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네 요괴와 단결의 화신
-한숨짓는 여인들
달칵!
방문을 닫고 들어온 연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손을 탁탁 털었다. 뭔가 불쾌한 화장실 청소라도 하고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휴식 시간을 틈타 예린과 연비 의 방에 놀러 온 은설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연 소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요?”
“어? 화장실 다녀오는 줄 알았는데.”
오늘도 친애하는 언니 나예린을 보러 은근슬쩍 놀러 온 이진설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연비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으음,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요괴 퇴치를 하고 와버렸네요.”
“기이한 일이로군요. 자세히 말해주겠어요, 연비?”
나예린이 정색을 하고 묻자 연비는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기분이 이상해서 위를 올려다봤더니…… 글쎄, 지네처럼 어~엄청 징그럽게 생긴 요괴가 천장에 붙어서 절 보고 히죽거리지 뭐예요? 완전 히 요괴였어요.”
“끼아악! 말만 들어도 기분 나빠요!”
이진설이 몸서리를 치며 나예린에게 달라붙었다.
“연 소저, 설마 사실은 아니겠죠?”
은설란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연비의 말이 진담, 특히 인간을 지네에 빗댄 거라면 이는 절대로 그냥 묵인할 사안이 아니었다.
“연비, 괜찮아요?”
나예린도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연비는 그제야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쿡쿡 웃어 보였다.
“아아, 물론이죠. 은 소저, 그 요괴는 제가 얌전히 성불시켰으니까 이제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
“성불이요?”
“네. 몇 가지 비법으로 혼내준 다음에 이마에 붉은 글씨로 놈의 이름을 새겨줬더니 성불해 버리더군요. 요괴들은 뭣보다도 자신의 이름이 밝혀지는 걸 가장 두려 워하거든요.”
연비가 너무도 막힘없이 얘기를 하자 세 사람은 이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놈의 이름은 뭐였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진설의 질문에 연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딱 보면 알잖아요? 변.태(變態).”
“푸훗.”
순간적으로 말문을 잃었던 세 사람은 이내 곧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웃을 일이 아닌데. 아무튼 마천각에 오고 나선 어쩐지 날마다 잊지 못할 경험들을 하게 되네요. 조속히 잊고 싶은 일들인데 잘 될지 모르겠어요.”
“하아ᅳ 이야기 들었어요. 청혼 받았다면서요?”
은설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녀가 놀러 온 진짜 이유는 사천왕의 활약(?)에 대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진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 다.
“벌써 그쪽까지 소문이 퍼진 건가요?”
“파다하게요.”
“……”
네 사람 사이에서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하아— 미안해요. 그런 인간이 마천각 사람이라.”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토하며 은설란이 사과했다. 그런 구제불능을 존속시키고 있는 마천각을 대신하기라도 하듯이.
“뭐, 처음엔 신종 정신 공격 수법이 아닌가 의심했어요.”
진심이 담긴 연비의 말이었다.
역시 그랬나, 그 심정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더라구요. 음, 그게 더 치명적인 정신 공격이었지만요. 후훗, 덕분에 안계를 넓혔어요. ‘구제불능’이 무슨 뜻인지를 직접 체험하는 인생 수업이었으니까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정을 가장한 채 말하면서 상큼하게 싱긋 웃는다.
그 미소에 세 사람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화내고 있군!’
그것만은 여자의 직감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경고만으로 끝내서는 안 됐었는데! 좀 더 확실하게 말해 드릴 걸 그랬어요.”
은설란은 손바닥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며 민망해했다.
“은 소저가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마천각뿐 아니라 세상천지 어디를 가도 널리고 깔린 게 이상한 남자들이잖아요? 하여간 남자들이란, 십중팔 구가 늑대니까 웬만하면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니까요. 그렇죠, 린?”
당연하다는 듯 동의를 구하는 연비의 말에 나예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연비. 십중팔구는 확실히 그러하니까요.”
“어라, 왠지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발언인데요?”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추궁하자 나예린은 다소 난감해졌다. 문득 양옆을 돌아보니 은설란과 이진설은 제각기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으음, 괜찮은 사람들도 간혹 있다는 말이었어요.”
“호오, 예를 들면요?”
짓궂은 미소를 애써 감추며 연비는 답을 재촉했다.
“ 가령 모용 공자라던가, 효룡 공자라던가, 또..”
연비는 ‘또 누구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예린의 모습을 보고는 꾹 참았다. 나예린은 속눈썹을 길게 드리운 채 찻잔의 테두리를 따라 손가락으로 원 모양을 그리면서 상념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금세 한숨이라도 내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한숨을 쉰 건 은설란이었다.
