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2화 – 금빛 날개가 설야를 감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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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2화 – 금빛 날개가 설야를 감싸다

금빛 날개가 설야를 감싸다

-춤추는 연비

사천성 회음현 아미산 부근의 한 성시. 이곳 사천성에서도 가장 맑고 향기로운 검남춘(劍南春)이 그득하기로 유명한 천향루(天香樓)에서는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파초(芭蕉) 잎에 튕겨 오르는 빗방울처럼 청아하고 맑은 금 소리. 대낮부터 꿈결 같은 금 소리가 흘러나오는 진원지는 대연회장의 중앙 무대였다. 특별한 날 특별 한 손님에게만 개방한다는 이곳 대연회장이 오늘은 이열로 길게 늘어선 술상들과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연회장 전체는 북적대기는커녕 마치 호수라도 된 듯 잔잔했다. 손님들의 시선은 모두 단상에서 금 한 곡조를 뜯고 있는 현의(衣)의 어린 소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딩, 딩. 디리링…….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팽팽한 금현을 연이어 가볍게 퉁겨낸다. 가녀린 섬섬옥수가 소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면사처럼 칠현의 우주를 하늘하늘 누빈다. 희디흰 손가락이 춤추듯 미끄러지며 아름다운 천상의 선율을 자아냈다.

때로는 연인의 속삼임처럼, 때로는 봉황의 날갯짓처럼, 때로는 시냇물의 노래처럼, 또 때로는 폭포의 우르릉거림처럼. 천변만화하는 소녀의 금음은 피와 칼에 한 평생을 담아온 거친 사내들의 혼을 일순간에 사로잡고 있었다. 소녀가 연주해 내는 선율을 감상하는 데에는 그 어떤 음악적 소양도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그저 듣 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딩!

마침내 연주가 멈추고, 아련한 선율의 반향이 가시고 나서야 사람들은 다시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오오오오!”

소녀가 조신한 몸짓으로 인사하자 주객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갈채가 터져 나왔다.

“어떻습니까?”

비단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상석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넌지시 물었다. 노인은 중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소리로 찬탄을 터뜨렸다.

“흠, 좋은 음악이네. 아주 좋은 음악이야!”

언뜻 보기에 적어도 백 살은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으나, 그 호기로운 말투와 우람한 풍채는 한창때인 장정 열 명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자연스럽고 도도 한 위엄은 노인이 오늘의 주객들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상석에 자리 잡은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노인은 소녀가 연주한 음률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박수 를 치며 칭찬을 금치 못했다.

“천상의 소리를 들은 게 아닌가 내 귀를 의심하게 되는구나!”

노인의 칭찬에 소녀가 겸양하며 대답했다.

“이제야 겨우 자연스레 가락을 맞추는 정도라 아직 그런 과한 평은 받을 수 없습니다.”

노인은 소녀의 반응이 재밌는지 실소를 터뜨리며 반문했다.

“허허. 아직 아니라는 말인즉슨, 조만간엔 천상의 소리를 자아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렷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연비(燕)입니다.”

현의의 소녀가 대답하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제비라… 그것참 어울리는 이름이로고. 겉보기에는 아직 둥지 속의 어린 제비 같았다마는, 네 연주 실력을 들어보니 이미 이름처럼 날아오를 때가 눈앞이 구나!”

“감사합니다.”

조신하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연비가 대답했다. 소녀의 목소리 또한 조금 전의 금음처럼 아름다웠다.

“허허, 너는 손가락뿐 아니라 목소리로도 음률을 연주하는구나.”

노인은 즐거운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그러자 이때다 싶은지 옆에 앉아 있던 비단옷의 중년 사내가 토를 달았다.

“설마 그래도 천하절색으로 자자한 따님만 하겠습니까?”

중년인은 나름대로 듣기 좋게 한 말이었지만, ‘따님’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싸늘한 냉기가 노익장의 전신에서 농후하게 뿜 어져 나왔다. 뭔가 중요한 역린을 건드린 것 같았다.

