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6화 – 극락에서 만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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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6화 – 극락에서 만난 소녀

극락에서 만난 소녀

-어둠의 위액

‘더러워… 싫어… 싫어. 오지 마, 오지 마. 이대로… 이대로 가라앉아 버리는 거야.’

뭉클거리는 어둠의 위장. 예린은 수천 수만 마리의 흉물스런 벌레들을 오물에 녹여 만든 어둠의 위액에 혼미하게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 끈적끈적한 위액의 독 충들은 예린의 의식에 달라붙어 사각사각 의식의 껍데기를 갉아내 갔다. 후텁지근한 독액이 서서히 의식으로 스며들어 간다.

의식의 끄트머리가 독기에 닿을 때마다 예린의 정신은 파닥파닥 경련을 일으키며 검게 타 들어갔다. 검붉은 숙부의 신음성, 피비린내 나는 비명, 뭉클거리는 광기 의 촉수, 찢겨져 나가는… 언젠가는 숙부가… 반드시…….

‘시, 싫어! 그마아아아안!’

예린의 영혼이 격하게 비틀리며 몸부림쳤다. 두려움, 혐오감, 증오, 그리고 광포한 살의가 갈 곳을 잃은 채 자신의 영혼을 할퀴고 뜯어내고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너덜너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미쳐 버린 영혼은 광기로 날뛴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한 번 찾아오는 편안한 절망감, 취할 것 같은 안락.

하지만 이 편안한 절망 상태도 길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또다시 뭔가가 떠올라 버리면 그녀의 의식은 처참한 자해를 다시금 반복할 것이 뻔했다.

그녀는 그 무형의 폐쇄 공간 속에서 발작과 절망의 쳇바퀴를 벌써 수백 수천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갈수록 잠겨드는 끊이지 않는 악몽의 나선이 찰나에도 끝없 이 지옥의 영겁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그 진창의 늪 속에서 모종의 한 점으로 귀결하고 있었다.

‘그래그래,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그냥… 잠드는 거야. 그래, 그래, 그래, 그렇게……..

예린은 아직도 파들파들 소스라치는 마음속의 무언가를, 어둠과 절망으로 단단히 묶어버렸다. 다시는 풀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듣지 않으리라. 이제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리라. 이제, 무언가를, 떠올려 버리는 것 따위, 심연 저 밑으로 던져 버리리라.

***

나백천은 서천의 발동과 끔찍한 만행을 겪은 직후 사태를 수습하며 심각하게 고심해야만 했다. 치명적인 상태에 이른 딸아이를 어느 곳에서 보호해야 할 것인가. 아직 추격과 정보 수집, 기타 일 처리를 하자면 열흘 이상은 걸릴 게 틀림없었다. 상처 입은 딸아이를 이제 와서 혼자 돌려보내는 것도, 천향루의 별채에서 섣불리 거처를 옮기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애초에 천향루를 숙소로 택했던 것은 사천제일이라는 명성 외에도 이곳이 방어와 정보 교환에 가장 유리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비견될 만한 위치에 사천 지부가 있긴 했지만, 숙소로는 워낙 적합지 않은 데다가 지금은 남궁현의 살해 사건으로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다. 내부의 적으로 혼란을 겪기는 했어도, 역시 그 서천이 밖 으로 빠져나간 현재로서는 이곳이 가장 유리한 거점이었다.

특히 나예린이 묵고 있던 객실은 고요한 별채에 당시 보기 드문 삼층이라는 높이, 창밖으로 시야가 트인 후원이 펼쳐져서 가장 쾌적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참사가 일어난 방에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법. 그는 고민 끝에 그녀를 부방(附房)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삼층 객실 위에 얹혀진 부방(附房). 삼층 객실이 햇살로 달궈지거나 겨울에 춥지 않도록 온도를 조절해 주고 창고도 되는 작은 다락방이다. 방도 작고 복도도 없어 방문을 열면 바로 계단이었지만, 방어에는 오히려 최적이었다.

나백천이 결단을 내리자 부방은 한 시진 만에 아담한 객실로 돌변했다. 나백천은 종이 인형처럼 변해 버린 딸아이, 그리고 그녀의 작은 새를 손수 옮기면서 이를 갈았다. 다시는, 다시는 그 누구도 딸아이를 상처 입힐 수 없게 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예린은 작은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좁지만 아담한 방. 창가에 겹겹이 드리워진 갈색 휘장 틈새로 싱그러운 햇살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

가느다란 팔, 상처난 입술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짹, 짹.

탁자 위에 놓인 새장 속에서 작은 새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푸스스한 깃털, 불안정한 움직임, 며칠 만에 토해내는 첫 울음이었다.

고개를 외로 꼬며 몸 곳곳을 부리로 추스르고는 먹이 통에 든 먹이를 두어 번 콕콕 찍어 넘긴다. 조금씩 힘이 돌아오는 것일까.

