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7화 – 계약 사항 엄수는 근로자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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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1권 7화 – 계약 사항 엄수는 근로자의 생명

계약 사항 엄수는 근로자의 생명

-이상한 계약

“괘, 괜찮겠습니까?”

수풀 너머에서 남궁진이 안절부절못하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옆에 있던 사람, 딱 보기에도 괜찮지 않음이 분명한 나백천은 침중한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이젠 괜찮을 걸세.”

이어 나오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 남궁진 역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서천의 일은 비밀리에 수습되어서 나백천과 남궁진을 제외한 일행들은 남궁현이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림맹주의 동생이 서천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강호는 피바람에 휘말려 버린다.

사천 총령 남궁현은 신원불명의 자객에게 살해, 부총령 나일천은 실종.

졸지에 상(喪)을 당하고 이 짤막한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들은 남궁진이 형의 관(棺)을 이끌고 남궁세가로 귀환하기를 바랐다. 그는 이제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였 다. 하지만 내막을 알고 있던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사천에 남았다. 형 앞에서 그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원수 나일천, 아니, 서천에게 직접 다짐하지 않았던가. 목 숨을 바쳐 나백천을 지키겠다고.

그렇다면 자신이 있을 곳은 싸늘해진 형의 주검 옆이 아니라 언젠가 원수가 반드시 찾아올 곳, 그가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한 자리, 곧 나백천의 옆이었다. 그리하 여 남궁현의 사인 때문에 찾아왔던 몇몇 방문객들을 나백천과 함께 배웅하던 그때, 그들은 후원으로 향하는 연비와 마주쳤다.

남궁진은 나예린의 일을 대략 알고 있었기에 나백천이 무슨 마음으로 연비를 제지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못 볼 확률이 컸지만, 혹시라도 예의 그 아름다운 춤이 상처 입은 마음에 위안이 되기를 바랐겠지. 그러나 만약을 위해 남궁진이 따로 지시를 해두었던 보초는 달려와서 어이없는 소식을 전했다.

간신히 구해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혼비백산한 나백천과 그가 달려오자마자 목격한 것은 바로 나예린의 오열. 곤혹스러워하는 연비 앞에서 소리없이 오열하는 나예린의 모습이었다. 나백천과 남궁진은 보초의 말이 아니어도 선뜻 나서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 이제야 우는구나, 이제야. 그래, 실컷 울거라.”

나백천은 누가 들으면 오해받을 말을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이 흘려내는 눈물에는, 온갖 끔찍한 것들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 것들은 언젠간 치명적인 독(毒)으로 산화해서 주인을 집어삼켜 버리고 만다.

언제부턴가 눈물조차 흘리지 않게 되어버린 작은 소녀.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찢어내고 그 안에 갖가지 상처들을 꾹꾹 쑤셔 박아온 것이리라. 그 결 과, 누구라도 탐낼 만큼 아름다운 빛을 발했던 소녀는 이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숨이 막힐 듯 몸을 떨며 한없이 오열하는 모습은 남궁진마저 가슴을 아리게 했다. 그도 그럴진대 친아비의 마음은 어떠하랴.

“..뒤를 부탁하네. 저 아이는 나중에 집무실로 불러주게나.”

나백천은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물론 ‘저 아이’란 연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남궁진은 그대로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심하며 아예 자리를 잡고 앉 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흐느낌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연비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 건네주었다.

“얼굴에 대봐요, 시원할 거예요.”

린은 얼굴을 닦은 뒤 연비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셨다. 시원한 물. 어딘가에서 물처럼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린처럼 펑펑 우는 아가씨는 처음 봤어요. 하아, 눈물에 빠져 익사하는 진귀한 경험을 해보나 기대했는데. 그래도 뭐,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일까요?”

웃음 어린 말투. 린은 얼떨결에 피식 웃었다. 얼마만의 웃음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연비가 이끄는 대로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으며 숨을 골랐다. 이제는 정 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전신이 한숨과 함께 녹아내린다. 그래도, 어쩐지 편안했다.

“보기 싫은… 괴물이 될 뻔했어요.”

“네에… 네?”

연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응답하려다가 문득 놀랐다.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린이라는 소녀를 바라보니 오히려 그 쪽이 의외라는 얼굴이다. 아니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스스로 놀라고 있는 것일까.

“아, 혹시 뛰어내린 이유를 말하는 거예요?”

