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2권 18화 – 밧줄의 무궁무진한 쓰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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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2권 18화 – 밧줄의 무궁무진한 쓰임에 대한 고찰

밧줄의 무궁무진한 쓰임에 대한 고찰

-흑삭포룡진 발동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분노한 일강이 검은 밧줄을 든 채 시근덕거리며 외쳤다.

“척 보니 별거 아닌 밧줄이네요.”

시큰둥한 어조로 연비가 대답했다. 별 관심 없다는 듯한 태도에 일강이 발끈했다.

“이 밧줄을 무시하지 마! 이건 보통 밧줄이 아냐!”

“보통 밧줄이 아니면?”

“이건 흑룡이라 불리는 밧줄이다.”

“흑! 룡! 삭!”

연비가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또박또박 강세까지 주어가며 외친 외침이었다.

“그래! 그 흑룡삭이다!”

그러자 연비가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근데 그게 뭐죠?”

굉장히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조금 전엔 일부러 놀란 척한 것일 뿐이었다.

“그 유명한 흑룡삭을 모른단 말이냐?”

“몰라요. 정말이지 물에 사는 인간들은 용에 대한 알 수 없는 동경을 품고 있는 모양이죠? 겨우 시시한 밧줄 따위에까지 룡 자를 붙이다니.” 그러자 성난 목소리로 일강이 외쳤다.

“밧줄을 무시하지 마라! 밧줄은 쓰임에 따라 무궁무진한 용도가 있어! 이 몸만 해도 밧줄 묶는 법에 관해선 수십 가지나 알고 있지.”

“수십 가지나요?”

그제야 연비는 약간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래, 수십 가지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일강이 대답했다.

“밧줄로 묶는 걸 어지간히 좋아하나 봐요? 사람도 묶나요?”

“그 정돈 기본이다. 그 오묘함을 몰라서 그래. 특히 너 같은 애들은 한 번 묶이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지! 암, 없고말고!”

“아, 네, 오묘함 말이죠.”

“그렇다! 밧줄의 세계는 심오하다!”

조금 흥분한 일강의 목소리는 열에 들떠 있었다. 그러자 연비가 싸늘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

“변태!”

이 싸늘한 한마디는 단숨에 일강의 심장을 꿰뚫었다.

“뭐, 어… 어째서 내가 변태란 말이냐!”

피를 토할 것만 같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일강이 쿨럭거리며 반박했다.

“방금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요.”

“내, 내가 언제!”

일강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천인공노할 모함이었다. 자신들이 죄없는 무구한 여인 두 명을 암습하는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지에 대해서는 잠시 제쳐 두는 편리하고 유연한 사고방식 또한 그는 소유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도 분명 들었어요. 그렇죠, 린?”

그러자 나예린은 마치 짐승이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일강을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납득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긴. 정말 기억력이 나쁘네요. 방금 전에 그랬잖아요. 자신은 밧줄 묶고 조이는 법만 수십 가지를 알고 있다고.”

“그, 그랬지.”

“그리고 그랬죠, 밧줄의 세계는 심오하다고. 나 같은 사람은 빠져나오지도 못한다면서요?”

“그, 그것도 그랬지.”

“여자를 밧줄로 수십 가지 방법으로 묶으면서 좋아하는데 그게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러자 장강육용사―그들은 어느새 육용사로 줄어 있었다ᅳ쪽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설마 대형에게 그런 취미가…….”

“밤마다 밧줄 가지고 묶고 풀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런 짓을 몰래 하고 다녔단 말이지…….”

수군수군수군! 쑥덕쑥덕쑥덕!

적들뿐만 아니라 동생들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듣게 되자 일강은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 아냐, 난 억울해! 난… 난…….?”

그러자 연비가 날카롭게 한마디 쏘아주었다.

“시끄러워요, 변태!”

그 말을 결정타로 일강의 정신은 심연의 바닥으로 침몰했다. 남은 빈자리엔 분노가 들어찼다.

