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길은 편하게
-어둠 속의 목소리
“정신 차려라, 이 녀석아!”
먼 곳,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자주 듣고 싶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 시끄러워요. 저승길이라도 좀 편히 갑시다.’
다시 어둠 저편에서 소리가 들린다. 절박한 목소리였다.
“네 녀석은 죽을 수 없다! 죽으면 안 돼! 죽지 마!”
“어어, 설마 슬퍼하는 거예요? 그럼 진작 있을 때 잘해주시지.’
절박한 목소리는 금세 거칠게 바뀌었다.
“이 버릇없는 놈, 허락도 없이 맘대로 죽을 셈이냐!”
‘뭐, 죽는 것 정도는 맘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이번엔 전혀 그럴 맘은 없었지만.’
그러고 보면 자업자득이었다. 린이 무사하길 빌었지만, 마지막에 아스라이 들려왔던 비명 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저승길을 앞둔 지금, 후회는 되도록 떨쳐 버리는 게 좋았다.
“미련이 많으면 원귀(鬼)가 된다던데. 음. 그럼 사부한테 들러붙어야지.’
“괘씸한 녀석! 냉큼 눈 뜨지 못할까? 네놈은 아직 할 일이 많아!”
다시 어둠이 쟁알거린다.
‘일? 그럼 그렇지, 슬퍼하긴 개뿔.이. 그리고 나이 드신 분이 자꾸 흥분하지나 마세요. 저승에 가자마자 또 만나긴 싫다구요.’
“이놈, 혹시 일하기 싫어 농땡이냐! 이런 식으로 먼저 죽으면 나중에 쫓아가서 백배천배 후회하게 해주마! 흥, 어디 한 십만 년 동안 부려먹어 줄까, 앙?”
어둠 저편에서도 절절한 진심이 전해져 온다.
‘앗, 그건 절대 사양! 저 같은 건 부디 잊어주세요!’
이런 지긋지긋한 악연은 지금까지도 충분하다.
“네놈이 없으면 누가 날 먹여 살리냐? 어서 정신 차리고 돈 벌러 가야지! 냉큼 일어나지 않으면 반 각(半刻)에 삼만 년씩 일거리를 늘려주마! 그것도 지금의 두 배
로!”
번쩍!
그 순간 자동반사적으로 눈이 떠지면서 환한 빛이 밀려들었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공기……. 하지만 몸은 무겁기만 할 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정신이 드냐?””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본다. 언제나 보아온 지겨운 수염이 보인다. 그 옆엔 어울리지 않게 약탕기가 보였다. 뭘 끓인 걸까?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싸… 부….”
“왜?”
퉁명스럽게 노인이 반문한다.
“우리의 악연은… 역시 저승까지였던 건가요.”
딱!
눈앞에서 여느 때처럼 별이 반짝인다. 왠지 반갑다.
“저승에서까지 폭력을…….?”
“시끄럽다! 시답잖게 헛소리할 거면 더 때려주랴?”
화내는 얼굴이 어째 창백해 보인다. 많이 놀랐나? 에이, 설마.
“나… 살아 있는 거예요?”
아무래도 저세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네 녀석이 내 허락도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헹,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고말고.”
여느 때와 같은 사부지만, 뭔가 조금 다르다.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심상한 모습이었다.
“일어나라!”
사부가 퉁명스레 말했다.
“으윽, 나 중환자인데. 사부도 가끔은 온정을 베풀어보라구요.”
“더 맞고 싶냐?”
사부가 슬그머니 주먹을 들었다.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였다. 인간의 정신력, 아니, 공포의 힘은 위대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반복 학습의 힘!
어느새 조금씩 잃어버린 감각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크윽!”
“마셔라!”
겨우 일어나 앉자, 사부는 퉁명스럽게 사발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왠지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 검고 진득한 액체가 김을 뿜고 있었다.
“시커멓게 생긴 게 꼭… 독(毒) 같네요.”
“독은 무슨! 약이다, 약! 냉큼 마셔라, 식는다.”
“약이라면, 사약(死藥). …?”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 의심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역시 맞고 싶은 게로구나.”
원한다면 얼마든지 때려주마! 꽉 움켜쥔 주먹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뇨. 오해입니다.”
