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창고에 떨어진 하얀 유성
-좋은 술은 때때로 좋은 무기가 된다
뚜벅뚜벅뚜벅!
연비는 홀로 강호란도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지금 가야 할 길은 자신 혼자서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 존재가 설 령 나예린이라 할지라도 이 길은 홀로 걸어야만 했다.
돈왕은 약속을 지켰다. 어디에 묵겠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데 전령은 정확히 그들을 찾아왔다. 서찰을 펼쳐 본 연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안에는 연비의 제안이 통과되었으며, 대대적인 준비가 필요한 관계로 삼 주 후에나 그 비싼 투기제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걸로 삼십만 냥 확보!’
그렇다면 이제 해볼 만했다. 그래서 연비는 지금 이렇게 혼자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묵묵히 자신의 무기를 찾아서.
지상최대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바로 ‘최고급 술’이었다.
숙박하고 있는 객잔에서 이미 위치를 알아온 터라 찾기는 쉬었다. 연비는 매우 화려한 삼층짜리 건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환월주루.’
이곳 강호란도에서 가장 향기롭고 비싼 술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달의 이슬[眞月露]’을 팔고 있는 주루였다. 이 한 잔의 술이 같은 무게의 금과 동일한 가치로 거 래된다고 하니 이 술이 얼마나 비싸고 가치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주인장을 만나고 싶군요.”
연비의 신비로운 미모에 압도당한 점원은 순순히 주인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현재 주인은 후원의 술 창고 쪽에 술을 가지러 갔다는 것이었다. 연비는 후원의 위 치를 물은 다음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술이 워낙 귀하다 보니 특급 술을 주문받으면 주인이 직접 술을 가지러 간다고 했다. 다른 사람 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금보다 귀한 술이니까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끼이이이익!
연비가 후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정원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
콰쾅!
후원 뒤쪽에서 지축을 울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돌가루와 먼지가 우수수 연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연비는 재빨리 검은 우산을 펴서 머릿결을 보 호했다. 그리곤 굉음의 진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채 주저앉아 있는 여기 주인인 듯한 중년 사내와 그의 뒤에서 역시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두 명의 호위가 보였다. 주인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오래되었지만 세월의 때가 묻어 있어 연륜이 느껴지는 창고였다. 그곳으로부 터 풍겨 나오는 술 냄새를 통해 연비는 후각적으로 그곳이 이곳 환월주루가 자랑하는 최고의 명술 ‘달의 이슬’을 보관하고 있는 ‘달의 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달의 샘의 지붕 위에 커다란 구멍이 뻥 하고 뚫려 있었다.
챙캉캉캉! 챙그랑!
그리고 창고 안으로부터 항아리 깨지는 듯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약 일각 전.
환월주루의 주인 주월산은 ‘달의 이슬’ 두 병을 주문받자 두 명의 호위를 거느리고 후원의 술 창고로 향했다. 그가 가장 신뢰하는 두 명의 호위만이 이중대한 과정 에 동참할 수 있었다.
‘달의 샘’이라 불리우는 오래된 술 창고는 이 환월주루와 그 역사를 함께하는 곳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개장과 증설을 통해 확장되어 온 환월주루와는 다르게 처 음 시작했던 그 모습 그대로 이곳의 후원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환월주루의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문자는 요즘 강호에서 명성을 얻고 있는 중양표국의 국주 장우양이었다. 현재 그는 그들의 주루에 머물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환월주루 가까운 곳에 위치 한 유명한 객잔에 머무르고 있었다. 강호란도 내에서 술에 관해서라면 그 어느 곳에도 꿇릴 게 없는 ‘환월주루’였지만, 숙박의 질에서는 그곳 ‘신라각’에 밀리는 경 향이 있었다. 때문에 주월산은 그 뒤처짐을 만회하기 위해 이번 봄에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개장보수공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 었다. 어쨌든 아무리 경쟁자라 해도 손님은 손님, 매상이 오르는 이상 판매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달의 샘’은 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은 채 타인의 접근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었다. 주인은 곧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열었다. 호위로 데려온 듯 한 장정 두 명이 열린 창고 문을 지키고 있는 동안 주인만 홀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주인의 호위가 아니라 창고 문을 수호하는 호위였던 것이다.
잠시 후, 주인은 어떤 물건 하나를 비단 주머니에 싼 채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히 들고 나왔다. 이 비단 보자기 안에 든 물건이야말로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최고의 명주, ‘달의 이슬’이었다.