“이이이이익!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네년들을 몽땅 잡아서 밧줄 맛을 보여주마!”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을까? 조금 전의 대사로 그의 변태 의혹설은 진실로 확정되었다.

“역시 그랬던 거야.”

“사실이었군.”

“대형, 믿었는데…….”

“나도 끼워주지……..

이제 아우들의 마음속에 일강은 완전한 변태로 공인되고 말았다.

“네 녀석들도 주딩이 닥쳐!”

분노로 눈이 먼 일강에겐 이제 뵈는 게 없었다. 자신을 가지고 논 저 시커먼 여자에 대한 복수심만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장강십용사 필두 번강수 일강! 향년 삼십팔 세에 변태로 낙인!

한 많은 인생이었다.

“아냐! 변태 아니라니깐!”

이대로 변태로 낙인찍힌 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일강이 거세게 항의했다. 동생들에 대한 위엄도 있었다. 앞으로 남은 긴 시간 동안 변태대형이란 소릴 들으면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게 마련이죠.”

안됐다는 표정으로 연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니라니깐 그러네! 잘 들어! 이 흑룡삭은, 뿌득, 보통 밧줄과는 격이 다른 물건이지. 뿌득. 고래의 힘줄과 가늘게 뽑은 쇠줄과 비전의 용액에 담근 튼튼한 새끼줄 을 꼬아 만들고, 뿌득, 그 위에 쇳조각과 쇳가루를 입힌 그런 물건이라 이 말씀이야. 뿌득뿌득. 이 밧줄에 얻어맞으면 쇠몽둥이로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에, 뿌득뿌 득,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지, 뿌득. 아가씨들의 야들야들한 여린 살가죽 따윈 금세 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다 이 말씀이야. 뿌드드드득!”

아직 분이 가시지 않은 일강이 이를 뿌득뿌득 갈며 으름장을 놓았다.

“흥, 수준 낮긴. 어린애도 그런 도발엔 안 넘어갈 것 같군요. 것보다 이빨 상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더 생산적인 것 같은데요?”

연비가 살짝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겁먹을 필요 없어요, 린. 저렇게 싸우기도 전에 자신들의 기문병기에 대해서 주절주절 떠벌리는 건 단순한 심리적 압박이니까요.”

“저 정도로 겁먹진 않아요. 하지만 왜 저리도 쓸데없이 말만 길게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그런 의도였군요.”

이런 계략 부분에선 순진했던 나예린은 그제야 엄포의 기세가 이해되는지 학생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린도 그쪽은 아직 경험이 적죠? 저렇게 주절주절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력이 어쩌구저쩌구 떠드는 건 그냥 입이 심심해서라던가 저자가 단순한 변태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인간의 상상은 공포의 그림자 또한 만들어내고 그 그림자는 무의식중에 사람의 반응을 제약하죠. 저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런 반응들이죠. 하지만 저게 그냥 검게 칠한 보통 밧줄인지 누가 알겠어요?”

“흠, 그런 거군요.”

몰랐던 것을 알게 된 나예린은 자신이 방금 배운 사실에 대해 심도 깊게 심사숙고하는 듯했다. 주술처럼 마음을 속박하는 사슬이라……. 상상의 그림자가 그토록 무서운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되는구나.’

그녀 역시도 마음속에 짊어진 짐이 있다. 아직도 어두운 과거는 그녀의 정신 중 일부를 구속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것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아마 대 부분이 그러하리라.

“아무리 대단하게 만들어졌다 해도 저건 그냥 단순한 밧줄이에요. 게다가 그걸 쓰는 자들의 실력 또한 한 짝을 모아와도 린 한 사람만 못해요. 그러니 빨리 끝내고 차나 마시러 가죠.”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마침 좀 피로하던 참이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끝까지 무시하기냐!”

자신들을 거기 없는 공기 취급 하자 열받은 일강이 사납게 외쳤다.

“흑삭포룡진(黑索捕龍陣)을 발동해라!”

