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성으로 승부하라
-왕만두와 유리면구(琉璃面咎)
“넌 이제 음률을 배웠다. 햇병아리 수준이지만 그럭저럭 들어줄 만하지. 그러나 음률을 안다고 해도 그것을 몸으로 체득하지 못하면 그저 취미 생활에 그칠 뿐이 다. 그러니 이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된 것 같다.”
사부가 진중한 얼굴로 그럴듯한 말을 읊조린다. 그 엄숙한 말씀을 차분히 듣고 있던 열한 살짜리 소년, 즉 비류연은 조금씩 뻣뻣하게 인상을 굳히기 시작했다. 이 럴 때면 언제나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한다는 것을 소년은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음 단계라뇨?”
퉁명스런 반문에 사부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더욱더 짙어졌다. 이때쯤 펼쳐지는 사부의 궤변은 불행으로 향하는 전형적 인 지름길일 터.
“가장 좋은 건 역시 실전이지. 넌 이제부터 실전으로 단련해 실전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검증받지 않은 것은 필요없다. 그런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 난 그런 흐 지부지 애매모호한 것은 딱 질색이다. 넌 자신의 음률에 만족하느냐?”
아아, 역시 불행으로 향하는 길은 열리고 말았다. 비류연은 한숨을 내쉬며 사부의 말에 대답했다.
“하아, 물론이죠. 난 천재니까요.”
딱!
기다렸다는 듯 꿀밤이 날아왔다.
“천재 타령은 그만 해라. 넌 그 음률이 남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익히기만 하고 선보이질 않았으니 어찌 알겠느냐?”
“별로 궁금하지 않은데요.”
딱!
“그것은 그 음률이 너 안에만 존재하고 남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 그것이 너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자기 안에 확신이 …(중략)… 세상과 부딪쳐 … (중략)… 너 자신을 확인하도록 … (중략)… 하나로 합일할 수 있을 것이니……
“그 말인즉?”
비류연이 기괴한 장광설을 끊고 반문하자 사부는 대뜸 뭔가 뭉실뭉실한 것을 꺼내 들어 보였다.
어디서 구한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비류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명백한 여자 옷, 그리고 어서 냉큼 입지 못하겠냐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왜요? 왜 내가 여장 따윌 해야 되는데요?”
비류연은 열과 성을 다해 강력히 항의했다.
“싫은 게냐?”
“당연한 말씀!”
이런 일에는 호불호를 묻는 쪽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그러나 사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리석은 녀석! 이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음양이 조화로워야 태극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성되는 법. 어찌 한쪽 면만 보고서 진인(眞人)의 경지를 이루겠느냐? 음 과 양, 정과 반의 양면을 알고 그것을 조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거창한 이론이었지만, 비류연은 그 말에 혹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전환이 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난 남자라구요.”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성 정체성은 확고했다.
“안 된다고 포기하다니, 이런 근성없는 놈!”
사부는 그야말로 몹쓸 것을 봤다는 듯 면박을 주며 호통 쳤다.
“그게 근성이란 무슨 상관이에요!”
아무 데서나 근성이 통하는 건 아니다.
“도대체 여장 하는 거랑 근성이랑 무슨 상관이람? 논리가 부족하잖아, 논리가!’
비류연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아무리 하늘처럼 모셔야 할 사부라지만, 설득력없는 건 설득력없는 거다. 아니지. 애초에 진지하게 설득하려는 마음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네 이놈! 감히 하늘 같은 사부님께 반항할 셈이냐!”
하지만 비류연에게는 그런 호통도 먹혀들지 않았다.
“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말은 부처님이 와서 말해도 듣지 말라면서요? 틀렸나요? 설마… 이제 와서 가르침을 번복하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오히려 대든다. 잘못한 게 아닌데 일일이 넘어갔다가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이미 본능으로 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허, 내가 널 잘못 가르쳤구나!”
노사부가 탄식하며 말했다.
“잘 가르치신 거죠. 실천이 빠르잖아요.”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다.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놈이라고 다시 한 번 사부는 탄식했다.
“귀여움? 그딴 건 키워서 뭐 하게요?”
불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비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쯧쯧, 무르구나! 물러! 귀여움의 파괴력을 모르다니! 이 세계에는 강함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느 한쪽만 갖춘다면 언젠가 한계에 부딪치게 마련! 강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한 자만이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다.”
사부는 세상을 진리의 빛으로 일깨우겠다는 이상한 사명감에 젖어 열변을 토했다.
“그런가?”
그러나 소년 비류연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할 만큼 시큰둥했다.
“좋다. 네가 정 바란다면 빈틈없는 논리의 철옹성으로 너의 그 방만한 태도를 바로잡아 주마!”
둘째 손가락을 소년의 코앞에 들이대며 사부가 선언했다.
“그러시지요.”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비류연이 말을 받았다.
“오냐! 그럼 시작하마!”
“언제든지!”
둘 다 마치 결투에 임하는 검객 같은 태도였다. 사실 첨예한 논리를 무기로 상대의 허를 파훼한다는 점에서는 이런 것도 정신적인 대결의 장이 아닌가.
