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1권 9화 – 작렬하는 귀면(鬼面), 절규하는 이진설
작렬하는 귀면(鬼面), 절규하는 이진설
-개문(門)
“꺄아아앗!”
두 눈이 흉신악살처럼 핏빛으로 번뜩이는 거대한 귀문을 본 몇몇 여성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꽃이 작렬하는 귀문이라면 낮보다는 밤에 선보이는 것이 단연 박력을 극대화시키는 법. 더구나 칠흑 같은 심야라면 귀기가 서너 배는 증폭되게 마련이다.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귀면의 입이 당장이라도 불을 토해낼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와 함께 귀면의 아가리에서 뜨거운 열기를 머금은 불꽃이 토해졌다.
“휴우, 이것 참! 이것 참!”
모든 이가 한 발짝씩 물러날 때, 되레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연비였다.
“연 소저!”
“연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연비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주며 귀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왼쪽 눈동자에는 불빛이 아롱지 고 있었다.
“이것 참 흥미롭군요.”
불길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도 전혀 뜨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타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만 둘 뿐, 데일 걱정보다는 무슨 장치인지가 훨씬 더 궁 금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니까 린도 이리 와봐요.”
연비가 나예린에게 손짓했다.
“불꽃을 퐁퐁 뿜어내고 있어요. 후훗. 귀엽죠?”
“귀여운 건가요?”
예린은 혹시나 해서 다시 한 번 거대한 귀신 형상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살벌한 두 눈을 흉흉히 번뜩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악귀의 얼굴. 역시 귀엽진 않다. “저는 좀 기괴하게 느껴지는군요.”
조심스런 반론이었다. 그러나 이미 연비는 이곳저곳을 살피느라 바쁜 참이었다.
“아! 저곳은 무쇠에다가 다른 금속을 섞은 걸까요? 흐흠, 이 불꽃은 유사시에는 공성병기로 바꿔 사용할 수 있는 건지.”
보면 볼수록 즐거운 모양이었다. 일행은 다들 연비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묘한 위화감에 빠져들었다. 화려한 비녀라도 선물할까 해서 가녀린 미녀를 노점가로 데려왔더니, 그 여인이 난데없이 도끼 파는 아저씨와 도끼날에 대해 격론을 벌이다가 갑자기 도끼를 들고 장작패기를 시험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랄까. “재미… 있어요?”
나예린이 물었다.
“린은 재미없어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기발하잖아요. 이렇게 성의 넘치는 장난은 처음 봤어요.”
“확실히 악의는 있는 것 같지만……”
“얼마나 겁을 주고 싶었으면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요? 어떤 면에서는 정말이지 성실하네요.”
감탄을 금치 못하는 연비의 말에 설마 하는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반문했다.
“이 문을 그런 의도로 만들었다는 건가요?”
“물론이죠. 아니면 왜 이리 쓸데없이 요란하겠어요? 아마 밤에 도착하게 한 것도 연출 효과를 높이려고 궁리한 결과겠죠. 자, 공연도 다 봤으니 이제 슬슬 들어갔 으면 좋겠는데 말예요.”
연비가 말을 마치자마자 귀문 양쪽으로 튀어나온 귀면 모양의 작은 장치를 향해 선장이 우렁차게 외쳤다.
“개문(開門)!”
끼이이이익!
그그그그그긍!
육중한 소리와 함께 귀면이 반으로 갈라지며 문이 열렸다. 그 앞으로 펼쳐져 있는 놀라운 광경에 사절단들은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이런! 이렇게 열렬히 환영받을 줄은 몰랐는데, 안 그런가, 궁상?”
현운이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감상을 토로했다.
“여기 사람들은 잠도 없나?”
남궁상의 표정도 그리 좋진 않았다. 곁에 있던 진령이 그의 팔을 꼭 움켜잡았다.
“어머…….”
연비는 속삭이듯 나직하게 감상을 피력했다.
“이건 또 대단한 장관이네요.”