그것을 본 것은 ‘달의 샘’의 입구에 다시 사슬을 채울 때였다. 새하얀 별이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유성?”
굉음이 울린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쾅!
절세의 미주를 보관하고 있던 광의 지붕이 떨어지는 하얀 별에 얻어맞아 와장창 부서졌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짙고 농밀한 술 향기가 하늘을 향해 뻥 뚫 려진 구멍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창고 안에서는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 후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와 벌컥벌컥, 추압추압 하는 뭔가를 들이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책무를 망각한 채 너무나 큰 충격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주인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어떤 놈이!!”
그의 얼굴은 석탄을 삼킨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주인은 그놈이 어떤 놈이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 리고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어떤 무례하고 경우없는 도둑놈인지 모르지만 절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어서 나와라, 이 도둑놈아!”
다시 한 번 주인이 늠름하게, 주인으로 합당한 노기를 띠며 분노를 담아 외쳤다.
와지끈!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닫혀 있던 창고 문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는 짙은 술 향기와 함께 먼지 사이로 어슬렁어슬렁 거대한 그림자가 걸어나왔다. 다시 한 번 분 노의 일갈을 터뜨리려던 주인의 얼굴에서 썰물처럼 핏기가 가셨다. 조금 전까지 달구어진 석탄처럼 붉던 얼굴이 지금은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보였다. 나타난 그것 은 ‘놈’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르!
두 개의 황금빛 태양을 번뜩이며 안개처럼 번지는 먼지를 가로지르며 걸어나온 그것은 눈처럼 새하얀 털을 지닌 산처럼 거대한 백호였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도 일격에 절단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 섬뜩한 아기리에 물려 있는 것은 최고급 비단으로 감싸인 ‘달의 이슬, 두 병이었다. 그것은 왠지 이질적이면서도 불합리해 보이 는 그 광경은 매우 압도적이었다. 주인을 향해 다가오던 연비가 백호를 목격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앗!”
“…..!!”
양쪽 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연비와 백호의 눈동자가 한 점에서 마주쳤다. 튀긴 불꽃과 함께 세상이 정지했다. 어디선가 귓가로 ‘휘이이잉’ 찬바람 부는 소리가 들 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밤의 후원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돌발 상황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당황은 마음을 흐트러뜨린다. 흐트러진 마음은 몸의 둔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꾸준하고 반복적인 수련은 돌발 상황에서 마 음보다 먼저 몸을 움직이게 한다. 마음이 흐트러지기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
인간은 너무 황당한 일을 겪고 나면 말을 잊게 되는 모양이다. 그것은 발생한 상황이 인간의 언어와 표현력을 뛰어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월산은 말 을 잊은 채 침묵했다. 그래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연비였다.
“아무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저 창고 안에 술은 남아 있지 않을 것 같군요?”
현재 술 창고 안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는 ‘처참慘)’ 이 두 글자로 충분했다.
“아…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 그래도 서너 개 정도는 멀쩡한 게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마침 그 일 때문에 절망하고 있던 주인의 목소리에 물기에 배어 있었다.
“혹시 주인장이 들고 있는 거랑 저 아가리에 물려 있는 것 말고 다른 곳에 비장하고 있는 것들이 있나요?”
만일 없다고 말한다면 그냥 몸을 휭 돌려 나갈 기세였다.
“이, 있습니다. 제, 제 방에 특별 손님들을 위한 ‘달의 이슬’이 딱 한 병 남겨져 있습니다. 극상품 중의 극상품이죠.”
주인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잘됐군요. 그렇다면 거래하지 않겠어요?”
연비가 주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무… 무슨 거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소저?”
공포가 가시지 않은 주인의 이빨은 말을 할 때마다 아래 윗니가 딱딱 방정맞게 부딪치고 있었다.
“간단해요. 내가 지금 필요한 건 주인장이 비장하고 있는 마지막 남은 ‘달의 이슬’이에요. 내가 이 주루를 위해 뭘 해주면 주인장은 내가 원하는 그 술을 주면 되 죠.”
“대체 소저께서 무엇을 해주실 수 있다는 것인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저 연약해 보이는 처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주인이 생각하기에 자고로 여자들이란 금 잘 타고 춤이나 잘 추며 술이 나 잘 따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연비의 금 솜씨와 춤 솜씨는 비범했다. 그러나 연비에겐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장기가 있었다.