중년의 사내는 삽시간에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실책을 후회하는 듯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연회장 전체가 침묵에 잠겨들고, 여기저기서 중년인을 향해 비난의 시선이 쏟아져 들어왔다. 중년인의 늠름하던 어깨가 점점 더 작게 쪼그라들었다. 그제야 좌중의 살벌함을 눈치 챈 노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흠. 아직 어린데도 정말 놀라운 기예다. 분명 엄격한 스승 밑에서 피나는 노력을 했겠지? 정말 장하다, 장해, 그렇지 않나, 동생?”

노인은 또 다른 옆 자리, 즉 비단옷의 중년인과 대칭되는 자리에 앉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동생이라 불린 사내는 노인처럼 백의를 걸치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계

속뚱한 얼굴로 술을 홀짝이고 있는 참이었다. 연주도 듣는 둥 마는 둥 쉴 새 없이 술잔을 털어 넣는 바람에 벌써부터 얼굴에 벌겋게 취기가 올라 있었다.

“글쎄요, 나 같은 못난이한텐 형님 같은 음악적 감수성이 좀처럼 생겨 먹질 않아서 말이외다. 끅!”

혀 꼬부라진 말로 사내가 대답했다.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여기 모인 이들 중 유일하게 소녀의 금음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이였다. 소녀의 연주가 계속되던 때에도, 모든 이들의 이목이 소녀를 향해 집중되어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피를 술로 못 바꾸는 게 한스러운 사람처럼 혼자서 술잔을 끊임없이 비워 나갔을 뿐이었다.

“자네, 술이 좀 과했나 보군.”

이런 자리에서 언성을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노인은 눈빛으로 주의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검남춘은 안 그래도 독한 술이거니와 이런 자리에서 혼자 연이어 술을 들이키는 것은 다른 주객들에게 심한 결례다. 그러나 노인의 경고는 별 효과가 없었다.

“끅, 나 같은 팔병신이 술 퍼마시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소이까? 안 그렇소, 형님?”

사내는 게슴츠레 풀려 버린 눈동자로 노인을 바라보며 한쪽 소매를 시위하듯 내저었다. 그의 오른쪽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일천!”

부아가 치민 노인이 참지 못하고 사내에게 호통을 쳤다.

“큭큭큭, 내 비록 팔병신이긴 하나 귀머거린 아니외다. 끅, 딸꾹!”

하나 남은 왼손으로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며 일천이라는 자가 대꾸했다.

“남궁 호위! 아무래도 부총령의 술이 과한 듯싶네. 방으로 모셔가 쉬시도록 부축해 드리게.”

노인이 명하자 노인의 우측 배후에 시립하고 있던 자가 포권을 하며 응답했다.

“예, 맹주님! 자, 가시지요, 부총령님.”

탁!

명을 받은 호위가 손을 뻗자 일천은 거칠게 손을 뿌리치며 일갈했다.

“만지지 마라!”

일천의 갑작스런 돌발 행위에 장내는 한층 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젠 축객령이오? 끄윽.”

일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인을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

노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를 억누르느라 상당한 인내심을 소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젠 이 못난 아우랑 이야기도 하기 싫은 모양이우?”

흥이 떨어졌는지 일천은 시선을 돌려 장내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이때라면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똑똑히 들릴 것 같은 정적이 장내를 감싸고 있었다. 주객 들은 다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일천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맺혔다.

“아, 농담이오, 농담! 너무 썰렁해서 내가 다 춥구만. 이보게, 자네. 남궁가의 둘째 남궁진이라 했나?”

일천의 물음에 그를 데려가려던 남궁 호위라는 자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듣자 하니 형보다 더 능력이 출중하다던데?”

어딘가가 비틀린 일천의 질문에 남궁진은 정색을 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형님의 능력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일천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흐흠, 그런가? 그 형님께서 여기 이 자리에 계셔서 그런 건 아니고?”

쾅!

