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4화 – 서풍이 몰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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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4화 – 서풍이 몰아치다

서풍이 몰아치다

– 서천의 발동

야심한 밤.

무림맹주 <진천뢰벽검> 나백천이 머무르고 있는 귀빈실로 어둠을 뚫고 한 인영이 접근했다. 솜 신발을 신고 있기라도 한 듯, 일체의 발걸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인영의 신형이 방문 앞에서 우뚝 멈춘다. 방 안은 아직 밝았다.

똑똑!

인영이 조심스레 문을 두 번 두드린다.

“들어오게.”

문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주위를 두어 번 둘러본 인영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간다. 쓰고 있던 초립을 벗자 모습이 드러났다. 바로 사천 지부장 남궁현이었다.

“갑작스런 시찰에 많이 놀랐겠지?”

“아, 아닙니다.”

사실 그 일로 사천 지부가 발칵 뒤집혀서 며칠 밤을 새긴 했지만, 굳이 그런 얘긴 하지 않았다.

“안심하게! 자네의 딴 주머니 속엔 관심없으니.”

그 말에 남궁현의 얼굴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따, 딴 주머니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기겁하는 목소리에 나백천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니면 다행이고. 이곳에 온 것은 시찰보다는 사실 다른 목적 때문이네.”

나백천은 남궁현 앞으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건…….”

서찰을 잡기가 망설여지는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모양이다.

“이 년 전 무림맹 본부에서 발생한 도난 사건을 기억하고 있나?”

“무, 물론입니다. 다름 아닌 제칠비고(第七秘庫)가 하룻밤 사이에 감쪽같이 털린 사건 아닙니까?”

그때라면 그도 아직 본부에 적을 두고 있었던 때였다. 제칠비고라면 무림맹의 최중요 기밀 창고. 일곱 겹의 감시가 뚫리고 그 비고 안의 물건을 도둑맞은 사실을 그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자넨 그때 없어진 물건이 무엇인지 몰랐을 거네.”

“그렇습니다.”

남궁현 같은 자도 모를 만큼 엄중하게 관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철저히 함구령을 내렸으니 아마 그랬겠지. 그 물건은 바로…….”

나백천은 내공을 이용해 펼쳐 낸 차음막으로도 불안한지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나백천이 그 물건의 정체와 유래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남궁현의 얼굴에서는 점점 더 핏기가 빠져나가며 핼쑥해졌다.

“서, 설마 그런 일이…….”

자초지종을 모두 들은 남궁현의 입은 떡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 몰랐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 이 일을 아는 이는 삼성 세 분과 나, 또 몇몇 호법들뿐이네. 그런데도 그것이 감쪽같이 없어졌으니 무림맹이 발칵 뒤집힌 걸세.”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직위 해제되어 옷을 벗어야만 했다. 모든 정보망과 인력을 총동원해 샅샅이 수색해도 결국 실마리조차 잡아내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이 서찰은 이 년 전 범인이 두고 간 서찰일세. 어차피 자네도 알아야 할 일이니 서둘러 읽게나.”

그 말에 남궁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인이 그때 단서를 두고 갔던 겁니까?”

“그렇지만 극비에 붙여졌지. 자칫 말이 새 나갔다가는 강호가 혼란에 빠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나백천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그토록 엄중히 다루었던 것인지 남궁현은 도리어 더욱 불안해졌다.

“보면 알게 되네.”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나백천이 대답했다. 남궁현은 조심스럽게 이 년 전 범인이 남겼다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서찰을 잡고 있는 남궁현의 손은 금세 사시나 무 떨리듯 세차게 경련했다.

“이… 이건…….?”

떨리는 것은 비단 그의 손뿐이 아니었다. 나백천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궁현은 다시 한 번 서찰을 들여다보았다. 두 번, 세 번, 아니, 다섯 번을 다시 읽어도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간다. 그동안 잘 보관해 줘 고맙다. 다음에 보자.

-빚을 진 자가.

“하지만 제칠비고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은..

남궁현은 두려운지 차마 방금 들었던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래! 일명 ‘서풍(西風)의 광란(狂亂)’, 바로 사천멸겁 중 한 명인 서천의 독문기문병기일세!”

“그럼, 설마 서천(西天)이 아직 살아 있다는…….”

남궁현은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이 되었다. 비록 오십여 세라고는 하나 아직도 그는 무림에서 젊은 축에 속했다. 백 년 전의 천겁혈세는 전설 속의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 역시 대전에 참전했다는 조부로부터 간간이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얘기 속에 깊이 배인 공포의 잔재만으로도 당시 의 두려움과 공포를 어느 정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쉿! 그런 말, 쉽게 입에 담아선 안 될 것이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백천이 신중한 얼굴로 주의를 주었다.