완전무장한 수백 명의 무인들이 군대의 병사들처럼 좌우로 도열한 채 시립해 있었다. 그 사이사이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십 개의 화톳불이 이글거렸다. 일행 이 지나가야 할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험상궂은 무인들이 나뉘어 선 형국이었다.
웃는 사람도 입을 여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무거운 침묵만이 그들을 내리 누를 뿐이었다. 엄격한 기강을 뽐내는 건지, 아니면 임전 태세로 적을 경계하는 건지 분 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일행은 중앙 통로를 앞두고 저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라도 갑자기 사방에서 쇠꼬챙이들이 날아들지 모를 흉흉한 길이었다.
“왜 저렇게 살기등등한 걸까요, 장형?”
조심스레 중앙 통로를 걸어가며 윤준호가 작은 목소리로 장홍에게 물었다.
환영회는 분명했지만, 모두들 조금도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을 쏘아보는 폼이 꼭 으르렁거리는 맹수들 같았다.
“글쎄, 수면 부족 때문이 아닐까? 분명 이 오밤중에 자고 있던 애들을 억지로 집합시켰을 테니.”
꽤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과연 그렇군요.”
납득해 버리고 마는 윤준호였다.
저벅저벅!
매섭게 노려보는 눈길 속에서 공허한 발걸음 소리만이 돌바닥에 울린다. 중앙 통로를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사방에서 밀려오는 투기에 심신이 짓눌릴 듯했다. 사절단 중 몇몇은 무기를 뽑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는 갔다. 칼날 같은 살기가 뒤통수든 앞통수든 무차별로 쿡쿡 찔러오는데 신경이 날카 로워지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을 뽑지 않으려면 안간힘을 다해 무인으로서의 본능을 억눌러야 했다.
“진정하게, 궁상. 먼저 뽑으면 지는 거야.”
적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알고 있어, 나도 알고 있다고.”
그는 지금 이를 악물고 참는 중이었다. 이대로 도발에 넘어가 버리면 저들에게 사절단을 공격하고 처분할 명분을 주게 된다. 그런 재앙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젠장. 이 길, 과연 끝이 있긴 한 건가?”
마치 괴이한 진법이라도 펼쳐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초장부터 일을 저지를 수야 없는 법. 그들은 이를 악물고 절도있게 중앙 통로를 걸어갔다. 이런 식의 주목은 전혀 달갑지 않다는 기분을 모두들 공감하면 서.
다만 살기가 몰아치는 한복판에서도 봄철 나들이를 나온 듯 느긋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연비였다. 연비는 검은 우산을 단정하게 접어 들고 태연한 얼굴 로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겨갔다. 연비와 나예린이 함께 지나가는 곳에선 어쩐지 살기가 조금쯤 엷어지는 것 같았다.
중앙 통로가 끝나는 곳에는 너른 공터, 즉 광장이 있었다. 거대한 돌을 반듯하게 잘라 만든 높다란 단상. 그 위에 서 있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좌우에 불이 켜져 있긴 한데 그림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박력이 전해졌다.
“이만한 기운을 내뿜는 자가 대체 누굴까?”
모용휘는 그자의 그림자를 언뜻 보자마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뭘까… 이 기분은…….’
숱한 고수들이 운집한 천무학관에서도 이런 기운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강한 정도를 넘어서 거대한 위험으로 다가오는 기운이었다.
“마천각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마천각주다. 짧게 말하지. 강하지 않은 자는 필요없다. 귀문을 넘어 발을 들인 이상 그대들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하라. 약육 강식! 그것만이 이 흑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모두들 살아서 돌아가길 기원하겠다.”
짧지만 강렬한 연설이 끝난 후 마천각주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단상이 너무 높은 데다 밤이라 얼굴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했다.
“저 사람이 바로 소문의 마천각주로군요.”
진소령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그녀에게 요란스레 경고성을 울리고 있었다.
“과연 대단하군요.”
점창제일검 유은성은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는지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흥, 잘난 척하긴.”
빈정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염도였다. 그의 성격상 이런 대우가 못마땅하지 않을 리 없었다.
