 여기는 흑도에서 ‘돈’과 그것을 모으는 능력이란 능력을 재는 절대가치요.” 매우 냉정한 평가였다.
“그럼 응시생은 보통 어느 정도인가요?”
“보통 천 명에서 천오백 정도요.”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영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나 많이요? 일 년 동안 영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놀아서 뭐 하겠소, 영업이나 해야지. 원래 돈은 다다익선인 거요. 흑도에선 더욱 그렇소. 특히 흑도는 명예나 정의 같은 애매모호한 가치에 의해 유지되지 않소. 이곳은 돈과 힘으로 유지되오. 그리고 그 돈의 그물은 너무 복잡하오. 그러니 돈이 많은 만큼 들어가는 곳도 많소.”
“그렇군요. 반은 납득이 가는군요.”
영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반은 왜 남겨뒀소?”
흑의서생이 되물었다.
“하지만 가끔 돈이 없어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요? 은거고인의 제자이거나?”
그냥 지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납득해 버리면 왠지 자신이 패배한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보통 흑도의 거두들은 은퇴는 해도 은거는 하지 않소. 물론 은퇴한 다음에는 한적한 심산에 들어가 사는 경우도 있소. 그러나 그때도 상납은 들어오오. 그리고 반 드시 몰래 모아둔 재물이 있게 마련이오. 그게 없으면 그자는 무능한 자가 틀림없소. 그럼 거두가 아니오. 그러니 만일 그 은거고인이 흑도 사람이 아니라 백도 사람 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으나 흑도의 고인이라면 재산이 없을 수 없소.”
“매우 극단적인 생각이로군요. 그래도 혹시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사부가 백도라도 흑도로 들어올 수도 있는 거구요.”
“아가씬 상당히 끈질기구려. 그렇소. 꽤 날카로운 지적이오. 사실 그런 경우도 가끔 있소. 물론 자주 있지는 않지만 말이오.”
“그렇죠.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무일푼인 응시생들에게 자그마한 기회를 주고 있소. 그들에게 아무런 방법도 주지 않을 만큼 야비하지는 않소. 반대로 능력만 있으면 출신 따윈 상관하지 않는 게 흑도의 생리요.”
“어떤 기회죠?”
“만일 그들이 그러고 싶다면 그들은 어떤 관문을 통과하면 되오.”
“어떤 관문이죠?”
“거참, 궁금증이 되게 많은 낭자로군.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마천각에 도착하면 되오. 정규 운항선을 이용하지 않고 말이오. 그러면 되오. 다만…..
“다만 뭐죠?”
“그러다 죽어도 우리는 책임지지 않소. ‘입각 요강’에도 분명히 나와 있소. 아가씨도 이걸 읽어보고 맨 마지막에 서명해야만 하오.”
영령이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을 읽어보았다.
“이 시험은 본인의 자율적인 의사에 의해 행하는 것이므로, 만일 이 시험 도중 사고가 나거나 심지어 사망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귀 각에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습 니다.”
그리고 옆에 서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도 꽤 되오. 어떻게 하겠소?”
먹을 찍은 붓을 건네주며 흑의서생이 물었다. 영령은 망설이지 않고 그 붓을 건네받은 다음 말했다.
“물론 서명하겠어요.”
이 정도로 물러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응시비를 내겠소? 아니면 특별관문에 도전하겠소?”
“으음… 그냥 응시비를 내겠어요.”
한참 고민하던 영령이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하겠소?”
“왜요? 이상해요?”
“아니오. 그저 내가 아는 소저라면 특별관문을 택했을 것 같단 느낌이 들었던 것뿐이오.”
“우린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다른 사람 이야기요. 잘 생각했소. 그게 현명한 거요. 흑도는 원래 대도를 가는 자가 아니라 지름길을 가는 자요. 하지만…….”
“그런가요? 그런 건 비겁한 거 아닌가요?”
