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2권 8화 – 두 번째라고 별수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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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2권 8화 – 두 번째라고 별수있나

두 번째라고 별수있나

-호환(患) 대(對) 용환(龍

장우양은 뱃전에 서서 노사부의 옆얼굴을 흘낏 바라보았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이상한 노인이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너무나 깊어서 자신의 손에는 결코 닿지 않는다. 자신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그 노인은 존재하고 있 었다. 분명 보고 있는 눈높이도 지금의 자신과는 다르리라.

“하지만 덕분에 아무 일도 없이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흑룡선의 깃발을 쓰러뜨린 후 그들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았다.

‘하긴 어느 미친놈이 흑룡선을 포획해 개처럼 질질 끌고 가고 있는 배를 덮치려 하겠는가!’

다행히 그런 미친놈은 없었다. 강호에 아직 상식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 장우양은 내심 안심했다. 최근 너무 비상식적인 것만 보다 보니 상식이라는 것이, 평범이라는 것이 그리워지는 그였다.

‘그러나 나도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

이미 너무 다른 곳을 보아왔다. 극에 이른 것을 보고 말았다. 아마 저 노인이야말로 ‘극(極)’이라는 것이겠지. 그런 것은 보기만 해도 망막에 화인(印)처럼 새겨 지고 만다. 태양을 똑바로 보는 것과 같다. 강렬한 빛의 홍수에 타버린 망막은 한동안 그 잔상을 비춘다. 자신도 이미 예전의 그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이 기연이란 건가.’

절벽에 떨어지지 않아도, 무공을 전수받지 못해도 기연은 기연. 과거의 자신을 딛고 한 발짝 더 올라설 수 있게 되었으니 기연이 확실하다. 게다가 그는 수호신까 지 얻고 청룡은장과 계약해 더욱 기반을 넓힐 발판을 마련했다. 그 인연을 마련해 준 것은 바로 저 정체불명의 노인이었다.

‘저 노인을 만난 것이 기연인가… 아니면…….”

뭐, 노인을 만난 것은 기연, 그 남자를 만난 것은 악연. 그렇게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갈 순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앞으로 나가는 길뿐.’

장우양은 굳은 의지와 결의가 담긴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드넓은 동정호의 수평선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마치 여기까지 올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바다를 본 자는 호수로 만족할 수 없다. 그런 것이다.

“이제는 표물만 건네면.”

겨우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꼭 남도 알고 있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상이 넓다 보니 제정신이 아닌 미친놈들도 많았다.

***

“저 배, 맞냐?”

어둠 속에 녹아든 검은 배의 선수에 선 거친 얼굴의 남자가 물었다.

“맞습니다, 부채주님! 저 배가 끌고 가고 있는 것은 분명 흑룡 일호선입니다.”

“킥! 형님의 구란 줄 알았는데 설마 사실일 줄이야… 사각선장 그놈, 별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는데 꼴좋게 됐지.”

동료가 당했는데도 그는 오히려 기쁜 모양이었다.

“역시 일호선의 주인은 이 몸 괴룡 해어광님뿐이지.”

장강수로채에서 흑사각과 그는 언제나 실력과 공을 다투는 사이였다. 이참에 경쟁자 하나가 저절로 떨궈져 나갔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자, 그럼 잡아먹으러 가볼까!”

이때 노사부는 이런 말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다다익선이란 좋은 거지.”

무척이나 기쁜 모양인지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흠, 한 대도 아니고 두 대라니, 제법 수지가 맞는군. 선전 문구도 만들어놨겠다… 이번엔 귀찮으니 간단히 처리함세.”

따악!

노사부는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두령님, 저… 저… 저……..”

평소 피를 좋아하던 부하 종필의 손가락 끝은 그의 탁한 목소리만큼이나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냐? 갑자기 언청이라도 됐냐? 왜 말을 더듬고 지랄이야?”

