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 잠겨들다
-추락하는 봉황
폭풍이 몰아친다. 거친 비바람에 항거하는 잠겨진 문을 비틀고 폭풍이 틈입한다.
똑!똑!
계단을 타고 물방울이 흐른다. 빗물이 아니다. 좀 전까지 누군가의 몸속에 생명을 싣고 돌고 있었을 붉은 액체, 그것은 바로 피였다.
핏물은 계단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삼층 꼭대기의 객실 앞. 피는 그곳에서부터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삼층 복도는 이미 피로 흥건했다. 피의 강 은 복도를 따라 안으로 쭉 이어져 있다. 그 복도의 끝에는 오직 방 하나만이 존재했다. 그 방문 앞에 두 명의 여무사가 핏물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져 있다. 두 사람 모두 심장이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었다.
피의 강은 텅 빈 심장 자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하얀 창호지로 도배되어 있던 방문은 붉은 피의 꽃이 활짝 펴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은 지금 굳게 닫혀 있었다. “크크큭!”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웃었다. 그 웃음에 소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창백한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응, 왜 그렇게 떨고 있느냐, 린아?”
사내가 물었다.
“오… 오지 마세요.”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치며 외쳤다.
“오지 말라니? 숙부가 조카한테 다가가는데도 일일이 허락을 맡아야 하느냐?”
나일천이 붉게 물든 오른손을 으쓱 들어올리며 짐짓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째, 짹. 푸득, 푸드득.
복도에서부터 약간의 불빛만이 스며들어 오는 어두침침한 방. 그 어둑함 속에서도 피에 젖은 손을 보았는지 작은 새는 소리를 죽이면서 푸득 푸득 날개를 떨었다. 나일천이 한발한발 소녀, 나예린에게 다가가자 새는 어지러이 횃대 위를 맴돌았다.
“수, 숙부.”
툭!
뒷걸음치던 등이 차가운 벽에 가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벌벌벌벌, 흐흐흐흐. 비에 젖은 새처럼 떠는 모습도 사랑스럽기 그지없구나.” 번쩍!
다시 한 번 섬광이 번쩍였다.
하얗게 드러난 나일천의 눈이 사이하고 음침한 빛으로 물들었다. 추악한 욕정으로 번뜩이는 눈. 그 사악하고 뒤틀린 욕정의 사념(念) 덩어리가 나예린의 마음속 으로 흘러들어 왔다. 그것은 이미 들짐승의 눈이었다.
“흐흐흐, 너의 그 순결한 눈동자는 독(毒)보다도 치명적이구나. 진주를 녹인 듯 보드라운 살결, 석류처럼 붉게 흐드러진 향기로운 입술… 흐흐흐. 예린아, 너는 왜 이리도 나를 미치게 하느냐. 난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참을 수가 없어!”
그 순간 나예린은 숙부의 가슴속 밑바닥에서 일렁거리는 그것을 보았다. 저주받을 용안 덕분에 그녀는 그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로지 쾌락, 쾌락만을 부르짖 는 추악한 들짐승의 본능을!
농밀하게 뭉쳐진 끈끈하고 더러운 독기가 그의 몸에서 자욱이 퍼져 나왔다. 그 시커먼 독소의 덩어리는 흡사 거대한 독벌레처럼 꿈틀꿈틀 촉수를 펼쳐 왔다. “자아, 착하지. 어서 이 숙부의 품에 안기려무나.”
나일천의 그림자가 점점 더 커지며 예린의 작은 몸을 뒤덮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움츠리며 외쳤다.
“시, 싫어어!”
누가, 누가 제발 도와주었으면.
푸득, 푸드득.
유일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새는 가만히 멈춰 서서 날개만을 푸드득 떨고 있었다.
“흐후후, 좀 더 울부짖어라! 그 모습은 더 더욱 참을 수 없구나. 어서, 어서 너의 그 보드라운 살결을 헤집어주마! 깨끗할수록 더럽혀지는 것은 어차피 숙명. 그렇다 면 이 몸이 더럽혀줘야겠지?”
나일천이 서서히 어린 예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뱀 앞의 다람쥐처럼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벽을 타고 오른쪽으로 다시 뒷걸음질쳐 보았지만, 곧 또 다른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일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쾌락을 음미하려는 것일까. 시간이 갈수록 그의 욕정과 광기는 더욱더 짙어질 따름이었다.
