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길
ᅳ함정을 위하여
마천각의 각 기숙사에는 수뇌부들이 효율적으로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회의실이 있다. 천무학관 관도들에게 배정된 열세 번째 기숙사에도 필요한 시설은 모 두 완비되어 있었다.
그 회의실에 지금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남궁상, 용천명, 마하령이 바로 그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대장?”
용천명이 남궁상을 향해 물었다.
“아니, 그 호칭은 좀……. 아직 임시고…….”
영 떨떠름한 호칭에 남궁상이 머리를 긁적이며 불편해했다.
“아무리 임시라도 현재 자넨 엄연히 우리의 대장이네. 그러니 대장답게 처신해야 될 필요가 있는 걸세. 대장이 권위가 없으면 남들에게 무시당하게 되지. 자네가 무시당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우리 전체가 무시당한다면 그야말로 더 큰 문제가 아니겠나?”
“저도 용 공자의 말에 찬성이에요.”
그때의 비무 이후로 용천명의 의견에 적극 찬성하는 일이 부쩍 늘어난 마하령이었다.
“에휴, 어째 대장 자리가 바뀐 것 같군요.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반쯤은 체념한 말투였다.
“원래 부대장의 역할이란 그런 걸세.”
“부대장의 역할도 대장의 부족함을 메우는 것 아니겠어요? 크게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무척 신경 쓰입니다만.
천무학관에서는 사사건건 이견이 틀어져 티격태격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죽이 척척 맞으니 그 사이에 끼어서 죽어나는 쪽은 오히려 남궁상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말고 다른 임시 수뇌부도 좀 더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갈수록 일손이 많이 필요해질 테니까요.”
마하령의 제안에 이번에는 용천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부대장이 두 명이니 수행관은 그렇다 쳐도, 참모나 정보관은 대장이 임명하는 것 같으니 속히 결정하는 것도 괜찮겠지. 어떻소, 대장?”
갈수록 늘어가는 책무에 남궁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의견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필요한 인원을 속히 선발하지 않으면 그만큼 업 무 부담이 세 사람에게 쏠릴 것은 자명했다.
“그렇긴 하군요.”
역시나 동의를 표한 뒤에도 두 사람의 똘망똘망한 시선은 여전히 남궁상의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서 냉큼 후보 명단을 읊어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참모라……..
남궁상의 머릿속에 몇 사람이 떠올랐다. 용천명, 백무영, 효룡, 연비… 용천명은 눈앞에 부대장으로 있으니 당연히 제외 대상이었고, 효룡은 마천각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긴 해도 참모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적합지 못했다.
연비는 이상하게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뇌리를 스쳐 간 얼굴이기에 즉각 기각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사람은 하나.
“지룡(智龍)은 어떨까요?”
“으음, 무영이라… 나무랄 데 없는 인선일세.”
남궁상의 말을 듣자마자 용천명이 곧바로 동의를 표했다. 마하령도 별로 이견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정보관은요?”
이미 예상한 질문이기도 했지만, 남궁상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명답에 별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정보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후보 는 단 한 명뿐.
그자는 이런 일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합한 존재였다.
“비연태 선배로 정하겠습니다.”
“……”
마하령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참신한 발상이군. 분명 그 선배라면 훌륭히 소화할 수 있겠어. 누가 뭐래도 가장 어려운 정보에 손대던 사람 아닌가.”
용천명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엄연한 찬성의 표시였다.
“애소저회 회원들이 좋아라하겠군요. 쓸데없는 부가 정보 수집은 좀 자제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정보 수집 능력은 인정하겠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용천명은 부드럽게 얘기를 정리했다.
“그럼 인선은 그렇게 정하고, 오늘은 일단 우리끼리 상의하세.”
“그러지요. 두 사람에게는 제가 오늘 중으로 통보하겠습니다.”
이로써 참모로는 백무영, 정보관으로는 비연태가 수뇌부에 합류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받은 서찰 말인데…….”
“나도 한번 보여줘요.”
마하령은 아직 그 서찰을 보기 전이었다. 남궁상은 얼른 자신이 얼결에 받은 서찰을 마하령에게 넘겨주었다.
“천무학관 사절단 대환영회?”
말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상당히 수상한 제목이군요.”
“동감입니다. 그들이 진짜 우릴 환영할 리도 없고 말이죠.”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잘 봐줘야 눈엣가시겠죠. 하지만 벌써부터 시비를 걸어오다니, 역시 흑도.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군요.”
“그러게 말이오. 마치 벼르고 있었다는 듯 행동하는구려.”
용천명이 맞장구를 쳤다.
“이거야 원, 뺄 수도 없고…….”
남궁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입장상 그러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랬다간 대번에 겁쟁이 취급 당하겠죠.”
맞는 말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계륵이오, 계륵.”
“그러게요. 진퇴양난입니다그려.”
남궁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은 자네이니 자네가 결정하게. 우린 그대로 따르겠네.”
언뜻 듣기에는 신뢰의 표현 같았지만 남궁상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문제를 자신에게 떠넘겼다는 생각밖엔 안 들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함정이라 해도 걸어 들어갈 수밖에요. 겁쟁이 취급받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각오를 정하며 남궁상이 말했다.
“동감일세.”
어차피 이럴 땐 뒤로 물러나는 게 곧 지는 것이었다.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면 미리 대비하면 되지 않겠어요? 나도 찬성이에요. 저들에게 천무학관이 녹록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겠어요.” 투지를 불태우며 마하령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결정났군요.”
남은 것은 대체 어떤 식으로 대비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
“짐은 다 실었나?”
수레에 벌렁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이 물었다.
“예, 어르신. 다 실었습니다.”
중양표국 국주 장우양이 공손하게 읍하며 대답했다. 그의 뒤로 새하얀 백호의 깃발이 무수히 펄럭이고 있었다.
짐의 정체는 앞서서 마천각으로 향한 천무학관 관도들이 일 년간 지니고 있을 소중한 물품들이었다. 그러나 노인이 그런 물품들의 행방이나 표행 자체에 별 관심 이 없다는 것쯤은 장우양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출발할 시간이 다 됐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습니다.”
노인은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장우양은 다시 한 번 읍하며 공손히 물러났다.
그는 이제부터 이 표행을 지휘해야 했다. 그가 단상에 올라가자 자신의 믿음직스런 부하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늠름한 백호의 문장과 연꽃과 검의 문장을, 한 가 슴에 동시에 단 표사들이 그를 우러러보고 있었다.
이번 일을 또 한 건 완수함으로써 중양표국의 명성은 더욱더 높아질 터였다. 왜냐하면 이 일은 지금껏 언제나 빠짐없이 중원표국의 일이었으니까.
이전엔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세계가 지금 그의 앞에 길을 쭈욱 뻗고 있었다. 이미 발은 들여놓은 이후였다. 앞으로는 전진만이 있을 뿐, 이제 돌아갈 길은 어디에 도 없었다. 물론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모두 준비되었나?”
우렁찬 목소리로 장우양이 물었다.
“예, 준비됐습니다!”
우렁찬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이 일을 완수하면 중원표국 놈들은 눈물깨나 짜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보고 싶나?”
“예, 보고 싶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통쾌히 웃고 싶나?”
“예, 그렇습니다!”
사기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하늘의 진노를 사는 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충천해 있었다.
“난 자네들을 믿는다. 자네들은 나를 믿는가?”
“믿습니다!”
일제히 대답이 터져 나왔다.
장우양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자, 그럼 동정호로 출발!”
<비뢰도』 제2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