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13화 – 끝내주는 해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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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13화 – 끝내주는 해결책

끝내주는 해결책

– 패배도 패배 나름

“그럼 입후보는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겠습니까?”

사절단이 회의 장소로 사용하게 된 넓은 회류(流殿). 임시 진행을 맡게 된 백무영이 야트막한 단상에서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긴장된 목소리였다.

이렇게 물었을 때 초반에 나오는 의견은 대부분 그저 그렇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첫 포문을 열어주는 것으로도 감지덕지할 지경이었다. 효룡의 말도 있 었으니 사람들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 공산도 컸다.

“비무대회를 열어서 전원 참가하는 건 어떨까요?”

노학이 손을 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관도들 사이에 술렁거림이 일며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백무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포문이 열린 것이다. 의미는 충분했다. 마천각에 대응하려면 실력자를 대장으로 뽑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는 좌중의 대세를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역시 생산성은 없는 의 견이었다.

“무립니다. 전원 참가는 일이 너무 커지고, 시간과 체력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기한이 내일까지라는 걸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무영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다른 의견 없습니까?”

연비가 살짝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일단 각 조에서 한 명씩 참가하는 건 어떨까요? 조장이 직접 나서도 좋고,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뽑아서 내보내도 되겠지요.”

이번 여정에 참가한 인원은 여섯 명씩 열 개조, 총 육십 명이었다. 통솔과 관리를 원활하게 하고자 조장은 인솔자들이 미리 뽑아둔 상태였다. 조가 나눠지니 이럴 때는 쓸모가 있었다. 괜히 심심해서 나눠놓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 좋은 생각이군요. 이의없습니까?”

태반은 참가할 의사도 없다 보니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조는 자신의 조에서 출전할 후보를 반 시진 후까지 저에게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번은 제비뽑기로 정하고, 비무는 한 시 진 후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무영은 회의를 마쳤다.

갑자기 사방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출전하는 데 이의가 없다는 건가요, 나예린?”

마하령이 나예린의 이름을 또박또박 힘주어 부르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난 이의없어요, 그런 관리직에 어울리지도 않고.”

어쩌다 보니 같은 조에 속해 있었던 나예린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마하령은 나예린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연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얘기를 할 때 다른 조의 조원이 붙어 있는 게 마뜩찮다는 눈빛이었다.

““너는 안 나가니?”

“어머, 후배라고 대뜸 반말이네요? 아무튼 우리 조는 나갈 분이 따로 계시니 이 몸은 열외랍니다. 워낙 이런 골치 아픈 일은 체질상 안 맞기도 하고.”

표정은 여전히 부드럽지만 미묘하게 반말 섞인 말투였다. 마하령은 팔짱을 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입후보 방식까지 건의한 사람치곤 의외로 소극적인데?”

“흐흠, 하지만 그건…….”

연비는 마하령을 흘끔 보더니 우수에 찬 표정으로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남자 관도들이 봤다면 입을 헤벌릴 자태였지만, 마하령은 이마에 핏대가 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그건?”

“그대로 지지부진 시간이 부족해지면 결국 투표하는 분위기가 됐을 테니까요. 그러면 다들 용회주가 대장이 될 거라던데요. 실력도 가리기 전에 무조건 구대문파 의 남제자로 결정이라니, 마 소저는 그래도 상관없나요? 뭐랄까, 좀 분하지 않아요?”

“그, 그건…….”

물론 마하령의 성격상 분하지 않을 리 만무했다.

“이건 여자의 근성을 보여줄 좋은 기회예요. 뭇 사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물론이지! 나만 믿어!”

단박에 얼굴을 활짝 편 마하령이 주먹을 움켜쥐며 힘차게 답했다.

‘저런 다루기 쉬운 성격이네.’

막무가내긴 해도 그런 면은 왠지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가씨였다.