“제,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남궁현은 실책을 자인했다. 나백천의 의도는 분명했다. 세상에는 사칭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범인은 얼마든지 그 수법을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괜히 호들갑 을 떨다가는 일을 시작해 보기도 전에 자멸할 수 있었다.

“내가 왜 자넬 일부러 은밀하게 이곳에 불렀는지 이제 알겠나? 모든 판단은 사실 확인을 한 이후로 미루게.”

“예, 명심하겠습니다, 맹주님!”

나백천은 그제야 만족한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번에 내 앞으로 은밀히 도착한 서찰일세.”

나백천은 두 번째 서찰을 내밀었다. 좀 전의 빛바랜 서찰과 달리 아직 새 티가 역력했다. 저것이 바로 나백천을 움직이게 해서 사천 지부 사람들이 몇 날 며칠을 새 게 한 원흉이리라.

남궁현은 뻣뻣하게 긴장된 손길로 서찰을 펴보았다. 겉봉에 적힌 ‘무림맹주 친전’이라는 글의 서체는 좀 전의 서체랑 꼭 같았다. 내용은 짧았지만 결코 가볍지 않 았다.

바야흐로 때가 되었다. 빚을 청산할 때가! 서쪽 관문을 넘어 서쪽 끝에서부터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할 것이다.

-빚을 진 자가.

“관문이라면 아마 사천 옥문관을 가리킨 것이겠지. 중원의 서쪽 끝에 위치한 천험의 요새이니 말일세. 중원의 서쪽 끝이면 단연 이곳 아니겠나?” 

“그래서 사천으로…….”

“바로 그걸세.”

굳이 이런 서찰을 보낸 것은 그로 하여금 본부에서 이탈하게 하려는 함정일 수도 있었다. 나백천이 딸을 데리고 온 것도 사실은 그런 불안이 있어서였다. 자신이 없는 무림맹에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위험해도 함께 데려오는 편이 마음 놓였다. 어쨌든 함정이고 뭐고 직접 나설 수밖에는 없었다. 서찰은 일종의 도전장이기도 했 던 것이다.

“이 년 만에 나타난 유일한 단서라네. 내 어찌 그걸 소홀히 다룰 수 있겠나?”

‘확실히 그 일이라면 맹주님 본인이 직접 나선다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왜 수십 일 길인 이곳까지 번거로운 몸을 움직였을까 고민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납득이 갔다.

“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마른침을 삼키며 남궁현이 물었다. 어깨가 천 근 철추에 눌린 듯 무거워져 왔다.

“우선 단서가 있나 알아봐 주게. 내용은 비밀로 하고, 기밀 유지가 최우선 관건이네.”

“어렵겠군요. 일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난감합니다.”

수하들에게도 함부로 정보를 흘릴 수 없는 이상 번거로움은 따놓은 당상이다. 수하를 부리는 의미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걱정 말게. 그가 진짜 서천이라면 단서가 있네. 과거 삼성께서 남겨놓으신 증거지.”

“그 단서는 무엇입니까?”

남궁현을 바라보는 나백천의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백 년 전 그자는 천무삼성에 의해 오른팔이 잘렸네.”

“그럼 그자가 외팔이라는…….”

그러나 나백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이 년 전이라면 확실히 그랬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예?”

어리둥절해하는 남궁현의 모습에 아랑곳 않고 나백천은 단호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그 독문병기는 그자의 팔이라네! 그러니 외팔이이면서도 외팔이가 아닌 자를 찾게!”

***

“이거 한바탕 몰아치겠는걸?”

산 중턱에 서 있던 소년이 몰려오는 먹구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물기 머금은 바람이 그의 작은 몸을 제법 매섭게 때리고 있었다.

하늘을 검게 뒤덮은 구름이 범상치 않다. 두께와 색깔을 보면 비바람을 잔뜩 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짙은 먹구름 안에서 성난 용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류연아! 빨래 걷어라! 폭풍우가 올 게다.”

등 뒤에 서 있는 초옥 안에서 사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요.”

소년 비류연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근데 빨래가 문제가 아니라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요?”

흘끔 초옥을 바라보며 비류연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서 있는 폼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영 생긴 게 시원찮았다.

“근성으로 버티면 돼!”

사부의 조언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근성만 있으면 예산도 계획도 필요없는 겁니까?”

소년이 항의했다.

“엉!”

항의는 즉각 묵살당했다.

***

방 밖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사내는 탁자 위에 놓인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로 만들어진 기다랗게 생긴 철관이랄까, 이리저리 복잡하게 쇠사 슬이 묶여 있는 철 상자였다.

들썩거리는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사내의 오른쪽 소매가 맥없이 펄럭였다. 사내는 외팔이였다.

“폭풍이라…이 녀석과 잘 어울리는 밤이군!”

철컥! 철컥!

외팔이 사내는 이중 삼중으로 둘러친 쇠사슬을 천천히 벗겨내고 상자를 열었다. 마찰음과 함께 상자가 열렸다.