“휴우…….?”
나지막하지만 상당히 복잡 미묘한 느낌의 한숨이었다.
“어머, 은 소저는 또 왜 한숨을?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요?”
“핫! 내… 내가 그랬나요?”
아무래도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중증이었다.
“무, 무슨 고민 같은 건 없어요. 다만…….”
“다만?”
“그저 요즘은 모용 공자가 안 보이는구나 싶어서요.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이래저래 궁금해져서…….”
용안의 능력이 아니어도 그녀의 말에서 실망의 기색을 읽어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원래부터 생각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이진설은 재빨리 눈을 반 짝이며 끼어들었다.
“킥킥, 어쩐지 어제오늘 은 소저가 연속으로 온다 했더니…….”
“아하하하. 어, 어째서 그런 생각을…….?”
심중을 정확히 찔렸는지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미묘한 분위기가 타파된 것을 기뻐하며 연비도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딱 걸렸어!’라는 얼굴로 연비는 나예린에 게 속삭이는 척했다.
“호오, 린, 모용 공자라면 분명 그……?”
“어흠, 어흠.”
나예린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은설란이 헛기침을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왕 오시는 것 일거양득, 일석이조면 좋은 거죠. 안 그래요?”
“그, 그런가요? 역시 그렇죠? 그런 거죠?”
그제야 숨통이 트인 은설란이 연비의 말에 반색을 했다. 살짝 발그레해진 볼이 귀여워 보였다.
“푸훗, 그런데 찾고 계신 모용 공자라면 근래 계속 방 아니면 우물가에 있다던걸요. 맞죠, 예린 언니?”
“맞아요, 벌써 사흘째인 것 같군요. 정말 대단해요.”
뭐가 대단하다는 걸까? 은설란의 마음속에 심어진 의혹은 점점 크기를 부풀려 갔다.
“우, 우물이요? 거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죠? 그것도 삼 일씩이나?”
예상 밖의 장소가 거론되자 은설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그건 바로…….”
한 박자 쉬고 이진설이 말했다.
“청소예요.”
“아!”
은설란은 그만 순간적으로 납득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실로 그에게 어울리는 일이었다.
***
공손절휘는 숙소에서 입을 닷 발이나 내놓은 채 투덜투덜 궁싯거리며 쓱싹쓱싹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이름 높은 공손세가의 후계자로 살아온 그로서는 평소 상상 도 하지 못했던 몰골이었다.
‘칠절신검 모용휘!’
이름 석 자만 떠올려도 절로 이가 갈린다.
“역시 그놈은 쓰러뜨려야만 할 적!’
공손절휘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자신을 이렇게 처참한 꼬락서니로 만든 그 얄미운 면상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잘생기면 다냐! 두고 보자! 이 원한 내 잊지 않으리!’
역시 자신은 모용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음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하아…….”
며칠 전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두렵고 부끄러워서 감히 할아버님과 아버님껜 얘기조차 꺼낼 수 없었던 그 일이. 특히 가문의 보검을 건네준 부친께 어찌 고개를 들 수 있으리오. 가문의 지보가 한낱… 한낱.
“크윽! 더 이상은 안 돼! 더 이상은 생각해 내지 마!”
공손절휘는 서둘러 기억의 재생을 단절시켰다. 더 이상 좌절이 계속되면 정신적으로 폐인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 망할 놈의 결벽증 환자 때문에!”
공손절휘는 복수를 다짐하며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참혹하군.”
삼 일 전, 그 결벽증 환자는 배정받은 방을 훑어보며 이상한 말을 중얼거렸다. 역사에 길이 남을 바른 생활 청년 모용휘가 모종의 흉기(?)로 새파란 후배를 핍박(?) 한 청소 강요 사건의 발단이었다.
물론 마천각에서 배정한 방은 절대 참혹한 수준이 아니었다. 다만 제십삼대의 부재로 몇 년째 비어 있던 건물이어서, 정기적으로 관리하긴 했어도 해묵은 때나 구 석구석의 먼지까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최소한 이 정도 상태를 참혹하다고 여길 사절단 일행은 모용휘밖에 없을 터였다. 아무튼 그는 뜻하지 않게 같 은 방에 배정받아 버린 공손절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 시작하세. 드디어 그것들을 꺼낼 때가 왔군.”