“호랑이 퇴치!”
“예?”
“저 백호를 퇴치해 주죠. 나쁜 거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저 백호가 술주정으로 이곳 손님을 잡아먹는 일이라도 생기면 가게 평판에 참으로 좋은 영향이 미칠 것 같지 않아요?”
그제야 자신이 잡아먹힐 수 있는 가능성 이외의 가능성에 생각이 미친 주인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히힉!”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다였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가게 문을 닫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터잡고 장사해 오던 이 바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서는 안 됐다.
“그, 그 일만은… 손님들은 안 됩니다, 손님들은!”
잠시 동결되었던 상인의 혼이 다시 깨어나자 주인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장사든 고객이 왕이었다. 고객을 외면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망상이었다.
“어때요? 나쁜 거래 조건은 아닌 것 같죠?”
연비의 웃음은 묘하게 사람을 압박하는 힘이 있었다.
“조, 좋습니다. 손님께서 그 일이 가능하시기만 하다면! 이 거래, 응하겠습니다!”
선택이 여지가 없는 주인장은 마침내 거래에 응했다.
“좋아요. 아주 잘 생각하셨어요. 음, 언제 어디서나 일을 할 때 계약서는 필히 쓰자는 주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군요. 구두계약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요. 만일 계약이 이행 안 된다면 그땐 저 백호가 아니라 날 원망해야 될 거예요.”
“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구두계약도 계약은 계약. 이런 걸로 수십 년을 쌓아온 신용을 내팽개칠 만큼 어리석진 않습니다. 부디 성공만 해주십시오.” 백호가 자신의 퇴치를 획책하는 주인장을 향해 잠시 눈을 부라렸기에 주인장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오금이 저려 조금이라도 방심하며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 다. 그래도 가업을 지켜야 했다. 손님들을 지켜야 했다.
“좋아요. 만족스럽군요.”
연비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술 냄새를 풍기며 서 있는 백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곤 말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들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연비는 인사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커흑’ 하는 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객점 주인장이 해동 되며 내는 소리였다. 지금 한가하게 통성명이나 하고 있을 땐가?!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크릉!
산만 한 백호가 마치 연비의 인사에 답하기라도 하듯 그 거대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두 자루의 거대한 송곳니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음… 혹시나 오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뭐 하나만 물어보죠. 그 왜… 세상 살다 보면 사람 잘못 봤다, 라는 일도 종종 있잖아요. 그런 일은 당하기 싫거든 요. 왠지 꼴불견이잖아요! 그런 꼴 당하면. 그래서 그런 한심한 꼴불견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해 봤어요. 그랬더니 그냥 막연히 혼자서 추측만 일삼는 것 보다 직접 물어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일 것 같더라구요. ‘백사불여일문’이란 말도 있잖아요. 백 번 혼자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직접 묻는 것보다 못하단 이야기죠. 그 래서 묻는 거예요. 뭐, 별거 아닌 질문이니까 솔직하게 대답하셔도 돼요.”
어쩐지 연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극심한 공포로 인해 미친 게 아닌가 싶기도 했 지만, 흔들림없는 눈동자를 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백호는 연비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크릉! 크릉!
백호가 두 번 크르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다는 뜻이 모양이었다. 연비는 잠시 밤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착각이 아니었군요. 아쉽네요. 이게 단순한 착각이거나 혹은 오해이거나 혹은 너무나 현실 같은 꿈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하긴, 그렇게 황 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눈탱이를 가진 호랑이는 많지 않죠. 안 그래요?”
크르릉!
다시 한 번 백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비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동의한다는 뜻이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거든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한 백만에 하나, 혹은 천만에 하나 라는 게 있잖아요. 무한히 영에 가까워도 영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대를 걸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아마 내일 하늘이 갈라지고 바다가 범람해
이 땅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해도 이처럼 슬프지는 않을 거예요.”
크릉! 크릉! 크르르릉!
다시 백호가 대답했다. 연비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계속했다.
