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면매복
-검은 우산 위로 쏟아지는 봄날 저녁의 화살비
약 오륙 장 정도 넓이의 작은 운하에 드리워진 다리를 디디던 나예린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장강용사인지 뭔지가 장강수로채에서는 조금 이름있는 무인이 라 해도 천무삼성의 일인의 검후의 직전제자인 그녀의 이목을 속이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연비.”
나예린은 전음으로 조심스럽게 연비를 불렀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연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느낀 걸 자신도 느꼈다는 표시였다.
“나도 느꼈어요.”
역시 자신의 감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예린은 긴장했다. 무언가가 계속해서 자신과 연비의 뒤를 밟고 있었다. 단순한 치한의 돌발 행동은 아니었다. 보이진 않지만 그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역시 연비도 느꼈군요?”
“이 정도로 팽배한 살기인걸요. 못 느끼는 쪽이 이상하죠. 어쩐지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끔따끔하더라구요. 역시 미인은 어딜 가나 주목받아서 귀찮다니깐요.” 연비의 나직한 투덜거림을 들은 나예린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 반격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었다. 정황상 그들은 자신들이 저 앞의 다리 위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저곳에 무엇인가가 은밀히 몸을 숨긴 채 자 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가죠, 뭐.”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연비가 말했다.
“괜찮겠어요?”
확인차 나예린이 물었다.
“고백을 못해서 안절부절못한 채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은데, 돌격할 기회를 한 번은 줘야죠.”
물론 기회는 주되 그 마음까지 받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연비, 그럼?”
나예린의 약간 놀란 듯한 전음에 연비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그 얼굴에서 나예린은 긴장의 단편조차 찾아볼 수 없었 다.
“그러니 계속 걷자구요, 멈추지 말고.”
연비는 발걸음을 멈출 생각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연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물감처럼 번져 나갔다. 나예린은 보조를 맞추듯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저벅!
곧 다리의 중앙에 이르게 된다. 아마 연비의 예상으로라면 이쯤일 터였다.
“슬슬 나타날 때로군요.”
살기의 개수와 방향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은 매복진이 분명했다. 진법을 상대함에 있어서 기본은 포진된 진형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최소한의 기본조차 서슴없이 파하는 연비의 대답은 경쾌할 정도로 밝았다.
“잠깐 얼굴이나 보고 인사나 해야겠어요.”
누가 이런 번거로운 환영식을 준비했는지 꼭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직까지 ‘연비’라는 존재가 누군가와 척질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도 이것의 목 표는 연비 자신이었다. 살기의 행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그걸 확인해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알게 되면? 물론 당한 것의 세 배를 더 얹어서 갚아주어야겠지. 능력이 없다면 모르되 능력이 있다면 자신을 해코지한 사람을 그냥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 일에 대해 가해자가 보복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그가 일으킨 행위의 업(業)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린, 업이란게 뭐라고 생각해요?”
발걸음을 옮기며 연비는 한가로운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갑작스런 질문이네요.”
비록 검각이 보타암의 영향으로 인해 불교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그런 의문에 대해 평소 품고 다닌 바는 없었다.
“난 업이란 게 일종의 수입, 지출 기록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때때로 결산이 늦어지면 현생이 아니라 내생으로까지 결산이 이월, 아니, 다음 생에까지 이생 (移生)되는 경우도 있는 철두철미한 수입, 지출 기록부 말이에요. 그렇다면 이생되는 일 없이 그 결산을 조금 앞당겨 주는 것도 바쁜 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 까요?”
업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 자체가 시대와 공간에 따라 변천하는 애매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말과 행위에는 힘이 깃들 어 있다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없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선악을 모르는 힘일 뿐이다. 그리고 그 행동의 결과는 어떤 경우에서든 반드시 나타난다. 그 결과가 그 시공간 속에서 선으로 판명될지 악으로 판명될지는 어디까지나 미지의 영역인 것이지만.
축적된 인과의 힘. 강한 힘이 쌓일수록 돌아오는 결과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법인데 그것이 복이 될지 흉이 될지는 오직 신만이 알 일이었다.
장강십용사의 일이삼강은 양손에 연노를 든 채 각자 세 방위로 나뉘어져서 목표물에 접근했다.
철컥! 철컥! 철컥!
