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19화 – 사부, 천무학관에 난입(亂入)하다
사부, 천무학관에 난입(亂入)하다
-허구(虛構)의 우상
천무학관의 정문에서 이어지는 중앙 대로 한가운데는, 거대한 동상 하나가 우뚝 서서 풋풋한 무인들을 항상 내려다보고 있다. 이 동상을 지날 때는 가볍게나마 공 손히 예를 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의 무림을 존립하는 데 큰 기둥이 된 사람을 기리고, 그를 본받아 정진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오늘 그 동상을 빤히 올려다보는 노인 한 명이 있었다. 그 노인의 눈에 서린 것은 지독한 회의와 의아함이었다. 이 노인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업적이었는데, 천무학관은 동상 하나로 그 일을 성공시킨 것이다.
노인은 정체는 물론 노사부였다.
“이보게, 뭐 하나만 물어보세.”
노사부가 길 가던 사람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우연찮게 노사부의 마수에 걸린 불쌍한 사람은, 화산비천응이란 멀쩡한 별호를 지니고서도 여태껏 천음선자 홍란에 게 별 고백도 못하고 끙끙 앓는 불우한 무사부 문일기였다.
“예, 말씀하십시오.”
바쁜 길이라 번거롭게 느껴졌지만, 문일기는 걸음을 멈추고 동상을 향해 가볍게 예를 표한 다음 답했다.
“이 동상은 도대체 누구 동상인가?”
“예?”
오히려 반문한 쪽은 문일기였다.
‘혹시 노망나셨나요?”라고 묻지 않은 것은 그가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도리를 아는 사람인 덕분이었다. 그 예의가 그의 목숨을 구했다.
“거기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만…….”
상대가 누군지 모르니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왔다. 혹시 글을 못 읽는다면 낭독해 줄 용의도 있는 것처럼 친절한 말투였다.
그가 가리킨 현판에는 네 줄의 글귀가 웅비하고 힘찬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천무학관(武學館) 시조(始祖)
하늘의 무(武)
무신(神)
태극신군(太極神君) 혁월린(赫月璘)
“나도 글은 읽을 줄 아네.”
그 글귀가 심기를 자극한 것일까?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노사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무슨 일로?”
까막눈도 아니라면 역시 노망인 거라고 문일기는 확신해 갔다.
“노부가 궁금한 건, 마치 신선처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얼굴선이 사내답고 늠름하며, 탄탄하고 단단한 두 팔로 각각 한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를 들고 있는 저 풍채 좋은 사람이 대체 어디 사는 누구냔 그 말일세.”
동상의 모습은 노인이 숨도 안 쉬고 표현한 것처럼 매우 위엄있고 남성적이었다. 딱 이야기에서 나올 법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니깐 저분이 바로 천무학관의 개창자이자 그 유명한 무신 혁월린…….”
딱!
문일기의 눈에서 별이 반짝였다. 언제 뭐가 어떻게 날아왔는지도 볼 수 없었다.
“거짓부렁도 유분수지!”
노사부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네, 직접 본 적은 있나, 그 무신인지 뭔지 하는 사람을?”
“소생에겐 아직 그런 광세의 기연은 없었던지라…….”
노인의 알 수 없는 박력에 문일기는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아니, 이럴 수가! 천무학관의 무사부씩이나 되어서 도대체 이 무슨 추태인가?”
마음 한 켠에선 그런 의문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저항할 수가 없었다.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동상, 대체 언제 만들어진 건가?”
다시 노사부가 추궁하듯 물었다.
“분명 오십 년 정도 된 걸로…….?
그런데 아직도 별다른 흠집 없이 매끈한 걸 보면 관리 하난 철저히 해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 문제시되는 부분은 그와는 관계없는 주제였다.
“이 동상이 세워질 때 본인도 그 자리에 있었나?”
무신 혁월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땐 이미 은거하신 지 오래된 후라…….”
