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2권 20화 – 백무후의 회상

랜덤 이미지

비뢰도 22권 20화 – 백무후의 회상

백무후의 회상

-지옥의 동물 실험

지금으로선 선뜻 믿겨지지 않지만 지금 백무후라 불리우며 아미산에 군림하는 이 순백의 호랑이도 처음에는 무척 약한 호랑이였다. 그녀도 연약한 소녀였던 때 가 있었던 것이다. 몸집도 그리 크지 않고 힘도 센 축에 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암컷이었다. 호랑이의 세계는 수놈들의 세계였다. 그 속에서 암컷인 백무후 는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힘이 약한 암컷은 그저 노리개나 심부름꾼에 불과했다, 놀고먹는 수컷들에게 오락과 먹을거리를 제공해 주는. 수컷들의 저녁 식사 거리를 마련해 오는 것은 이 불쌍한 암백호의 일이었다. 게으른 수컷들은 동굴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납되고 용 서받을 수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그런 세계에서 암놈인 그녀는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백무후가 아니라 백묘라 불려도 할 말이 없었다.

어느 날, 그날도 이 힘없고 연약한ᅳ상당히 상대적인 관점이긴 하지만ᅳ암백호는 게으른 수컷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먹이 사냥에 나섰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 아 먹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백염백발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털의 질과 색깔이 자신의 것이 훨씬 더 뛰어났다. 그녀의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털은 그 녀의 많지 않은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노인의 오른손엔 술병이 들려 있었는데, 조금 나이가 들어 질겨 보이긴 했지만 의외로 살이 실해 보였다. 술에 잰 고기는 분 명 야들야들할 게 틀림없었다. 비록 그녀에겐 찌꺼기만 돌아온다 해도 말이다.

불행한 점이라면 그 백발백염의 노인이 바로 인간의 척도로는 재기에 상당히 규격을 벗어난 인간이라는 점이었지만.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이때 그 노인은 할 일이 없어 무척 심심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심심하다 해도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짐승을 그냥 내버려 둘 만큼 호인은 아니었다.

노인은 그 지랄 맞은 성격에 자신을 저녁 식사 거리로 삼겠다고 달려드는 짐승을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원한과 적의는 언제나 백 배로. 그것이 노인의 지론이었다. 암놈이든 수놈이든 상관없었다. 배제해야 할 적! 상대에 대한 정의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날 이 암백호는 완전히 떡이 되었다.

“상대가 나빴구나!”

노인은 무감정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은 다음 손을 치켜들었다.

“눈보다 더 새하얀 모피구나. 무척이나 비싼 값에 팔.

노인은 치켜든 손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는 유심히 백호의 이곳저것을 뜯어보고 털들을 쓸어보고 만져 보고 뽑아보고 햇빛에 비춰보았다. 그 노인의 눈엔 미미 한 감탄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도대체 이 괴노인이 원하는 것이 뭘까? 의문은 곧 풀렸다. 노인이 대뜸 질문했다.

“오, 정말 새하얀 털이구나. 관리 비결이 대체 뭐냐?”

음, 내 백아를 능가하는 털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노인의 목소리엔 미미한 감탄과 사소한 질투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조금 우쭐해졌다. 그녀 역시 자신의 흰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특수한 비법으로 철저히 관리를 한 덕분이었다. 비바람에 완전 노출되는 자연산인 만큼 더욱더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 처절한 노력을 알아준 수컷은 이 노인이 처음이었다. 자신은 사냥감의 붉은 피가 튀어도 비가 자국을 씻어줄 때 까지 내버려 두는 야만적이고 천박한 수놈들하고는 달랐다. 그러나 계속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분명 이 노인은 자신의 멋진 털을 벗겨 가죽으로 남길 거라고 생각 하니 우쭐했던 기분은 금방 우울하게 변했다. 그때 노인이 다시 말했다.

“가죽을 벗길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무 아깝지. 좋다. 어르신을 습격한 네 행동이 괘씸하지만, 내 특별히 선심을 베풀도록 하지. 그 털의 관리 비법을 알려주면 네 목숨을 살려주도록 하마!”

그것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노인은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건 굳이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 덕였다. 일단 살아야 털도 있는 것이다. 죽어서 가죽을 남겨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변태도 아니고, 자기 가죽이 인간의 눈요기를 위해 걸려 있는데 얼씨구나 좋 다고 할 호랑이가 어디 있겠는가. 자기 비전의 흰털 특수 표백 관리 비법이 타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비극이었지만, 그것으로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오, 좋다고? 짐승 주제에 똑똑하구나.”