이미 장전은 끝나 있었다. 연노 안에 장전된 화살은 살기를 잔뜩 머금은 채 기관장치 안에서 목표의 숨통을 끊기 위한 힘을 비축하며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방아 쇠에 걸린 손가락만 한 번 까딱 움직이는 것으로 사람 하나의 생명을 이 세상 위에서 떨굴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기란 그런 물건이었다. 특히 이런 저격용 장거리 공격 무기는 생명의 무게를 느끼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나고 만다. 돌이키는 일 따윈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셋 중 누구도 돌이키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그들은 이미 이런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스윽!
일강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매복진은 발동하게 된다. 일강은 가볍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손을 내렸다.
‘십면매복 발동!’
연비와 나예린을 향해 세 방향에서 동시에 나타난 연노는 물고 있던 살의 어린 화살을 연속적으로 토해냈다.
투웅! 투웅! 투웅! 슉! 슉! 슉! 쉐에에에에에엑!
연노의 발사대 위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던 화살이 매서운 속도로 연비와 나예린을 향해 날아갔다. 기관장치를 이용해 연속 발사가 가능하도록 만든 물건이기 때문 에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 소모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 연노 세 대면 궁수 열두 명 몫도 너끈히 해낼 수 있었다.
스무 명이 세 방향에서 동시에 쏘는 것과 동등한 효과를 지닌 화살비가 두 사람의 생명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 둘은 화살이 지척까지 날아오는데도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먼저 하죠.”
먼저 움직인 쪽은 백의의 미소저 나예린이었다.
파바바밧!
나예린이 하얀 검을 세차게 휘두르자 순식간에 검기의 벽이 펼쳐졌다. 백광의 검막에 가로막힌 화살들은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하고 토막이 난 채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화살로 만들어진 비는 옷자락 한 번 적셔보지 못하고 맑게 개였다. 연노에 의한 제일파는 그렇게 해서 무위로 돌아갔다.
“멋진 솜씨예요, 린.”
연비가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마치 그녀가 막아줄 것을 믿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이… 이럴 수가…….”
저토록 가녀린 몸 안에 그토록 고명한 검술이 숨어 있을 줄 짐작하지 못했던 세 남자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떡합니까, 형님?”
다소의 저항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철저히 무효화될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재장전!”
미녀 방해꾼에 의해 제일파 공격이 무산되자 일강, 이강, 삼강은 서둘러 화살통을 새로 교체했다.
“쏴!”
재빠른 속도로 장전을 마친 그들은 또다시 화살을 미친 듯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투웅! 투웅! 투웅! 투두두두두두두!
또다시 화살비가 쏟아졌다.
“또 오네요.”
연비가 그걸 보며 한마디 했다.
“소용없는 짓을…….”
나예린은 애검 빙루를 차분히 늘어뜨린 채 나직이 뇌까렸다.
쉬이이이이익!
나예린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바로 코앞까지 날아오는데도 얼음 조각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청각만은 예민하게 개방된 상태였다. 바람의 비명
소리가 화살의 궤적을 알려주고 있었다. 팟! 팟! 팟! 팟!
나예린 앞으로 다가오던 화살들이 보이지 않는 칼날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슨 조화냐?”
일강의 눈엔 나예린의 검은 여전히 지면을 향해 늘어뜨린 채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 가까이 접근하는 화살은 영락없이 두 쪽이 나서 떨어졌다.
“훌륭한 쾌검이에요, 린!”
연비가 박수까지 치며 칭찬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화살들을 베어내는 쾌검이라니! 눈 나쁜 사람들에겐 귀신 곡할 노릇으로 보일 거예요. 평범한 자들에겐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걸 로 보일 테니깐요.”
누가 듣고 있는 것도 아닌데 연비는 마치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서 설명조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사실 지금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암습자 얼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지만 그들의 무능한 청력 때문에 그것마저도 불가능했다.
팟! 팟!!
싹둑! 싹둑! 싹둑!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이라 해도 나예린의 보이지 않는 검벽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살의가 충만하다 해도 모두들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검벽 앞에서 두 동 강이 나서 떨어질 뿐이었다.
제이파 공격도 그렇게 무위로 돌아갔다.
“에잇! 마지막 남은 걸 몽땅 쏴버려!”
일, 이, 삼강은 뒷일은 생각지 않고 빈 통을 버리고 예비용으로 남겨두었던 세 번째 화살통을 연노 위에 장전했다. 철컥 하는 쇠 잠김 소리와 함께 교체가 끝났다. “일제 사격! 다 쏟아 부어!”