문일기도 그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동상 만드는 사람은 뭘 근거로 이런 물건을 내놓은 건가? 초상화라도 있었나?”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자꾸만 높아지는 압박 수위에 당황하며 문일기가 대답했다.
“호오, 그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상상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상하게도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을 훔치며 문일기는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렇습니다. 하나 이건 어디까지나 그분의 업적을 기…….”
“흥, 시끄럽네. 거참,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로군. 본인이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하기라도 했나? 저렇게 콧구멍 한 짝도 안 닮은 볼품없는 동상을 세워달라고?” 검지로 동상의 가리키며 노사부가 힐난했다.
“그, 그건 물론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허참! 상상만으로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놓다니, 기가 막혀서 원. 저런 불쾌하기 짝이 없는 물건은 당장 치워 버리게!”
“그, 그럴 수야…….”
그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이 동상은 천무학관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그걸 정체 모를 노인네가 지나가다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냅다 치울 수야 없는 노 릇이었다.
“싫다는 겐가?”
“그, 그보단 제 권한 밖의 일인지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잠시 생각에 잠긴 노사부가 다시 문일기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화산비천응은 소심한 참새처럼 몸을 움츠렸다.
“할 수 없군. 자신들의 과오는 스스로 바로잡게 만들고 싶지만, 이번만은 노부가 특별히 수고를 덜어주도록 하겠네!”
“…..?”
쾅!
서너 다발의 천둥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굉음이 학관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피유우우웅!
한자리에 못 박힌 듯 오십 성상을 지키고 있던 동상이 오늘 드디어 자유를 찾아 하늘로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작은 새들과 바람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 만 갑작스레 얻은 자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십여 장을 날아간 동상은 청석 바닥으로 낙하해 머리를 부딪치더니 호숫가에 던진 물수제비처럼 십수번을 튕긴 다음 앞쪽에 놓인 본관 건물에 그대로 처박혔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떠헉!
문일기는 너무 경악한 나머지 턱이 빠지고 말았다.
적의 기습이 아닌 이상 울릴 일이 없는 특일급 비상경보가 천무학관을 들쑤셔 놓았다.
서둘러 무장을 챙긴 무사부들은 최대한 빠른 경공을 사용해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중에는 천무학관의 관주 철권 마진가도 끼어 있었다. 마진가는 마침 비상 종이 울릴 때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금방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자는 전혀 도망갈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금세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포위망이 완성되는 것을 느긋하게 관망하며 노사부가 중얼거렸다.
“좀 늦구만.”
도망치기는커녕 기다린 모양이었다.
“이, 이럴 수가!”
무사부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대영웅의 동상이 십여 장 밖의 건물에 거꾸로 처박힌 꼴이라니.
‘누가 천무학관 앞마당에서 이리도 대담한 짓을 벌였단 말인가!’
그동안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놈! 감히 무신님을 모욕하다니!”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한 무사부가 외쳤다.
“모욕? 누가 누굴?”
노사부의 시선이 흘깃 그 무사부를 향했다.
“헉!”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 정체불명의 노인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물었다. 누가 누굴 모욕했다는 게냐?”
낮지만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여전히 숨 쉬기가 버거운 듯 그 사내는 파리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범상한 고수가 아니구나!’
마진가는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멈추시지요.”
나직한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마진가가 말했다.
“응?”
노사부의 시선이 그 사내를 떠나 마진가를 향했다. 그제야 겨우 숨 쉬기가 편해진 남자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자넨 누군가?”
노사부가 물었다.
“전 미욱하나마 이 천무학관을 맡고 있는 관주 마진가라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성대명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마진가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본 후 노사부가 퉁명스레 말했다.
“넌 아직 그럴 자격이 없다.”
주위를 단숨에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엄청난 발언이었다.
“가, 감히!”
당장이라도 무례한 늙은이를 때려잡겠다고 분기탱천해서 달려들 태세였다. 마진가는 무사부들을 저지하며 침착한 어조로 지시했다.
“함부로 끼어들지 말게나!”