살벌한 소리를 내며 술잔이 거칠게 탁자에 부딪쳤다. 눈썹을 찌푸리며 술잔을 내려친 사람은, 좀 전에 실책을 범한 뒤 계속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 있던 예의 그 중 년인이었다.

“이보게, 부총령! 자네는 우리 아우에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가? 혹은 내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겐가?”

일천의 시선이 데구루루 중년인에게로 굴러갔다.

“아, 지부장님. 여기 계셨었군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그려?”

좀 전의 대화, 그리고 앉아 있는 위치를 고려해 보면, 중년인이 있는 줄 몰랐다는 말은 어느 모로 보든 어불성설이었다.

“자네도 저런 성질이 불같은 형님을 둬서 고생깨나 하겠구먼. 장손인 사람은 절대 이런 설움 모르지. 안 그런가? 남궁 호위, 앞으로도 우리 형님 잘 부탁하네. 변방

으로 쫓겨난 나 같은 팔병신보다 몇천 배나 귀하신 우리 가문의 장손이자 지존이시니 말일세.”

일천의 말을 듣는 남궁진의 얼굴은 몹시 일그러져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언사와 극에 달한 무례함은 실로 참기 힘들었지만, 호위의 입장에서 자신이 모셔야 할 상대에게 먼저 칼을 들이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일천의 말에는 섣불리 건드리기 힘든 증오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서려 있었다.

“무, 물론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본분을 다할 생각입니다.”

간신히 뱉어낸 남궁진의 말에 일천은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수고하게.”

일천은 술병을 병째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주객들이 그제야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어색한 침묵.

솜은 물에 젖으면 통나무처럼 무거워진다고 하지만, 공기는 침묵에 젖어들면 쇳덩이보다도 무거워지는 법.

일천이라는 자는 연회장에서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침묵은 한참이나 좌중을 무겁게 짓눌렀다. 누구 하나 감히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다들 자기 아닌 다른 누군 가가 첫 칼을 뽑아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럴 때는 높은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부하들의 신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그 칼자루를 쥐어야 할 자는 아무래도 지부장이라 불린 중년인 같았다.

“어, 어흠! 어째 분위기가 많이 죽었군. 크흠크흠, 그래, 연비라고 했던가?”

목에 가래라도 끓는지 지부장이 연신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예.”

조금 전까지 싸늘한 풍경 속에 있었음에도 소녀의 안색은 평온했다. 면사로 가리기는 했지만, 언뜻 보기로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서넛이 채 안 된 나이치고는 매우 담대한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리 침착할 수 있다니, 어린 나이에도 정신 수양이 상당하구나!’

연비라는 소녀의 차분한 모습에 그는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내 듣기론 천향루의 묵연비(墨燕飛)는 음률 말고도 또 다른 절예(絶藝)가 있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 노인을 비롯한 주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호오, 그것은 또 무엇이냐?”

노인이 솔깃해진 얼굴로 물었다.

“절예라니요. 소문이 과장되었나 봅니다.”

연비는 나이답지 않게 일단 겸양했다. 노인은 다시금 기분을 회복했는지 재밌어하는 얼굴로 답했다.

“무슨 기예인지는 몰라도 어디 한번 보자꾸나.”

“글쎄요, 괜히 좋은 자리만 어지럽힐까 두려워서……

연비는 내키지 않는지 다시금 사양했다. 노인이 더 이상 거절을 당했다가는 또다시 어색한 상황이 될까 봐 지부장이 제법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막았다. “하하하하! 천향루의 제비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선녀가 춤을 추는 것보다 구경 어렵다더니, 이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다!”

지부장의 말에 겨우 의문이 풀린 듯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흠, 춤인가 보군. 그 춤이 그리도 대단하오, 남궁 총령?”