약간의 저항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저쪽도 일단은 꽤 고수인 것 같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허무하게 차단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치사 하게 한 발짝도 안 움직이냐! 오히려 기습한 쪽이 항의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항의엔 말보다는 화살을 이용하기로 했다.
투두두
두두두!
다시 한 번 세 방향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그걸 보고 연비가 한마디 했다.
“바보들이네요. 적어도 공격 방향이라도 좀 바꾸지.”
이미 어디에 숨어서 화살을 날리는지 다 파악한 뒤였다.
“나 여기 있습니다, 라고 광고할 필요까진 없는데 말이죠.”
너무 빤히 보여 민망할 정도였다. 여기서 비도를 던져도 충분히 맞힐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굳이 그러진 않았다.
“이번엔 내 차례네요.”
연비는 활짝 편 우산을 가볍게 올린 채 빙글 몸을 돌렸다. 즉,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과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돌아선 것이다. 물론 연비의 뒤통수에 눈이 덤으로 달 려 있거나 하진 않았다.
“위험……!”
나예린이 경호성을 마저 터뜨리기도 전에 화살비가 연비의 몸에 쇄도했다.
파바바바방!
검은 우산 현천은린에 부딪친 화살들이 비 막는 우산 하나를 꿰뚫지 못한 채 사방으로 비산했다. 우산 끝을 장난치듯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검은 장벽이 눈 앞에 펼쳐져 두 사람을 보호했다.
“이 우산이 좀 특제거든요. 대부분의 비는 다 막을 수 있는 전천후 우산이랍니다. 비록 그것이 화살비라 해도 말이죠.”
서로 마주 보게 된 나예린을 향해 연비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엔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했다. 거의 비가 그칠 무렵 연비는 다시 한 번 빙 글 몸을 돌려 날아들던 마지막 세 자루의 화살을 낚아채더니 반 호흡의 쉼도 없이 곧바로 세 방향을 향해 날려 보냈다. 손으로 던졌는데도 기관을 이용한 것보다 수 배 이상 빠른 속도였다.
쉐애애애애애애액!
세 사람의 매복자가 숨어 있던 장소로 빛살처럼 똑바로 날아간 화살은 정확하게 연노의 발사구를 무자비하게 꿰뚫은 다음 어깨에 가서 박혔다.
콰직!
“끄아아아아아아악!”
연노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 세 사람도 당분간 무기를 들기가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자로 잰 듯한 정확한 솜씨였다. 미간을 꿰뚫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었다.
“음훗, 약간의 답례였어요. 받기만 하면 부담스럽잖아요.”
그럴 땐 부담을 분산시키기 위해 재깍재깍 결산을 해두는 게 좋았다.
“이제 끝난 걸까요?”
“아뇨, 아마 이제 시작일걸… 요?”
연비가 갑자기 나예린의 손을 잡은 다음 재빨리 위로 던져 올렸다. 왜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다. 대답은 다리 바닥에서부터 왔다.
슈욱! 슉!
연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리 밑에서 시커멓고 날카로운 물체가 무서운 속도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날카로운 창이었다. 몸체가 강철로 만들어진 두 자루의 창은 창날과 몸뚱이 하나로 되어 있어 물체를 꿰뚫어도 창날 끝에 걸릴 일은 없었다. 마치 이런 상황을 상정해서 만든 듯한 창이었다.
밑에서 기습적으로 창을 찔러온 이는 장강용사의 사하와 오하였다. 그들은 다리 밑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목표가 다가오자 망설이지 않고 창을 찌른 것 이었다. 하지만 창 솜씨에 비해 부족한 은신잠행술은 그들의 존재를 계획보다 빨리 탄로나게 만들었다.
사뿐히 뛰어올랐던 연비와 나예린은 깃털처럼 가볍게 불쑥 솟아오른 창끝을 발판으로 그곳에 내려앉았다. 창끝에 실린 갑작스런 무게에 사하와 오하는 당황했다. 설마 창끝 위에 설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다른 곳에 섰다면 다시 재공격을 하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것도 불가능했다.
“이익! 이익!”