“좋다. 우선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너는 물 조금과 왕만두 다섯 개를 가지고 닷새 거리의 길을 걷고 있다. 그곳은 달리 식량을 구할 수 없는 험난한 길이며, 왕만 두 하나를 먹으면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있지. 알겠느냐?”
사부가 물었다.
“이상한 가정이지만 뭐 그렇다 치죠.”
비류연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답했다. 이럴 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자칫 사부의 궤변에 말려들 수가 있는 것이다.
“빳빳한 녀석. 아무튼 그렇게 길을 가던 중에 너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내놈이고, 또 하나는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귀엽고 여리여 리한 소저! 공통점은 둘 다 식량이 떨어져서 네게 왕만두 하나를 부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자! 너는 이 중 누구에게 왕만두 하나를 주겠느냐?!”
“뭐, 정중히 거절하죠. 나 먹을 것도 팍팍한 판국이라.”
냉정하고 단호한 대답에 사부는 분노했다.
“매정한 녀석! 이 사부가 너를 그리도 인정머리없는 놈으로 키웠단 말이냐?”
“어어, 아니었어요?”
딱!
“큭.”
비류연은 무의식 중에 이를 악다물었다. 이번에 날아온 타격의 강도는 단순한 꿀밤이라고 얼버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보통의 열한 살짜리 소년 이었다면 피를 철철 흘리… 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졌으리라. 비류연은 사태의 흐름을 약간 바꿔보기로 했다.
“뭐, 무슨 말씀인지는 알았다구요. 사부님은 귀여운 쪽이 왕만두를 얻는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흥, 그래도 구제불능의 바보는 아니로구나.”
사부가 코웃음을 치자 비류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사부님은 그러실지 몰라도 현실은 다를걸요. 보통은 외진 길에서 우락부락한 사내를 만나면 덜덜 떨면서 있는 걸 다 내주지 않나요? 반대로 귀여운 소저 의 경우, 조금이라도 음흉한 놈을 만나면 만두는커녕 돌이킬 수 없는 화를..
퍼억!
“이눔이……!”
노사부가 빠직 하고 핏대를 세우는 찰나, 비류연은 잠시 지옥에 인사를 하고 돌아왔다. 더불어 아무래도 전면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 었다.
“하, 하기야 그냥 무공을 갖춘 사내보다는 무공을 갖춘 ‘귀여운’ 소저가 더 유리하긴 하겠죠.”
“흐흠,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군.”
사부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비류연은 어딘가에서 ‘역시 맞아야 말귀를 알아듣는군’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남몰래 눈물 을 삼켰다.
그러나 제자의 슬픔은 사부에 의해 묵살되었다. 사부의 입에서는 곧이어 열변이 토해졌다.
“어쨌든 핵심은 여장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 여성이란 부드럽고 풍요로운 음(陰)의 결정체. 여자가 되어보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 없던 많은 것들 을 보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지 말란 말이다.”
“아니, 하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그러나 이미 사부는 대화 불능 상태였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런 말도 모르냐? 어설픈 근성으로 포기하지 마라. 만약 진짜 여자가 되는 데 실패하더라도 진정한 여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 한 거야, 노력하는 자세가!”
“이게 노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저런 막무가내를 쓰다니… 역시 설득력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졌다.
“관계있다면 관계있는 줄 알아!”
이젠 거의 막무가내다. 노력과 근성이 무슨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인가. 여기서 비류연은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단순히 그래야 돈벌이가 더 되는 것은 아니고요?”
.돈벌이라니?”
그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날래날래 떨어지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사부가 반문했다. 그러나 반문을 하기까지의 그 잠시간의 공백. 핵심에 찔려 ‘으윽’하 고 신음성을 토하는 마음의 소리가 담긴 것 같은 그 공백이 비류연은 심히 미심쩍었다.
그게 아니어도 가슴속에 쌓인 말은 많았다.
“그렇잖아요? 청루나 객잔에서 술 퍼마시는 사람 중 압도적 다수는 사내들이죠. 거의가 음률과 춤에 무지하고요. 밤낮 여자끼고 술퍼마실 생각만 하는 놈들이 무 슨 음률과 춤을 알겠어요? 쥐뿔도 모르고 치맛자락만 보이면 그저 헤헤 침 흘리는 놈들이!”
짓씹듯 내뱉는 비류연의 말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사,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마라.”
노사부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게 사소한 겁니까? 개인적으로 작은 일이라고 하기엔 좀 너무 지나치게 사회에 만연한 것 같은데요?”
제자의 항의에 사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진짜를 알아줄 사람을 만나기란 절벽에서 떨어져 기연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법이다. 그렇게 음률과 춤에 능통한 사람이 많다면 고산유수(高山流 水)나 지음(知音)이라는 말은 왜 있겠느냐? 또한 종자기의 죽음이 뭐가 아쉽다고 백아가 거문고 현을 끊었겠느냐? 만 명에 한 명이라도 깨어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행운인줄 알아야지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투덜대지 말고 이 옷을 입도록!”
“……”
***
..왜 이야기가 계속 그렇게 귀결되는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런 꼬락서니로 있으면 정말 그런 걸 이룰 수 있나?”
거울 속에서 턱을 괴고 삐뚜름히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소년은 중얼거렸다. 확신이 전혀 서지 않았다.
“에잇, 모르겠다!”