초반의 기선 제압에 실패한 일강은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사방에서 벌 떼처럼 붕붕거리던 검은 삭들이 영활한 뱀처럼 여인들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죽어라!”

조금 전엔 사로잡는다더니 일관성이 없는 일강의 외침이었다.

“그렇겐 못하죠.”

파바바바바밧!

연비가 오른손을 움직이자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방패처럼 그들의 주위를 감쌌다. 거대한 사발을 뒤집어놓은 것 같은 검은 장막은 두 사람의 신형을 안전하게 숨 길 수 있을 만큼 크고 단단했다.

“저… 저게 무슨 무공이냐…….”

얼빠진 목소리로 일강이 물었다.

“그, 글쎄요…….”

마찬가지로 당황한 동생들에게서 쓸 만한 대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흑룡삭을 완벽하게 막아낸 연비가 검은 우산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이거요? 검막은 아니고… 음… 산막(傘幕)이라고 해야 할까요?”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름이 없었다. 아직 초식명도 지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원래 알고 있던 초식이 아니었어요?”

나예린이 놀라서 반문했다.

“응용이죠, 응용.”

별거 아니라는 투로 연비가 대답했다.

“그런…….”

갑작스런 응용만으로도 저런 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나예린으로서도 금세 믿음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연약한 여성들에겐 호신술은 필수 아니겠어요. 가벼운 재주죠.”

그 말에 일강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신술이라니…….”

저런 기예를 두고 어떻게 단순한 호신술이라고 평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 문제되는 건 그다음 발언이었다.

“누, 누가 연약하다는 거냐!”

그런 언어도단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일강이 외쳤다.

“어멋! 둔하긴~ 보는 눈이 없군요, 쯧쯧. 멀리 가서 찾을 필요 있나요? 여기 있잖아요.”

연비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가 비록 귀엽긴 했어도 일강이 보기엔 가증스럽기만 했다. 일강은 다시 한 번 자칭 연약한 여성을 향 해 사정없이 흑룡삭을 날렸다.

팟! 팟! 팟!

나예린은 다시 한 번 새하얗게 빛나는 검을 휘둘러 백광의 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게 방어할 수 없는 듯했다. 흑룡삭이 사방에서 날아오는 데다가 무 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나예린의 검기에 의해 베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흑룡삭은 검을 자신의 몸에 박아 넣은 채 역으로 휘감겨 들어오기까지 했다. 붙잡히면 아무리 일류고수라 해도 끝장이었다. 나예린에게 무기는 이 검 하나뿐이었지만, 그들에겐 흑룡의 다른 머리들이 아직까지 건재했다.

“악! 꺅! 악! 이런!”

연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검은 밧줄의 공세 때문에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이리저리 검은 우산을 무기 삼아 휘두르곤 있지만, 나 예린의 날카로운 보검으로도 잘리지 않은 밧줄이 상할 일은 없었다.

“괜찮아요, 연비?”

심려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외쳤다.

“아, 아직은요.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연비가 절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두 사람의 비명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일강은 속으로 더욱더 기뻐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한 자루 검과 한 개의 우산만 봉쇄되면 흑룡의 나머지 머리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에잇에잇에잇!”

기합인지 아닌지 모호한 소리를 지르며 연비는 검은 우산을 휘둘렀다.

“저리 가! 저리 가!”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린, 아직 괜찮아요? 버틸 수 있겠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비가 외쳤다.

“아뇨, 어떡하죠? 저도 이제 한계예요. 사부님으로부터 전수받은 비설보는 일 대 일 대결에서는 무한한 효능을 발휘하지만 이런 포위 공격에서는 그다지 큰 쓸모 가 없어요. 저 역시 이런 변칙적인 합동 공격에는 익숙지 않고요.”