린은 잠깐 생각을 해보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좀 꾀죄죄한 건 사실이지만 괴물은 심했네요. 설마 등에 커다란 입이 달려서 밤만 되면 등짝으로 닭을 잡아먹는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죠?”

기괴한 상상을 두루룩 늘어놓는 연비에게 린은 잠시 반응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거대한 의문이 그녀의 말문을 트이게 했다.

“꾀죄죄?”

연비는 속으로 흠칫했다. 순간적인 위기감과 복잡한 생각이 한데 뒤엉켰다.

‘으윽! 아까도 말 한마디 잘못 물었다가 한참 울었는데. 차라리 사부한테 몇 대 맞는 게… 아니, 그건 아니지. 그런 불길한 비교는 하지도 말자!’

연비는 재빨리 번뇌를 떨쳐 내면서 표현을 좀 더 완곡하게 바꿔보기로 했다.

“그, 그야, 바싹 마른 몸에 눈빛도 탁하고 안색까지 창백한 게, 꼭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는 폐인 같다고나 할까…….”

‘이런!’

연비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사부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진실 앞에 당당한 자세로 살고자 늘 항의와 지적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입바른 소리는 통제하지 못하 게 된 것인가.

하지만 연비의 평은 정확했다. 며칠간 세수는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보석처럼 빛나던 눈동자도 탁하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입술의 상처도 다 낫지 않은 상태.

“꾀죄죄, 폐인……

예린은 나지막하게 되뇌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탐내며 뻗어오는 끈끈한 마수보다는 차라리 꾀죄죄하다는 말이 백배 나았다. 연비는 기회를 틈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어째서 린은 괴물이 될 것 같다고 느꼈을까요?”

“나는… 볼 수 있어요. 아니, 흘러들어 와요, 끈적끈적하고 뭉클뭉클한 시커먼 사람들의 마음이. 그러다가… 나도 그렇게…….”

연비는 ‘하아, 그러십니까’라는 회의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보통은 웃어넘기거나 거짓말쟁이라고 단정했겠지만, 연비는 무턱대고 불신하기에 앞서 곰곰이 생각 했다. 표정이나 정황상 거짓말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진짜 그런 신기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비는 문득 궁금해졌다.

“난 어때요? 나도 시커메요?”

흐릿하고 뿌연 눈동자로 물끄러미 연비의 눈을 응시하다가, 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서진 그때부터 뭔가가 닫혔다는 것을.

“아! 지금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흘러들어 오지 않아요.”

감각이 한 가지 없어진 느낌이었다. 연비라는 소녀와 함께 있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이 들던 것은 이 때문일까.

“흐흠, 뭔지 몰라도 아깝게 됐네요. 신기한 능력인데.”

“그렇지 않아요. 괴물인걸요, 사람들의 마음은.”

톡.

연비는 린의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놓았다.

“너무해요. 나도 사람인데.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그건…..”

린이 말꼬리를 흐리자 연비는 부드럽게 웃었다.

“린 주변엔 나쁜 사람들이 많았나 봐요. 하지만 부모님이라던가 좋아해 주는 사람, 아니면 예쁜 아기들은 어때요? 그런 건 정말 기분 좋게 느껴질 것 같은데. 아, 나쁜 사람들한테 속아 넘어갈 일도 없으니까 여러모로 편리한 능력이네요.”

“하지만 끈적끈적한 것들이 흘러들어 올 때면.

“청소! 그럴 땐 청소를 하면 되죠. 집 안에 쓰레기가 생기면 쓸어버리잖아요? 그러니까 물컹물컹 끈적거리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치워 버리고, 산뜻한 사람들로 채 워가는 거예요.”

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하는 거죠, 그 청소?”

“흐흠, 린이 힘이 세다면 발로 뻥 차버리면 될 거고, 돈이 많다면 사람을 써서 대신 치워달라고 해도 될 거고, 말재주가 뛰어나다면 촌철살인으로 정신 공격을… 린이 잘하는 건 뭔가요?”

“잘하는 거요?”

그런 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네. 뭔가 하나는 있지 않겠어요? 그걸 찾아서 갈고닦으면 힘이 될 거고, 힘이 있으면 쓸 수 있는 방법도 생기겠죠.”