팔을 신경질적으로 내젓자 짤랑짤랑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비류연, 즉 연비는 움직일 때마다 종알종알 짤랑거리는 방울을 바라보았다. 그 방울은 용 문양이 새겨진 팔찌에 달려 있었다.
‘망할 사부! 이런 거나 달아놓고.’
그는 사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부는 옷을 갈아입고 난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아!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
“뭔데요?”
“춤출 때 벗지는 마라.” 짐짓 엄숙한 얼굴로 주의를 준다.
“아니! 벗긴 누가 벗어요?”
재빨리 옷깃을 여미며 어중간한 모습이 된 비류연이 소리를 빽 질렀다.
“이제는 이 노망난 사부가 나를 그런 불법적이고 퇴폐적인 업소에 팔아넘기기로 작정했단 말인가? 설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소년은 정절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웬 징그러운 눈빛이냐? 넘겨짚기는. 그 팔찌랑 발찌 말이다.”
사부가 가리킨 것은 팔목과 발목에 찬 한 쌍의 팔찌와 발찌였다.
“아, 이것들이요?”
나중에는 신체의 일부분처럼 꽤나 친숙해진 녀석들이지만, 당시에는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그걸 차고도 완벽한 춤을 출수 있도록 해라. 그리고 이건 덤이다.”
사부가 뭔가를 휙 던졌다.
“이게 뭔데요?”
얼른 그것을 받으며 비류연이 되물었다.
“뭐긴 뭐야. 방울이지. 보고도 모르냐?”
“그건 알지만..
고양이 목에 달아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용도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팔찌랑 발찌에 달도록 해라.”
사부가 지시했다.
“그리고요?”
아직 의혹이 완전히 풀린 게 아닌지라 그는 다시 물었다.
“응? 뻔하지. 춤출 때 소리가 안 날 수 있도록 수련해야지.”
‘뻔하긴 뭐가! 하나도 당연하지 않잖아!’
비류연은 튀어나오는 외침을 꾹 참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사부님, 방울은 원래 딸랑거리라고 있는 것이랍니다. 소리를 듣기 싫으면…….”
방울은 왜 다나. 방울은 딸랑거리라고 다는 것 아닌가. 그러나 사부의 세계에서 그것은 상식이 아닌 모양이었다.
“왜 이딴 것을 해야 되냐고?”
사부는 정확히 그의 의문을 짚어냈다. 비류연은 사부의 말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가르쳐 주지. 해보면 안다!”
사부는 평소에 어떻게 하면 최고로 무성의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날마다 연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그는 확신했다. 하지만 재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뭐, 이왕 하는 거 새로운 이름도 지어주지. 이제 여자가 됐으니까.”
그 당연하다는 말투에 비류연은 꿈틀거리는 눈썹을 애써 진정시키며 외쳤다.
“아직 속은 멀쩡한 남자라니까요!”
“쯧쯧, 여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군. 그럼 그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속까지 여자가 되도록! 당분간은 몸도 마음도 여자로 살아봐라.”
여자가 되려면 멀었다는 사부의 말에 비류연은 기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어차피 난 남자라구요. 여자 마음 같은 걸 어떻게 알아요.”
“넌 상상력도 없냐? 상상력을 좀 발휘해 봐라. 심상(心象)해 보란 말이다! 특훈 시작!”
비류연은 장렬히 항의하기로 결의했다. 어쩐지 항의라도 해대지 않으면 마음속 뭔가가 붕괴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 데나 특훈 갖다 붙이지 마세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기각한다!”
“그럼 적어도 장작 패거나 사냥하러 갈 때는 이 옷을.
“기각!”
사부는 무참한 기각으로 좌절하는 비류연의 얼굴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항의를 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폭력일 것이 틀림없었다.
“아, 맞다. 이름 짓기로 했었지?”
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노사부가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연비로 하자. 비류연의 류를 빼고 뒤집어서 연비(燕飛), 제비 연(燕)이다.”
사부의 선언에 비류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비 연이요? 원래는 연결될 연()자인데, 전혀 다르잖아요?”
“그냥 뒤집으면 너무 단순하잖냐. 너무 뻔한 건 싫어. 제비라면 어감도 좋지. 아, 조만간 제비집이나 맛보러 내려가 볼까.”
사부는 벌써 어느새 볼일을 다 봤다는 듯 한가해진 말투였다.
“그, 그걸로 끝이에요?”
비류연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는 ‘왜, 떫으냐?”는 표정으로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래, 끝. 이걸로 보다 완벽해졌군.”
만족스러운 말투. 정말로 완벽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뭐가 완벽입니까! 있지도 않은 여자를 만들어 가짜 이름을 붙여놓고.”
“있지도 않다니? 이름까지 붙였으니 또 다른 네가 눈을 뜰지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사부는 눈까지 가늘게 떠가며 불길하기 짝이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비류연은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랬다간 이중인격이 되라구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속단은 금물이란 말도 모르나? 그거야 두고 봐야 알 일이지.”
불길함을 배가시키는 사부의 대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류연은 다음날부터 기본적인 몸가짐을 비롯한 갖가지 기괴한 수련을 받아야 했다.
“음. 원래는 축골공 같은 신체 변환술도 써야 하지만, 어린 지금은 그다지 필요없겠지. 문제는… 그런 옷차림으로 남자처럼 어슬렁거리지 말란 말이다!”