‘뭘 말입니까?”라고 공손절휘가 물어보려는 순간, 모용휘는 행랑(行囊)을 놓아둔 곳으로 척척 걸어가더니 무언가를 꺼내서 탁자 위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그리 고는 모종의 신병기를 재빠르게 조립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는 몰랐지만, 공손절휘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손놀림을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눈 깜빡할 새에 조립이 끝나 버리자 그는 경악하고 말았다.
“헉! 이, 이것은… 빗자루와 먼지떨이?!”
“훗. 진가를 알아보겠나? 얼마 전에 특별히 구해왔지. 기능성뿐 아니라 휴대성도 뛰어나다네. 삼단 분리와 조립도 가능할뿐더러, 여기를 누르면 길이 조절도 가능 하지. 속이 빈 특수 금속 재질이라서 가볍고도 탄탄하다네. 특히 여기 이 부분은 부드럽지만 내구력 좋은 특상의 말총 재질일세. 이 말총 부분만 교체할 수도 있지. 게다가 이 미려한 외양! 믿을 만한 정보에 의하면 황궁에도 납품된다고 하더군. 놀랍지 않나? 이제 싸리와 대나무의 시대는 갔다네!”
명마(名馬)를 얻은 장수의 눈빛으로 열광하며 말하는 모용휘를 바라보며 공손절휘는 혼란에 빠졌다.
“그건…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이용되는 겁니까? 뭐랄까, 청소를 하는 척하다가 손잡이를 돌리면 암기가 발사된다거나……..”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자네도 많이 피곤한가 보군. 오늘은 일단 자정까지만 청소하고 빨리 쉬세나.”
그리고 모용휘는 행랑에서 꺼낸 흰 천으로 머리와 허리를 둘러싼 다음, 양팔의 소맷단을 끈으로 동여매서 걷어붙였다. 완벽한 본격 태세였다.
모용휘가 총채를 집어 들고 등을 돌렸을 때, 공손절휘는 소리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은 그대로 탈출한 후에 모용휘의 심각한 상태를 누군가에게든 알리고 도 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살기 어린 총채, 즉 먼지떨이개가 자신의 등을 겨누기 전까진.
“어딜 가나, 이 중요한 때에?”
“크윽!”
자신을 향한 총채를 보며 공손절휘는 신음했다.
‘중요하긴, 개뿔이!’
그러나 그 말은 속으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총채에 어려 있는 뭔가 단호하고도 집요한 모종의 결의 때문일까. 그대로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총 채에 달린 털들이 암기처럼 파파팟 광속으로 발사될 것 같았다.
“젠장.”
공손절휘는 은연중에 왼쪽 허리춤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검의 손잡이가 손에 와 닿자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그건 설마, 청소를 하기 싫다는 뜻인가?”
“당연하지요. 그런 건 하인들에게나 시키면 될 것 아닙니까. 저는 지금까지 청소 같은 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수신제가(修身齊家)는 군자의 본분일세. 자신이 머무르는 곳을 청결하게 다스리는 일도 제가(齊家)에 속하거늘, 자네는 그런 일을 타인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있습니다만.”
망설임없는 즉답이었다.
“자랑은 아니군. 난 가능하면 늘 직접 청소를 해왔네. 어떤가, 자네도 제가(齊家)를 몸소 실천하면서 안계를 넓혀보지 않겠나?”
그러면서 총채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이 마치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열쇠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혼자 하시지요!”
공손절휘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그 순간, 모용휘의 기도가 미묘하게 변화했다.
“할 수 없군. 뽑게.”
“뭘 말입니까?”
“검(劍) 말일세. 자네가 검으로 이 총채를 꺾을 수 있다면 자네 마음대로 해도 좋네.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앞으로는 자네도 몸소 청소를 해야 하네.”
“…그거, 역시 특수 병기였습니까?”
“계속 그 소린가? 정신 차리게. 이건 단지 신개발 조립식 총채일 뿐일세.”
공손절휘는 헛웃음을 웃었다. 신개발이든 조립식이든, 총채로 검을 막겠다니. 이 사람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다.
“그럼 그 결정, 후회하지 마십시오!”
모용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태는 결국 강호인답게 무력 해결, 즉 공손세가 가문의 보검과 신개발 조립식 총채의 대격돌로 가닥을 잡게 되었다. 챠랑!
검이 뽑혔다. 새하얀 검신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어차피 강도 실험을 해볼 필요도 없이 무기의 우위는 명백했다. 그 엄청나게 까마득한 간격은 절대 실력으로 메울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단 일격의 칼질에 저 보기 싫은 신제품 총채는 재생 불가의 폐품이 될 것이고, 그 여파로 가문의 원수인 저 청소광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공손절휘는 그렇게 믿었 으나,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닿지 않으면 벨 수 없다는 사실을.