괴룡해어광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지금 종필은 눈앞의 사태를 받아들이는 데만도 정신적으로 한계였다.

“그… 그러니까 저… 저… 저…….?

한곳을 가리키고 있는 종필의 손가락은 이제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었다.

““대체 뭐가 있다고? 별거 아니면 죽을 줄 알아!”

그렇게 엄포를 놓고는 그 손가락 끝을 따라 돛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흡!”

그 순간 해어광은 숨을 멈췄다.

“저딴 게 왜 여기에……?”

언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돛대 위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황금빛 태양 같은 두 눈을 요요로이 번뜩이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 설마…….?

여기는 깊은 산속이 아니라 장강의 한복판이었다. 저런 게 있을 곳이 아니었다.

“하하, 얘들아, 저거 환각 맞지?”

“……”

돌아온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었다.

육지에서 생활하는 자들과 달리 물 위에서 생활하는 자들이 걱정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호환(虎患)이다. 때문에 그들은 물의 신인 용신은 경배 할망정 산신의 권속인 호랑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호환, 마마가 무섭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별세계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물을 떠나지 않는 한 이 생이 다하도록 인연이 없어야 될 생물이기도 했다. 그렇다. 호환 같은 건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면 충분했다.

그렇다면 저건 대체 뭐란 말인가? 돛대 위에 웅크리고 오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것은?

돛대 위에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 새하얀 위엄을 내뿜으며 오롯이 서 있었다.

크허어어어어어엉!

처음 그 포효가 울려 퍼졌을 때 흑룡선의 모든 이들은 몸을 움츠리며 벌벌 떨었다. 마치 용신의 분노와도 같이, 영혼을 떨게 만드는 소리였다. 다음 순간,

하얀 뇌광이 검은 배 위로 내리꽂혔다.

크허어어어어어어엉!

콰드드드득!

갑판의 나무들을 우그러뜨리며 ‘그것’이 다시 한 번 포효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용과 호랑이가 호각을 이루며 격렬하게 쟁투하는 모습을 묘사한 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흑룡은 백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흑룡을 사칭 하는 가짜 모조품에 불과한 떨거지들이 어찌 감히 진짜 신령한 산의 주인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단 한 번의 질주,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무래도 이 백호는 물이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한 뼘의 발 디딜 곳만 있으면 자신은 무적이라고 온몸으로 외치 고 있는 듯했다. 그 자신감 그대로 그녀의 움직임은 질풍 같았고, 그 도약에는 힘이 넘쳤다. 갑판에서 갑판으로, 선수에서 선미로, 선미에서 돛대 위로 하얀 뇌광을 연상시킬 정도로 압도적으로 빠른 움직임에 중양표국 사람들은 넋을 잃고 그 장관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들이 나설 기회 따윈 조금도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이 섬광의 내달림 뒤에 남은 것은 얼빠진 껍데기와 시체들뿐일 게 틀림없었다.

“뭐, 그럭저럭 밥값이랑 술값 정도는 하는군.”

그저 노사부만이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며 촌평할 뿐이었다.

***

크허어어어어어엉!

밤이 내려앉은 동정호 저편으로부터 흉포한 맹수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뭐지?”

“뭐지?”

“꺅! 싫어~”

“설마 호랑이?”

소독이네 뭐네로 실랑이를 벌이던 중에 당황한 천무학관 사절단들의 의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동정호 한가운데에서 웬 호랑이 포효 소리?”

동정호에서 물고기들과 어울려 헤엄치길 좋아하는 호랑이가 산다는 괴담은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연비의 안색은 핏기가 가신 듯 매우 창백했 다.

‘이 소리는 설마?”

듣는 순간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다. 어릴 때부터 산속에서 종종 듣던 그 소리를 잊을 리가 없었다.

“왜 그래요, 연비? 안색이 좋지 못한데?”

나예린이 걱정할 정도로 안색 변화가 심했던 모양이다.

