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2권 21화 – 아직 돌아가도 늦지 않은 때[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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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2권 21화 – 아직 돌아가도 늦지 않은 때[時]…

아직 돌아가도 늦지 않은 때[時]…

-내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응? 이제 정신이 들었니?”

크릉!

“잘됐구나.”

크릉크릉!

“한 가지만 물어보자. 사부… 여기 와 있지?”

끄덕!

“휴우~ 역시 그렇구나.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라 이건가…….

끄덕끄덕!

“그럼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 뭐? 된다고? 고마워라.”

백무후는 아직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터였다.

“날 사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줘. 할 수 있겠지?”

백무후는 대답 대신 멍청한 눈으로 연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연비가 그 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날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말아줄래? 난 아직 제정신이거든? 짐승한테까지 그런 시선 받고 싶진 않아, 솔직히.”

백무후는 다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가볼까? 이럇!”

동시에 백무후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백호는 여러 개의 지풍을 박차며 밤하늘 아래를 달렸다. 바람이 연비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집들이 작게 보일 때도 있었다. 그만큼 백호의 도약은 높고 빨랐다.

백호는 금세 ‘신라각’이란 간판이 달려 있는 객점의 후원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경공씩이나 배운 영물이라 그런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백무후가 조심스레 몸을 바닥에 붙였다. 그러자 백호의 등으로부터 검은 옷을 걸친 여인이 내려왔다. 물론 그녀는 연비였다. 백호를 기승물로 쓰다니, 실로 터무니없는 배짱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백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위치는?”

그러자 백무후는 고개를 들어 삼층 끝에 있는 창을 가리켰다.

“흠, 저기란 말이군. 고마워. 그럼 또 보자, 하양아!”

그러자 백무후의 황금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진짜 다시 볼 수 있을까?”

백무후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다시 보게 될 거야, 꼭!”

그리고 곧 연비의 신형은 누각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오해가 없도록 하자.

연비라고 해서 지금 좋아서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서 이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층에서 그만 돌아가고 싶지만 다시 한 층 더 올라간다. 내키지 않지만 오른쪽으로 열 걸음을 걸어 왼쪽 끝에 위치한 방문 앞에 이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있다. 그냥 몸 을 돌려서 조용히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걸어나가면 그만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위험은 증대한다. 그러니 돌아가려면 지금이다. 좋아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 아!

시선을 들어 문을 바라본다. 특실인 것만 빼면 특별할 것 없는 문이다. 마천각의 귀문처럼 불을 뿜지도 않는다. 흉신악살의 기괴한 상들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 나 쉽사리 문을 두드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천각의 귀문으로 들어갈 땐 조금도 두렵지 않은 연비였다. 두렵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흥밋거리가 생겨 즐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 평범한 문은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이 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릴지도 몰랐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해는 없도록 하자.

절대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것 이외에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도망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키지 않 는 문을 열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 된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망설이는가. 각오는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손을 들고 문을 두드려라. 자, 어서!

똑똑!

마침내 연비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드르륵 닫혀 있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날이 따뜻한지 화로에 불은 들어 있지 않았다. 공기는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백발백염이 노인은 방 안 중앙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더 좋은 술을 가져오겠다며 나간 장우양은 아직 오지 않았기에 혼자 자작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두 번 문 두드리던 소리가 나더니 대답도 하기 전에 드르륵 문이 열렸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무례한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방문객은 검 은 옷을 걸치고 한 손엔 우산을, 다른 한 손엔 비단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바로 연비였다.

노인은 입을 다문 채 한동안 조용히 연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심연보다 더 깊은 깊이를 가진 시선이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 이 흘렀다. 연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노인 쪽이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노인이 시선을 움직여 연비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청이라도 들려고 왔느냐? 여자를 찾은 적은 없는데?”

아무래도 노인은 방금 들어온 여인을 기녀로 착각한 모양이다. 물론 연비는 출장 영업 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연비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부끄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잉, 오빠도 참!”

허리랑 다리를 한 번 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순간 시간이 얼어붙고 공간이 정지했다. 조금 전보다 더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얼어붙어 가는 것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허허허.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노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노인의 눈에 추울 때 불씨를 넣어놓는 쇠로 만든 화로가 보였다. 저거면 충분했다. 노인은 양손으로 무쇠 화로의 양쪽을 잡더니 서서히 양손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랑말랑한 진흙처럼 무쇠 화로가 한 점으로 닫히기 시작했다. 노인은 도자기를 빚기 위해 진흙을 매만지는 도공처럼 무쇠 화로를 주물럭거렸다. 노인이 가볍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무쇠 반죽은 이리 접히고 저리 접히며 본래의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슬슬 무쇠 화로가 한 덩어리를 이루자 노인은 그것을 돌돌 말아 가래떡처럼 무쇳덩이를 늘리기 시작했다. 곧 적당한 크기의 굵고 단단해 보이는 쇠몽둥이 하나가 만들어졌다. 노인은 마무리의 의미에서 그 쇠몽둥이의 끝 부분에 손가락으로 타격각성 정신봉(打擊覺醒 淨身棒)’이라고 적어 넣었다. 마치 두부에다 쓰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인의 손가락은 아무런 거침도 없었다. 작업을 모두 마친 노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비딱하게 연비를 바라보았다.

“허허허… 허허허..

다시 한 번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벅저벅저벅!

태산처럼 멈춰 있던 노인의 몸이 움직였다. 노인은 쇠몽둥이를 돌바닥에 끌며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갔다.

키르르르르릉! 파바밧!

돌 바닥에 긁힌 쇠몽둥이의 끄트머리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제자의 잘못을 계도하는 것이 사부 된 자의 도리!

“어허허, 이 오빠가 좀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마!”

노인의 용건은 무척 단순하고 간단하고 무시무시했다.

<『비뢰도』 제2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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