사부가 엄한 목소리로 호통 쳤다. 사부의 말에 따라 두어 걸음을 걸어보던 비류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연하죠. 원래 남자니깐!”
“어허, 몸도 마음도 여자가 되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엉덩이를 긁거나 다리를 벌리고 앉는 꼴은 용서할 수 없어! 우아하게 귀밑머리를 매만지는 습관이 있다던가, 앉을땐 단아하게 무릎을 붙이는, 그런 게 여자란 말이다!”
알 수 없는 열의로 불타오르는 사부를 비류연은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나요? 그리고 그런 여성상은 어째 사부님의 개인적인 취향이 듬뿍 들어간 것 같은데요.”
십여 년의 짧은 세월이라고는 하나 남자로 꾸준히 살아온 몸이었다. 하루아침에 몸도 마음도 여자가 될 리 만무했다.
“과거 따윈 잊어버려. 지금 넌 여자다. 역에 몰두하란 말이야. 역할과 동화되지 않고서 어찌 그 진수를 얻으리오!”
“진수까지나…….?”
의욕이 전혀 없는 비류연이었다.
“한 장의 유리면구를 썼다고 생각해라.”
“유리면구(琉璃面咎)?”
어디서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노부가 예전에 감명 깊게 읽었던 한 서책에 나오는 문구다. 연기를 하는 자, 유리면구가 부서지게 하지 말지어니.” 자못 아련한 눈빛이 되어 사부는 시를 낭송하듯 중얼거렸다.
“네가 여자, 혹은 다른 인생을 연기할 때, 너는 한 장의 유리처럼 얇고 부서지기 쉬운 인피면구를 쓰고 있는 것과 같다.”
비류연은 그 말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유리는 유리고 인피(人皮)는 사람 가죽인데 유리 같은 인피면구가 어디 있어요? 설마 유리로 된 인간이?”
딱!
치마를 입고 있어도 사부의 꿀밤은 언제나처럼 날아왔다.
“비유의 묘(妙)도 모르는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아무튼 까딱 방심하면 그 유리면구는 산산이 부서져 흩어질 것이다. 그리고 네 녀석의 하잘것없는 본성이 드러나
게 되겠지. 그러니 너는 천(千)의 얼굴, 천 개의 면구를 쓴 자가 되어야 한다.”
사부가 다시 본격적으로 열변을 토했다.
“겨우 여장 하나 하는 데 천의 얼굴씩이나… 그냥 두세 개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비류연이 냉정하게 지적했다. 배우도 아니고 특별히 공연을 할 것도 아닌데 천 개씩이나 되는 얼굴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또 잔머리냐?”
“제자, 이성적인 판단이라 사료되옵니다.”
평소에 쓰지 않는 정중한 어투를 쓰면 오히려 반항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미숙하구나! 네 녀석은 마음으로는 부드러움보다 강함을 추구하고, 무공에선 강함보다 잔기교에 치중하지. 언젠가 후회하게 될 날이 올 거다. 그때 가서 울지 말 고 열심히 여자가 되어라!”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걸까?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여자, 여자, 나는 한없이 우아하고 기품있는 여자’라고 되뇌어라. 껍데기뿐 아니라 알맹이까지 진정한 여자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남자로서의 감정이나 과거는 신경 쓰지 마라. 넌 이제부터 여자다. 자신을 속여라.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쓰임이 조금, 혹은 아주 많이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여자와 함께 자더라도 절대 동요해서는 안 된다. 여자가 여자랑 있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심지어 함께 목욕을 하거나 함께 화장실에 가도 말이다!” 그때 비류연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잠깐만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여자끼리도 그럴 땐 서로 부끄러워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제자의 지적에 사부는 단호하게 답했다.
“모른다! 난 남자니까. 그저 그렇다는 소문이 있던데. 흐음, 과연 어떨지. 기회가 생기면 필히 시험해 보도록!”
“…..”
할 말을 잃고 잠시 사고의 흐름이 끊어진 비류연에게 사부는 다시금 강의를 계속했다.
“아무튼 여자의 가면을 쓰는 순간 넌 완전히 여자가 되어야 해! 함부로 무대를 내려와선 안 되는 것이다.”
‘무대라니, 어디 무대를 말하는 걸까…….?
머리에 뭔가 혼란이 오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비류연은 확신했다. 혹시 나이가 들면 간혹 발생한다는 치매의 전조인 걸까. 역시, 나이를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만.
“무대라니, 아무리 봐도 아까부터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거 아니에요?”
“어허, 사소한 것엔 신경 쓰지 말라니까. 말투도 왜 아직 사내 말투야? 좀 더 조신하고 나긋나긋하게!”
사부가 다시 한 번 호통쳤다. 마치 연기의 길을 물로 보지 말라고 외치는 듯했다. 자꾸만 이상한 데서 불타오르기는.
뭔가 무지 신경 쓰였다.
“그때 사부의 말이 최면 효과가 있었던 걸까?”