“음, 나도 얼마 전에 안 건데 오랜만에 만남을 가진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에요.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인연이란 게 참 신기해서 꼭 좋은 인연만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에요. 음, 안타깝지만 확실히 이 세상에 악연이라 게 존재하거든요. 좋은 인연만 잔뜩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에요. 하긴 그러면 좋은 인연이 란 말도 의미가 없겠군요. 아아, 나쁜 인연이 있어야만 좋은 인연이 뭔지 알 수 있다니…… 씁쓸한 일이에요. 그래도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입으로만 나불나불 불평 불만을 터뜨린다고 해서 뭔가 바뀌는 건 없겠죠? 몇 번 실험해 봤는데 다 소용이 없더라구요. 역시 거저 먹기란 없는 거예요. 그렇죠? 나 같은 게으름뱅이한텐 참 잔 인한 일이죠. 그냥 놀고먹는 게 나의 원대한 꿈인데, 세상이 그 꿈을 방해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등가교환이라고 하나요? 나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군요, 이 세상.이.”
그리고는 연비는 활짝 펴져 있던 우산을 조용히 접었다. 조금 전 광이 부서진 충격의 여파로 인해 머리 위로 쏟아지던 돌가루와 먼지를 막기 위해 폈던 우산이었 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의 감정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연비는 검은 우산을 비스듬히 눕히며 눈앞에 들어 올렸다.
콰드드득!
연비의 섬섬옥수가 우산대가 으스러질 듯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곤 웃었다.
“호호호! 그냥 산속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그것은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으스스한 웃음이었다. 아니면 조금 어이없어하는 헛웃음에 가까운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저 산만 한 하얀 호랑 이를 움찔하게 만드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과연 자연 속에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던 야성의 감각은 감지한 위험을 즉각 몸에 고지하게 했다.
연비가 지면을 박차며 도약했다.
“이 술주정뱅이, 흰 고양이가!”
조용히 억눌러왔던 연비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그것은 지하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던 용암이 한순간에 지표를 뚫고 산을 부수며 분출되어 나오는 것과 같 았다.
이백 년이 지난 지금도 아미산의 여황으로서 현역으로 군림하고 있는 백무후는 힘도 세지만 코도 무척 좋았다. 특히 술 냄새를 맡는 데는 기가 막혔다. 아무래도 그것은 예전에 먹이 사냥이랍시고 달려든 그녀를 단숨에 제압한 다음 거의 애완동물 취급한 한 노인의 영향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지난 세월 동안 때때로 노인의 대 작 상대였던 것이다. 술을 금보다 귀하게 여기는 노인네인지라 많이 얻어 마시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상당히 감별력이 뛰어난 미주 애호가였다. 술 마신 경력만 어언 이백 년. 이젠 어지간한 술로는 그녀의 예민하고 섬세한 미각을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백무후는 어떻게 술을 마실까? 접시에 따라주면 마실까? 천만의 말씀. 이 고고한 산의 여황은 그런 고양이 같은 천박한 짓은 하지 않는다. 사발에다 따라 벌컥벌컥 들이켜지도 않는다. 물론 병나발도 불지 않는다. 그런 천박한 행동은 그녀의 긍지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는 놀랍게도 잔을 사용한다. 물론 인간이 마시는 것보다는 크다. 하지만 생김새는 비슷하다. 그것을 오른 앞 발등에 올려놓고 기술 좋게 마신다. 마치 인간처 럼.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술이 항상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술을 천금처럼 아끼는 노인이 그리 많이 술을 나눠줄 리 없었다. 석 잔도 안 되는 술에 이 덩치 큰 여인이 만족할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자기가 마실 술은 스스로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이른 바 ‘자력갱생(自力更生)’이란 것이었다(조금 의미가 다른 것 같지만). 그다음은 말 안 해도 될 것이다. 그것은 구차해지기만 할 뿐이기에. 그리하며 백무후는 지금 저 술 창고에서 걸어나오게 된 것이고 그런 백호를 향해 연비는 검은 우산을 움켜쥔 채 달려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우산을 움켜쥐고 백호를 향해 달려가는 연비의 모습은 매우 느려 보였다. 보는 이에게 연비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천 근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일부러 느 리게 움직여도 그렇게 움직이긴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연비의 신형이 반쯤 접근했을 때쯤, 순간 연비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사라진 연비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백호의 꼬리 쪽이었다.
부우우우웅! 쐐애애애애액!
검은 우산이 검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졌다. 야생의 본능적인 감으로 위기를 인식한 백호가 그 일격을 피하기 위해 앞으로 펄쩍 뛰었다. 인정사정없는 일격인지 라 아무리 산중지여황인 백무후라 해도 그것을 맞고서는 멀쩡하기 힘들었다.