“방심해선 안 되겠군, 이곳은 이미 적진의 한가운데니. 우리가 왜 이곳에 있는지 잊지 말게.”
빙검이 신중하게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천무학관의 제자들을 지켜야 할 막중한 책임이 그들 네 사람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걱정마! 안 잊었으니까.”
“그럼 머리라도 식혀. 흥분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될걸.”
“이렇게까지 해주니 정말 호랑이 입속에라도 들어온 것 같은걸.”
장홍이 너스레를 떨며 한마디 했다.
“앞으로 괜찮을까요?”
윤준호는 불안한지 연신 눈을 굴리며 이리저리 주위를 살폈다.
“너무 위축되지 마. 겉으로라도 강한 척해야지, 무시당하는 순간 베인다. 여긴 밀림이야, 야생의 세계라고.”
“…..”
효룡은 말이 없었다. 그는 배에서 내린 이후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고통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우거지상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극히 예외적이지만 여전히 즐거워하는 얼굴도 있었다.
“앞으로는 우산 쓸 일이 많아지겠어요.”
연비가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단상 위를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수수께끼 같은 한마디였다.
마천각주가 사라진 뒤, 사절단 일행은 별다른 설명도 듣지 못하고 잠시 동안 광장에 버려지고 말았다. 급격한 환경 변화 때문일까. 이미 몇몇은 옆 사람에게 소곤 소곤 소화불량과 편두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이도 있었다. 상황 자체가 엄청난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사람들이 슬슬 혼돈의 국면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두 사람이 사절단을 향해 걸어왔다. 남녀 한 쌍이었는데, 입고 있는 옷뿐 아니라 얼굴까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왼쪽 팔뚝에 검은 십자가가 새겨진 완장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둘 모두.
“안녕하십니까, 흑십자회의 흑일입니다. 으음…….”
어째 초췌한 인상의 남자는 인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한쪽 손에 들고 온 책장을 팔락팔락 넘기더니 단조로운 목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했다.
“우리 흑십자회는 나눔과 평화를 기쁨으로 삼는 마천각 공식 봉사 단체입니다. 평화적인 상호 교류와 배움의 묘를 나누고자 방문하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하 는바, 햇볕은 쨍쨍 대머리는 번쩍… 크, 크흠.”
일행이 다들 소금 기둥처럼 굳어 있는 가운데, 흑일이라는 자는 옆에 서서 방글거리고 있는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흑월, 또 네 짓이냐?”
“후후후후, 그러게 인사 같은 건 문자에 의존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자자, 여러분, 흑십자회 명물 쌍둥이의 상큼한 미녀 여동생 흑월입니다! 어젯밤 꿈에 산신령님 이 나와서 말씀하시길, 먼 바다 저편에서 귀인들이 올 거라고 하더니만, 여러분이 딱 그거군요! 귀인 여러분, 잘 부탁해요!”
흑월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발랄한 얼굴로 손까지 흔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사절단은 쌍둥이 남매의 인사를 들으며 이제 완전히 혼돈의 국면에 빠져들고 있었다. 흑일이 한숨을 내쉬고 흑월이 여전히 열성적으로 손을 흔드는 동안, 일행 사 이로 수군수군 술렁임이 일었다.
“흑십자회?”
“나눔과 평화가 기쁨이래.”
“저 남자 책을 읽으나 안 읽으나 말투가 똑같아. 화낼 때조차 최면 거는 말투다!”
“흑월이라는 아가씨, 확실히 상큼하긴 한데, 동정호에서 웬 산신령? 아니, 그보다 우리 바다 넘어온 거였어?”
어딜 봐도 수상한 단체, 수상한 남매였다.
“암튼 영광스럽게도 오늘부터 저희 두 사람이 여러분의 안내역이에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언제든지 팍팍 물어주세요.”
흑월이 대략 인사를 마무리해 버리자, 흑일은 다행스러워하는 건지 한심해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다시 일행을 향해 말했다.
“우선은 기숙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 방에 네 분씩입니다. 남성 분들은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방 배정은…….?”