노인은 지부장을 남궁 총령이라고 부르며 물었다. 아마 지부장과 총령은 동일한 칭호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일천이라는 자는 부총령이라 불렸으니 남궁 총령의 직속 부하인 셈이었다. 그러나 직속 부하에게 ‘성질이 불같다’는 말을 들었던 남궁 총령은, 그 악평과는 달리 금세 불쾌했던 기분을 감추고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노 인에게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물론이고말고요! 그 춤은 흡사 선녀의 천무와도 같다고 합니다. 이미 이 사천 바닥에선 유명한 얘기지요.”

“호오, 그런 춤이라면 꼭 한 번 보고 싶구려.”

이렇게 되면 사천의 지부장인 남궁 총령으로서는 어떻게든 그 사천 바닥에서 유명하다는 춤을 보여주어야 했다. 아쉬움을 남기는 접대는 안 하느니만 못한 법. 하 물며 상사의 접대는 먹을 것이 모자라면 간이라도 빼서 바쳐야 한다지 않던가. 남궁 총령은 이런저런 위기감에 호기를 부리기로 했다.

“좋다! 만일 네 춤이 소문대로 훌륭하다면, 그래서 이 자리에 다시금 흥을 돋울 수만 있다면 내 크게 보답하겠다!”

“그 말씀이 정말이신지요?”

지부장의 제안에 연비가 야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물론이다!”

그는 옳거니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때 이른 자축이었는지, 소녀는 생각만큼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르신 같은 분이 ‘크게’ 보답을 하신다니, 과연 어린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돌려서 말하기는 했지만, 쉽게 말해 ‘큰 보답을 명확한 액수로 제시해 달라는 뜻이다. 지부장은 속으로 헛바람을 들이켰다. 껍데기만 여리디여린 소녀지, 알맹이

는 완전히 강호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장사치 저리 가라였다. 그렇다고 그의 입장에서는 꼴사납게 흥정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뒤탈이 없도록 넉넉하게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허허허, 야무지기는. 내 너에게는 두 손 다 들었다. 더 이상 기다리다 지쳐 쓰러지겠구나.”

지부장이 장난스레 두 손을 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연비는 비로소 방긋 미소를 지었다. 두 손에 달려 있는 것은 열 손가락, 다시 말해 숫자 십(+). 높으신 분이 중 요한 자리에서 하는 약속이니 단위는 당연히 금(金)! 즉, 지부장은 은유적으로 금 열 냥을 약속한 것이었다. 춤 한 번에 금 열 냥이라니, 서민들이 들으면 입에 거품 을 물고 쓰러질 정도의 횡재다.

“풋,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짝짝!

연비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대기하던 악대들이 단상 위로 우르르 올라왔다.

“우리까지 부르다니 별일이구나. 그동안 손가락 관절에 녹스는 줄 알았다.” 대금을 잡은 노인이 한마디 했다.

“그거야 늙어서 뼈가 굳어 그런 거구. 간만에 솜씨 한번 보이려나 보지?”

북채를 잡은 노인도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던졌다.

“좋은 물에서 좋은 술이 나온다는데, 춤도 마찬가지겠지요. 허접한 가락은 싫으니 잘 부탁드려요.”

나긋나긋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연비의 답이었다.

“허허, 아직 어린 처자가 듣는 귀는 있어 가지고. 요즘 실력을 보일 데가 없어 따분했는데 잘됐지.”

금(琴)을 담당하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맹인(盲人)노인이 즐거이 말했다.

“곡은 어떤 걸로?”

노인의 질문에 연비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네모 반듯 단정히 개어놓은 은빛 주단이 손에 와 닿았다. 어느새 기척도 없이 연비의 주변을 깨끗이 치우고 가면서 잔 심부름꾼이 건네준 물건이었다.

“향정의 <금시비설야(金翅庇雪夜)>.”

연비의 말에 맹인노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금시비설야라… 정말 오랜만이군. 거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 쓰겠는걸.”

여러 번 춤을 췄지만 좀처럼 추지 않던 환상의 춤이었다. 오늘은 손님이 손님인지라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들은 평생 동안 연주 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다. 사천제일이라는 천향루의 전속 연주자들이니 명인에 가까운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라락.