그는 알 수 없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본 결과 지금은 그 본능에 충실히 따라야 할 때였다. 그 대처가 노사부의 마음에 좀 든 모양이 었다.
“자네가 여기 책임자라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기 저 동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겠군?”
“말씀드리기 전에 고인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게.”
“고인께서 무신님을 모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욕? 하, 적반하장이로세. 누가 누굴 모욕했는지 모르겠군. ‘그 녀석’을 모욕한 것은 네 녀석들이 아니냐?”
기분이 몹시 상했다는 목소리다. 필시 그들의 주장이 아주 어이없게 들린 탓이리라.
‘그, 그 녀석이라니…….”
무지막지하게 신경 쓰이는 호칭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관계이기에 천하의 무신을 ‘그 녀석’이라 호칭할 수 있단 말인가?
“저희들이 무신님을 모욕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희는 그분을 누구보다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마진가가 항의했다.
“그럼 저기 저 보기 흉한 동상은 대체 뭐냐?”
자신이 날려 버린 동상의 발바닥을 가리키며 노사부가 힐문했다.
“그러니깐 그건 그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노사부는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찼다.
“기려? 모욕이 아니고? 우상 신봉자도 이따위 동상을 만들지는 못할 게야. 암, 그렇고말고.”
“모, 모욕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런 말이야말로 저희에 대한 모욕입니다!”
마진가는 용감했다.
“그럼 아니라고?”
노사부가 반문했다.
“물론 아닙니다.”
마진가의 답에 노인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크크큭! 크하하하! 재밌군, 재밌어. 좋아, 다시 한 번 묻겠다. 마치 신선처럼 긴 수염에 사내다운 얼굴 선, 탄탄 단단한 두 팔로 검과 도를 들고 있는 저 풍채 좋은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라고?”
“그러니깐 당연히 무신.”
노사부의 시선이 정면으로 쏟아지자 마진가도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온몸이 옥죄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지껄일 테냐? 너, 사실 저 녀석 만난 적 없지?! 여기 책임자씩이나 되면서!”
푹!
노사부의 말은 비수가 되어 마진가의 심장에 박혔다. 사실 그도 무신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만난 적은 없었다.
“여기서 그 녀석을 직접 본 놈은 한 놈도 없는 게냐?”
주위를 빙 둘러보며 노사부가 물었다.
“딱 한 사람 있습니다.”
잠시 생각해 보던 마진가가 대답했다.
“그게 누구냐?”
노인이 흥미를 나타내며 반문했다.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서 한 노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보검을 빼 들고 질풍처럼 달려오는 노인의 정 체는 바로…….
“바로 저분, 이곳 천무학관의 최고 원로이자 고문이신 검존 공손일취 선배님이십니다.”
마진가가 짧게 소개했다. 그러나 지금의 공손일취는 어딜 보나 대화를 할 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비켜라!”
질풍이 무색하게 달려오던 공손일취는 벽력처럼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두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참담하게 처박힌 동상을 목격한 게 틀림 없었다. 백 살이 넘었어도 성급한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 성급함만 없애면 검성과 동급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런 것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압!”
힘찬 기합성과 함께 공손일취가 지면을 박찼다. 신형이 비조처럼 허공을 가른다. 백 살이 넘은 노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호쾌한 움직임이었다. 합합합합!
오 장 넘은 곳에서 허공 높이 도약한 검존은 공중에서 다시 허공을 밟으며 대여섯 걸음 더 신형을 옮겼다.
“오옷! 저것은 바로 전설의 허공답보(虛空踏步)!”
경신법의 극의라 칭해지는 전설의 경지, 공중을 맨땅처럼 걷는 궁극의 경지, 바로 허공답보의 경지였다. 검존이 이처럼 무위를 자랑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기에, 중 인들의 입에선 자연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오오옷! 처음 봤다!”
허공답보(虛空踏步). 문자 그대로 허공을 지면처럼 밟으며 걷는 기술!