창을 잡아 빼려고 해도 빠지지가 않았다. 어떤 거대한 힘이 창끝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연비는 검은 우산으로, 나예린은 검집으로 신형을 고정한 채 창 날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사하와 오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나 여전히 창은 요지부동이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창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압!”
그 순간 다리 바닥 중 일부가 위로 솟구쳤다. 마치 도려내지듯 동그랗게 난 구멍으로 사하와 오하가 뛰어올랐다. 목표가 다리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장치였다. 두 개의 구멍 사이로 몸을 띄운 사하와 오하는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 목표를 향해 공격해 갔다.
“죽어라!”
별로 개성없는 말을 내뱉으며 두 명의 암습자는 두 자루의 단도를 날카롭게 휘둘렀다. 그러나 암습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그 둘의 공격은 연비의 활짝 펴진 우 산에 가로막혀 버리고 말았다.
휘리리릭!
연비가 검은 우산을 가볍게 돌리자 회전에 휘말린 두 자루의 단도는 암습자의 손을 빠져나와 다리 아래로 떨어져 갔다.
그다음의 가벼운 두 번의 찌르기로 두 암습자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과 함께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이제 끝났….”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 한가운데에 단층이 생겼다. 분명 하나로 이어져 있어야 할 곳이 나뉘어져 있었다. “어멋?”
연비가 짧게 경호성을 터뜨렸다.
정가운데서 정확히 잘려 나간 다리는 두 사람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아래로 푹 꺼져 내렸다. 설마 이렇게 무식한 방법을 사용할 줄이야! 한 번 무너져 내리 자 붕괴는 삽시간에 찾아왔다.
“린!”
짧은 부름이었지만 나예린은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알아차렸다. 나예린은 재빨리 연비가 펼쳐 준 우산을 발판 삼아 비조처럼 몸을 위로 띄웠다. 그다음 연비 역시 재빨리 경공으로 이 추락에서 벗어나려 했다.
휘! 휙! 휙! 휙! 휙!
그러나 물속에서 솟아오른 여섯 자루의 비도 때문에 그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런 돌발 사태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왕좌왕하길 바라는 적의 바람을 무참히 짓밟으며 연비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연비는 아무런 발판이 없는 허공에서도 이리저리 자유자재로 몸을 뒤집으며 연속해서 날아오는 비도들을 피해냈다. 이런 비도 피하기 수업은 어릴 적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수업으로 기초편에 속했다. 이런 것쯤은 이제 눈 감고도 피해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수업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비도를 피하다 보니 위로 도약할 시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쳇, 할 수 없군요.”
연비는 위로 뛰어오르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강물에 빠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리 깊지 않은 강이라곤 하지만 한 번 빠지면 늪에 빠진 것처럼 벗어나기 힘 들 것이 분명했다. 물속에 숨어 먹이를 노리는 상어처럼 자신들을 노리는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생선을 좋아하긴 해도 상어의 밥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상어 를 잡아 지느러미를 떼어내 요리해 먹는 쪽이 더 취향에 맞았다.
연비는 검은 우산을 펼쳐 들었다.
파앙!
그리고는 가볍게 무너져 가는 바닥을 박찼다. 그러자 추락하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런 날 수영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공중에 뜬 연비는 펼쳐 든 우산을 발아래 방향으로 향했다. 먼저 물에 닿은 것은 검은 우산의 꼭지 부분이었다. 거꾸로 뒤집힌 우산은 별 힘들이지 않고 물에 떴다. 연비는 한 발로 사뿐히 우산대 위에 내려앉았다. 금방 우산이 뒤집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검은 우산을 중심으로 파문만이 퍼져 나갈 뿐이었 다. 발끝을 통해 보내는 내공으로 우산과 물 사이의 반발력을 높이고 경공으로 몸의 무게를 줄인 것이다. 연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고 싶 었던 암습자들에게 있어선 매우 불행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무너진 다리에서 벗어나 운하 가에 착지한 나예린은 그 모습을 보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연비는 연속되는 암습에도 아무런 상처 없이 무사했고 무너지는 다리 파편에 얻어맞는 불상사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안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스르르르륵!
물속에서 파문을 그리며 떠 있는 검은 우산을 향해 접근하는 두 개의 그림자를 목격했던 탓이다.