연비는 하얀 면사를 걷어내면서 아무도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야 사부가 절 이곳에 보낸 보람이 있지요.”

딸랑, 딸랑…….

은은한 방울 소리와 함께 나직한 대금 소리가 바람처럼 울려 퍼졌다. 춤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

중앙 연회장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후원에 위치한 고급 객실. 원래는 아기자기한 침상과 호화로운 장식들이 돋보이는 방이었지만, 지금은 어두침침해서 윤 곽만 겨우 잡힐 뿐이다. 밖은 아직 환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모조리 닫아놓은 채 검은 천을 덧씌워놓았기 때문이다. 방에는 그 흔한 촛불조차도 켜져 있지 않았다.

그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 가녀린 소녀 하나가 무릎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짹짹! 뾰로롱!

그나마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생기를 띠고 있던 작은 새가 불안한 듯 횃대를 부리로 찍으며 지저귄다. 아마도 조금 전부터 부서져라 문짝을 두들겨 대는 소리 때 문이리라.

쿵쾅쿵쾅!

“예린아! 숙부가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느냐!”

“이러시면 안 됩니다, 부총령님!”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시끄럽다. 어찌 숙부가 조카를 보는 데 일일이 호위들의 허가가 필요하단 말이냐?”

짹짹짹! 짹짹!

불안감이 커져 가는지 새가 연신 날갯짓을 하면서 초조하게 지저귄다. 소녀는 무릎을 껴안은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면서 눈을 꼭 감았다.

“맹주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부총령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네놈들, 감히 내가 누군 줄 모르느냐?”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내 앞길을 막아?”

“맹주님이나 아가씨의 명(命)이 아니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쾅쾅쾅!

“에잇, 시끄러운 것들! 예린아, 듣고 있는 것 다 안다. 네가 나와서 이것들에게 뭐라고 말 좀 해주거라!”

소녀, 즉 예린은 움찔 몸을 움츠리며 귀를 틀어막았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으며 숨을 죽였다, 마치 크게 숨을 내쉬면 잡혀가기라도 할 것처럼.

쾅쾅쾅쾅쾅쾅!

짹짹짹짹짹짹!

얼마나 흘렀을까.

그토록 원하던 침묵이 찾아왔다.

소란이 가라앉고 새도 조용해지자 예린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무척 예쁜 소녀다. 어두침침한 방에서도 백옥처럼 희고 부드럽게 은은한 빛을 발하는 살결. 어둠 속을 투명하게 꿰뚫는 검은 두 눈동자에는 신비로운 마력이 담겨져 있다.

누구라도 이 소녀를 본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하리라. 불행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예린은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나를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인 걸까??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납치의 위험에 많이 노출되는 체질이었다. 그래도 무수한 납치 시도가 하나같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모두 그녀의 아버지, 나백천 덕분이었다. 아버지가 그 권력과 전력을 다해 지켜주지 않았다면 분명 이렇게 무사하지는 못했으리라.

호위병도 숱하게 뒀었다. 그러나 호위병이 납치범으로 돌변해 버리는 사건이 이따금 발생하자, 그 이후로는 아무리 나백천이라 해도 남자 호위병은 도리어 꺼릴 정도가 되었다. 고육지책으로 여자 호위를 쓴 적도 있었지만, 여자 호위는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가끔씩은 그마저도 돌변할 때가 있었다. 그만큼 나예린의 마력은 압 도적이었다.

두 달 전에 여자 호위병을 주축으로 한 어이없는 납치 미수 사건을 겪은 후, 나백천은 결국 그 어떤 호위 체계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항상 자신의 가까이에 딸아이 를 두고 보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특히나 업무 처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천에 오면서부터는 위험에 대한 대비가 극에 달해서, 예린은 거의 감금이나 다를 바 없 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래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이미 현실이다. 부모님이나 어린아이를 제외한 인간들 모두 가 그녀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원하진 않았지만 우연찮게 생겨 버린 능력이 그녀의 대인기피증을 악화시켰다.