“헛?”
검을 내지른 그의 입에서 기함이 터져 나왔다. 찌르기가 빗나간 것이다. 그 순간, 모용휘는 그의 검을 총채로 세차게 후려쳤다.
땅! 맑은 소리를 내며 쇠가 울렸다.
휘리리릭!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총채의 털들이 흡사 천잠사처럼 보검을 휘감아갔다. 일순간 빈틈이 생긴 공손절의 품 안으로 모용휘가 단숨에 파고들었다.
툭. 기우뚱!
가벼운 발짓 한 번에 균형을 상실한 공손절휘의 세계가 빙그르르 한 바퀴 회전했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짝과 척추가 비일상적 고통에 신음했다. 반격의 실마리를 제거하고자 낙법을 할 여지조차 모조리 빼앗은 터라 충격이 고스란히 등 짝과 그 중심축을 강타한 것이다.
“자, 이제 청소할까?”
꼴사납게 쓰러진 공손절휘를 내려다보며 모용휘는 실로 담담하게 말했다.
“크윽…….”
공손절휘는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샌님처럼 얌전한 면상이지만 역시 방심해선 안 되는 거였다. 진검, 그것도 가문의 보검을 들고도 총채 하나 떨어뜨릴 수 없었던 자신의 한심한 실력에 그는 뼈저리게 좌절했다.
“이것부터 익히게.”
몸을 바로 세운 그에게 모용휘가 불쑥 두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티없이 희고 보송보송한 천 조각, 그리고 작은 두루마리였다.
“우선 지금 준 걸레로 기본기를 익히면서 두루마리에 적어놓은 주의 사항들을 숙지하도록. 원래는 감옥에 있을 누군가를 감화코자 준비했던 것인데, 자네에게 먼 저 주게 될 줄은 몰랐군.”
공손절휘는 멍해진 얼굴로 걸레라 불리는 순백의 천 조각과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다. 마치 무공 비급처럼 보이는 두루마리에는 단정한 글씨로 ‘청법십이도(淸法 十二道)’라 적혀 있었다.
“휴우, 요즘은 효룡도 안색이 안 좋아졌어요. 옆 방, 그러니까 모용 공자 방에서 한밤중까지 계속 쓱쓱싹싹 소리가 나더래요. 게다가 모용 공자가 우물가에 갈 때마 다 방에 남은 좌절… 아니, 공손 공자가 혼자 뿌득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려서 숙면을 이룰 수 없다나. 꿈자리도 뒤숭숭하대요, 아주.”
“하아, 적당히 하면 좋을 텐데.
이진설의 하소연에 한숨으로 화답하는 은설란이었다.
“청소에 대해서라면 모용 공자에게 ‘적당’이라는 개념이 통할 리 없지요. 외골수라 해야 될지, 집착이라 해야 될지……..
연비의 맞장구에 은설란의 몸이 순간 흠칫 굳어졌다.
“어머, 연 소저도 그 사람에 대해서 무척 잘 알고 있네요?”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연비를 향했다. 연비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겉으론 도리어 피식 웃어버렸다.
“척 보면 알지 않나요? 남자가 그렇게 새하얀 옷을 먼지 하나 없이 유지하는 것만 봐도 절대 ‘적당히’ 할 사람은 아니고, 배 타고 오면서도 선실(船室)을 청소하던 걸요. 뭣보다도 얼굴이… 청소에 관해서라면 한 치 양보도 없을 것 같은 관상이랄까?”
“흠,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나예린도 옆에서 동의를 표해주었건만, 은설란은 여전히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아니, 은 소저는 왜 계속 그런 눈길을?”
“꽤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이래서 사람은 말을 아껴야 하는 법이다. 연비는 마지막 승부수를 걸기로 했다.
“푸훗, 걱정 말아요. 좀 특이하다고 느꼈을 뿐이지, 은 소저의 경쟁자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에요.”
연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설란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무, 무슨 얘길 하시는 거예욧! 겨, 경쟁자라뇨! 난 결코 그런 사람은…….”
항의를 하면 할수록 말소리가 점점 더 수그러들더니 급기야 커다란 한숨으로 뒤바뀌었다.
“하아…… 정말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그 사람일까요?”
한탄 같은 반문에 누구도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인간의 마음은 그 어떠한 잣대로도 측량할 수 없고, 이성의 힘을 누를 만큼 강력하다. 그렇기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구도자들의 숙원이 아니었겠는가. 은설란은 일견 착잡해 보이면서도 묘하게 들뜬 얼굴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