한 시진 후, 사절단 일동은 기숙사 옆에 있는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비무대회의 구도는 단순하면서도 엄정했다. 자의든 타의든 긴급 비무대회에 참가하게 된 열 명 의 후보는 일단 전반전 여섯 명과 후반전 네 명으로 나뉘었다.

용천명, 마하령, 천야진, 청흔이 후반전, 전반전에는 남궁상, 진령, 남궁산산, 현운, 그리고 어째서인지 윤준호와 공손절휘가 끼어 있었다.

“자넨 왜 나왔나?”

남궁상이 약간은 어이없어하면서 물었다. 아무리 검존의 손자이자 공손세가의 후계자라 해도 아직은 미완성의 검. 지금부터 펼쳐질 강자들의 대결에 끼기엔 여러 모로 손색이 많았다. 분명 본인도 자각하고 있을 터였다. 지난 사건을 벌써 잊어버릴 만큼 기억 장애에 시달리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신입생은 각자 시험 담당관과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그러니 모용휘와 공손절휘가 한 조, 나예린과 유란이 한 조, 윤준호와 유운비가 한 조, 마지막으로 자신과 연 비가 한 조였다. 조별 후보를 뽑을 때 출전 의사를 물어보자 연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었다.

“어머, 저한테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세요? 꼭 건승하시길 기원하겠어요!”

바로 이것. 이것이 상식적인 신입생의 반응이다. 참고로 남궁상은 그중 유일하게 신입생에게 패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도 결코 명예로운 간판이 아니라는 점은 자 각하고 있었다. 그때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것에 대해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릴 정도로.

하지만 그런 연비조차 기특하게도 저렇게 상식적인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공손절휘의 조에서는 칠절신검 모용휘 정도는 나왔어야 정상이지 않는 가.

“그런데 어째서?”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보면 공명심 때문은 아니고, 그렇다고 심각한 중증 기억 장애나 개념 탈출증도 아닌 듯했다. 그럼 도대체 어째서?

“그게… 다른 분들이 나가기 귀찮다고 해서…….”

공손절휘 이외의 조원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슬쩍 살펴보는 순간 남궁상은 그만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일종의 체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본 것은 장홍과 효룡과 모용휘가 한데 모여 쑥덕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세 사람 옆에는 나머지 두 명의 조원도 있었지만, 왠지 인상이 희미한 평범한 관도들이라 남궁상의 눈에는 투명인간 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나머지 조원들이 차지한 저 자리에는 또 한 명이 끼어 있었어야 정상이다. 검은 옷에 앞머리가 눈 밑까지 내려오는.

‘장홍과 효룡이야 그 사람이랑 오랜 단짝이니 그렇다 치고, 설마 천하의 모범생이던 칠절신검 모용휘까지 물들었을 줄이야……!”

역시 대사형! 두렵기 짝이 없는 공포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혹 유령처럼 투명한 잔영으로나마 저 속에 끼어들어 친구들의 귓가에 나쁜 생각을 불어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굿이라도 하는 게 좋을지도.

“여기 함께 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지.’

그랬다가는 언제 어디서 무슨 재앙을 불러올지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본인의 주장처럼 그는 천재가 분명했다. 인력으론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천재 (天災)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쪽은……..

남궁상의 시선이 윤준호를 향했다. 그도 우물쭈물하는 모습이 공손절휘보다 그다지 나은 상태는 아니었다.

‘골탕 먹이기인가?”

약해 보이니 놀려주자는 심보로 떠밀어 보낸 것이리라.

‘하지만 저래 봬도 대사형의 친구. 겉보기랑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에 뭔가 보여줄지도.’

대전표는 공정을 기하기 위해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남궁상은 전반전 중에서도 맨처음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전 상대는…

‘나, 이길 수 있을까?”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며 남궁상은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아니, 져! 확실히 진다!’

이리 뜯어보고 저리 뜯어봐도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예쁘긴 했다.

“이렇게 되다니! 참 유감이에요, 상.”

진령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 그렇구려….