정중히 거절하고 약을 받아 들었다. 하얀 사발과 검은 액체가 뚜렷한 흑백 대비를 보이고 있었다. 잠시 그 고약하게 생긴 검은 물결을 바라보다가 눈을 딱 감고 벌 컥벌컥 들이켰다.
“우엑, 써라. 응?”
텅 빈 사발을 내려놓는데 입 안에서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혀로 밀어 빼내보니 어딘가 친숙해 보이는 하얀 비늘이 나왔다.
“이거, 대체 뭘 달인 거죠?”
아무리 달이고 농축한 맛이라지만, 쓴맛 속에 숨어 있는 이 수상쩍은 비린 맛. 비록 시커먼 국물로 변했다 해도 그것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 그거? 그러고 보니…….”
퍽!
이미 꿀밤이라고 할 수 없는 강력한 타격이 머리로 날아왔다.
“아욱!”
“멍청한 놈! 백교가 바로 옆에 있었던 걸 다행으로 알아라! 백교의 독에는 어떤 약도 안 듣는다고 내 미리 경고했거늘, 넌 그때 졸았냐? 엉?”
“그럼 해독제라는 게…….”
“독과 해독제는 가까운 법. 백교의 독은 그 자리에서 백교의 피를 마셔서 진정시킨 다음, 비늘 한 줌과 심장을 다려서 삼 일 밤낮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하지. 일각 이라도 늦었으면 바로 황천길이었다!”
사부의 비아냥은 듣기 싫었지만 별달리 대꾸할 말은 없었다. 독이 퍼지던 속도를 떠올려 보면 사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때마침 처치를 해주지 않았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구사일생에 기뻐하고 있자니, 신경 쓰이는 것들이 하나씩 생겼다.
“근데, 제 옆에 있던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요?”
“몰라. 떨거지들이 잘 데리고 갔겠지.”
전혀 관심없다는 말투다.
“떨거지라니요? 다치진 않았어요?”
사부의 두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가 슬며시 위로 올라갔다.
“호오, 벌써부터 밝히는 게냐? 어쩐지 요새 들떴다 싶더라니.”
“이익! 크억!”
화를 내려니까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식은땀이 흐른다. 아직 남아 있는 독의 여파인 것 같았다. 아니면 전력 개방의 후유증이거나.
“진정해라. 입에서 거품 나올라. 암튼 아가씨 아가씨 하던데 뭔 놈의 아가씨가 그렇게 시끄러운지 원.”
귀찮았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더 이상은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말투로 보건대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들린 비명 소리는 착각이었나?”
그렇다면 달리 신경 쓰이는 것들 중에 사부에게 물어볼 내용은 한 가지뿐이었다.
“백교… 나머지 부위는 거기 그대로 있어요?”
“미쳤냐? 싹 다 이리저리 해체해서 여기저기 팔아야지. 희귀하고 근수도 많이 나가니 꽤 많이 받을 수 있을 게다. 크흠. 심장도 값이 꽤 높았을 것을, 팔지도 못하 고 써야 하다니. 아깝게시리…….”
어이없는 궁싯거림에 왠지 인상이 구겨졌다.
“그래도 내가 다 잡은 건데…….”
자신에게도 조금은 처분에 대한 권리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주장이었다. 주장에 대한 대가는 사부의 콧방귀였다.
“흥. 확실하게 숨 끊어놓는 사람이 임자지 무슨 헛소리냐. 죽었다 살아난 놈은 이 사부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감사나 하고 있어라. 생명의 빚이 얼마나 큰지는 네놈 도 모르진 않겠지?”
“윽!”
역시 사부는 만만하지가 않았다.
‘하긴 그 게으른 성격에 약까지 달여준 것만 해도 기적이지.’
체념은 빠르고 간단했다. 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럴 때는 사부에게도 조금쯤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참! 그 생명의 빚은 말이다.”
기분이 한결 산뜻해졌는지 사부의 목소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왠지 고마운 마음이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해서 갚아라!”
역시, 사라졌다.
***
“그땐 정말로 연비가 죽는 줄 알았어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지 나예린이 진저리를 치듯 말했다.
“나도 그랬어요. 빚이 생겨 버리긴 했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죠.”
“빚이라뇨? 설마 치료비 때문에…….?