요령이 없다 보니 그저 검 한 자루에 몸을 의탁한 채 무조건 휘두를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체력 소모가 많아지게 되어 있었다. 나예린은 점점 수세로 몰리고 있는 듯했다. 연비도 마찬가지로 검은 우산을 이리저리 힘겹게 휘두르며 흑룡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곤 있지만 초반에 비해 현저히 속도나 위력이 떨어져 있었다.

두 여인의 절박한 비명 소리를 듣고 있던 장강육용사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의 포룡진은 봉황을 잡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이 입증된 것처럼 보였 던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두 미녀는 그들의 품 안에 들어오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크하하하하하! 비명 소리가 마치 아기 새의 지저귐 같구나! 울어라! 더 울어! 하지만 어쩌겠느냐? 그것이 너희들의 운명인 것을. 아가씨의 눈 밖에 난 것을 원망 해라!”

그리고 이제 마무리를 하려는 그 순간, 나예린이 연비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그렇대요, 연비.”

“아, 그랬군요. 이제야 알았네.”

명랑하게 대답하는 연비의 목소리엔 조금 전까지 궁지에 몰린 것 같던 절박함이 싸그리 사라지고 없었다.

“뭐… 뭐… 뭐지?”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것 같던 검초도 어느새 툭툭 치는 듯이 가볍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흑룡삭의 공격은 두 사람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하고 있었다. 헉헉거리던 가쁜 숨도 어느새 너무나 평온하게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대체…….”

너무나 급작스런 변화에 일강은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여우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일강에게 연비는 전에 없는 친절을 발휘하기로 했다.

“아직도 모르겠는 모양이네요? 쯧쯧, 이래서 머리 나쁘면 고생이라니까요. 여자를 어떻게 묶을지만 궁리하지 말고 공부도 좀 하지 그랬어요. 쯧쯧. 배워서 남 주는 것도 아닌데.”

“뭐… 뭐라고?! 지금…….”

그러나 연비는 일강의 말허리를 단호하게 자르며 말을 이었다.

“멍청하긴. 왜 당신들이 아직도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건 우리들에게 궁금증이 있어서였어요. 개인적으로 좀 호기심이 많은 편이 라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성격이거든요.”

“서… 설마…….”

“맞아요. 우린 누가 이 암습을 사주했는지 그게 궁금했죠. 그래서 일부러 수세에 몰린 척한 거예요. 하나도 안 힘든데 절박한 표정 지으려니까 정말 힘들더라고 요.”

“그… 그러니깐 지금까지 모두 연기였다 그거냐?”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일강이 말을 꺼냈다. 그러나 연비가 보기엔 그것조차도 너무 늦었다.

“이제 좀 나쁜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네요. 하긴, 이렇게까지 말해줬는데도 못 알아먹으면 죽어야지 어쩌겠어요.”

혀에 칼이 달려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날카로운 말들이 연비의 입에서 마구 쏟아졌다.

“장강수로채 채주 흑룡왕에게는 딸이 한 명 있다고 들었어요. 아마 이들이 말한 아가씨란 분명 그 사람이겠죠.”

나예린이 단정적인 어조로 확신하며 말했다.

“혹시 이름을 알아요, 린?”

“아니요. 전 잘 몰라요. 들어보지 못했어요.”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비가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쳇, 명성도 없는 별 볼일 없는 ‘것’이었던 모양이네요.”

김샜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는다. 일강이 발끈했다.

“벼, 별것없다니! 아가씨를 무시하지 마라! 우리 아가씬 교룡미 해어화라 하면 흑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이시다!”

반짝 충성심이 발휘된 일강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정말 눈물겨운 충성심이 아닐 수 없었다. 연비는 옳다구나 주먹으로 손바닥을 때렸다. “아하, 역시 장강수채 사람이 맞군요. 흐흠, 그런 이름이었단 말이지…….”

만족스럽게 원하던 정보를 모두 빼낸 연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확실해졌군요.”

나예린도 조용히 한마디 거들었다.

“허거덩!”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일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혀… 형님…….”

“그… 그걸 말하시면…….?”