무림 전체를 드넓은 백사장에 비유하자면, 물 위를 걷는다는 등평도수의 경지에 도달하는 자는 전체를 통틀어 한 줌도 채 되지 않는다. 허공답보라는 환상의 경지 는 더 더욱 성취가 어려운지라 지난 수십 년간 강호상에서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목격할 수 없었다. 기술을 넘어선 하나의 경지. ‘있다 카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로나 회자되던 환상의 경지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데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압! 상승(上昇)!”
창천일소성과 동시에 공손일취의 신형이 공중에서 사라졌다. “오오오오오!”
허공의 바람을 밟고 도약해 태양 속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내리쬐는 태양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사람들은 그만 그의 신형을 놓치고 말았다.
노사부는 공손일취의 행동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 태평하게 뒷짐진 자세로 가만히 서 있었다.
“지존검법(至尊劍法) 오의(奧義)!”
태양 속에서 다시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존무상(至尊無上)!”
태양의 광망은 무수한 빛의 창이 되어 뜬금없는 폭우처럼 노사부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선 노사부의 몸을 단숨에 꼬치 신세로 만들기 위해 서.
같은 기술인데도 공손절휘가 잠시 보여줬던 그 초식과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모두 물러나게! 위험하네!”
다급한 목소리로 마진가가 외쳤다. 아무래도 검존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힘 조절에 실패한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간 덩달 아 꼬치 신세가 될 판국이었다.
마진가를 비롯한 무사부들은 인두를 엉덩이에 들이댄 듯 화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노사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쐐애애애애애액! 파바바바바바박!
태양의 창살이 매섭게 대지를 꿰뚫었다. 수십 줄기의 검기가 대지를 헤집자 무수한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 맹렬한 기세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간담마저 서늘해졌다.
“뼛조각은 주울 수 있을까?”
“그건 힘들 걸…….”
“동감일세!”
모두들 마른침을 삼킨 채, 곧 불어올 바람이 자욱한 흙먼지를 밀어내고 보여줄 참상을 두근두근 콩닥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바람이 불자 흙먼지가 쓸려 나가 며 모습이 드러났다.
“크헉!”
“헉!”
“히엑!”
턱이 빠진 사람, 눈알이 반쯤은 튀어나올 것 같은 사람, 머리칼을 움켜쥔 사람 등등 가지가지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경악한 사람은 바로 지상으로 하강한 검존 공 손일본인이었다.
“마,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천참만륙이 되어 천지사방으로 흩어졌을 줄 알았던 노인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사지 멀쩡하게 그대로 서 있었다. 약간 달라진 점 이 있다면 뒷짐을 졌던 손이 양손에서 한 손으로 바뀐 정도였다.
뒷짐을 푼 한 손은 태연하게 검존의 검끝을 잡고 있었다. 공손일취의 심장이 어찌 철렁 내려앉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도 성급하고, 검은 더 성급하군.”
아무래도 교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훈계를 내리겠다.”
찰싹! 찰싹!
경쾌한 격타음과 함께 공손일취의 얼굴이 오른쪽 왼쪽으로 홱홱 돌아갔다.
대낮인데도 눈앞에서 별이 반짝였다. 태양 속을 뚫고 나온 후유증 탓일까?
‘와, 왕복 뺨따구!’
현세에서 벌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무시무시한 광경에 중인들은 내뱉던 숨도 되삼켜야 했다.
공손일취는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의 얼얼한 통증을 느끼며 멍하니 뒷걸음질쳤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마진가 바로 옆 자리였다. 이제는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 는 건지 본인조차도 헷갈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당한 불합리한 모욕에 항의할 기회를 공손일취는 영영 놓치고 말았다.
“어라? 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다?”
당장이라도 폭발코자 활화산 용암처럼 들끓던 분노가 그 한마디에 싸늘히 식어버렸다.
“그런 바보 같은 일이……. 이건 꿈이야!’