짹짹!

지저귐이 확연해졌다. 예린의 손끝이 살짝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새는 기운을 완전히 회복했는지, 비로소 낭랑한 지저귐을 터뜨렸다. 짹짹! 뾰롱!

청아하고 맑은 새소리. 예린의 안색은 그 소리에 갈수록 파리해지고 있었다. 새는 마치 누군가를 애타게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짹짹짹! 뾰로롱!

짹짹!

예린은 마침내 뭔가에 홀린 듯 서서히 눈을 떴다. 검은 먹물이 번진 것처럼 뿌옇고 탁한 눈. 흔들리는 시선은 허공을 헤매다 탁자 위에 고정되었다. 순간 그녀는 가 녀린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기 시작했다.

작은 새.

그날, 그곳에 있었던 작은 새.

그날, 그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작은 새.

그날, 그곳에서 숙부가… 자신을.

뾰롱!

예린은 퀭한 눈으로 몸을 일으키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멈칫한 것도 잠시, 그녀는 힘없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탁자로 기어갔다.

탁자를 붙잡고 일어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새장을 열었다. 새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횃대 위에 앉아 있었다. 예린은 가쁜 숨을 참으며 겁에 질린 얼굴 로 손을 뻗었다.

따스한 깃털. 숨을 죽이고 엄지와 검지로 새의 목을 잡는다.

떨리는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작은 날개가 작은 손 안에서 조금씩 파닥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예린은 거세지는 움직임을 느끼며 멍한 눈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푸득, 푸드득, 짹짹, 쿡!

“…아!”

예린은 새가 손등을 부리로 쪼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뺐다. 살점이 살짝 패었는지 손등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잠시나마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예린은 그제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예린은 자신이 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톡, 멍하니 내려다보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 그 속에서 한참을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다시금 새장으로 손을 뻗었다. 두 손으로 살포시 새를 감싼다. 더 이상 이 새를 여기 둘 수는 없었 다.

그녀는 새를 가지고 비틀비틀 창가로 다가갔다. 휘장 너머로 넘실거리는 햇살이 그녀를 잠시 망설이게 했다. 만물을 생육하는 빛은 그녀에겐 곧 개방된 것의 상징, 두려움의 대상일 따름이었다.

잠시 후, 예린은 이를 악물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이익!

쏟아지는 햇살에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오랜만에 본 강렬한 햇살. 타 들어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새 역시 발톱에 힘을 주며 예린의 손가락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날아갈 생각이 없는 것일까. 눈을 뜰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예린은 손가락을 살며시 흔들어보았다. 그러나 새는 떨어질까 두려운지 푸득거리며 손가락에 매달려 왔 다.

“…가.”

갈라진 입술을 움직여 힘들게 내뱉은 말이건만, 새는 날개를 푸득거리기만 한다.

“가! 어서!”

예린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듯 외치며 힘껏 손을 휘저었다. 새는 창틀 위로 떨어질 듯 위태롭게 날개를 파닥거리다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새는 창가를 벗어나 날기 시작했다. 예린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비참하리만치 덧없이 푸르렀다.

차라랑.

하늘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일까. 가슴이 저미도록 투명한 소리, 순수의 샘물이 흘러넘치는 소리였다. 나락에 녹아가던 예린의 영혼은 아려오는 고통에 몸을 떨었 다. 딸랑, 딸랑!

개울물 같은 방울 소리가 부드럽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눈물이 아롱진 눈으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어둠처럼 검은, 하지만 윤기를 발하 는 아름다운 옷자락이 꿈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차라라랑!

부서져 내리는 빛, 그 눈부신 빛이 터뜨려 내는 교소. 은빛의 물결이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새처럼.

예린은 빛에 이끌리듯 휘청거리며 어느새 창문 위로 올라섰다. 방울 소리가 운율을 맞춰 들려온다.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하늘, 바람, 햇살, 새, 방울 소리…….

경련처럼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딸랑딸랑, 차라라라랑!

비틀거리듯 내민 마지막 한 발짝.

가녀린 몸이 깃털처럼 공중에 뜬 그 순간, 대지의 사슬은 광포한 힘으로 작은 몸을 끌어당겼다.

예린은 급격히 추락해 갔다.

연비가 창틀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소녀를 발견한 것은 춤을 마무리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후원에 가지 말라는 경고쯤은 간단히 무시하고 평소처럼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채 뒤로 들어오는 길에서 일전의 그 높으신 영감과 무인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후원에서 춤을 추겠다고 하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도리어 잘 부탁한다며 한 숨을 쉬고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수풀 너머로 보초가 경계를 하더니만, 춤 연습을 시작하자 곧 물러났다. 형태를 보면 아마도 저 위의 삼층 객실, 혹은 그 위에 ‘귀빈’이 있는 것 같았다. 애 초에 귀빈용으로 지은 건물이라 삼층이라고는 해도 어지간히 높다. 부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높으신 분도 고개를 끄덕인 열한 살배기 무희를 경계하는 것보다는 후원으로 침입할 수 있는 통로를 감시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리라. 최소한 보초는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덕에 연비는 곧 호젓하고 아늑한 후원에서 마음껏 춤에 전념할 수 있었다. 위에 뭐가 있기에 그리 호들갑들인지 어떻게든 올라가서 봐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 만, 일단은 오늘 할 연습부터 끝내야 했다.