진정 안타까운 것은 진령의 손에 들린 서슬 퍼런 검 한 자루였다. 그건 그만 좀 집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망할!’

하고많은 상대 중에 하필 연인인 진령이라니. 이 불운에 대해 남궁상은 하늘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과는 모두 싸워볼 만해도 진령만은 그렇지 않았 다.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심적인 차원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을 대비해 이 자리에서 승부를 가리는 것도 좋겠지만…….’

나중이라는 건 도대체 어떤 나중일까? 알 수 없는 오한에 남궁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나중으로 미루죠. 해서 전 이 싸움, 기권하겠어요.”

스르릉!

진령은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다행히 그녀의 검은 뽑히면 꼭 피를 봐야 하는 독특한 취향의 검이 아니었고, 그녀 자신도 그런 악취미는 갖고 있지 않았다. ‘살았다!’

남궁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질 것 같은 싸움은 안 하는 게 좋았다. 특히 이렇게 백전백패의 싸움은. 주위의 맥 빠진다는 반응 따윈 어찌 됐든 상관없었 다. 이런 진퇴양난의 곤란함은 겪어보지 않은 자들은 모르는 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시합은 시시하게 끝났다. 진령과 남궁상은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걸어와 나란히 앉았다.

그때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제가 이렇게 양보한 이상, 지면 …알고 있겠죠?”

남궁상은 깜짝 놀라 진령을 쳐다봤다. 그녀는 시합장을 주시할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궁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들은 게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남궁상이 굳게 결심했다.

“져, 졌습니다.”

놓쳐 버린 검을 멍하니 바라보며 공손절휘가 말했다. 어째 요즘 들어 계속 세상이 만만찮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미안해요. 이겨 버려서…….”

두 번째 대전의 승자인 윤준호가 정말 곤란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크…왜 사과하는 거냐! 놀리는 거냐!

공손절휘는 그렇게 외치고픈 본심을 꾹 눌러야만 했다. 저런 사과는 듣는 이를 오히려 분노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은 엄연한 패배자. 패배자가 이리저리 화내봤자 추하고 볼썽사나울 뿐이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걱정스런 어조로 윤준호가 묻는다.

“괜찮습니다. 멀쩡합니다.”

공손절휘가 다시 한 번 화를 참으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용휘도 아니고, 어째서 이런 약해 빠져 보이는 순둥이 놈한테도 져버린 걸까?”

윤준호가 대전 상대라는 것을 알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연 소저께 격려까지 받았는데…….?

겨우 이런 꼴사나운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니, 짐 싸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그것만은 틀림없었다.

“우린 이제 어쩌죠, 현운?”

“글쎄… 어쩌면 좋겠소, 산산?”

“답을 물었건만 외려 질문이라니, 정말 도움이 안 되네요.”

“그것참 미안하게 됐구려.”

안타깝게도 세 번째 대전에 참가한 현운의 대전 상대는 같은 주작단이자 남궁상의 쌍둥이 누나인 남궁산산이었다. 그녀와 현운은 둘 다 구룡칠봉의 일원, 한마디 로 동급이었으니 결코 경시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에겐 때마침 참고할 만한 예시가 있었다.

“좀 전에 보니 진 소저가 기권했더구려.”

진령과 남궁상 역시 같은 주작단원이자 그들의 맹우였다.

“그 말은 나도 기권하라는 이야긴가요? 령이처럼?”

남궁산산이 정색하며 반문했다.

“물론 그럴 필요 없소. 그냥… 참고하자는 얘기였소.”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현운이 대답했다.

“걔들이랑 우리들은 상황이 달라요.”

“뭐가 다르오?”

“걔들은 연인 사이잖아요.”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남궁산산이 핀잔을 주었다.

“그럼 어쩌면 좋겠소? 그냥 싸우겠소?”

“남자들은 왜 싸우는 것밖에 몰라요? 좀 더 다른 해결책을 모색해 봐야죠.”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비무대회다. 원래 치고받고 싸우는 게 본론인 것이다.