흑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또다시 책장을 펄럭거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따라올 테면 따라오고 말라면 말라는 듯이.
기숙사 인원 배정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인솔자들이 독자적인 권한으로 마음껏 정한 결과였다. 물론 염도는 성격상, 빙검은 지위상 그런 자잘한 일을 할 만한 이가 아니었기에 결국 일 처리는 진소령과 유은성의 몫이 되었다. 유은성은 진소령과 함께라면 이 정도 잡무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때문에 인원 배치와 방 배정 은 마천각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완료된 터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한 사람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끼아아아아악! 안 돼애애애애애애!”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귀를 틀어막아야만 할 정도로 커다란 절규였다.
“뭐, 뭐야! 습격인가!”
그렇게 당황한 자도 꽤 있었으나 다행히 습격은 아니었다.
“언니이이이이! 어째서어어어어!”
절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귀를 틀어막게 만든 절규의 출처는 바로 이진설의 입이었다. 사슴 눈동자 같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진설은 멀어져 가는 나예린의 환상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보았지만 그 손은 끝내 닿지 않았다.
“아쉽게 되었구나.”
절규하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진설과 달리 나예린의 태도는 담담하기만 했다.
“안 돼요, 왜 내가 언니랑 같은 방이 아닌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누군가의 농간이에요. 음모예요. 언니와 저를 떼어놓으려는 간악한 음모. 이런 불합리, 전 절 대로 인정할 수 없어욧!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진실로 분개하며 외쳤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노사님들이 바꿔주시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네 방에도 좋은 사람들이 있잖느냐?”
나예린이 어린애처럼 떼쓰는 이진설을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이진설은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친애하는 언니 나예린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연비라는 여자와 철옥잠 마하령, 그리고 유란이라는 풋내기와 한 방이 되었다. 자신이 끼어 있지 않은 방에 연비가 끼어 있다는 사실에 이진설은 분개했다.
이런 방 배치는, 신입생들을 되도록 같은 방에 배정하고 당시 담당 시험관을 인도자로 배치해서 신입생들을 돌봐준다는 의도였다. 다만 연비의 시험관은 남궁상, 즉 남자인지라 마하령이 그 책임을 대신 지게 된 것이다. 이진설은 자신이 마하령 대신 연비를 지도해 주겠다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주장은 기각되었다.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자네에겐 신입생을 맡길 수 없네.”
그것이 유은성의 말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이런이런.”
연비는 방 배정 결과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 난감한데..
“왜요? 연비.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옆에 있던 나예린은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연비가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아뇨, 그냥 일이 너무 지나치게 잘 풀린달까…….”
“예?”
나예린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앞으론 평상심이 좀 더 필요할 거란 얘기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의 의미를 날마다 되새겨 봐야 하겠어요.”
역시 나예린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비는 나름대로 즐거워 보이는 것 같았다. 나예린은 그걸로 만족했다.
비뢰도 21권 10화 – 농염한 호랑이, 고개 숙인 장홍
농염한 호랑이, 고개 숙인 장홍
-업보의 무게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보면 약간의 흐트러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나예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것이 더욱 강렬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자신이 절대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사람들 대부분은 완벽함에 거부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곧 인간 이외의 존재, 이를테면 ‘요물’ 내지는 ‘정 떨어지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만큼 완벽함 속의 작은 균열, 즉 적당한 흐트러짐은 도리어 사랑스러움을 더하는 것이다.
“잘 잤어요, 연비?”
거울 속에서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예린이 머리 모양을 다듬으며 물었다. 흑단 같은 머릿결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린은 머릿결이 너무 예쁘네요. 비단결도 이겼어요.”
연비가 너울지는 검은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감탄했다.
“그런가요? 난 잘 모르겠는데.”
연비의 칭찬에 나예린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정도면 국보(國寶)로 지정해도 문제없겠는데요. 분명 뭔가 특별한 관리 비법 같은 게 있겠죠?”
연비가 장담했다.
“비법이라니, 딱히 그런 건…….”