용안(!

마음의 단편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독심술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의 마음이 넘칠 때마다 그녀에게로 흘러들어 오는 느낌. 그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 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원망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납치의 위험으로도 문제는 끊이지 않는데, 그때마다 엿보이는 사람들의 마음, 특히 사내들의 마음은 사갈보다도 더 추악했다. 넘실거리는 검은 악의 덩어리가 잔 뜩 쌓인 늪의 가장 깊은 밑바닥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짙은 독기를 쏘일 때마다 그녀는 며칠, 혹은 일주일 이상 앓아누워야만 했다. 인간들의 악의와 독기에 대해 그녀는 너무나 면역력이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견디기엔 너무도 강렬했다.

너무나 추악하고 더러웠다.

어른들 사이에 서 있기만 해도 그 자욱한 독기에 구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어둡진 구석에 작은 몸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다. 사방 어디에고 사람이 없는 곳은 없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아직 너무도 어렸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

어두운 방에서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예린은 쓸쓸히 중얼거렸다.

***

수십 명의 사람들 가운데에 화려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다. 모두들 기도가 범상치 않고 일신에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의 무리임이 분명했 다.

그들은 사천성을 총괄하는 사천 지부 지부장 전룡검(劍) 남궁현과 그 일파였다. 오늘 그들은 매우 중요한 손님을 맞아 이곳에 주안상을 마련한 참이었다.

그러나 왜일까. 평소에는 피와 술에 들끓던 이들이 오늘은 좀처럼 술잔을 부딪칠 생각도 않은 채 오직 한곳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두들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거나 어깨를 가볍게 들썩거린다. 마치 저마다 근육 어딘가에 짓눌려 있었던 최후의 감수성이 알 수 없는 계기를 통해 한순간에 예술 혼으로 촉발된 것 같았다. 그 알 수 없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단상 위에서 춤사위를 밟고 있는 소녀, 연비의 모습이었다.

‘비록 춤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 나이에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니, 분명 고명한 스승에게서 수업을 받았겠구나.’’

춤사위를 구경하기에는 최고의 명당인 중앙 상석에 앉아 있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금시비설야(金翅庇雪夜)라… 금빛 날개가 눈 나리는 밤을 뒤덮는다니. 그럴듯하긴 해도 화창한 대낮에 추기에는 적당한 선곡이 아니다. 그러나 은은한 방울 소리 가 주문처럼 울려 퍼지고 서늘한 대금 소리가 바람처럼 장내를 스쳐 가자, 사람들은 어느새 ‘밤[夜]’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칠흑처럼 깊고 검은 옷자락이 연비의 몸을 감싸고 사람들의 시야를 가득 메운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날아갈 듯하면서도 영혼을 옭아맬 것 같은 아득한 칠흑의 물결. 그러나 그 취할 것 같은 어둠의 자락도, 그윽한 금(琴)의 선율과 함께 흩뿌려진 은빛의 눈보라에는 은은히 잠겨들 뿐이었다.

차라랑, 차라랑……

유리인지 진주인지 모를 빛의 파편들이 올올히 박힌 주단이 연비의 손에 나부낄 때마다 이루 말할 데 없는 미성(聲)이 빛과 함께 부서져 내린다. 은빛의 주단은 그녀의 검은 옷자락을 휘감으며 겨울밤에 피어나는 매화처럼 춤사위에 향기를 더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한결같이 사로잡고 있는 것은 꿈결 같은 어둠의 자락이나 매화처럼 흩뿌려지는 은빛의 주단이 아니었다. 사라락 면사를 걷어낸 자리에서 나타난 그것, 마치 금빛의 영혼을 깊은 심연에 아로새겨 놓은 듯한 연비의 눈동자였다.