한마디씩 하는 동생들의 얼굴도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처리되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가씨가 알면…..”

“우린 죽어요.”

감추어야 될 주인의 정체를 보란 듯이 낱낱이 까발렸으니, 만일 그 사실이 그 성격 폭급한 해어화의 귀에 들어가는 날엔 그들은 더 이상 물 위에서 숨 쉴 일은 없어 질 것이다. 곧바로 바위에 매달려 장강 밑바닥에 처박힐 테니 말이다.

“조… 조금 전에도 연기였던 거냐?”

“물론이죠.”

연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강이 연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사실 연기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연비와 나예린 두 사람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 는 사람처럼 행동했고, 일강은 무의식중에 두 사람이 그들의 배후에 있는 해어화의 존재를 이미 알아챘다고 믿어버렸다. 마음의 빗장이 헐거워진 일강은 격장지계 의 좋은 밥이었다.

“그런 가증스런 연기를……..

여자들은 다 꼬리 아홉 달린 불여우라더니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실례되는 말을. 믿은 게 잘못이죠. 아, 웃음 참느라 혼났네.”

이젠 굳이 연기를 안 해도 되는 연비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럼 이제 약한 척 안 해도 되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훌륭한 연기였어요, 린. 나도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니깐요.”

연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랐다. 솔직히 상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예린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본인 역시 나름대로 즐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생포할 필요 없어! 죽여 버리겠다!”

평생 당한 것보다 더 많은 바보 취급을 오늘 하루에 다 당한 일강은 분노로 눈이 뒤집혀 버렸다.

“글쎄, 그게 가능할까요? 린, 이제 그만 놀아야겠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연비. 이 싸움, 저에게 맡겨주지 않겠어요?”

그 말에 연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린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아, 이게 좀처럼 오기 힘든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거든요.”

진지한 얼굴로 나예린이 대답했다.

“어멋, 그건 왜죠?”

“사부님께 새로 배운 검기를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것 같아서요.”

“그것참 좋은 생각이에요, 린.”

연비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보름 뒤에 시합도 있으니 기회가 있을 때 연습해 둬야죠.”

그 학구열 넘치는 성실한 대답을 들은 일강이 소리쳤다.

“뭐, 뭣이라! 우리가 무슨 수련용 목각 인형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러자 연비가 한심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어멋, 쓸모없는 당신들을 그거로라도 써주는 게 어디예요? 영광으로 알아야지. 불평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밝힐 줄만 알지 자기 주제를 돌아볼 줄은 모르는

군요. 아아, 이래서 남자들이란 대부분 자기들이 대단한 줄 아는 착각 속에 산단 말이에요. 쯧쯧. 겁쟁이들.”

일강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다.

“누, 누가 밝힌다는 거냐! 게다가 누가 겁쟁이라는 거냐?! 도대체!”

“쯧쯧, 그런 사소한 것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니, 사내 주제에 속이 좁군요.”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였다. 졸지에 소인배가 되어버린 일강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화했다.

“하지만 일단 물었으니 대답해 주죠.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자기 자신조차 마주 볼 용기가 없으니 그게 바로 겁쟁이가 아니고 뭐겠어요? 안 그래요?”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치란 말야!”

목청이 찢어져라 격렬하게 일강이 외쳤다. 저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저 입을 막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다! 날더러 주제 파악이 안 됐다는데, 그렇다면 네 주제는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 얘들아!”

“예, 대형!”

그의 동생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흑삭구두룡살진을 발동해라!”

흑삭구두룡살진!

‘흑삭진법’의 마지막 공격법으로 상대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 철저히 말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진법이었다. 일강의 구령에 따라 진세가 변화하자 연비와 나예린 두 사람에게 쏘아지는 살기도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연비는 웃었다.

“여섯 개밖에 없는데 무슨 구두라는 건지.”

연비가 피식 웃으며 지적했다.

“그쪽이야말로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쇼!”

