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8화 – 어둠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어둠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세 가지 조건
―지도, 지남철, 그리고 목적지
나예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은 천길만길 먼 길을 걸어온 것처럼 무거웠다. 흐릿한 상이 점점 또렷해지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이곳이 어디지??
항상 보던 자신의 방이 아니다. 아직도 꿈에 사로잡힌 것일까? 몸이 물 위에 뜬 부평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배…….’
마천각에서 보내온 배를 탄 것이 기억났다. 강을 타고 꽤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며칠 걸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깨어났어요, 린?”
그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 그러나 그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목소리였다.
“연비…….”
침상에 누운 채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곳에 연비가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식은땀을 많이 흘리던데. 나쁜 꿈이라도 꿨어요? 아니면 뱃멀미?”
연비는 무척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아마 자는 동안 가위에 심히 눌렸던 모양이었다. 걱정도 되는 것이, 같은 사절단의 진성곤 임성진은 이 배에 올라타고 한 시진 쯤 뒤부터 지금껏 계속 뱃속에 있는 것들을 일일이 끄집어내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의 안색에 비하면 차라리 시체의 얼굴이 더 건강해 보일 정도였다.
“아니요. 이렇게 큰 배인 걸요. 뱃멀미도 없고 괜찮아요. 계속 옆에 있어줬던 거예요, 연비?”
“물론이죠.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던데 어떻게 린을 혼자 둘 수 있겠어요?”
손을 꼭 잡고 얘기해 주는 상냥한 목소리. 그 한마디가 나예린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연비와 처음 만났을 때의 꿈을 꿨어요.”
살짝 미소 지으며 나예린이 말했다. 연비는 물에 적신 손수건을 한번 짜낸 다음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훔쳐 주었다.
“어머, 그거 악몽이었어요?”
연비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나예린이 따라 웃었다. 일어나 볼까 했지만 아직 침상을 떨쳐 낼 힘은 없었다.
“최근에는 그때의 꿈을 꾼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무래도 연비를 만난 덕에 떠오른 것 같아요.”
십 년 전. 가장 힘든 시기였다. 그때 그녀의 정신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나예린은 잠시 자신의 머리맡에 앉아 있는 연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일 그때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응?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이상했는지 연비가 손가락으로 뺨을 이리저리 만지며 되물었다.
“아니요. 연비를 만나서 참 다행이었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어머, 나 같은 근로 처녀한텐 아부해도 나올 것 없는데?”
“아부라니요. 진심이에요.”
장난스런 어조로 반문했던 연비는 나예린의 진지한 말투에 도리어 당황했다.
“앗,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반칙인데. 린은 정말이지 예나 지금이나 진지하군요.”
이제 겨우 힘이 났는지 나예린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인가요?”
“아직 밤이에요. 해가 뜨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요. 별다른 말썽도 없고, 물길도 순조롭군요.”
배를 탄 것은 삼 일 전으로, 이제 하루가 더 지나면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사절단 육십사 명을 모두 수용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배라서, 몇 명의 뱃 멀미를 제외하면 별로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일전에 무당산으로 합숙 훈련을 받으러 가던 중에는 나예린 일행이 탄 배가 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화산지회로 가는 길에서도 그랬기 때문에 이번에는 다들 상 당히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각오가 무색하리만치 뱃길은 평화로웠고, 슬슬 긴장이 풀리는 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얘길 들어보니, 이 강에 사는 자들 중엔 흑룡(黑龍)의 깃발이 걸린 배에 달려들 정도로 바보 멍청이는 없다더군요.”
“그렇군요. 강에 노를 담근 채 장강수로채를 적으로 돌릴 만큼 어리석은 이는 없겠죠.”
나예린도 그 이야기엔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연비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나가서 강바람이라도 쐴까요? 그럼 답답한 기분도 단박에 시원해질 거예요. 어때요?”
무척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좋아요. 마침 그러고 싶던 참이었어요.”
“자,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
연비가 연극을 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예린은 살포시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선실 밖은 달도 자취를 감춘 그믐밤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카맣게 칠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판 위에 걸린 등은 배 위를 밝히는 데만도 벅찰 지경이었다. 마치 무(無)의 세계에 이 배 하나만 떠 있는 듯했다. 등불의 빛이 닿는 곳만이 세계의 전부였다.