“드디어…….”

상자 안을 바라보는 사내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번져 간다.

번쩍!

창밖으로 뇌전이 번뜩인다.

우르르릉! 콰쾅! 천둥이 대기를 때린다.

“때가 되었다!”

외팔이 사내는 상자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꺼냈다.

“복수의 때가!”

저벅저벅저벅!

***

무림맹 사천 지부 지부장 집무실 앞 복도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사내의 발걸음이 문밖에서 우뚝 멎었다.

번쩍!

번쩍이는 섬광이 창호지 위에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누구냐!”

탁자 위의 검대에 올려놓았던 검을 잡으며 남궁현이 외쳤다.

드르륵!

대답 대신 문이 활짝 열렸다.

“뭐야, 자네였나.”

방문자를 확인한 남궁현은 검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 일부러 그랬지! 좀 기별이나 하고 들어오게. 깜짝 놀랐잖나, 부총령.”

남궁현의 비난을 받은 부총령 나일천은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여긴 무림맹 사천 지부 안입니다. 누가 감히 허튼수작을 부린단 말입니까? 지부장님이 너무 소심하면 보기 안 좋습니다.”

“자네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네. 그래, 무슨 일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이 된 나일천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천에 대한 단서가 잡혔습니다.”

“뭐?”

남궁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름조차 입에 담기 두려운 존재, 혈신을 호위하던 네 명의 심복, 그 이름도 두려운 사천멸겁. 그중 행방불명된 서천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는데 그가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뭔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외팔이면서도 외팔이 아닌 자’라는 수수께끼를 푼 게 도움이 되었지요.”

나일천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남궁현은 그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위화감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아, 그렇군. 그래, 그렇군……. 그런데 말이야.”

“예?”

나일천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반문하는 동안 남궁현은 천천히 손을 무릎으로 가져갔다.

“어떻게 알았나? 나는 자네한테 ‘서천’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번쩍!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섬광을 배경으로 나일천은 번개처럼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남궁현이 급히 의자를 박차며 몸을 뒤로 날리는 동시에 의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어떻게 오른손이!”

분명 헐렁해야 할 그곳에 손이 달려 있었다. 나일천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말투도 바뀌었다.

“이건 이제야 눈치 챘나? 생각보다 멍청하군.”

“이런, 네놈이!”

남궁현이 검을 빼 드는 동안에도 나일천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훗!”

다시 한 번 입가에 조소가 걸리는 순간, 나일천의 오른손이 남궁현의 심장을 향해 뻗어갔다.

피융!

어떤 사전 동작도 없이 날카로운 창처럼 늘어난 오른손이 섬전처럼 빠른 속도로 남궁현의 심장을 쫓아가 꿰뚫었다. 남궁현의 검은 덜컥, 힘없이 땅에 떨어졌다. 콰악!

남궁현의 심장을 꿰뚫은 마수(魔手)는 여력이 감소하지 않은 채 그대로 뒤편의 벽을 꿰뚫고 그곳에 박혔다.

남궁현은 순식간에 꼬치 신세가 되어 허공에 매달리게 되었다.

스르르르륵!

팔은 뻗은 채 나일천의 몸이 지면을 스치듯 움직여 남궁현에게 다가갔다.

“서, 서천은 분명 백이십 살도 넘었을 텐데..

나일천을 내려다보는 남궁현의 눈에 불신의 빛이 가득 찼다.

“뭐, 이대째라고 해두지.”

“내, 내겐 무슨 원한이……..

“별로. 난 장손이 싫거든.”

남궁현의 가슴을 꿰뚫은 오른팔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일천이 내뱉듯 말했다.

“장손이란 것만으로 모든 걸 손에 넣잖아. 그건 그렇고, 꽤 오래 버티는데?”

예상대로라면 곧바로 숨이 끊어졌어야 정상이다.

“과연, 썩어도 준치란 건가! 몸을 비틀어 심장을 비켰군. 그러면 좀 더 도와주지!”

찰캉 하는 소리와 함께 남궁현의 몸에서 굵은 쇠침이 튀어나왔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잘 가시오, 지부장 나리!”

나일천이 즐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스르륵!

늘어났던 팔이 점점 줄어들었다. 뽑혀져 나온 마수 위에는 붉은 심장이 들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현의 가슴속에서 더운 피를 내뿜던 바로 그 심장이었 다.

와작!

약간의 힘을 가하자 심장은 마치 사과처럼 붉은 즙을 내며 바스러졌다.

“흐흐흐!”

그의 입가에 잔인하면서도 즐거운 미소가 맺혔다. “자, 그럼 이제 우리 귀여운 조카님을 만나러 가볼까!”

얇은 윗입술을 혀로 핥으며 나일천이 중얼거렸다. 밖에는 여전히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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