원래 장강수로채는 업계가 업계인 만큼 수공(功)이 강했다. 다른 곳에 비해 고도로 특화된 그들의 수공은 맨 몸으로도 한 자루 칼만 있으면 배에 구멍을 낼 수 있 을 정도였다. 그 위력은 실로 장강을 제패할 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장강십용사의 여섯째와 일곱째인 육하(六河)와 칠천(川)은 이들 열 명 중에서도 특히 수공에 능했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수의를 입고 운하 속에 잠 복해 있었다. 그들의 차례까지 안 오면 좋겠지만 만일 그들 차례까지 돌아왔을 때는 가차없이 손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수면 위로 물고기처럼 펄쩍 뛰어올라 톱니가 달린 두 개의 기형단도로 상어의 아가리가 다물리 듯 매섭게 공격한 초식은 그들이 가장 자랑하는 이인 수공 합격술인 ‘교아격살(蛟牙擊殺)’의 일초였다. 상 어가 먹이를 물어 죽이는 것을 본뜬 초식이 연비의 목덜미와 허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잠깐만!”이라고 외쳐 봤자 기다려 줄 상대는 아니었다. 옳다구나, 더욱 매섭게 공세를 펼쳐 올 게 뻔했다. 연비는 발끝으로 우산대를 찍으며 몸을 위로 날렸다. 그 러면서 양발 끝을 살짝 교차시키며 우산을 말아 올렸다. 연비의 신묘한 발기술에 우산이 반원을 그리며 위로 떠올랐다.
‘아닛! 헉!’
몸을 띄운 연비가 그다음 발판으로 삼은 것은 칠천의 머리통이었다.
퍽!
연비의 발이 칠천의 얼굴에 보란 듯이 발도장을 찍었다.
“크헉!”
짧은 단말마로 함께 균형을 잃은 칠천은 수면으로 패대기쳐졌다.
첨벙!
세찬 물보라 튀어 오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비는 다시 육하의 내지르는 기형단도 위에 사뿐히 왼발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 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그대로 육하의 오른쪽 면상을 후려갈겼다.
우둑! 퍼석!
“꾸에에에에엑!”
괴이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입에서 피분수와 이빨 몇 개를 동시에 뿜어내며 육하의 몸이 수면 위에 패대기쳐졌다. 물수제비처럼 몇 번 수면에 몸을 튕긴 육하의 몸은 부서진 다리의 잔해에 충돌하고 나서야 겨우 자신의 몸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수영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몸뚱이는 꼬로록 그대로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할 일을 마친 연비는 발걸음도 가볍게 수면 위에 착지했다. 아무것도 없는 물 위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니었다. 뭐, 그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려려면 불필요 하게 너무 많은 내공을 소모하게 될 뿐이었다. 지금 주위에는 부서진 다리의 여파로 발판으로 쓸 만한 나무 조각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런 비능률적인 일을 할 필요 또한 없었다. 연비는 그중 몇 개를 징검다리 삼아 가볍게 몸을 움직여 나예린 옆에 내려섰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연비.”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예린이 말했다.
“뭐, 별거 아니었어요. 수고랄 것도 없죠. 겨우 물고기 두 마릴 잡았을 뿐인걸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연비가 대답했다.
“린이야말로 다친 데는 없어요?”
연비의 상냥한 물음에 린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덕분에 괜찮아요. 고마워요, 연비.”
“어멋, 공치사받을 정도는 아닌데요 뭐.”
연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제가 좀 더 힘이 못 되어드려서 죄송해요.”
그녀가 힘을 쓴 것은 맨 처음 날아오는 화살비를 두 번 막은 것뿐이었다. 그다음은 모두 연비가 맡아서 처리했다. 나예린은 그 사실이 못내 미안했다.
“그걸로 충분한데…
“아니요, 불충분해요.”
나예린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친구로서 대등하게 있고 싶었지 보호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자기 자신의 몸은 자기 힘으로 지킬 수 있다 는 것을 연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제 십 년 전의 힘없는 소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앞으로 또 기회가 있겠죠. 그럼 그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적들은 연비를 쉬게 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쉬리리리리릭!
검고 가늘고 길쭉한 무엇이 마치 채찍처럼 예리하게 연비들을 노리며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생각보다 끈질긴 사람들이군요.”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연비와 나예린은 그 움직임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나예린은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채찍을 향해 날카로운 검광을 내뿜었다.
그녀의 검광에 당한 채찍이 놀란 뱀처럼 그녀들 주위에서 물러났다.