특훈을 빙자해 두어 달가량 여자로 생활했더니 완전히 여자로서의 행동거지가 몸에 배어버렸다. 말투도 여성스럽게 변했다. 가끔 의식적으로 거칠게 말하지 않는 이상,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어조가 나온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많은 고초를 겪었다. 잠자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나무를 패는 자세, 심지어는 볼일을 보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사부는 시도 때도 없이 급습 해서 요상하기 짝이 없는 특훈을 시켰다. 남성으로서의 자연스런 행동들은 가혹한 제약 하에 급속도로 제거되어 갔다.
‘걸치는 옷에 따라서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나중에는 옷을 갈아입는 순간 뭐랄까, 일종의 신호가 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행위를 기점으로 자연스레 존재가 바뀐 달까. 단순히 연비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의 ‘연비’라는 존재가 겉으로 튀어나오는 느낌마저 들었다.
역에 대한 몰입이라고 보기엔 좀 달랐다. 진짜의 자신은 한 발짝 물러나 ‘연비’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더욱더 자아가 또렷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러다 정말 이중인격 되는 거 아냐??
확실히 이 모습을 하고 있으면 평소보다 성질이 빨리 가라앉는다. 쉽게 흥분하지도 않는다. 이토록 차분한 모습이 되는 데 일조했던 것은 우습게도 사부가 던져 준 딸랑이, 즉 방울이었다.
방울을 달고 춤 연습을 시작하자마자 연비는 그것이 사부가 던져 준 최대의 족쇄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방울은 여지없이 경망스레 딸랑거 렸다. 살며시 흔들 때는 맑은 미성(美聲)을 흘려내지만, 제멋대로 흔들릴 때는 시끄럽고 경망한 소음에 불과했다. 게다가 유리면구라는 출처 모를 괴서적에 심취해 시도 때도 없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사부의 잔소리는 방울 소리보다도 더 시끄러웠다.
“쯧쯧. 방울 소리를 없애는 것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그 시끄러운 잡음만큼 네 몸동작에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다는 것이다!”
어차피 팔다리에 방울을 달고 몇 달을 살다 보면 누구라도 그 시끄러운 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신경을 제거하던가 소리를 제거하 던가. 연비는 결국 고된 연습 끝에 딱히 의식을 하지 않고도 방울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연비는 여러 가지 효과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군더더기없이 우아하고 부드러운 몸동작을 생활화하게 된 것이나, 방울 소리가 일종의 주문처럼 작용해 자신을 보다 완벽히 통제할 수 있게 된 것 등이 가장 큰 성과였다.
묘한 것은 연비가 마치 주문 의식에 들어가듯 방울을 가볍게 울리며 춤추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관객들도 마치 주술에 걸린 듯 춤에 빠져든다는 것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방울인데, 설마 사부가 일부러 이상한 걸로 구해온 건 아니겠지??
연비는 사부가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에, 애써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리며 경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경대 옆에는 기분 전환에 도움 이 될 만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오늘의 특별 소득인가?”
그제야 사천 지부장 남궁현에게서 받은 물건에 눈길이 갔다.
“흐흥, 의외로 괜찮네. 그냥 금 열 냥인 줄 알았더니.”
탐스러운 금화(金花) 열 송이가 담긴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연비는 한마디 했다. 이곳은 연비의 전용 분장실로, 천향루 내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었다. 물론 전 용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력과 인기 덕분이었다.
“그나마 이 짓을 하는 보람이 있군.”
딱히 춤과 금이 싫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당히 심취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금을 연주하고 춤을 출 때마다 여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됐다. “이 동경은 왜 이리 지저분해졌어? 거울갈이라도 불러놓지 원.”
연비가 한참 분장을 지우며 투덜거릴 때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나 보네.”
삼십 줄에 접어든 남성의 목소리였다.
“뭔데? 그 금지옥엽 아가씨에 관한 건가?”
말투나 내용으로 봐선 십중팔구 하급 무사들이었다.
“맞네. 듣기로는 말은커녕 사람 얼굴도 똑바로 못 본다더군. 아직 어린 나이에 허구한 날 방구석에만 쪼그려 앉아 있다던걸.”
“왜 그리 됐다던가? 그런 집에서 자랐으면 무서울 것도 부족한 것도 없었을 텐데. 나 같으면 좋아서 날아다니겠구만.”
비웃음과 의아함과 동정심이 적당히 섞인 말투였다.
“잘난 게 죄지. 개나 소나 덥석 잡아가고 싶을 미모라서 이래저래 말 못할 미수 사건들이 수두룩했다더군.”
“허허, 그것참, 얼마나 예쁘길래. 나도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네.”
“그만두게, 그만둬. 말도 꺼내지 말게. 남궁 총령도 벌벌 떨던 거 못 봤어?”
“하긴, 지켜보던 나도 식은땀이 다 나던데. 딸내미 혼자 두기 걱정돼서 직접 데리고 왔다는 소문이 사실인갑네.”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거지. 어쨌든 묵연비의 춤은 과연 대단하더군, 쩝.”
“뭐야, 자네 소녀 취향인 거야?”
어느새 하급 무사들의 목소리에는 능글거림이 더해져 있었다.
“하늘 위의 금지옥엽보단 이쪽이 더 가망있지. 어디 한번…….? 빠직!”
얘기를 듣고 있던 연비는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이것들이!’
그때 연비의 눈에 마침 좋은 게 들어왔다. 무식하게 생겨서 처박아놨던 커다란 나무 빗이었다.