노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흠, 그런데 어쩐다? 이미 뼛속까지 상해 있는 것 같으니. 내장도 엉망이고…… 이거이거, 곤란하게 되었군. 살살 한다고 살살했는데……. 허허, 어쩌다 이 지경 이 되었느냐?”

그 장본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야성의 직감을 가진 그녀는 감히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네가 처세를 아는구나.”

노인은 더욱 그녀가 맘에 든 모양이었다.

“흠, 어디 보자…… 짐승한테는 이쪽에 장심을 놓아야 하나……?”

노인은 손바닥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녀의 배 쪽을 여기저기 눌러보았다. 어떤 위치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확률은 반반이지만…… 안 해보는 것보다는 해보는 게 낫겠지. 네가 죽으면 미용 관리 비법도 알아낼 수 없고. 그럼 곤란하지.”

대충 몸의 중심인 듯한 곳에 올려놓은 노인의 손이 상서로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땐 몰랐지만 그것이 바로 자신의 내공을 이용해 상대의 상처를 치료 하는 운공요상법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같은 짐승에게 시전되기는 아마 무림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도박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용케 죽 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생명을 구해낸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어? 되네?”

본인으로서도 설마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죽음의 경계선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그녀에겐 부작용이 하나 생겼다.

“흠, 눈동자의 색까지 황금색으로 변할 줄이야…….?”

노인에게도 그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당량의 내공을 주입한 결과 발생한 일이었다. 무인의 생명 같은 내공을 자신을 습격한 맹수에게 주입하다니. 그것도 겨우 미용 관리법을 알아내기 위해서 기행이 아니라 괴행이라 해야 마땅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노인의 괴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참 심심에 절어 따분해하던 노인은 한 가지 매우 획기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생각을 해낸다. 인간이 쌓아놓은 기가 짐승에게도 효과를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자 노인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 먹히네? 신기하군. 흠, 그렇다면 호랑이도 기를 축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 호랑이의 단전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도 호랑이도 다 같은 동물이잖아?”

요는 기를 인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일 뿐일 것이라고 노인은 생각하게 된다. 어차피 기라는 것은 자연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이니까. 단지 인간은 그것을 인위적인 방식으로 축적하고 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노인이 보기에 그녀는 보기보다 무척 똑똑해 보여서 가르치면 될 것도 같았다. 어지간히 심심했던 것 이다. 노인은 그날부로 실험해 착수했다.

거대한 백호를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이 시작되었다. 물론 피실험체는 이 불쌍 가련한(?) 암백호였다. 그녀에겐 이미 운기요상을 받을 때 노인으로부터 받은 강대 한 기운이 사지 곳곳에 면밀히 흐르고 있었다.

노인이 해줄 것은 그것을 기맥을 통해 돌게 해서 그녀가 그 기란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말로 가르쳐 줄 수는 없지만 행동으로 직접 느끼게 해줄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호랑이의 혈맥과 사람의 혈맥은 그 위치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일단 찔러보기로 했다.

그 혈도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침으로 그것을 찌르거나 손가락으로 점혈하듯이 찔러보며 가상의 기맥을 살펴보았다. 정말 할 일이 없고 심심하기 짝이 없었으니 가능한 작업들이었다. 어쩔 때는 잘못 혈을 찔러 사지가 꼬이는 경우도 있었다. 한마디도 반항 못하는 백호가 불쌍할 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실 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면서. 차라리 포기해, 라고 백호가 외쳤지만 사부의 귀에는 단지 크르렁거리는 시끄러운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실험은 끝없 는 실패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랜 시행착오 끝에 이 말 못하는 짐승인 그녀도 드디어 자신의 몸 안에 도는 기의 존재를 느끼고 그것을 한곳에 모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몸 안 어딘가에 존재하는 임의의 단전 안에 기를 축적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딱 일만 번째의 일이었다.

심심하기 짝이 없던 노인에게 있어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만 번째의 성공을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그리고 훌륭한 시간 때우기이기도 했다. 설마 정말로 만 번씩이나 시도했겠느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 겨우 만 번 만에 성공하다니 좀 아쉬운걸!”

마침내 그 실험이 성공했을 때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기쁨의 탄성이 아니라 더 이상의 심심풀이 거리가 떨어져 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 은 그녀는 식겁하며 그 실험이 만 번 만에 끝난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만 번이고 삼만 번이고 실험은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경지에 도달할 경우 어떤 이는 만족하고, 어떤 이는 더 높은 곳을 꿈꾸게 마련이다.

갱상일층루(更上一層樓)!