“묘한 기분이네요.”
배 난간에 몸을 기댄 채 나예린이 말했다.
“왜요?”
연비가 물었다. 물 냄새가 코끝으로 확 풍겨왔다.
“아무것도 없는, 하지만 친숙한 느낌이네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영혼마저 삼켜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귀신이란 것은 저 검은 심연의 물이 만들어낸 환상인 걸까? “밤의 호수를 너무 오래 바라보는 건 좋지 않아요. 어둠에 잡아먹히거든요.”
연비가 주의를 준다. 형태도 없고 경계도 없이 펼쳐진 어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경계가 희미해져 인간의 마음은 어느새 깊이 가라앉고 만다. 보통 사람 도 그럴진대 용안을 가진 예린이라면 더욱 위험하다.
“그래요. 그때의 나랑 같군요. 연비랑 만나기 전엔 나도 이렇게 새카맣고 어두운 심연 속에 삼켜져 있었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곳엔 작은 등불조차도 없었어요.”
배가 물을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물결이 선체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지금 자신들이 있는 곳을 알려줄 뿐이었다.
“그때 내게 유일한 불빛은 바로 연비였어요.”
“그건 고백?”
“아뇨, 감사!”
“난 계약에 따라 움직인 것뿐이에요. 그나마도 이야기 상대밖에 못 된 것 같은데요?”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연비는 모를 거예요.”
“나도 얼마나 즐거웠는지 예린은 모를 거예요.”
나예린은 연비의 대꾸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여전히 연비는 못 당하겠어요.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있어요.”
“뭔가요, 린?”
“지난 십 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다시 만났을 때부터 쭉 품고 있었던 의문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의 회우(會遇)에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겨우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잡았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근로와 수련의 연속이랄까요. 음률과 춤을 팔기도 하고, 장신구도 만들고,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애들이 혹독한 현실 따윈 아무것도 모른 채, 뭐 그것도 나름대로 딱하긴 하지만, 암튼 하하 호호 즐겁게 뛰놀고 있을 때 저는 고된 노동의 나날을 보냈죠. 전 가난한 근로 소녀였으니까요. 굶어 죽거나 과로 사하지 않고 이렇게 살아남아서 린과 함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연비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눈가를 가렸다. 과거의 아픔들이 떠오른 모양이라고 나예린은 생각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는 연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랬군요. …그럼 지금까지 죽 사천에?”
“여러 해가 지난 뒤에는 사천을 벗어나 이곳저곳을 다녔죠.”
“그럼 나에 대한 것은 어떻게?”
그 부분 역시 무척이나 궁금했다.
“어느 날 우연찮게 린의 아버님을 봤거든요.”
“아버님을요?”
연비의 말에 린이 깜짝 놀랐다.
“네. 그분은 절 못 알아보시더군요. 나도 그때와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나 봐요.”
연비가 하는 말은 모두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 그분이 그 유명한 무림맹주님이셨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뭐예요.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정말 심장이 뚝 멎는 줄 알았다구요.”
연비는 한쪽 손을 가슴에 얹고 꼭 방금 전에 크게 놀랐던 사람처럼 숨을 골랐다. 나예린은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연비에겐 저희 아버님이나 집안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때야 뭐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도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린이 누군지 알게 되었죠. 현 무림맹주님의 금지옥엽은 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요. 정말이지 유명인이 되었더군요, 린은. 그때에야 비로소 린의 성(姓)도 본명(本名)도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게다가 이렇게 절세미인이 되어 있을 줄이야… 남자였 다면 나도 정말 반했겠는데요?”
“지, 짓궂은 것도 여전하네요, 연비는.”
나예린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어떻게 연비가 이 넓은 강호에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예린이 내친김에 연비의 사문까지 물어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배의 속도가 느려졌다. 두 사람 모두 바로 그것을 감지했다.
“강을 빠져나와 호수로 나온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곳은…….”
연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도 동정호겠죠. 하지만 이렇게 어두워서야 어느 경로로 마천각까지 갔는지 전혀 알아낼 수 없겠어요. 꽤 용의주도하군요.”
“일부러 이런 밤에?”
확실히 보안을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환경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 아니겠어요? 어쩌면 날씨와 날짜까지 계산했는지도 모르죠.”