“흑도에 비겁은 없소. 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가 중요한 곳, 그게 바로 흑도요. 어설픈 마음으로 함부로 발을 들여놓다가는 큰코다칠 거요.” “그건 경고인가요?”
“그냥 단순한 충고요. 사실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라 경고라 할 것도 없소.”
“기억해 두죠. 자, 여기 금화 열 냥이 있어요.”
흑의서생이 옆에 놓여 있던 상자의 자물쇠를 열고 그 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자, 이 패를 받으시오. 그리고 내일 묘(卯) 정각에 선착장에 닿는 붉은 깃발의 배를 타시오. 이 패를 보여주면 태워줄 거요.”
“만일 없다고 시치미 떼면요?”
약간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영령이 물었다.
“나라면 그런 모험 안 하겠소. 이곳 물고기들은 충분히 배가 부르오. 아가씨가 들어간다 해도 그리 환영받지는 못할 거요. 아마 남길지도 모르지.”
물에 빠뜨린다는 말보다 훨씬 무서운 말이었다.
“조언 감사해요. 그럼 내일 뵙죠.”
“잘 가시오. 아마 내일 나는 없을 테지만 말이오. 행운을 비오.”
“어머, 그거 아쉽네요. 고마워요. 아참, 그러고 보니 우린 통성명도 안 했네요. 우린 오늘 처음 만났지만 앞으로는 종종 자주 만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통성명이 나 하죠. 제 이름은 다 알았으니 그쪽 이름도 알려주지 않으시겠어요?”
영령의 물음에 흑의서생은 잠시 침묵했다.
“왜요? 알려주기 싫으세요?”
“아니오, 그건 아니오.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말을 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던 흑의서생이 겨우 이름 하나를 입에 올리는 것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영령의 눈에는 마치 자기와 치열하게 다 투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쪽이 승리한 듯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은… 명…….?
“예? 뭐라고요? 잘 못 들었어요.”
흑의서생이 뭔가 다짐한 듯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딱 한 번만 다시 말할 테니 잘 들으시오. 내 이름은 은명(隱名)이오.”
‘응?’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따끔함이었다. 이 이름을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나? 영령은 그 이름을 혀 위에 놓고 한 번 굴린 다음 천천히 음 미해 보았다.
“은명… 이라?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별난 이름이네요. 분명 별생각없이 지었을 거예요.”
영령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내, 자신을 은명이라 소개한 그 사내는 웃지 않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누가 지었는데요? 아버지? 어머니? 아니면 할아버지?”
흑의서생의 눈동자 안으로 괴로운 고통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알 필요 없소. 잘 가시오.”
“쳇, 빼기는 알았어요. 그럼 곧 다시 뵙죠.”
검은 패를 받아 든 영령은 발걸음을 돌려 자신이 묵고 있던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사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밤의 호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의 눈동자는 세찬 격랑으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검은 헝겊으로 싼 길고 넓적한 막대기 같은 것을 등에 진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예를 올리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만 가시지요, 주군. 곧 대장회의가 시작됩니다.”
탁자 위를 정리하던 흑의서생의 동작이 딱 멎었다.
“또, 주군이라 부르는구나.”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흑의서생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실수했습니다, 대장님.”
“알면 됐다. 잊지 마라, 지금의 나는 너희들의 주군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네 자신의 날개를 숨겼듯 나 역시 나의 이름을 감추었다는 것을.”
“며, 명심하겠습니다.”
흑의서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류’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힐끗 다시 한 번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예산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무사히 입각 응시 절차를 마치고 객잔으로 향하는 영령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그녀는 지금 조금 전 나루터에서 만난 흑 의서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무척이나 친숙한 느낌이었다. 왠지 신경 쓰이는 남자였다.
“은명이라…….”
입 안에 조각 얼음을 넣었을 때처럼 음미하며 두어 번 굴려본다.
“역시 이상한 이름이야.”
이제는 그 이름을 불러보아도 가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도 아릿하지 않았다.
혀끝이 알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