공손일취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 보니 자신도 기억에 있는 얼굴… 일 뿐만 아니라 이 뺨의 아픔도 기억이 있었다. 그저 기억에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자 신의 절기를 한 손으로 가뿐하게 파훼시킨 장본인의 얼굴은, 잊을래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간간이 몸이 안 좋을 때면 밤마다 악몽이 되어 자신을 괴롭히던 얼굴을 백 년이 지났다고 해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노사부는 아직 희미한 기억의 저편을 뒤적이고 있었다. 사소한 것은 기억하지 않는 주의라 가물가물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도 노사부의 기나 긴 세월 속에서 뭔가 나름대로 이색적인 감상을 남겼던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기분 탓인 듯합니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사근사근한 말투로 공손일취가 말했다.
‘제발 기억하지 마라! 기억하지 말아줘! 기억하지 말아주세요!’
검존은 속으로 절실히 외쳤으나 별 효험은 없었다.
“아, 맞다! 너, 바로 그때 그 애송이구나!”
백 년 전에 혼꾸멍냈던 애송이를 아직껏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송이??
그 한마디에 중인들은 모두 경악했다. 애송이라니. 검존이라 불리는 이에게 가장 걸맞지 않은 표현 중 하나다. 그러나 검존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는 지금 절 망하느라 무척 바쁜 중이었다.
“다, 당신은.
악몽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통에 검존은 참으로 오랜만에 혼란과 절망의 감각을 맛보고 있었다.
“흠. 내가 혹시 잘못 본 건가?”
컴컴한 절망 속에서 검존은 희망을 한 가닥 발견했다. 그러나 노인의 눈을 마주 본 순간 그는 즉시 희망을 접었다. 그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난 이미 확신하고 있지만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봐주마.
속이려 해봤자 헛수고. 검존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검존의 솔직한 자백에 노사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리라 생각했다. 네 녀석은 여긴 웬일이냐?”
역시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분은 현재 고문으로 계시는 검존 공손일취 선배님이십니다.”
대신 답한 사람은 바로 마진가였다. 막무가내로 검존을 대하는 노인의 행동은 그도 경악하고 있었으나, 검존이 곤란해하는 기색을 눈치 채고 얼른 대신 답한 것이 었다.
“검존? 크, 크흠, 거 꽤 거창한 칭호를 달고 다니는구나.”
웃음을 참는 게 분명한 어조였다.
“부, 부끄럽습니다.”
공손일취는 무심결에 말을 더듬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옆에서 있던 마진가가 소곤거리며 물었다.
“그냥 좀, 아는 사이네. 더 이상 자세히 묻지는 말게!”
째려보는 눈빛에는 단호함과 살기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숨기고 싶은 과거를 캐내는 자에게 살인멸구의 감정이 치솟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마진가도 범상 한 고수는 아닌지라 그 이면에 담긴 위험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물으면 위험하다!’
그것은 본능이 알려주는 위험신호였다. 그러나 노인의 한마디에 공손일취의 은밀하지만 처절한 은폐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 옛날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개기길래 좀 만져 준 적이 있지. 그땐 정말 새파란 애송이였는데 이젠 수염도 좀 그럴듯하네?”
공손일취의 수염을 힐끗 쳐다보며 노사부가 한마디 했다.
“어, 어르신!”
노사부의 생각없는 폭로에 공손일취는 울상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진짜 살인멸구를…
모여 있던 중인들은 뼛골을 에이는 스산한 살기에 어깨를 움츠려야만 했다. 붉은 살기가 실핏줄처럼 흰 동공을 빽빽이 메운 눈이 주위를 훑고 지나갔다.
‘다른 데 가서 주책없이 입을 놀리기만 해봐라! 죽을 줄 알아!’
주위를 둘러보는 공손일취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너는 그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고?”
“그 녀석이라시면?”
“저기 저 동상에 적혀 있는 그 본인 말이다.”
“아예, 예전에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 녀석 얼굴을 기억하고 있겠군. 네 녀석이 좀 증언해 줘라. 그 이쁘장한 녀석이 이렇게 생겼었더냐?”