“아무에게도 널 내주지 않겠다. 곧 네가 환희로 몸을 떨며 내 품에 매달리도록 해주마. 흐후후후!”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광소가 더욱 스산해졌다. 역겨운 입김이 예린의 목에 들척지근하게 달라붙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역겨움에 몸을 떨었다. 너무나 무서웠 다. 너무나 더러웠다.
“제발 도와줘요, 제발!’
그러나 그녀의 염원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점점 농후해지는 광기와 독기, 그리고 그 후텁지근한 입김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암흑의 나락이 저 밑에서 입을 쩍 벌린 채 그녀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마지막 힘을 짜내 울부짖었다. 그 호칭을 듣는 순간 나일천의 두 눈에서 광기가 폭발했다.
철썩!
예린의 작은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나일천이 거칠게 뺨을 때리자 힘을 버텨내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쾅!
그녀는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벽에 등을 부딪치며 다시금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나일천은 한 손으로 그녀를 들어올려 벽으로 거세게 밀어붙 이고 있었다. 작은 발이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렸다.
얼얼한 오른쪽 뺨, 불에 덴 것 같은 입술, 혀끝으로 느껴지는 찝찔한 액체. 숨이 막혀왔다.
“흥, 그 멍청한 놈은 바빠서 오지 못할걸! 여기 있는 것은 너와 나, 둘뿐이지. 걱정 마라, 시간은 아주 많으니!”
이글이글 광기에 타오르는 눈으로 나일천이 내뱉었다. 예린의 입가로 흘러나온 핏방울이 똑,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이런, 예쁜 얼굴이 아깝게 됐구나. 하지만 이건 이거대로 독특한 맛이 있지.”
나일천은 예린의 턱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자신의 혀로 핥았다. 그녀는 뱀의 혓바닥이 얼굴을 핥는 듯한 감각에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는 왼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목을 움켜쥔 채 오른손을 천천히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날카로운 쇳조각이 와 닿자 섬뜩한 한기가 그녀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흐흐흐, 그럼 어디!”
나일천의 날카로운 쇠 손톱이 그녀의 가녀린 교구 한가운데를 따라 서서히 내려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그녀의 옷이 양측으로 갈라졌다. 사내의 욕정과 광기는 폭발할 듯 농밀해졌다. 그의 입에서는 기묘한 신음성과 함께 뜨거운 입 김이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예린은 파들파들 경련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한시바삐 아득해지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아, 아빠… 제발, 도와…….”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톡! 사르륵!
눈물방울이 찢겨진 옷자락과 함께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끼아아아아악!”
절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와장창창!
광기로 번뜩이던 나일천은 고개를 홱 돌렸다. 부서진 문짝에서 튀어 오르는 파편이 그의 팔에 맞고 떨어졌다.
“웬 놈이냐!”
방 안으로 뛰어든 인영(人影)이 번개처럼 맥문을 움켜잡는 바람에 나일천은 순간적으로 손아귀의 힘을 풀고 말았다. 벽에 눌려 있던 예린의 몸이 툭 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침입자는 왼손으로 예린을 받아 들며 재빨리 오른손의 검을 놀려 탁자 위의 천으로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나일천은 침입자가 손을 쓰는 틈을 타 한바탕 발길질을 한 다음 몸을 뒤로 날렸다. 기절한 나예린을 흐트러진 침상에 올려놓은 후 침입자는 몸을 돌렸다.
문짝이 떨어져 나간 자리로 복도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일천은 그제야 방 안에 침입한 이가 누군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혀… 형님…….?”
문짝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의 손아귀에서 다 잡은 새를 빼앗아간 자는 다름 아닌 친형 나백천이었다. 창백한 나백천의 얼굴은 지금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이 끔찍한 참상은 대체 뭐냐? 내가 형이라고? 그렇다면 저 아인 네 조카다, 그것도 아직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애야!”
“어, 형님, 그러니깐 이건……..”
‘쳇, 계획이 틀어져 버렸군.’
당황해하는 표정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날을 갈고 있었다. 오른팔은 이미 암암리에 소매 속으로 거두어들인 뒤였다. 다행히 나백천은 딸아이의 일에 정신이 없어 나일천에게 오른손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짐승만도 못한 짓이냐!”
마침내 나백천이 노성을 터뜨렸다. 이미 일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자 나일천은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나백천에게서 전수받은 검법, <백혼검뢰천검식>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공격에는 뚜렷한 살의가 깃들어 있었다.
챙!
동생이 이렇게까지 뻔뻔하고 잔인하게 나올 줄 몰랐던 형은 기겁을 하며 검을 막았다.
“못난 놈! 반성하기는커녕 검을 휘두르다니. 혈육에게 패륜을 저지를 셈이냐?”