“흥, 꼭 각종 무공대회에서 우승한 애들이 ‘전 하루 일곱 시간씩 꼬박꼬박 자면서 사부님 말씀대로 비급만 가지고 수련했어요. 맹세컨대 영약이나 숨겨둔 사부 같 은 건 없었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군요. 자자, 나의 이 빛나는 눈동자가 안 보여요? 어서 털어놔 봐요. 밤마다 몰래 먹는 미모 증강 영약이라도 있나요?” 연비가 장난스레 타박을 하자 예린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옥구슬을 은 쟁반에 굴린 것처럼 맑은 웃음소리였다.
“어, 그렇게 재밌어요? 린이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보네요.”
연비가 물었다.
“풋, 제게 연비처럼 재밌는 농담을 하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게 친했던 독고 사자도 이런 농담을 주고받은 적은 없었다. 농담 실력은 둘째 치고라도, 독고령은 자신을 꾸미고 가꾸는 일 자체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어머, 여자의 미모는 중요한 문제라고요. 아름다운 미모는 여성의 무기! 어릴 땐 몰랐는데, 살다 보니 화장이나 몸단장이 근육보다 쓸 만한 때도 많더군요. 보기 도 좋고 싸움도 줄이고, 우락부락한 근육에 무식하고 땀내나는 사내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이죠.”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도취된 연비의 말을 들으며, 나예린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몇몇 예외는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모용 공자 같은… 아, 아니, 방금 건 잊어주세요.”
당황한 나예린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이었다.
‘연비에게 옮았나?”
“어머, 나름대로 꽤 흥미로운 제안이로군요. 후후후, 그거 재밌겠는데요?”
연비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설명회에 갈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그러네요. 담당이 누구라고 했더라? 옥 뭐라고 했는데…….”
들었는데 까먹은 모양이었다. 대신 대답해 준 것은 나예린이었다.
“혈옥선자 옥유경, 사부님이 무림에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여고수 중 한 명이죠.”
그 말에 연비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린의 사부님이라면, 검후님이?”
검후라면 고수를 인정하는 기준도 엄격하고 까다로울 게 분명했다. 또한 같은 여자라면 더욱더 신중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었을 테니 그 기준을 어떻게든 통과했다
면 평범한 실력은 아닐 것이다.
“이곳에선 혈나찰(血羅刹)이라고도 불린다더군요.”
무시무시한 별호다. 그러나 흑도에서 여인의 몸으로 명성을 날리려면 그 별호처럼 처신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설프면 무시당하거나 잡아먹혀 버릴 테니 말이다. “저런, 오늘은 지각하면 안 되겠네요. 그런 아줌마한테 잘못 찍히면 내내 고생하겠어요!”
연비의 말투가 우스웠는지 나예린이 살포시 웃었다.
준비를 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예린이 자신의 애검 ‘빙루(氷淚)’를 잡는 것을 보며 연비는 가볍게 검은 우산을 들어올렸다. 드디어 마천각에서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천각의 무교관이며 제칠기숙사 혈봉대의 대장인 혈옥선자 옥유경이 단상에 오르자, 주위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옥유경을 바라보는 몇몇 천무학관 사 내들의 시선이 범상치 않았다. 비록 풍기는 분위기는 싸늘해도, 그녀는 상당히 풍만한 몸매에 농염한 완숙미의 소유자였다.
진면목을 알고 있는 마천각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서만 봐도 몸을 흠칫 굳히거나 자리를 피하지만, 어제 막 도착한 천무학관 관도들은 아직 그녀의 진면목을 모르 고 있었다.
“나찰이라기에 우락부락한 호랑이 아줌만 줄 알았는데 상당한 미인인걸요?”
연비가 귓속말로 나예린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군요. 차갑지만 당당한 기도가 압도적이네요.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 검 같아요.”
나예린이 그 기도에 감탄하며 말했다. 겉모습만 봐도 그녀가 상당한 수준의 고수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과연, 다가가면 단박에 베이겠어요. 위험하면서도 무인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게, 일종의 마검(魔劍)이로군요.”