“이, 이쁘장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가진 무신 혁월린의 늠름무쌍한 상(像)과 맞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 그건…….”
그렇다. 그는 무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몇몇 전장에서 함께 싸워보기도 했다. 그때는 천무삼성이 아직 삼성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었고, 그들 네 명을 가리켜 ‘사신 성(四新星)’이라 부를 때였다.
그러나 ‘모종의 사고’로 마지막 대전에 참가하지 못하고 병상에 누운 자신은, 그들 세 명과 나란히 이름을 놓을 기회를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그 사고의 가해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마음이 어찌 심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왜 대답이 그리 굼떠? 굼벵이를 삶아 먹다 체하기라도 했나?”
노사부가 대답을 재촉했다. 은근한 압박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니깐…….”
자신에게 쏠린 수십 개의 시선이 검존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말똥말똥말똥!
“다른 곳들도 좀 쳐다보고 있지, 이 드넓은 세상에 볼 게 이 늙은 몸 하나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나 사람들은 다들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눈을 부릅,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자, 대답해 보게. 그 녀석이 정말 저렇게 생겼는가?”
대답에 따라 그들은 명분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은폐할 수는 있어도 없는 일로는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속이려야 속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셨죠.”
마침내 검존은 진실 앞에 굴복했다. 대답하는 그의 어깨가 오늘따라 맥없이 축 처져 있었다.
웅성웅성웅성!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 왁자지껄 튀어나왔다.
“그럼 왜 이런 엉터리 동상을 허용한 게냐?”
다시 노사부가 힐문했다.
“그게, 진짜 모습 그대로 세워놓으면 아무도 안 믿을까 봐…….?
검존은 필사적으로 변명해 보려고 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그래서 저런 허풍 섞인 동상을 올려놓게 허용했단 말이냐? 단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 때문에?”
“그, 그렇습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검존이 대답했다.
“그럼 누가 누굴 모욕했는지 이젠 확실히 밝혀졌군.”
무심한 눈빛으로 주위를 쏘아보며 노사부가 이죽거렸다.
“…..”
검존과 마진가를 위시한 무사부들은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조용히 용건만 끝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이 동상을, 그리고 거기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기분이 팍 상하면서 무척 아니꼬워졌던 것이 다.
“그 사람이 어땠는지는 알려고도 않고 자신이 가진 상을 일방적으로 투영하다니,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준엄한 노사부의 질문에 중인들은 침묵했다.
“기억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했던 그 행동들은 저기 저 혁월린이란 한 인간의 존재를 말살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저런 거짓 우상 따위는 차라리 녹여서 세숫대
야로 쓰는 게 나아!”
“송구스럽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마진가와 공손일취가 깊이 반성하는 기색을 보였다.
“난 사소한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알겠나? 부디 사소한 것으로 노부를 자극하지 말게, 귀찮으니깐.”
노사부는 짜증스러워하며 쯧쯧 혀를 찼다.
“예, 어르신!”
“그건 그렇고, 마침 잘됐군. 자네가 이곳의 높은 사람 같으니 한 가지만 묻세.”
“뭐든지 하문하십시오.”
공손일취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천무학관 내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태도였다.
“그놈은 어딨나?”
노사부의 입에서 대뜸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예? 그놈이라뇨?”
질문이 너무 짧다 보니 미처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순풍산부이인가 하는 녀석의 말에 의하면 그 녀석, 이곳에 벌써 삼 년째 틀어박혀 있었다고 하던데?”
노사부도 그 순풍산부이 나대이의 집을 방문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깐 어떤 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비류연이란 놈일세. 이십대 초반쯤 된 사내 녀석인데 평소 땐 앞머리로 요렇게 눈을 가리고 다니지 본 적이 있나?” 노사부는 스스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머리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물론 그렇게까지 안 해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본 적이 있군. 안 그런가?”
검존이 대답하기도 전에 노사부가 반문했다.