살며시 드리워진 짙은 속눈썹 밑에서, 햇살을 받을 때마다 빛이 아로새겨진 눈동자가 투명한 금빛을 발할 것 같았다. 금빛은 종종 타오르는 불로 묘사된다지만, 저 것은 흡사 물빛이라고 해도 납득할 만한 투명하고 서늘한 호안석(虎眼石)의 빛깔. 그 눈동자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흔들릴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빛을 잃는 듯 했다.

“허허… 실로 눈 나리는 밤을 뒤덮는 금빛의 날개 같구나.”

노인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 이것이 몇 번째인지도 잊어버린 탄성이었다. 단순히 눈동자나 의상, 선율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춤이나 음악에 대해 서 해박한 것은 아니지만, 노인이 보기에도 연비의 춤은 뜨내기로 배운 그저 그런 솜씨가 아니었다. 잠재된 아름다움을 극으로 끌어올려 눈앞에서 환상을 빚어낸다 는 것은 육체의 가능성을 최고로 끌어내고자 하는 의지. 수천 수만 번의 반복 끝에 얻어지는 실력이다.

‘아름다운 춤이라는 것은 분명 저런 형태의 것이겠지.’

동작 하나하나가 절도있으면서도 기품있는, 그러면서도 소녀답지 않은 힘이 느껴지는 현묘한 춤. 어떤 것이든 일정 경지 이상 오르면 문외한에게도 모종의 경외감 을 주게 된다. 비록 무(武)와 춤[舞]이 영역은 다르다 하나, 노인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불쾌한 일정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좋은 구경을 하는군.’

노인의 이름은 나백천, 소위 강호무림의 지존이라 불리는 무림맹주였다. 그가 금지옥엽(金枝玉葉)까지 데리고 모종의 일 처리와 시찰을 동시에 처리하고자 사천 땅에 발을 들이자마자 사천 지부장인 남궁현은 다짜고짜 환영의 주안상을 마련했다.

업무 보고는 뒷전으로 하고 접대를 우선시한 남궁현의 일 처리에 은근히 괘씸해하던 나백천은 그제야 진심으로 웃음을 보였다. 이런 자리에서 의외로 저런 것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범상하지 않은 것, 빼어난 것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좀 전의 일 때문에 날이 서 있던 신경이 스르륵 눈 녹듯 누그러졌다. ‘그래도 어디 두고 보자.’

챙길 건 챙기는 나백천이었다. 공사 혼동은 그의 소신에 위배되는 행위였다.

챠라라락, 딸랑

마침내 음악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방울이 흔들렸다. 주문이 풀리는 것처럼 연비의 춤사위가 우뚝 멈추었다. 밤의 물결이 사라지고, 흩뿌려지던 눈발이 땅속으로 스며든다. 연비가 고개를 숙이자 금빛의 날개가 파르르 떨리며 날개를 접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 것은 다들 춤이 만들어낸 설야(雪夜)의 환상에서 깨어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

“젠장! 망할 놈의 변태 영감들!”

비좁은 방에서 거칠게 잡동사니들을 바닥에 내던지고 있는 것은, 방금 전 주객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중앙 연회장에서 돌아온 연비였다.

“어디다 눈을 힐끔힐끔거리는 거야! 나잇값도 못하고 입에서 침이라니! 우욱, 이놈이고 저놈이고 사내들이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발로 마구 짓밟는다. 다소 묘한 것은, 어쩐지 약간이나마 돈이 될 만한 것들은 과격한 발길질에 화를 입지 않고 무사하다는 점이었다.

“에휴!”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경대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을 힐끔 보자 구릿빛 거울이 눈에 들어온다. 화려한 문양이 양쪽에 조각되어 있는 고가품으로 거 의 연비의 전용 물품이었다.

얼음처럼 반드르르했던 거울이 어느덧 입김과 손때에 얼룩져 있었다. 다행히 화장을 고치는 데 쓰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동경 안을 들여다보니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연비를 반겼다.

“칫!”

여전히 낯선 얼굴이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거지?”

해답은 뻔했다. 그 이외에 무슨 또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원인은 정말 확고부동했다.

“이게 다 그 망할 사부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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