연비는 접은 우산으로 날아오는 두 마리의 뱀을 두들겨 팼다. 한 채찍이 검은 우산을 휘감으려 했지만, 연비가 재빨리 우산을 뒤로 뺀 다음 그것의 머리를 내려쳤 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마지막 하나에는 두 사람의 우산과 검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연비와 나예린은 서로 등을 맞대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어느새 그들의 주위에는 여섯 명의 사내가 검은 줄을 머리 위로 붕붕 휘두르며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 세 명은 오른쪽 어깨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죠? 채찍이었나요? 베려는 마음으로 검을 휘둘렀는데 베지 못했어요.”
나예린이 아직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만 검으로 때리기라도 한 듯한 묵직한 감촉만이 검신을 타고 느껴질 뿐이었다.
부웅! 부웅! 부웅!
그 검고 기다란 줄들은 마치 수천 마리의 벌 떼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불길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저건 채찍이 아니에요.”
연비는 호박색 눈동자에 안력을 집중하며 말했다.
“저건 밧줄이에요. 배를 묶을 때 쓰는!”
뱃사람들은 삭(索), 즉 밧줄을 잘 다루어야 한다. 뱃사람에게 있어서 밧줄은 곧 생명선이다. 풍랑에서 자신을 구해주는 것도 밧줄이요,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잡 아주는 것도 밧줄이다. 남의 배를 털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밧줄이고, 돛을 올렸다 내렸다 묶거나 방향을 조절하는 것도 모두 밧줄이었다. 때문에 뱃 사람은 밧줄을 잘 묶고, 잘 풀고, 잘 던지고, 잘 당겨야 한다. 때문에 그들에겐 밧줄을 묶고 푸는 법만 수십 가지가 존재했다. 밧줄을 수족처럼 다루지 못하고서야 한 사람분의 뱃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들 장강수로채의 무공 중에 가장 빛나는 무공이 밧줄을 이용한 무공이라 해도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이들이 머리 위에서 돌리고 있는 밧줄은 배를 정박할 때 사용하는 계류삭이었다. 보통 계류삭은 황색인 데 비해 이들이 들고 있는 밧줄은 검다는 게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이 검은 계류삭은 몇몇 특수한 재료와 약품들을 사용해 꼰 것이라 어지간한 창칼은 물론이고 검기로도 상처는 입힐지 몰라도 벨 수는 없었다. 그들 중 세 사람은 오른쪽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상처 부위를 백포로 싸매두긴 했지만 그 위로 피가 배어 나왔던 것이다.
“저런, 상처가 심한 것 같은데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걱정이 한가득한 목소리로 연비가 묻자 일강이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
그런데 대답하다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괜찮을 리가 있냐! 썅!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어멋, 누구 때문이죠?”
“이게 다 네년 때문이잖아!”
장강육용사가 일제히 연비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년이라니, 말조심하세요. 그 불손한 입을 확 꿰매 버리기 전에 말이에요. 그리고 삿대질도 하지 말아요. 교양없게시리. 척 보니 화살에 당한 상처 같은데 그 화살 은 애초에 누구의 화살이었죠?”
연비가 날카로운 어조로 힐문했다.
“그, 그거야… 우리들의…….”
일강의 말이 조그맣게 잦아들었다.
“것 봐요. 그 화살은 댁들 건데 그걸 가지고 나한테 뭐라 하면 안 되죠. 무엇보다 남한테 아무 말 없이 화살을 날린 쪽은 그쪽 아닌가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
어째 자꾸만 궁지로 몰리고 마는 일강이었다.
“여성들은 원래 섬세해서 좀 전 같은 그런 갑작스런 접근을 별로 안 좋아해요. 좀 더 은근한 맛이 있어야지. 여자들에겐 마음의 준비라는 기간이 필요한 거라구요. 알겠어요?”
“아, 예, 알겠습니다.”
얼빠진 목소리로 일강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통증을 줄이기 위해 사용한 진통환’이나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 바른 ‘금창약의 부작용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는 연비의 말이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형, 정신 차리쇼!”
그 얼빠진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이강과 삼강이 기이함을 깨닫고 소리쳤다. 그 외침 소리에 그제야 일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 사술(術)이었냐…….”
연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아뇨, 화술(術)이죠.”
일일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 말이 장강십용사의ᅳ비록 지금은 네 명이 빠져 있지만ᅳ분노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