“그러면 달리 해결책이 있소?”

“딱 한 가지. 좋은 해결책이 있어요.”

“그게 뭐요?”

“우리도 걔들처럼 되는 거지요. 어때요?”

환하게 웃으며 남궁산산이 말했다.

“그거 진심이오?”

“현운, 여자들이 그런 걸 가지고 농담할 것 같나요?”

“할 것도 같소만.”

현운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하군요. 하지만 이번엔 걱정하지 말아요. 진심이니깐.”

그건 그것 나름대로 걱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농담인 쪽이 걱정할 일은 더 적을 것 같았다.

“지금 저 두 사람 뭐라는 거요?”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남궁상이 진령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요? 고백하는 거잖아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진령이 답했다. 새삼 놀랄 것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모습이 남궁상에겐 더 더욱 충격이었다.

“아, 알고 있었소?”

“물론이죠. 여자끼린걸요.”

남궁상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외감과 박탈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런 중대사를 혈육, 그것도 쌍둥이인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이럴 수는 없었다. “이건 이것대로 더 흥미진진하군요, 장 형.”

남궁상과는 좌측으로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효룡이 감탄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저 현운이란 친구, 의외의 기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몰렸는걸. 심히 불쌍하면서도 어째 부럽기 짝이 없는 희한한 처지일세. 과연 어떻게 답할 것인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군.”

사태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비단 효룡과 장홍뿐이 아니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현운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자, 어떡하겠어요?”

남궁산산이 다시 한 번 물었다. 현운은 이제 도저히 대답을 미룰 수 없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재촉의 시선, 뜸 들이지 말고 당장 본심을 밝히라는 무형의 압박 역 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침내 수십 쌍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현운의 입이 열렸다.

“그것참 안타깝지만…….”

꿀꺽!

주위 여기저기에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끝내주는 해결책이구려!”

“그럼…….”

남궁산산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소. 기권해 주시오.”

아무래도 연인이 되어달라는 말 대신인 모양이었다.

“기꺼이!”

햇살처럼 화사한 웃음꽃을 피우며 남궁산산이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 기이한 대결은 현운의 승리로 돌아갔다. 물론 실질적인 승리자는 어디까지나 남궁산산이었 다.

이렇게 해서 전반전의 일차 대결은 의외로 쾌속하게 결판이 났다. 전반전 이차 대결의 후보자는 남궁상, 윤준호, 현운이었다.

얄궂게도 후반전의 첫 대전은 용천명과 청흔이, 두 번째 대전은 마하령과 천야진이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아까부터 이렇게 어이없는 대전표라니, 주최 측이 제 비에 농간이라도 부린 게 아니냐는 의혹이 번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삼절검 청흔은 구정회 회주인 용천명의 사람, 섬룡 천야진은 군웅팔가회 회주 마하령의 사람이었다. 절대로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난 것이다. 이 경우 둘, 혹은 넷의 생각은 같았다. 용천명과 마하령의 힘을 온존시키자는 것이었다. 결국 청흔과 천야진의 기권으로 후반전의 일차 대결이 끝나 버린 것이다.

용천명과 마하령을 포함한 다섯 명의 이차 대결 후보자 가운데 실질적으로 전투를 치른 것은 윤준호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차 대결은 윤준호를 제외한 남궁상과 현운, 그리고 용천명과 마하령이 각각 치르기로 했다.

현운을 마주하고 선 남궁상. 그는 맹우의 지극 가상한 용기에 탄성을 터뜨려야 할지, 혹은 그 무지몽매한 어리석음의 극치에 탄식을 터뜨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자네 제정신인가?”

“뭐가?”

“산산이랑 사귀려 하다니, 정녕 자네가 제정신인가 묻는 것일세. 혹시 이상한 약이라도 먹었다면 내 꼭 해독약을 구해줌세.”