연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대단한 실력들이에요. 이런 칠흑 같은 밤에 이토록 거침없이 배를 몰다니…….”
나예린이 감탄했다. 배짱 하나는 두둑하다고 칭찬할 만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않고 무사히 도착한 후엔 인정해 주죠.”
연비의 말투엔 묘하게 불쾌해하는 기색이 있었다. 상당수의 일들은 마무리가 엉망이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더구나 이 경우는 인명까지 함께 물거품이 될 가 능성이 있었다. 타인이 부린 배짱 덕에 물거품이 되는 일만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어둠 속에서도 망설임없이 나아갈 수 있는 걸까요?”
연비의 말을 빌지 않아도, 달조차 뜨지 않는 이런 밤의 어둠은 사람의 감각을 혼란으로 몰고 가게 마련이다.
“아마 세 가지가 있기 때문이겠죠.”
연비가 손가락을 세 개 들어올리며 말했다.
“세 가지?”
“바로 지도, 지남철, 그리고 목적지가 바로 그것이죠.”
“지도, 지남철, 목적지……..”
나예린은 그 말을 입 안에 넣고 두어 번 굴려보았다.
“그들에겐 가야 할 곳이 있고, 그곳까지의 길을 나타내는 지도가 있어요. 그리고 불변의 기준이 되어주는 지남철이 있죠. 그러니 그들은 이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 지 않는 거겠죠.”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사람도 그렇겠네요. 이루고 싶은 목표와 그 방법을 알려주는 지식, 그리고 냉정한 기준을 잡아주는 이성만 있다면 살면서 길을 잃을 이유는 없으니 까요. 그렇죠?”
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목적지라…….?
자신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아직 그녀의 지도는 목적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미완성품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 마천각인가?”
조용하던 배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적이 깨지고 다시금 활기가 돌았다.
“마천각이라고?”
“어디어디?”
“나도 나도!”
역시 무인 집단이라 그런지 다들 귀 하나는 밝았다. 마천각이라는 말이 들리자마자 우르르 몰려나와 난간에 자리를 틀어서, 늦은 사람은 별수없이 앞사람의 등을 보는 신세로 전락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사람도 있었다. 경신술이 뭔지 모르는 일반인이었다면 분명 물고기들의 아침밥상에 오르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마천각이라며? 어디 있어?”
“왜 이렇게 어두운 거야? 이래서야 코빼기도 안 보이겠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불평 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아무도 마천각이 잘 보일 거라고 말하진 않았는데 말이죠. 사람들이란 정말 편할 대로만 생각하는군요.”
한심하다는 듯한 말투로 연비가 한마디 했을 때였다.
“앗, 저길 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나는 곳을 향했다.
“불꽃이다!”
뱃머리 저편에서 어둠을 헤치고 불꽃이 솟아올랐다. 밝은 불꽃은 점점 더 세차게 하늘로 치솟았다.
화르륵! 화르륵!
신호에 화답이라도 하듯, 멀찍이 떨어진 수면 위에서 두 개의 불기둥이 동시에 일었다. 곧이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불기둥들이 차례로 짝을 이루며 솟아오르기 시 작했다. 두 줄로 나란히 뱃길을 그려가는 모양새였다.
“수면 위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불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연비는 그 구조가 자못 신기한 모양이었다. 예린도 이런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불빛이 밝아지자 섬 하나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듯 나타났다. 날카로운 자줏빛 죽창들을 엮어 만든 자죽책(紫竹柵)도 어느새 모습을 드러내며 흉흉한 위엄을 떨쳤다.
“알 수가 없군요. 환영 인사인 걸까요?”
“아니면 무력시위거나!”
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꽤 기네요. 아니, 지금부터가 시작인가?”
연비의 말대로였다. 자죽책의 중앙을 가르며 타오르는 화염의 뱃길 옆으로 또 다른 불꽃의 행렬이 원형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불꽃이 맹렬히 내달리는 것 같 았다. 눈 깜짝할 새에 섬을 빙 두른 불꽃의 고리가 완성되었다. 거대한 불꽃의 고리 안쪽으로 자그마한 새벽이 찾아온 듯했다. 실로 장관이었다.
그 강렬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배에 몸을 맡긴 채 불길을 따라 목적지로 들어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