“호오, 이거면 충분하지.”
망설이지 않고 힘을 주어 빗살을 두 개 분지른다. 순식간에 굵은 나무 바늘이 만들어졌다.
‘두 개 동시엔 무리라도 하나씩이라면!’
연비는 정신을 집중해 빗살에 기를 모았다. 그리고는 벽을 향해 날카롭게 손을 휘둘렀다.
퍽!
“끅!”
벽 너머로 비명이 전해진다.
“아니, 자네 왜 그러나?”
연비의 손이 망설이지 않고 남은 빗살을 마저 던졌다.
“꽥!”
다시금 비명 소리가 짧게 울리고, 곧이어 뭔가가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쿵, 쿵 연속으로 들려왔다.
“흥, 일어나기 전에 가서 좀 더 뻐근하게 해줄까.”
아직 이상적인 여성의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기엔 무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흰 칠이 된 벽에는 미세한 구멍 두 개가 뚫려 있었다.
‘방금 전 그건 누구 얘기였을까??
다시금 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한 연비의 머릿속에 짧은 생각이 일순간 스쳐 갔다. 하지만 잠시 후 공연의 흔적을 모두 지운 뒤에는, 이미 그런 의문마저 머릿속에 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잠시 기절해 있는 두 하급 무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자자, 그럼 오늘의 주요 업무를 처리해 볼까. 여자답게, 여자답게.”
연비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돈!”
연비가 손을 쭉 내밀며 짧게 말했다. 상대는 이곳 천향루의 주인인 소한산이었다. 어떻게 보면 실로 불경한 광경이었지만, 소한산 역시 말없이 곧장 돈을 꺼내 연 비 앞으로 내밀었다.
안에 든 내용물을 정확히 세어본 후 연비는 전낭을 품속에 고이 챙겨 넣었다.
“틀림없군요.”
“깐깐하기는.”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소한산이 한마디로 답했다.
“남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만한 사업을 일구려면 철저한 금전 감각은 필수불가결이다. 돈의 습성과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성공을 이룩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으면 거의 불 가능에 가깝다. 소한산은 연비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연주와 춤, 상당히 훌륭했다고 들었네.”
“일이니까요.”
연비는 약간의 경계심을 발동했다. 아무래도 본론은 연주와 춤을 칭찬하자는 것이 아닌 듯했다.
“남궁 대협에게 특별 부상까지 꽤 받았다더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날카로운 어조로 연비가 반문했다. 십여 세 소녀답지 않은 매서운 눈빛에 산전수전 다 겪은 소한산은 가볍게 얼굴을 굳혔다.
“뭐, 문제는 없지.”
“그렇겠죠? 처음부터 그렇게 계약했으니까요.”
사부가 처음 연비를 데리고 이곳 천향루에 왔을 때, 소한산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저런 어린 계집애를 써봐야 무슨 득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저 애는 올해로 열다섯이라네. 편식을 해서 성장이 좀 느린 모양이야.”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듣고 있던 연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잘 봐야 열두셋, 아마 열한 살 정도겠군요.”
“허허, 자넨 그간 속고만 살았나. 아무튼 그래서 싫다는 겐가?”
사부의 목소리가 슬슬 위협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한산이라는 자도 녹록치는 않은 모양이었다.
“전 장사꾼입니다, 노야. 아무리 노야의 부탁이라도 저렇게 어린아이를 써버리면 삼대에 걸쳐 쌓아온 저희 천향루의 명성에 흠이 갈 것입니다.”
평판이 나빠지면 그것은 곧 매상 저하로 이어진다. 소한산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흥. 내가 듣기로 가끔 이런 곳엔 독특한 손님들도 찾아온다던데? 열서넛 이상은 도리어 상대도 안 한다는…….”
“어흠, 흠. 다른 삼류주루들이 벌이는 짓을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사부의 난감한 언급을 소한산은 잔기침으로 무마했다. 연비는 소한산의 흘낏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왠지 사부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어차피 저 아이 장기도 그런 쪽이 아니니까 상관없는 일이지만. 뭐, 할 수 없군. 저 녀석을 왜 이곳에 데려왔는지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뭘 말입니까?”
“무대나 만들어주게.”
급히 무대가 만들어졌다. 어린 소녀가 자기 키보다 큰 금을 들고 무대 위에 오르자 소한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아마 일종의 여흥으로 여기자 고 다짐한 모양이었다.
‘흥!’
칠현의 금 줄 위에 손가락을 얹으며 연비는 생각했다.
‘좋아. 여기서 일부러 대충 하면 이곳에서 일할 일도 없다는 거지?”
그러잖아도 이미 부업으로 하고 있는 일들은 차고 넘쳤다. 여기에 주루 일까지 더한다면 창창한 나이에 과로사할 위험이 있었다. 사부가 무공을 가르치는 것은 결 국 과로사의 위험을 막기 위한 체력 보강에 불과한 게 아닌가 부쩍 의심이 드는 요즘이었다.
‘적당히 하자고, 연비!’
그가 자신에게 속삭였다. ‘적당히! 적당히!’
그때 사부가 한마디 했다.
“적당히 할 생각 마라!”
이럴 땐 정말 귀신이다.