“흥, 이미 틀어진 것을 어쩌라고. 근친 강간이나 근친 살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소. 형님, 이 아우는 이미 거리낄 것이 없소이다.”
간악하고 파렴치한 동생의 말에 나백천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눈앞이 노래졌다. 등짝에 칼이 꽂힌 기분이었다.
“이, 이놈이, 어디라고 그런 망언을 입에 담느냐! 정녕 네가 내 동생이냐? 사천무림맹의 부총령이란 말이냐? 이놈!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하늘이고 부총령이고 시궁창에나 처박으라지! 어차피 난 이름도 뭐도 없고 그냥 ‘무림맹주의 동생’일 뿐, 사천 부총령이래 봤자 맹주님 앞에선 저 밑의 떨거지에 불과하오. 그럴 거면 차라리 다 뒤엎어 버리는 게 낫지 않겠소?”
예상치 못했던 동생의 한 맺힌 폭언에 나백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그래, 이왕 뒤엎을 거라면 우리 위대하신 형님부터 지옥 맛을 보여 드려야지! 그렇게 곰곰 궁리를 해봤더니 묘수가 하나 나옵디다. 전부터 동하긴 했어도 억 지로 참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지요. 흐흐흐.”
성토를 듣고 있던 나백천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게 네 친조카란 말이냐? 여린 마음으로 고통받는 저 작은 아이를 더럽히는 것이 고작 네가 생각해 낸 복수냐! 인간이라면 그런 치졸하고 간악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암, 없고말고.”
나일천은 새삼스레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인간이니까 그런 묘수를 떠올릴 수 있는 거외다. 안 그러면 그야말로 영락없는 짐승 아니겠소?”
그의 궤변을 듣자 나백천은 완전히 뭔가가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짐승새끼만도 못한 것! 네가 그 꼴이 된 것은 자업자득인 것을, 남 탓만 하고 맹주 자리나 탐을 냈단 말이로구나! 너처럼 어리석은 놈은 백년천년을 발버둥 쳐도 결코 맹주 될 자격이 없다!”
“흥, 힘있는 자가 맹주가 되는 것은 강호의 법칙이오. 바로 나 같은 패왕(覇王)이 말이지!”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나일천이 도약했다. 번뜩이는 섬광의 무리가 나백천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도 내심 대비하고 있었기에 나일천의 검초들은 별 효용 없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차피 그가 직접 가르친 검법이니 세세한 변식 하나까지 손바닥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또다시 동생의 칼질을 막아내며 나백천은 슬 픔에 복받친 얼굴로 되뇌었다. 그의 노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토록 추악하게 쓰라고 검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거늘… 못난 놈! 네놈의 못난 목숨, 내 손으로 거둬주마!”
나백천의 검이 번쩍 빛났다. 나일천의 검보다 수배는 빠른 쾌검이었다. 진정으로 <백혼검뢰천검식>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눈부신 속도였다. 그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아악!”
비명성을 터뜨리며 나일천은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왼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결국, 결국 난 어느 것 하나 당신을 이기지 못하는구려, 나백천!”
그는 더 이상 나백천을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신이라고?”
“크크큭! 이미 끊어진 인연 아니오. 설마 아직도 뭔가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겠지?”
냉소적인 그의 말에 나백천이 움찔했다. 딸아이의 일과 동생의 패륜으로 눈이 뒤집히긴 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일천의 말은 일 종의 확인사살이었다. 나백천은 그에게 검끝을 겨눈 채 외쳤다.
“사죄해라!”
“뭘 사죄하란 말이오?”
고통 속에서도 비웃음이 담긴 어조로 나일천이 물었다.
“나에게 사죄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겠다. 하지만 저 아이에게는, 네가 남긴 상처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저 아이에게는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백천이 가리킨 곳에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두려움에 벌벌 떠는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다.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그녀는 또다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씨익! 나일천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사죄하마, 예린아! 이, 숙부가 사죄하마! 암, 사죄하고말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어른의 맛을 가르쳐 주지 못하다니, 언젠가는 꼭 이 숙부가 네 보드라운 속살을 가르고 듬뿍 귀여워해 주마. 반.드.시!”
털썩.
예린은 쓰러졌다. 검은 악의의 홍수가 어린 소녀의 영혼을 삼켜 버렸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마음에 또다시 몰아쳐 온, 끈적끈적 짙게 농축된 악의의 덩어리. 그것 은 그녀가 견뎌낼 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모든 빛깔이, 모든 소리가 세상으로부터 사라졌다. 빛은 사라졌다. 자신도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네, 네놈이!”