진심 어린 호의였다.

“이상한 약 먹은 적도 없고, 먹었어도 상관없네. 뭐가 그렇게 이상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이보게, 친구. 혈육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긴 가슴이 아프지만, 세속에서는 산산 같은 처자를 전문 용어로 ‘왈가닥’이라 한다네!”

현운이 경악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을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자, 남궁상은 안타까움과 동정을 금치 못하며 혀를 찼다.

“난 자네가 좀 더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이라 생각했었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왈가닥도로 따지면 남궁 소저나 진 소저나 거기서 거기일세.”

현운의 날카로운 반격이었다. 남궁상은 그런 몹쓸 누명은 난생처음이라는 듯 분노하며 외쳤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말 되는 소리일세. 다만 자네 눈에 뭐가 씌었을 뿐이지. 도(道)를 추구하는 자들은 그런 것을 전문 용어로 ‘계탁’이라 한다네.”

현운의 태연한 반박에 남궁상은 어깨를 흠칫했다.

“내, 내 눈에 뭐가 씌었다고?”

현운은 한 점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럴 리가…….”

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눈을 두어 번 비벼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는다. 역시 모함이다.

“아무것도 없잖나?”

“원래 본인은 대체로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지.”

“믿을 수 없네.”

“사람은 원래 자기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법이네. 사람이란 게 보통 다 그렇지. 그런 자네를 난 이해하네.”

한없는 도량으로 감싸주겠다는 분위기였지만, 그래 봤자 남궁상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왠지 더 불쾌하군.”

“뭐, 지금은 내 정신 상태의 이상 유무나 걱정할 때가 아닌 듯싶네. 자네 신변에 닥친 위기나 잘 극복하도록 하게.”

“무슨 위기 말인가?”

이건 생사를 걸고 다투는 무시무시한 생사결도 아니고, 지면 그냥 반장이 안 되는 것뿐 아니던가.

“내 모르긴 해도, 만일 자네가 지면 진 소저가 가만있을 것 같나?”

남궁상은 현운의 조언에 그 으스스한 속삭임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한 번 내뱉은 말은 꼭 지키는 것이 진령이다. 이런 일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데, 예외가 없다 는 것도 때로는 무척 슬픈 일이었다.

“뭐, 자네와 한번 겨뤄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으나, 이렇게 된 이상 누가 이기든 산산과 진 소저 모두 달가워하지 않겠지. 이대로 두 번이나 시합을 하고 나서 또다시 저 용 회주나 마 소저와 전투를 벌인다는 건 무리기도 하고. 그런고로 난 이만 물러날 테니 잘해보게나.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자넨 꽤 괜찮은 친구이니 부디 승자가 되어서 목숨을 보전하게나. 이런 일로 자네가 사라진다면 무척 쓸쓸할 걸세.”

현운은 진령이 있는 쪽을 슬쩍 곁눈질하면서 자못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상은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퉁명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이사.”

전혀 눈곱만치도 고맙지 않은 마음 씀씀이였다. 그러나 현운의 마음 씀씀이는 윤준호에게도 효과를 발휘했다. 어쩐지 현운이 쓸데없이 조목조목 장황한 설명을 늘 어놓는다 싶더니, 난데없이 윤준호가 손을 들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 때문에 남궁 선배님이 기력을 소모하면 나중에 불리해지시겠군요. 저, 저는…….”

윤준호는 진령을 흘끗 보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역시 남궁 선배님이 사라지는 게 싫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의 뜻을 이어받아 선배님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기권하겠어요!”

소심한 윤준호치고는 소신있는 의견 표명이었다. 좀 잘못 생각한 것 같긴 했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의 기권은 쉽게 받아들여졌고, 남궁상은 자 동적으로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렇다. 용천명과 마하령이 ‘준’결승전을 하는 동안 그는 벌써 결승전에 올라가 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남들은 열심히 싸울 동안에 단 한 번도 싸우지 않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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