‘너무 대충 하면 들킬 테니까 적당한 선에서 연주하는 게 좋겠군.’
디리리리리링!
연비는 연주를 시작했다. 금 연주는 사부에게서 금을 배운 이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칠현 위를 달려가는 작은 손에는 아무런 거침도 없었다. 이제는 수위 조 절도 자유자재로 가능했다.
‘적당히! 적당히!’
너무 심취해 버리면 곤란하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곳 천향루 정도라면 상당한 실력의 연주자를 고용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적당히만 하면 충분히 떨 어질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런데 반응들이 좀 이상했다.
‘왜 다들 눈을 감고 있는 거야?”
저래서야 마치 음률에 취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거 곤란한데.
‘이보세요들! 지금 적당히 켜고 있는 거 안 들려요? 표정들이 다들 왜 그래요? 어서 눈을 뜨고 이런 적당한 음률 따윈 귓가에 흘려들으며 일상으로 돌아가라니깐!’ 이 적당함에 어디 감탄할 요소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연비의 마음속 외침은 사람들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서둘러 주인 소한산 쪽을 바라봤다.
‘그래, 주인장인 소한산의 판단이 중요해! 그라면 그 음률에 스며든 적당함과 대충대충함을 눈치 챌 수 있을 터. ‘
그러나 소한산의 얼굴을 본 연비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디딩!
어느새 잡생각과 딴생각이 가득한 연주가 끝났다. 순간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다.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 아직은 희망이…….’
그러나 연비의 희망은 곧이어 터져 나온 감탄성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호오오오!”
“거참!”
“와아아아!”
저 뒤쪽에서 탁자를 닦던 점원 하나는 고개를 외로 꼬고 슬쩍 눈물을 훔쳤다.
“이, 이보세요. 대충 한 사람 미안하게 눈물 흘리지 말아요.’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연비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답례로 정중히 인사하는 것은 빼놓지 않았다.
“흠, 가능성은 큰 것 같군요. 그럼 일단 계약해 두겠습니다.”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고 소한산이 한 장의 종이를 내밀었다. 좀 전의 떨떠름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선 계약 내용부터 살펴봐야지. 조건부터 따지는 게 순서 아니겠나?”
이번엔 사부가 느긋한 소리를 했다. 소한산이 끄응 소리를 냈다.
“연주비 이외에 손님에게서 받는 부상 일체는 전부 이쪽에서 받아가도 되겠지?”
“그건 좀..”
원래 그런 건 적당한 비율로 나누는 것이 관례다.
“왜? 불만인가?”
“뭐, 괜찮겠지요.”
한숨을 내쉬며 소한산이 말했다. 연비의 재주가 탐나긴 탐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을 땐 춤을 추지 않겠네.”
“그건 상당히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더 희소가치가 올라가는 법일세. 연주가 저리도 대단한데 춤은 또 어떨까 하고 말이야. 함부로 웃음을 팔면 싸구려가 되게 마련이지. 자네도 경영 수완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조부에겐 못 미치는구먼.”
사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노인은 소한산의 조부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때 금산(金山)이라고까지 불렸던 사천 일대 최고의 상인을 말이다.
“어찌 제 수완이 조부님께 미칠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노야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었다. 연비로서는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소한산은 절대 부상에 대해 연비에게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소한산은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와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넘어가지. 그보다 평소에 춤 연습을 하던 후원 말인데… 당분간은 그곳에 가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웬일인지 곤란해하는 말투에 연비는 호기심이 생겼다.
“이유가 뭐죠?”
“귀빈의 부탁으로 어제부터 그곳은 금지 구역이 됐으니까.”
연비의 호기심은 좀 더 증폭되었다.
“귀빈이라면?”
“말하기 곤란해. 아무튼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런 말을 들을수록 호기심이란 녀석이 고개를 치켜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다.
“그러죠. 그럼 이만.”
용무가 끝나자 연비는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아, 내일도 부탁해도 되나? 중요한 손님들이 한동안 머무를 예정이어서 말이지.”
아마도 오늘 중앙 연회장을 빌렸던 손님들을 말하는 듯했다. 어쩌면 귀빈이라던가 금지 구역이라던가 하는 것도 그들과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연비 자신과는 별 상관 없는 얘기.
연비는 이곳 천향루에 예속된 처지가 아니었다. 일정 조건을 내걸고 정당한 계약을 했을 뿐이니 자신이 굳이 천향루의 일정에 휘둘릴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일은 일하는 날이 아니니까 계약 사항 외의 업무군요. 내일은 다른 일이 있어서 곤란해요.”
단호하지만 정당한 거절이었다. 다음날은 만화장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거칠긴 하지만 근래 상당히 애착이 가는 일이기도 했다. 뭔가를, 특히나 고(高)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 아닌가.
“물론 공짜는 아닐세. 평소 임금의 두 배를 주겠네!”
“세 배라면 생각해 보죠.”
“글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공연은 분명 호평이었을 테니 아쉬운 건 분명 저쪽이다. 연비는 망설이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잠깐!”
“왜 그러시죠?”
뒤도 안 돌아본다.
“내가 졌네. 세 배를 주지.”
문밖으로 나가던 연비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빙글 몸을 돌리며 연비가 말했다.