마지막까지 이런 패행을 저지를 줄 몰랐던 나백천은 경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패륜아를 참할 일보다는 딸이 더 걱정되었다. 그 말이 최후의 기폭제가 되었는지 딸아이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어린 딸의 상태에 놀란 나백천의 신경이 한순간 그쪽을 향해 쏠렸다. 나일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만들어내고 자 그는 다시 한 번 어린 조카의 정신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폭우 소리를 뚫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백천을 강력한 힘으로 내려친 것은 검도 칼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일천의 새로운 오른 팔이었다.
“이, 이럴 수가!”
간신히 제때 공격을 막아낸 나백천은 경악했다. 그제야 동생의 몸에 새로 돋은 오른팔의 존재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직접 칼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왜? 당신이 냉큼 잘라냈었던 게 멀쩡히 돋아나서 놀랐소?”
나일천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설마 네놈이!”
하나의 깨달음은 연쇄적으로 또 다른 깨달음을 불러왔다.
““바로 맞췄소!”
그 순간 나일천의 소매가 검력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드러났다. 일만 삼천 장의 싸늘한 쇳조각으로 만들어진, 피에 굶주린 마 수가!
“서풍의 광란..
나백천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일천은 형의 그런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는 것이 기뻐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후후, 서천의 행방을 찾으러 오신 것 같던데, 마침 잘됐구려!”
나일천의 비웃음이 극에 달했다.
“내가 바로 당신을 파멸시킬 새로운 서천(西天)이니까 말이지!”
찰칵!
모습을 드러낸 검은 마수가 수백 개의 비늘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세웠다.
“이것은…….”
나백천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서풍의 광시곡.
오의.
서풍광란.
거대한 광풍이 미친 듯이 장내에 몰아쳤다.
“예, 예린아!”
나백천은 다급히 딸을 쳐다보았다. 아직 무공을 모르는 어린 딸은 이만한 압력을 견디기에 너무나 무력했다.
“구십 년 만의 재현이라! 어디 한번 받아보시오!”
천겁혈세 당시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살초가 다시 한 번 맹위를 떨쳤다.
나백천은 다급히 수비식 중 가장 강력한 초식을 펼쳐 난폭한 폭풍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백혼검뢰천검식(白魂劍雷天劍式).
오의(義).
뇌망백렬(雷網白裂).
새하얀 백광이 눈부시게 작렬하며 뇌망을 형성했다.
폭풍과 뇌망이 서로 부딪치며 맹렬히 기세를 다투었다. 불꽃과 굉음이 한곳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다툼은 어느 한 명의 승자도 낳지 않은 채 그 끝을 고했다. “칫, 상쇄했나?”
나일천이 불만스런 어조로 투덜거렸다. 그동안 증오로 벼려왔던 검날도 그의 적(敵)을 쓰러뜨리기엔 아직 날카로움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쳇! 아직 미완성이라 이건가!’
과연 사철멸겁의 서쪽 축! 서천의 무공을 완전히 익히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모양이다.
“제기랄!”
아무래도 계획의 수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그동안 강해진 건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자만한 채 수련 따윈 게을리 했으면 좋았을 것 을! 이만큼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그로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동귀어진은 사양이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철저하고 확고한 승리로 끝나지 않으면 의 미가 없다.
“결판은 다음으로 미뤄야겠소, 형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일천이 왼손 장저를 내밀었다.
콰르르릉!
천둥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좌장에서 엄청난 광풍이 몰아쳤다.
“광풍장(狂風掌)!”
예전에 백풍검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동생이 자랑하던 절초였다. 게다가 그가 장력을 쏘아댄 방향은 나백천이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있는 곳이었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나백천은 얼른 몸을 날려 장력을 받아냈다. 급하게 몸을 움직인 터라 위력을 완전히 반감시키지는 못했다.
그 순간 나일천은 그 반동으로 몸을 뒤로 날렸다.
콰쾅!
창문이 요란스레 부서지며 나일천은 사나운 폭풍우 뒤로 그 몸을 숨겼다.
“괜찮은 거냐, 예린아?”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보는 순간, 나백천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예린아! 예린아!”
별빛처럼 맑았던 눈은 어느새 검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뿌옇게 변해 있었다. 침상에 쓰러져 있는 딸은 탁하게 변한 두 눈을 멀뚱히 뜬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예린아, 정신 차려라! 예린아!”
예린의 마음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그녀는 어둠에 휩싸여 까마득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