연비의 통찰력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보아하니 숱한 남자들이 이래저래 다가갔다가 당했을 거예요.”
백도에서도 간간이 벌어지는 일이 흑도에서는 안 일어날 리 없었다. 아니, 빈도수만 따지면 더 심하리라. 그런데도 저렇듯 당당한 기백을 뿜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위협들을 실력 하나로 제거해 왔다는 이야기였다.
“상당한 여걸이네요. 사부님께 인정받을 만해요.”
서 있는 위치만으로도 진가를 증명하는 사람이었다.
“확실히 그렇군요. 진 소사(少師)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강할까요?”
“진 소사요? 아, 아미신녀 진 여협 말이군요?”
진소령은 점창제일검 유은성과 함께 인솔자로서 그들과 동행한 처지였다. 천무학관의 일행들은 구분을 위해 편의상 빙검과 염도는 노사(老師), 진소령과 유은성 은 소사(少師)라 부르고 있었다.
“진 소사와 옥교관이 만났을 때 불꽃이 튀는 것 같았잖아요?”
고압적인 환영회 후 배정된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혈옥선자 옥유경이었다. 다음날 일정을 통고하려고 온 것이었다.
“난 두 사람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몇 수 정도 교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인내심이 대단하더라고요.”
“어젠 첫날이었잖아요? 두 분 모두 지위도 있는데 함부로 검을 섞을 수는 없었겠죠.”
나예린도 그 광경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 이름을 교환하는 순간 주위를 팽팽히 긴장시켰던 맹렬한 투기를. 한 명은 백도에서 이름난 신녀(神女), 다른 한 명은 흑도에서 유명한 선자(仙子)! 두 사람 모두 중년배 여류무인 중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검도의 고수들이다. 호승심이 용솟음치지 않을 리 없었다. “단언컨대 그 두 사람, 근 시일 내에 분명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한판 벌일 거예요.”
그때가 무척 기다려지는지 연비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연비, 즐거워 보이네요?”
“재밌잖아요. 린은 궁금하지 않아요,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그렇게 솔직하게 물으면 질문받는 사람도 곤란해진다.
“그, 그야 궁금하긴 하지만…….”
나예린 자신도 검각의 제자로 검법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싸움을 바라는 것 같아 찜찜하긴 해도, 검의 길을 걷는 여류무인이 두 사람의 승패에 관심이 없다고 한 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이라는데, 좀 재밌어하면 어때요. 우리가 싸움 붙이는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거기, 조용!”
그때 옥유경이 두 사람이 소곤거리는 것을 발견하곤 주의를 주었다. 흐트러진 태도는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으로부터 한자리 건너뛴 곳에 앉아서 연 비에게 이글거리는 눈총을 쏘아 보내던 이진설은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크, 들켰네요.”
연비가 혀를 삐죽 내밀곤 이내 시선을 옥유경에게로 돌렸다.
“내가 누군지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믿고 소개는 생략하겠다. 이름을 부르면 손을 들고 대답하도록.”
옥유경이 단상 위에서 출석 명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명부 맨 위에 적힌 이름부터 호명하기 시작했다. 옥유경은 사람들이 손을 들며 답할 때마다 주의 깊 은 눈길로 한 명씩 훑어보았다. 예리한 시선, 이따금 덧붙이는 첨언(添言)은 그녀의 출석 호명이 단순한 형식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명에 답하고 혈나찰의 눈길이 스쳐 가는 그 짧은 순간에 일행은 모두들 자신이 무형의 심판대에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천각에서 처음으로 각자의 점수 가 매겨지는 순간이었다. 옥유경의 안광에 어깨를 움츠리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격려를 받고 용기백배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마하령처럼.
“흐흠, 자네는 마 관주님의 외동딸인 철옥잠 마하령인가?”
옥유경의 흥미롭다는 시선에 마하령은 당당한 모습으로 공수하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옥유경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난 강한 여성을 좋아하지! 마음에 들었다. 활약, 기대하마!”