“무, 물론입니다.”
그 말에 노사부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잘됐군. 오늘은 일이 좀 풀리는구만.”
노사부나 그렇지 검존과 마진가를 위시한 천무학관 일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최악의 일진이라 할 만했다.
“그래, 그 망할 녀석은 지금 어디 있나?”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검존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노사부의 얼굴에 약간 실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짜 모르나?”
“예, 요즘 그 녀석을 봤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알지도 모르지요. 어찌 됐든 이곳의 최고 책임자니까요.”
그러면서 검존은 슬쩍 마진가를 가리켰다.
‘헉!’
마진가는 속으로 기겁했다. 이건 분명 자신에게 일을 떠넘기려는 음모가 분명했다.
“호오, 거기 철탑처럼 덩치 큰 친구가 알고 있다고?”
노사부의 시선이 마진가에게로 넘어갔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마진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검존을 노려보았으나 공손일취는 그 눈빛에 찔릴까 두려운지 재빨리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되니 마진가는 당황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왜 그리 당황하나? 설마?”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사부가 힐문했다. 마진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이실직고했다.
“그, 그렇습니다. 사실 저도 요즘은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분명 지난번 습격 사건도 있고 해서 일 년 동안 근신 처분을 내려놨었는데, 그게 그만….”
“종적이 묘연해졌다?”
마치 그 행동이 손에 잡히는 듯 노사부가 반문했다.
“그, 그렇습니다.”
귀신 족집게 같은 눈치가 아닐 수 없었다.
“또 놓친 건가.”
약간 실망한 말투였다. 겨우겨우 여기까지 쫓아왔더니 단서가 끊겨 버린 것이다.
“하, 하지만 짐작 가는 곳이라면 한 곳 있습니다.”
정신을 다시 수습한 마진가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 그게 어딘가?”
안색이 조금 밝아진 노인이 기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곳은 바로…….?”
마진가는 잠시 갈등했다. 자신의 짐작을 말할지 말지, 이게 혹시 자신의 학생을 배신하는 일이 될지 말지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저어, 죄송하지만, 노선배님은 그 아이와 어떤 관계이신지요?”
“아, 그놈이 내 제자일세. 어느 날 말도 없이 사문의 보물을 들고 줄행랑을 쳤지. 당장 쫓아가서 주리를 틀까 했는데, 문 앞에 검남춘 서른 병이 줄줄이 있지 뭔가. 허허. 아, 갑자기 귀찮더라고. 그걸 다 마셨더니 며칠이 지났지. 그래도 막 출발하려는데 청룡은장이란 데서 연금이란 게 떡하니 날아오더구만. 뭐, 나중에 생계가 위험에 처할 때나 출발해 볼까 했는데, 마침 또 검남춘 세 병이 배달 오지 뭔가. 이래저래 먹고 마시다 보니 다달이 연금이 꼬박꼬박 나오더란 말일세. 허허.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삼 년이 훌떡 가던데.”
‘그래서 청룡은장이 멸문한 지금 겨우 자리를 털고 나선 것인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녀석이 어디 있는 것 같다고?”
마진가는 갑자기 기운이 빠져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되었다.
“아마도…… 마천각입니다.”
그 이름 석 자에 힘을 주며 마진가가 말했다.
“마천각?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것도 무척 최근의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친구들이 간다던 곳이 그곳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진소령이란 여자 아일 혹시 알고 있나? 덤으로 유은성이란 애송이도.”
그 말에 마진가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그 두 사람을.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저희 천무학관 사절단의 인솔자가 되어 함께 마천각으로 출발했지요. 그런데 그들은 왜?”
“아닐세. 그냥 문득 떠올랐던 것뿐이네. 그리고 여기서 거기로 표행 하나를 보내기로 했지 아마? 중양표국편으로?”
“그,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문제가 될 정도로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마진가는 마치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진소령, 유은성, 중양표국과 정체불명의 괴노인을 연결하는 접점을 아무 데 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흠, 그렇다면 굳이 길잡이는 필요없겠군.”