더 멀리 오르기 위해선 누각을 한 층 더 높이 올라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전자가 아니라 불행히도ᅳ특히 그녀에게 있어ᅳ후자였다. 기의 고착 성공에 낙심(?)하며 다시 며칠간을 실의에 빠져 심심하고 따분해하던 노인의 머릿속으로 번쩍 하며 유성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발상이 있었다.

“단전에 기를 모아두기만 하고 쓰지 않다니, 이 얼마나 아깝기 짝이 없는 일이란 말인가!’

일단 무엇이든 능력을 가졌으면 그것을 사용해야만 의미가 있었다. 모아놓고 쓰지 않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돈도 모을 줄 알면 쓸 줄도 알아야 하고, 무 한한 가능성도 발현되지 않으면 말짱 헛것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그녀의 단전에 축적된 기를 이리저리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노인의 고민 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노인은 머리로만 고민하는 것보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며 실패―심심풀이—의 과정을 차근차근ᅳ백호의 입장에선 잘근잘근ᅳ밟아나가 는 것을 더 선호했다.

“음, 역시 호랑이 하면 호조겠지? 그에 본딴 무공도 있고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 이상의 것은 없었다. 호랑이가 검이나 창을 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호랑이에게는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천혜의 무기 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었다. 우선적인 목표는 발톱에 검기를 맺히게 하는 것이었다.

“좋아! 새로운 목표가 생겼군. 좋아! 훌륭해!”

무엇보다 극상인 점은 다시 시간을 때울 만한 수단이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보다 진취적인 학구열에 불타며 또다시 노인은 새로운 실험에 도전했다. 그 앞에 기다 리는 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실패도 따분한 노인에게는 오로지 환영할 만한 번거로움에 불과했다. 그리고 결과는 연비가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였다.

한 번 터를 닦아놓았더니 그다음은 금방금방 내공이 모이고 강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기를 운용해 호조를 쓸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달음박질도 훨씬 더 빨라졌다. 그래서 호기심 삼아 경공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뒤론 바람이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원래 말보다 빠른데 더 빨라졌으니 그때부터 멀리서 그녀를 목격한 사 람들에 의해 하얀 뇌광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녀는 수컷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아미산의 군림자가 되었다. 그 후론 그 수컷들이 그녀에게 저녁 식사를 갖다

바쳐야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그녀는 아미산 짐승들의 여황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검기 정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걸로 우쭐거리지 말아요. 그러다 큰코다치는 수가 있으니깐요.”

연비는 검은 우산을 검처럼 잡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은 진지하게 상대해 주죠.”

놀이는 이제 끝났다. 연비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백무후는 낮게 위협적으로 갸르릉거렸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몸을 웅크렸다. 그녀에겐 자연이 준 천혜의 준족과 괴력이 있었다. 기까지 쓸 수 있는 그녀에게 패배 한 있을 수 없었다.

크허어어어어엉!

백무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기세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힘을 일순간에 개방하며 백무후가 달려들었다.

네 줄기의 검기가 돋아난 호조가 연비의 몸을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들었다. 연비는 급히 우산을 들어 그 무시무시한 일격을 정면으로 받았다. 쾅!

엄청난 힘이 격돌하며 흙먼지를 자욱이 쌓아 올렸다. 백무후는 자신의 일격이 성공했을 거라는 데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백무후의 발톱은 지금 연비의 검은 우산에 막혀 있었다. 그녀의 빛나는 발톱은 연비의 방어를 뚫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이 현천은린은 좀 특제 물건이라서 말이에요, 생각보다 무척 질기답니다.”

연비가 웃었다. 그걸 본 백무후의 꼬리가 쭈뼛 섰다.

“자, 그럼 이제 실패의 대가를 치러야겠죠?”

백무후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기도 전에 연비는 이미 다음 수의 예비 동작에 들어가 있었다.

삼복구타산(三伏狗打) 전력(力) 발동(發動)!

궁극(極) 말살기(技)

패고패고막패고패(覇拷稗苦膜敗叩).

“빠샤!”

현천은린은 검은 뇌광이 되어 새하얀 백호의 전신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무시무시한 속도, 무시무시한 빠르기였다.

빠바바바바바박! 뚜쉬! 뚜쉬! 빠바바바박! 빡빡빡! 트핫! 탓탓탓! 퍽퍽퍽!

이 초식은 패도적으로 세게 때리고, 엄청 고통스럽게 패고, 아득할 정도로 마구 차고 두드린다는 의미를 지닌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하기 짝이 없는 궁극의 말살기 였다. 소낙비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이 죽음의 공세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빠악! 빡!

별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본 것은 백무후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란꽃들이 만발하게 핀 아름다운 강가가 보였다.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빠르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