그렇게 한창 연습을 하고 있을 무렵, 새 한 마리가 부방 쪽에서 날아오르는 것이 언뜻 보이더니 이내 누군가가 창문으로 연비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위험해!”

연비는 열성적이다 못해 무대 위로 다짜고짜 뛰어내린 소녀 관객을 받아주고자 몸을 날리며 속으로 혀를 찼다.

냅다 뛰어내리지만 않았어도 그럭저럭 좋은 관객으로 남았을 것을.

불에 덴 듯 뜨거운 자극.

흩어졌던 의식이 자극을 기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간의 정신이 돌아오자 소녀는 의문이 생겼다.

“…여긴, 극락??

그런 것치고는 온몸이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역시 지옥인 걸까.

“정신이 들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손이 이마에 와 닿았다.

그녀는 눈을 떴다. 투명하고 깊은 진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사하게 미소 짓는 우아한 현의(衣)소녀였다.

“…여, 여긴..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보군요. 음, 짐작했겠지만 여긴 극락이에요.”

자못 진지한 어조의 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풋! 농담이에요, 농담. 자, 여기저기 아프겠지만 좀 마시는 게 좋을 거예요.”

농담의 주인공, 즉 연비는 작은 호리병을 소녀의 입에 대고 약간의 물을 흘려 넣었다. 일이 터지자 화급히 달려온 보초에게 빌린 물병이었다.

달려오던 보초는 연비가 몸을 날려 소녀를 받아 드는 광경, 이어 그늘로 안고 와서 그 소녀의 왼쪽 다리를 접골하는 것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초 자신이 부방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았다 해도, 저만한 높이라면 둘 다 어느 정도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특히 이 경우 밑에서 받는 사람은 더 위중한 치 명상을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떨어진 소녀의 왼쪽 발목이 살짝 어긋난 걸 빼면 저 어린 무희는 다친 곳 하나 없었다.

한술 더 떠 자신과 비슷한 또래를 두 팔에 안고도 비틀거리는 기색 없이 그늘로 데려가 재빨리 치료하지 않는가. 눈 깜짝할 새에 다리를 맞춘 무희는 그에게 새침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이쯤에서 사람 부르러 가실 거죠? 오실 때는 저쪽에 있다가 제가 부르면 조용히 와주시겠어요? 뼈 맞춘 직후에 갑작스레 놀라면 별로 좋을 건 없으니까 요. 아, 물은 좀 주고 가세요.”

보초는 연비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심상찮은 소녀에게 호위 대상을 맡겨도 될까 하는 점은 심히 찜찜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가장 든든한 은인이었다. 해칠거라면 진작 해쳤으리라. 게다가 어떻게 봐도 그 말대로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동이었다.

보초는 다행히 구제불능의 바보가 아니었던지라, 결국 묵묵히 호리병을 건네준 뒤 묵묵히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깨어난 소녀에게 농담을 건네며 목을 축이게 한 연비는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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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비, 제 이름이에요. 아가씨는?”

“……”

소녀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흐음. 혹시 이름을 가르쳐 주면 안 되는 처지인가요?”

연비는 진심으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구석을 봐도 사연이 듬뿍듬뿍 배어 있는 소녀다. 귀빈실의 금지옥엽인가 했지만 그러기엔 모습이 너무 험했다. 여윈 몸매에 시체 같은 안색, 터진 입술, 퀭한 두 눈은 영락없이 사연 많은 영양실조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유백색을 띠는 고급 복장이나 은근한 기품, 보초의 태 도를 보면 또 그런 것만도 아니고. 그런데 왜 난데없이 저런 곳에서 뛰어내린 것일까.

이쯤이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내막이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그저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을 뿐일까. 입술이 머 뭇머뭇 달싹거렸다.

“…ᄂ….린.”

소녀는 그 한마디를 힘겹게 내뱉고는 안색이 핼쑥해졌다. 꼭 가위에 눌렸다가 겨우 손끝을 움직여 낸 사람 같았다.

이게 소녀가 타인에게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라는 사실을 연비는 알지 못했다.

“처음 뵙겠어요, 린!”

사근사근하게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연비가 인사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사아아사아아 몸을 비볐다. 

“그럼, 저승사자가 된 기분으로 한번 들어볼까요? 린이 난데없이 뛰어내린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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