마하령이 그 말에 약간의 감격을 금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옥유경의 격려에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호오? 네가 바로 천하제일미라고 명성이 자자한 빙백봉 나예린이로구나.”
나예린에 대한 소문은 산을 넘고 강을 지나 넓은 호수를 건너 이곳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자태를 훔쳐보는 사내 관도들의 눈에 황홀감 이 가득했다.
“당치도 않은 소문입니다. 달가운 평도 아니니 무시해 주십시오.”
그녀에게 천하제일미란 호칭은 재앙의 씨앗 그 자체였다. 아무리 치켜 세워 줘도 기쁠 리 만무했다.
“글쎄, 이렇게 보니 과연 명불허전인걸? 잘못하면 여자인 나조차도 반하겠구나. 그래, 검후님께선 안녕하시고?”
끝에 가선 경의 어린 말투가 되고 있었다. 사실 검후 이옥상은 옥유경이 현 무림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사내에게도 무릎 꿇지 않고, 때때로 검성과 도성조차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검후는 옥유경이 다다르고픈 궁극의 이상이자 목표이기도 했다.
“예, 언제나 그렇듯 정정하십니다.”
지금쯤 어떻게 하면 남해의 새들을 수월하게 때려잡을 수 있을까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맛집을 찾아 식도락 기행을 하고 있거나.
“그래? 그분은 여전하신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옥유경은 검후와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 우리 마천각에 들어온 아이도 자네와 비슷한 또래에 자질도 출중하다네. 자네와 붙어도 지지 않을 것 같은데?”
옥유경의 얼굴을 보아하니 두 사람을 붙여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예린은 본래 승부욕으로 불타오르는 성격이 아닌지라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몽환산장의 영령이라고 들어봤나?”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람되지만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역시 백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군. 그럼 나중에 한 번 소개시켜 주지. 그건 그렇고…….?
그녀의 말이 꼭 나중에 한판 붙게 해준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자네에겐 독고 뭐라는 사자가 있지 않았나? 명단엔 안 보이는군.”
그 순간 나예린은 심장에 비수라도 꽂힌 표정이 되었다. 한순간에 창백해진 얼굴을 보자 옥유경은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꼭 얼음 인형 같던 아이가 저런 얼굴이 되다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나예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자는… 독고 사자는… 함께 올 수 없었습니다.”
무겁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마다 듣는 사람까지도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 괴로움이 서려 있었다.
“어째서?”
나예린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스스로 밝히는 것은 괴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신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용천명이었다. “독안봉 독고령 소저는 지난번 화산지회의 화겁 이후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런가? 그 아이의 실력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참으로 아쉽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탄식이었다. 정말 호전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검에 대한 열정은 결단코 진소령의 아래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름을 부르던 옥유경의 눈길이 출석부의 한 지점에서 우뚝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한동안 그곳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리곤 그 이름을 부 르는 대신 출석부에서 고개를 들어 사절단을 차근차근 쓸어보았다. 시선이 멈춘 곳은 바로 산발머리에 안대를 걸친 효룡과 소심하게 앉은 윤준호의 가운데 자리였 다.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이름을 불렀다.
“장… 홍……!”
당사자는 화급히 시선을 피했다.
“예에…….”
장홍이 손을 반쯤 들어올리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여 눈이 마주칠까 두려운지 시선을 자꾸만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어라? 장 형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양쪽에 앉아 있던 효룡과 윤준호의 마음속에 동시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장홍이 겁먹은 강아지처럼 보이는 일은 두 사람 다 처음이었다. 언제나 맏형 같던 장홍이 오늘따라 왜소해 보였다.
“호오, 이 풋풋한 자리에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군요. 자리를 잘못 찾은 게 아니신지?”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아보며 옥유경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 독설의 화살이 누굴 향하는지는 명백했다.
“…….”
장홍은 여전히 고개를 수그린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꿀 먹은 벙어리인가, 왜 대답이 없죠? 장홍 학생!”
선명한 적의가 넘실거리는 말투다.
“그, 그게…….?