일강이 버럭 소리 질렀다. 계속 당하기만 하니 속에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빨리 진세를 발동시켜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고 싶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원래 흑삭구두룡살진에서 아홉이 머리고 나머지 하나는 숨겨진 꼬리였다. 그러나 다리 위에서 잠복했다 공격했던 둘은 실신 상태였고, 물속에서 합격했던 둘은 지 금 익사 직전이었다. 그러니 아홉 머리를 채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거야 당연히 자업자득이죠!”

연비의 대답엔 한 점 꿀림도 없었다.

“남의 목숨을 노리려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죠. 그게 강호의 상식 아닌가요?”

그렇게 당당히 힐문하는데 대답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뭐, 이번엔 특별히 기다려 주죠.”

갑자기 연비가 불쑥 말했다.

“뭘 기다려 준단 말이냐?”

여전히 밧줄을 빙빙 돌리던 일강이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멍청하긴. 보는 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귀도 어둡군요. 육두룡이 구두룡이 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거예요. 정말 고맙죠?”

그 말인즉 널브러진 애들을 수습해서 태세를 다시 정비하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친절한 피암습인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야, 세상 참 좋아졌어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일강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비현실적인 괴리감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얻는 이득이 뭐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일강이 물었다. 그렇게 해봤자 저 여자들에게 득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런 제안을 한단 말인가?

“안 미쳤어요. 멍청하긴!”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듯한 대꾸에 뜨끔했다.

“그… 그럼 왜?”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시시하니까 그렇죠. 그래서야 제대로 된 연습이 되겠어요? 우리 예린의 연습거리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그거야말로 큰일이죠. 어느 정도 실력이 돼야 우리 예린이도 실력 발휘를 좀 하지 않겠어요?”

“그게 정말이냐?”

“이런 걸 가지고 농담할 것 같아요?”

하긴 그런 정신나간놈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저 둘은 애초에 정신이 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들이 정신 나가 있거나. 지금 자기들이 들은 게 몽땅 다 환청인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니 맘 바꾸지 전에 빨리 애들 깨워요.”

그리고는 검은 우산을 늘어뜨린 채 편한 자세를 취했다. 나예린도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개무시당하긴 생전 처음이었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멀쩡히 찾아온 기회를 버릴 만큼 열혈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냉정,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동생들에게 지시했다.

“물에 빠진 녀석은 건져 올리고 기절한 녀석들도 당장 깨워. 뺨을 때리든 물을 뿌리든 당장! 뭐, 숨을 안 쉰다고? 그럼 인공호흡이라도 해줘. 싫긴 뭐가 싫어! 해준 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지금 너 비위 상하는 게 문제냐? 그게 싫으면 주먹으로 배를 치던가. 어쨌든 깨우기만 해.”

장강육용사 중 일강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바쁘게 움직였다. 수공의 달인인 주제에 익사할 뻔한 애들을 건져 내고, 기절한 녀석들을 두들겨 깨웠다. 그 과정 에서 몇 번의 마찰이 있었지만 연비와 나예린은 아무런 방해도 하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려 주었다. 혹시나 둘이 허튼짓을 할까 봐 두 눈이 벌게질 정도로 감시하던 일강에겐 무척이나 허탈한 일이었다.

“끝났나요?”

“끝났소.”

일강이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육용사였던 그들은 다시 십용사가 되어 있었다. 진세의 기세 역시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빈자리가 모두 메워지자 진법이 제 힘을 온전히 발휘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럼 난 기다리고 있을게요, 린.”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연비.”

나예린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게 어디가 인사받을 만한 일이란 말인가? 결국 더 힘들어진 것 아닌가?’

일강으로서는 그 기제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될 것 같지 않았다.

연비는 한 발 물러서고, 나예린은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연비가 그녀를 위해 마련해 준 무대였다. 그렇다면 최고의 검무(劍舞)로 그 기대에 답할 뿐이다.

‘그래, 그 검기라면!’

분명 그것이라면 이 강력한 진세를 단 한순간에 파해할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아직 미완이라는 것.’