싸고 편하게 여행할 방법은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 순간 공손일취는 크게 안도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만일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 길잡이 역할이 바로 자신에게 돌아왔을 것이라는 것을. 그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준 하늘에 그는 감사했다.
노인은 더 이상 이곳에서 용무가 없었다.
“고맙네, 잘 지내게. 애송이 자네도.”
인사는 잊지 않는다.
“아니, 잠시만..
그러나 이미 노인의 모습은 바람처럼 사라진 후였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한낮의 백일몽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이 지나도록 검존은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실정이었다.
푸욱!
검존은 하마터면 땅바닥에 주저앉을 뻔하다가 검을 바닥에 꽂아 넣어서 간신히 버텨냈다. 걱정이 된 제자들이 슬금슬금 주변으로 몰려들자 그가 일갈했다.
“누구도 내 몸에 손대지 마라!”
누가 건드렸다가는 이 이상 자세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많은 제자들 앞에서 주저앉았다가는 은퇴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근데 저 괴물이 그 비류연이란 놈의 사부란 말인가?”
그렇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 노인은 도대체 누굴까요, 관주님?”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로 문일기가 조심스레 마진가에게 물었다.
“글쎄… 솔직히 나도 그게 제일 궁금하네.”
진심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든 무림 인명부는 꽤나 두껍다고 자만하고 있었건만, 노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그 안에도 없었다.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꼭 무신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만…….”
나름대로 추정해 본다.
“아마 그럴 걸세. 그렇지 않다면 동상을 가지고 그렇게 화내진 않았겠지. 그건 본인을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네.”
그 말을 듣는 즉시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무신마 갈중혁 그분?”
마진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확실히 아니라 할 수 있네. 난 그분을 만나본 적이 있으니까. 물론 검존께서도 그 사실을 확인해 주실 걸세.”
공손일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여전히 땅에 박혀 있었다.
“무신마 그분은 아닐세.”
문일기의 시선을 받은 마진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니, 무신마도 아닌데 무신을 잘 알고 있으며, 저 정도의 무공을 지닌 고수가 있단 말입니까? 설혹 있다 해도 왜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 단 말입니까?”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짚이는 사람이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서, 설마 천겁.
“더는 말하지 말게!”
마진가는 급히 그의 입을 막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말게. 아니, 말해서는 안 되네.”
진실이든 거짓이든, 말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혼란을 잉태할 수 있었다. 신중히 확인해 보기 전엔 섣부른 판단을 미루는 게 좋았다.
“검존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정체불명의 신비노인과 검존은 예전에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부동심을 연마했을 검존이 아직까지도 이토록 허둥지둥 당황하고 있을 턱이 없었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검존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다면 감시대를 파견해야겠습니다.”
“이의없네. 그리고 또 하나. 저 노인이 찾는 그 비류연이란 녀석도 철저히 감시해야 하네. 차마 입에 담기도 두려운 일이지만, 만에 하나 저 노인의 정체가 ‘그’라 면.
검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불쾌한 상상이 머릿속을 헤집은 탓이다.
“그 녀석은 ‘그’의 제자가 되는 셈이니 말일세.”
그것은 곧 강호 전체의 적이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침중한 어조로 마진가가 대답했다.
“특수 추적 부대 ‘무영각(無影閣)’에게 지시를!”
마진가의 명령은 신속하고 적확(的確)했다. 무영각은 추적과 정보 수집이 본업인 신견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을 모아 만든 특수 조직이었다. 현재 각주는 무영객(無影客)이라 불리는 자인데, 아직까지 사람들 앞에 정체를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영각이 추적하지 못한다면, 천무학관의 그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잘 있나 모르겠군. 무사하면 좋으련만.”
천하의 검존조차 어린애처럼 다루는 저런 정체불명의 괴물이 그곳으로 향한다니, 저절로 근심 걱정이 앞서는 마진가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