어렸을 때는 그런 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는데, 돌이켜 보면 연비는 당시에도 이미 음률과 가무를 팔던 신세였다. 안 그래도 가난한 처지에 갑작스레 치료비 를 낼 수 없어 빚을 냈는지도 몰랐다. 자신이 모르는 새에 연비는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나예린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후후후, 걱정 말아요. 그냥 사부가 억지로 뒤집어씌운 정신적인 빚이니까요.”
“정말이죠, 연비?”
“물론이죠.”
연비가 싱긋 웃었다.
“아. 그 어르신은 잘 계신가요? 생각해 보면 저한테도 소중한 은인이신데, 죄송하기도 하고.”
연비는 몸을 흠칫했다.
‘소중한 은인? 그보다 죄송하다는 건 또 뭐지??
“연비뿐 아니라 저도 구해주셨는데 그런 무례를… 아, 그러고 보니 그 이후에 연비를 만났을 땐 그저 기뻐하다가 자세히 말을 못해줬네요.”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기뻐서 계속 울먹이느라 제대로 말을 못한 거지만.
“그때, 연비가 쓰러지고 백교가 저한테 달려드는 것을 어르신이 막아주셨어요. 이렇게요.”
나예린은 가볍게 웃으며 한쪽 손을 위로 들더니, 무심결에 날파리를 쫓듯 손을 살짝 털었다.
“그 손짓 한 번에 백교가 그대로 절명했어요. 이미 죽어가는 때였다곤 해도 정말 대단한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연비도 그때부터 그렇게 강했겠죠.”
연비는 웃기는커녕 얼굴이 뻣뻣해졌다. 누구는 생사를 오가며 덤벼야 했던 상대를 파리 쫓기 한 방에 날려 버리다니, 역시 괴물 사부였다.
“그런데 감사 인사를 드리기는커녕, 때마침 달려온 분들이 제가 우는 걸 보고 오해를 해서…….”
뒤는 말하지 않아도 훤했다.
‘악당인 줄 알고 달려들었겠지. 뭐, 악당이 맞긴 하지만.’
“그분들, 다치진 않았나요?”
“…거의 괜찮았어요. 날아간 것치고는.”
“날아가요?”
연비의 반문에 나예린은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예의 그 파리 쫓기 동작을 다시 한 번 해 보였다. 연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연비의 입술에 백교의 피를 흘려 넣으시더군요. 그땐 사람들도 오해한 걸 알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어르신이 그냥 가버리셨지요. 연비를 들쳐메 고 백교도 끌고 가시더군요.”
그제야 연비는 린의 안부를 물었을 때 사부가 마뜩찮아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어르신은 건강하시겠죠? 제게도 은인이신 분이니, 실례가 아니라면 존성대명이나 계신 곳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밝히는 걸 따로 허락받지 못해서요. 건강이라면야, 아마 죽여도 죽지 않을 정도로 정정할걸요.”
다소 기이한 대답이었지만 나예린은 쉽사리 수긍했다. 사문에 관한 것을 밝히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명하는 은거기인들은 원래부터 종종 있었다. 그럴 때는 본인이 밝히지 않는 이상 캐묻지 않는 것이 예의다.
“그렇군요. 그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린 탓에 다시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유감이네요. 그치만 어쩐지 한 번 정도는 꼭 다시 만나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순간 연비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자신의 몸에 다시 피가 도는 것을 느낀 것은 조금 지난 후였다.
“다음번에 뵙게 되면 꼭 정중히 감사드려야겠어요.”
연비는 경악한 얼굴로 나예린의 어깨를 두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아니에요, 린! 그런 생각은 당장 떨쳐 버려요! 그런 무시무시한 과거는 인생에 한 번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크나큰 불행! 게다가 다시 만나다니, 그땐 린까지 불 행해지고 만다구요! 그런 무서운 말은 두 번 다시 입 밖에 내지 마세요! 알았죠?”
왜 그러는지는 몰라도 도저히 거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반드시 다짐을 받아놓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지금까지 연비가 이렇게 기겁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이 없었다.
“아, 알았어요.”
나예린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연비는 다시 몸가짐을 바로 하곤 환하게 미소 지었다.
“하아, 바로 그거예요, 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