불안의 요소는 아직 잔재했지만 나예린은 이내 결심을 굳혔다. 항상 만전의 상태로 적과 조우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아직 더욱더 강해지지 않으 면 안 된다. 운명과 맞서 싸우려면 아직 부족했다.

우뚝!

나예린의 발걸음이 멈췄다. 정확히 진법의 정중앙이었다.

“전 준비가 끝났습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검은 그녀의 손에서 조용히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제 명경지수처럼 맑아져 있었다. 그녀의 귀와 눈과 마음으로 사방의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지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바람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눈을 감아도 주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동!”

일강의 수신호와 함께 열 명의 사내는 흑룡삭을 머리 위로 붕붕 돌리며 나예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움직임이 매우 느렸으나, 시간이 갈수록 주위를 도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밧!

어느새 장강십용사는 나예린의 주위를 질풍처럼 돌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흑룡의 소리가 말벌 떼 소리처럼 귀에 거슬렸다. 연비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 다. 연비는 린을 믿었고,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이 검기를 익히려면 먼저 비설보를 익혀야 한단다.”

서서히 은빛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동작 한 동작에 기품이 배어 있어 저것이 정말로 살기 어린 검술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 그런 움직임이었다. 마치 한 사위 검무를 보는 듯 아름답고 우아했다. 만상이 그녀의 검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예린의 검기는 이미 그들의 인지 범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이 단 한 여인의 몸으로 가능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자 새하얀 눈보라 같기도 하고 꽃보라 같기도 한 검기의 빛무리가 장강십용사가 그린 검은 원 바깥에 하얀 원을 그리고 있었다. 눈보라 같은 검 기가 점점 거세지더니 그 안에 있던 검은 원을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눈보라가 그린 하얀 원이 새하얀 반구 안에 갇혀 버렸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침묵이 찾아왔다.

은빛 눈보라가 가시자 연비는 조금 전 눈보라가 감싸 안았던 내부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장강수로채가 자랑하던 정예 장강십용사는 모두 바닥에 널브러진 채 정 신을 잃고 있었고, 그들이 자랑하던 질기디질긴 흑룡삭은 토막토막이 난 채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나예린은 자신이 만들어낸 눈보라 후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들고 있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찰칵, 검이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후우…….”

그리고 나서야 나예린은 깊이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었다. 몇 번 더 눈을 깜빡이며 사방을 둘러본 이후에야 조금씩 잊혀졌던 감각이 돌아왔다. 그녀는 검기를 펼치 는 동안 완전한 몰아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망아의 경지 속에서 그녀는 검이자 곧 바람이고 또한 눈보라였다. 그 녀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자신의 몸이 세상을 뒤덮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조그맣게 빙글빙글 움직이던 검은 원은 그렇게 해서 사라 졌다. 더 이상 지울 것이 없어지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이고 누구였는지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 순간 망아가 깨지고 그녀의 정신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조금 전까지 자기 자신이었던 차가운 은빛 검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잊혀졌던 것 중에 가장 먼저 돌아온 것은 바람이 피부를 스치는 감촉이었다. 그다 음 돌아온 것은 청각이었다. 잊어버렸던 소리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안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풍물들이 점점 그녀와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예린은 자신의 눈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친구를 볼 수 있었다.

“멋진 검무였어요, 서서 넋을 잃을 만큼.”

나예린은 연비의 칭찬에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연비.”

아마 연비가 아니었다면, 연비가 믿어주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으리라. 남들이 그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자신과 연비만이 그것을 이해하면 충분했다.

차가운 바람이 무척이나 기분 좋게 귓가를 스친다. 물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좋은 밤이었다. 그러나 피곤한 밤이기도 했다. 이제 쉬고 싶었다.

연비는 즉각 동의했다.