“어딜!”
그러나 이 변화무쌍한 일격을 눈치 채고 회피 동작에 들어간 것은 무진장 칭찬해 줄만 하지만 시기가 늦었다.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뻑!
“꾸에에에엑! 꺄울~!”
괴이한 비명이 강호란도의 밤하늘로 낭랑히 울려 퍼졌다. 그것은 어째 좀 인간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연비는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진지하게 회 의해 보았으나 사실은 아무리 황당해도 어디까지나 사실이었다. 이삼백 년 살다 보면 인간의 말을 알아먹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말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연비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날 갑자기 어깨에 저 무시무시한 앞발을 턱하니 올려놓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ᅳ어이, 불!
그리고 사람 수십 잡아먹었을 그 입에는 곰방대가… 뻐끔! 뻐끔!
‘에잇,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과민한 탓이야, 과민한 탓.’
연비는 망상을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었다. 크릉! 크릉! 크르르릉! 끼이이잉!
검은 우산으로 볼썽사납게 엉덩이를 얻어맞은 백무후가 맹렬히 항의했다. 하마터면 자신의 우아하고 탱글탱글한 엉덩이 살이 쑹텅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었던 것 이다. 아직까지도 얻어맞은 엉덩이 부분이 얼얼했다.
크르르르르르릉!
복수를 다짐한 듯 백무후는 앞발을 들어 발톱을 날름 핥았다.
“호오? 아직 포기 안 했니?”
연비가 검은 우산의 첨단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얌전히 물고 있는 술을 내려놓는 게 어떨까? 물어볼 것도 있고.”
그러나 크르렁거리며 잔뜩 몸을 웅크리는 백무후는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몸을 낮게 움츠린 것은 뒤로 도망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을 향해 도약하기 위해서였다. 누워 있던 백무후의 하얀 털이 바늘처럼 일제히 일어섰다. 백무후의 꼿꼿이 일어선 하얀 털이 밤하늘 아래에서 새하얗게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 순간, 백무후는 하얀 뇌광이 되어 연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신속’이라 칭할 만했다.
쉬잉!
발톱 끝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광선이 연비의 몸을 일순간에 갈랐다.
“이런!”
연비는 재빨리 몸을 뒤로 눕히며 그 일격을 피했다. 이 기습적인 일격은 연비로서도 너무나 의외일 정도로 빠르고 강했기 때문에 잠시 대응이 늦어졌던 것이다. 부 드러운 버드나무 가지처럼 허리를 뒤로 젖힌 연비는 다시 유연하게 몸을 틀어 상체를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조금 전 연비가 서 있던 곳에 새하얗게 빛을 내는 털이 가진 백호가 착지했다.
스르륵.
그다음 순간 백호의 좌우 등 뒤에 자라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반 토막이 난 채 쓰러졌다. 절단면은 거울처럼 매끈했다.
저 아름드리나무를 발톱으로 우악스레 부순 게 아니라 예리하게 베어버리다니…….
“쳇, 검기인가? 짐승 주제에…….”
형체가 되어 뿜어져 나온 날카로운 기의 칼날, 그것은 발톱 끝에서 나왔지만 분명 검기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한 섬뜩한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짐승이 검기를 사용하다니, 강호사에 전후무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짐승이 기를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어릴 적 어머니가 머리맡에서 들려주던 옛날이야기 속에도 없었는데. 하지만 어느 한 망할 노인 때문에 세상의 상식은 불쌍하게 뒤엎고 말았다.
“눈동자 색깔로 짐작했어야 했는데…….”
연비는 백무후의 황금색으로 변색된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것이 원래 저런 사금을 뿌려놓은 듯한 황금색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저 색은 자연 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공적인 것이었다.
백호의 검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빛으로 만드는 것은 저 집채만 한 백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 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인간이 딱 한 명 있었다. 지금도 아직 인간인지 아닌지 의문이 가는 망할 인간의 소행.
연비는 잠시 숨을 들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었다.
“망할 사부!”
여러 가지 감정은 한데 담긴 목소리였다.
저 호랭이가 설마 이 정도까지 기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다니, 불찰이었다.
“호랭이한테 대체 뭘 가르친 거야?”
일단 옆에 있든 없든 항의 한마디 내뱉지 않고선 참을 수 없는 연비였다.
그러니까 다 망할 사부가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