린은 얼굴을 붉혔다. 왜 그런지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자,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될 거고, 이제 슬슬 부모님께 돌아가야겠죠? 저쪽에도 아까부터 마중 나온 분이 계신 것 같고.”

연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궁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수풀을 넘어왔다. 그가 사박사박 풀을 밟으며 다가오자, 린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연비의 옷자락을 꼬옥 붙잡았다.

“응? 모르는 사람이에요?”

“아니, 저, 가…….?”

린은 고개를 저으며 초조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우물거렸다. 연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린, 사람을 대할 때는 확실히 표현을 해줘야 상대방도 린이 뭘 바라는지 알 수 있어요.”

책망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사는 명확했다.

“같이 가요, 연비도.”

린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까지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것도 처음이었고, 자신이 부끄럽다 고 느꼈던 것도 처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컴컴하고도 참담한 절망 속에서 뛰어내린 자신을, 처음으로 사심없이 보듬어준 사람이다.

용안이 열려 있었다면 연비라는 소녀에게선 시원하면서도 따스한 빛이 느껴질 것 같았다. 지금은 이 옷자락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 었지만, 어둠에 휩싸여 산산이 부서졌던 마음의 조각들이 겨우 조금씩 빛을 떠올리려는 중이었다.

“같이 가시지요. 린 아가씨의 부친께서도 보고 싶어하십니다.”

남궁진은 존댓말까지 써가며 정중하게 청했다. 상황을 지켜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들은 그로서는 연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어린 무희에 불 과할지 몰라도, 이미 연비는 나예린, 아니, 나백천에겐 최고의 귀빈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러나 연비의 답은 단호했다.

“음, 그건 좀 곤란해요. 서둘러 일을 하러 가지 않으면 지각이거든요. 그럼 린, 잘 들어가요.”

연비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만 가보겠다는 뜻이 분명했지만 린은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남궁진은 창백해지는 예린의 낯빛을 살펴보며 재빨리 말을 붙였다.

“천향루에는 따로 얘기해 놓겠습니다. 그보다 린 아가씨의 부친께서…….”

순간 연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양할게요. 애초에 그분을 만날 이유도 없고, 계약 사항 엄수는 근로자의 생명이니까요. 계약이나 약속을 하찮게 여기는 분이 아니시라면 이해해 주시겠죠?” 남궁진은 연비의 싸늘한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맹주의 명이 있긴 했으나, 거절하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가면 괜히 일만 더 틀어질 뿐이다. 더구나 상대방은 금지옥 엽의 은인 아닌가.

“그, 그럼… 나도, 아니, 나랑 계약해요, 연비.”

“네?”

뜬금없이 나온 말에 연비뿐 아니라 남궁진까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면, 또 볼 수 있는 거죠?”

절박한 말투로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는 린을 보고 연비는 잠시 멍청해졌다.

“아, 안 되나요?”

대답이 없자 린이 다시 물었다. 남궁진은 난감한 얼굴로 옆에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뭐랄까, 보통 그런 건 계약이라기보단 약속이라고……..

“아니아니, 그런데 계약을 하면 린은 제게 뭘 줄 건가요?”

진지한 얼굴로 연비가 물었다.

“뭐, 뭘 줘야 하는 건가요?”

린은 당황했다. 다급한 상황에 말을 꺼내긴 했어도 그녀는 ‘계약’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 모르고 있었다. 워낙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나백천의 품에서 떠난 적이 없 기 때문에 돈이나 계약 같은 세속적인 개념들은 전혀 접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풋, 푸훗!”

연비가 웃음을 터뜨리자, 남궁진은 웃음과 한숨을 참느라 잠시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요. 앞으로 린이 창문에 붉은 끈이나 수건을 걸어놓으면 늦어도 이틀 내로 달려올게요. 까다로운 사정이 있어서 빠져나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대가 는 린이 저의 세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하죠. 내용은 생각해 보고 나중에 말하겠어요. 어때요?”

일사천리로 쏟아져 나오는 말에 남궁진은 긴장했다. 나백천의 정확한 신분은 보안 때문에 천향루에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주인 이외의 점원들은 그가 누군 지 모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연비도 예린의 신분은 모르는 듯했고, 계약이라기보단 애들 장난 같은 약속이지만, 어쩐지 찜찜했다. 그러나 그가 만류하기도 전에 예 린은 입을 열었다.

“그럼 된 건가요, 계약?”

“네, 계약 성립이에요!”

연비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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