“잘도 그런 낯짝으로 태연히 앉아 있을 수 있군요. 그 배짱에 본인은 참으로 감탄했어요!”
옥유경에게는 비틀린 칼날을 목소리로 재현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저게 어디가 태연한 얼굴이지?”
쩔쩔매는 장홍을 지켜보면서 효룡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의문이 떠올랐다.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하고, 힘이 넘치던 눈동자는 불안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안 색은 병자처럼 파리하고, 손발은 수전증 환자처럼 부르르 떨린다. 어딜 봐도 절대로 태연한 얼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효룡이 알던 장홍은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어째 옥교관 말투가 갑자기 존댓말로 바뀐 것 같지 않아요?”
연비가 소곤거렸다. 장홍에게 말할 때부터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지만, 존댓말이라도 정중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심히 꼬여 있는 말투였다. “그러게요. 역시 연비는 예리하군요.”
나예린 역시 소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설은 다시금 두 사람이 즐겁게 소곤거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이 되었다. 이유는 달 랐지만 처량한 처지가 된 것은 이진설뿐이 아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드신다면 나가겠습니다.”
장홍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투에 분노나 억울함은 서려 있지는 않았다. 옥유경의 입가엔 싸늘한 조소가 맺혔다.
“아뇨. 그대로 있으세요. 지금 나갔다가 칠 년 사 개월 십사 일가량 소식이 묘연해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죠. 알겠어요?”
온몸이 난도질당한 사람처럼 장홍의 얼굴이 괴로움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무척 미묘한 숫자였다.
“알겠습니… 다.”
쥐어짜내는 듯한 대답을 하고 장홍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싸늘한 적막이 건물 안을 가득 메웠다. 모두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 잠시 불쾌한 일로 지체되었으나 다들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아무도 그녀에게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건드렸다가는 당장이라도 폭발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호명 절차를 쾌속하게 마친 후, 옥유경은 출석부 를 접었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우리 마천각의 기숙사는 각각이 모두 독립된 무력 부대로서, 독자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구축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닥 쳐도 제각기 즉각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도록 한 것이 바로 지금의 독립 부대 체재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전시체제였다. 더 나아가 기숙사들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도 됐다.
“마천십삼대’라는 호칭 때문에 기숙사가 총 열세 개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자죽도를 둘러싸고 동, 서, 남, 북, 네 개의 섬이 있는 것은 다들 알고 있나?”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흉험한 무인들이 타고 있는 쾌속선의 호위를 받으며 마천각에 들어설 때 그들은 보았다. 살벌한 자죽책 주위로 일제히 불길이 솟구쳐 오 르고, 마침내 섬 위로 떠오른 거대한 불꽃의 고리 속에 비친 네 개의 섬을.
환영을 빙자한 열렬한 무력시위는 꽤 성공적이었다. 몇몇은 초장부터 그 압도적인 모습에 위축되고 말았다. 마천각은 아무리 봐도 단순히 학교가 아니었다. 그들
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자신들이 너무도 안락한 곳에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동서남북, 섬 하나에 세 개씩, 기숙사는 도합 열두 개다.”
“열세 번째 부대는 없습니까?”
누군가가 질문했다. 마천십삼대라면 숫자가 하나 부족했다.
“있다곤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옥유경의 대답에 다들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지난 백 년간 그 부대를 확인한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역시 ‘환상의 십삼대’라 부르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그 열세 번째 자리를 자네들에게 빌려주겠 다. 자네들은 앞으로 임시 십삼대가 되어서 철저히 교육받게 될 것이다. 놀러 온 게 아닌 이상, 자네들도 이제부터 다른 기숙사생들과 똑같이 처우하겠다.”
파도가 이는 것처럼 웅성거림이 번져 갔다.
“그런 얘긴 전혀 듣지 못했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속삭임을 요약하면 이 정도쯤 되리라.
“자네들이 지금부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혈옥선자 옥유경이 힘주어 말했다.
“반장을 뽑는 것이다. 기한은 내일! 방법은.”
잠시 뜸을 들인 후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