“그럼 좀 더 의논해 볼까요?”
연비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맺혔다.
의견 조율을 마치고 나온 연비는 흘낏 후원 쪽을 바라보았다.
“위험한 금지 구역이라니, 그렇게 강조하는 걸 보면 꼭 가보란 얘기겠지?”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미 연비는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은장부터”
그날 번 돈은 그날그날 은장에 즉각 맡겨놓는 것이 연비의 철칙이었다.
연비가 도착하자마자 청룡은장의 총관이 냉큼 달려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연 소저. 오늘도 어김없이 저희 청룡은장을 방문해 주셨군요.”
대접하는 폼을 보아하니 연비 역시 청룡은장의 초우량 고객인 듯했다. 맡은 돈이 클수록 더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으니, 날이면 날마다 잊지 않고 돈을 맡겨주는 이 아가씨가 고맙지 않을 리 없었다.
“오늘은 이 금화(金花) 열 송이도 현금화하고 싶군요. 이 정도 재질에 이 정도 상태면 최상급이고, 여기에 현금 예금을 더하면.
연비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주판을 재빨리 몇 번 튕겨보였다. 총관은 주판알을 세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이 바닥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정확하게 귀금속의 가치를 매기기 힘들 텐데 말입니다.”
“약간 인연이 있어서요.”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요는 어리다고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지혜를 살짝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꽤 거래를 했으니까 겨우 나 이 때문에 무시할 멍청이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비류연일 때보다는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알맹이는 똑같아도 바지를 걸쳤을 때와 치마를 걸쳤을 때는 대우나 신 뢰도가 다른 것이다.
“자, 처리가 모두 끝났습니다.”
총관은 공손하게 장부를 내밀었다. 그동안의 모든 거래 내역이 적혀 있는 장부였다.
“음, 확실하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장부에 기재된 내용을 확인하고 총관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별말씀을. 연 소저의 자산 증식은 저희들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뭘요. 앞으로도 계속해야죠.”
이런 건 꾸준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연비는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은장을 나왔다.
그러나 그날 저녁.
산 위에 있는 누군가는, 한 번 받고 나면 결코 되돌려주지도 않을 돈을 받으면서도 청룡은장의 이들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것뿐이냐?”
“그럼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간 연비, 아니, 비류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흐흠, 덤으로 더 받은 것은 없고?”
비류연의 전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노인이 물었다.
“그럼요.”
속으론 뜨끔한 게 있었으나 내색치 않고 대답했다. 대답에 조금이라도 지체가 있으면 걸려드는 것이다. 비류연은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인가??
역시 배워놓으면 다 쓸모가 있었다.
“진짜란 말이지?”
의혹의 구름이 뭉실뭉실 떠오르는 눈빛으로 사부가 재차 질문했다.
“물론이죠.”
비류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녀석! 많이 늘었는걸!’
비류연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사부는 이내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알았다. 내일은 만화장 가는 날이냐?”
사천 지방에서 가장 알아주는 철물점이었다. 무사의 도검에서부터 규방 아가씨의 장신구 노리개까지 못 만드는 게 없는 곳이기도 했다.
“모레로 바꾸게 되었어요. 내일은 천향루에서 초과 근무를 하기로 해서. 두 배 보수라니 할 말은 없죠.”
비류연은 은근슬쩍 세 배를 두 배로 바꿔 말했다. 평상시대로 보수를 받고 초과 근무를 한다고 했으면 사부는 믿지도 않았겠지만, 이 정도면 조용하겠지. 세 배와
두 배 사이의 차액은 뭐 가벼운 융통성이랄까.
“흐흠. 그래, 만화장 쪽은 진척이 좀 있냐?”
역시, 다행히 무사통과다.
“조금 있었죠. 아직 검장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되지만요.”
“쯧쯧, 굼뜨긴. 대장장이는 검을 만들어야 비로소 진짜지. 검이야말로 철과 불의 예술 그 자체니깐.”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진짜라는 건 아니고요?”
물론 그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너, 어째 불만인 것 같다?”
역시 사부의 눈치는 귀신같다. 이럴 때 당황하면 자신이 그랬다는 것을 자백하는 꼴, 비류연은 최대한 밝고 상큼하게 미소 지었다.
“아뇨, 그럴 리가요. 지당하다고 생각했는걸요?”
“흠, 그렇다고 해두지. 그보다 분뢰수 수련에 좀 더 정진하도록.”
사부는 비류연의 손을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왜요?”
“여자애라면 손이 이뻐야지. 불과 쇠를 만지려면 손이 거칠어지는 게 필연이지만, 분뢰수를 익히면 그럴 걱정이 없어지지.”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사부가 대답했다.
“그거, 미용신공(美容神功)이었어요?”
딱! 이제는 습관처럼 날아오는 꿀밤.
“멍청한 놈! 그럴 리가 있겠냐? 응용(應用)이란 거다, 응용!”
비류연은 정수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항의했다.
“크윽, 그렇다고 때릴 것까진 없잖아요!”
“밥이나 먹자.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내일도 또 수고하란 얘기였다.
“예.”
공손하게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입은 삐죽거리고 있었다. 저녁 준비는 언제나 비류연의 독차지였던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이 생활을 청산하고 말리라!’
소년은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