숙박 업소가 모인 곳에 도착해 적당한 숙소에다 방을 잡은 다음 여장을 풀었다. 오늘 하루 많은 힘을 소진한 나예린은 무척 피곤했다. 지금 침상에 누우면 곧바로 잠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연비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나예린은 방문을 닫고 후원에 있는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밤의 한가운데에 연비가 서 있었다. 연비는 밤보다 더 깊은 밤을 두르고 조용히 별과 달이 잠들어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과 같은 색을 두르고 밤 속에 있는데도 어둠 속에 녹아들지 않고 오히려 빛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렇게 현의가 잘 어울리는 여인을 나예린은 따로 알지 못했다. 연비가 자신처럼 하얀 옷 을 입거나 아니면 ‘진홍의 검희’라 불리우는 석류하처럼 붉은 옷을 걸치고 있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 깊은 밤 같은 현() 색은 오직 연비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늘의 색을 현(玄)하다고 한 것은 하늘이 검어서가 아니라 그 깊이의 끝없음을 상징하기 위해서이다. 조용히 밤하늘을 직시하고 있는 지 금의 연비는 깊은 물과 밤처럼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그녀의 용안도 그 심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나예린은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안식할 곳이 없다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비류연의 빈자리를 연비가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 비류연이 그랬듯 지금은 연비가 그녀에게 쉴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었다. 마치 강한 햇살과 세찬 비를 막아주는 그녀의 우산처럼.

살며시 연비 곁으로 다가가 나란히 선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비,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었어요?”

연비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운명의 장애요.”

“운명의 장애?”

“네, 시시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고소를 머금으며 연비가 말했다.

“연비, 당신은 절대 시시하지 않아요. 당신은 멋진 사람이에요.”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이야기였죠. 이제 운명이 나를 따라붙었어요. 난 선택해야만 하죠. 그것에 맞설 것이냐, 아니면 도망갈 것이냐.”

운명에 굴복하는 사람은 시시하다. 그런 시시한 사람이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나의 운명이 펼치는 장애를 조그맣게나마 방해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 아니겠어요?”

그리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한 다음 다시 말했다.

“아니면 단순한 화풀이인지도 모르죠.”

그 말에 나예린이 눈을 크게 떴다.

“무엇에 대한 화풀이요?”

그녀가 화풀이할 만한 일이 최근 들어 있었는지 나예린은 의문이었다. 나예린이 알기로는 그만한 일들은 없었다. 그러자 연비가 대답해 주었다.

“운명이 날 따라잡은 것에 대한 화풀이요.”

그 순간 연비의 입가에 고소가 맺히는 것을 나예린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운명에 화풀이를 한 건가요?”

연비는 다시 장난스런 얼굴로 돌아와 웃으며 말했다.

“운명에게 화가 났으면 운명에게 화를 푸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래야 공평하죠.”

연비는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었다. 삶이란 끊임없이 선택하고 규정해 가는 과정이며 자유란 선택할 자유와 그에 대한 책임을 짊어질 자유다. 선택할 자유는 우리에게 있지만 선택 문항의 출제는 세계와 운명이 공동으로 담당한다.

물론 연비라 해서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다. 될 수 있으면 그곳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밤을 도와 이 땅의 끝 너머까지 간다면 그 운명으로부터 얼 마간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은 도망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 순간 자신은 패배자가 되고 만다. 운명에 패배한 자는 운명을 지배할 수 없 다. 그런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다.

“결심은 섰나요?”

잠시 생각하던 연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진 않겠어요, 그건 취향이 아니니까. 난 싸우겠어요. 나를 따라잡은 나의 운명과!”

“그 운명의 이름은 적인가요?”

“적이죠. 그것은 아마 지상최대(地上最大)의 적(敵)’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존재일 거예요.”

누구에게나 그 적이 있다. 그리고 반드시 한 번은 그 적과 싸워야 할 때가 온다. 중간은 없다.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뿐이었다.

1. 도망친다.

2. 싸운다.

세 번째 예시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지는 둘, 선택은 하나!

양자택일(兩者擇-)!

예외(例外)는 없었다[全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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