“설마…….”

“예? 갑자기 왜 그래요, 연비. 무슨 일인가요?”

항상 당당하고 두려움을 모를 것 같던 호박색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천각의 요란법석한 환영식에도 오히려 즐기며 웃던 연비가 이렇게나 눈에 띄 게 당황하는 모습을 나예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괜찮아요, 연비?”

연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비의 두 눈동자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금 그 소리… 예린도 들었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본다. 마지막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는 성이 차지 않는다. 차라리 환청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것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 있다.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이 오늘만큼은 조금 원망스러웠다.

“네, 분명히 들었어요. 이런 호수 한가운데서 또다시 저 소리를 듣게 되다니 의외군요.”

““또’라고요?”

그 단어가 무척 마음에 걸린다. 언제 들었던 걸까? 이렇게 되면 시기가 매우 중요해진다. 십 년 전 그때였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혹시 그거 십 년 전이었어요?”

“아니요.”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걸요.”

“뭐라고요?”

“류… 음, 가까운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던 때였어요.”

지난 한 달 안에 감옥에 갇힌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렇다면 남창에도 왔었다는 이야긴데……

‘설마…….?’

지하에 있어서 듣지 못했던 건가?

“무슨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방법은 무척 한정되어 있었다.

이거 유리한 협상거래 내역품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아무리 재난이 인간의 의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해도 만일을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에 휩쓸려 사망할 뿐이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 돼!’

아무리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라 해도 그것이 들이닥쳤을 때 두 손 놓고 가만히 있다면 죽기 딱 십상이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이 가혹한 운명과 맞 서서. 그것만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떨린다!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쥐어 짜이는 것 같다.

‘진정하자, 진정해!’

이것은 시련이다. 언제가 넘어야 할 시련. 그것이 단지 운이 더럽게 나쁘게 오늘이 된 것뿐이다. ‘그러니깐 진정하는 거야. 마음을 가라앉혀!’

두근거리며 파열할 것만 같은 심장을 강제로 진정시킨다. 이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몇 번이나 심상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바로 그 사태가 닥쳤을 때 혼란 에 빠지지 않기 위한 예행연습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환상 속에서라면 벌써 수백 번도 더 겪은 일이다. 다만 환상과 현실의 격차가 클 뿐. 그렇게 수없이 반복했던 사전 연습을 하마터면 한순간에 날릴 뻔했다.

조용히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진정하라고 되뇌인다. 스스로에게 강한 암시를 걸듯이. 그동안 쌓아두었던 경험이 깨어날 수 있도록.

‘나는 이 상황의 지배자이다.’

조금 더 강한 말을 자신에게 불어넣는다.

“모든 변수는 이미 재고(再考)했다.’

남은 것은 심상했던 결론을 현실로 끄집어내 사실(事實)로 만드는 것뿐.

도망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당연하다. 인간은 자신이 다룰 수 없는 사태에 당연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회피라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자 가장 어리석은 방법만 아니었어도 망설임없이 그렇 게 했겠지. 그러나 도망치는 걸로는 그 어떤 매듭도 지을 수 없다. 한 번 도망치기로 결정하면 계속해서 그 일에서 도망치게 되고 만다. 관성이라는 녀석이다. 한 번 달리기 시작한 말은 쉽게 방향을 틀 수도 없고, 멈추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러니 두렵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더라도 그 미지의 암흑을 향해 용기를 가지고 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이론,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물린 이론.

그러나 그 이론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다른 문제였다. 몸이 거부한다. 몸은 언제나 쉬운 일을 바란다. 역시나 인간은 이성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머리로는 알면서 몸은 자꾸만 피하게 된다. 악순환이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용기를 쌓기 위해 그토록 많은 예행연습을 반복해 온 것이 아니었 던가.

분명 얻은 것이 있을 터! 지금이 바로 그것을 꺼내 쓸 때였다. 그래도 이 당황스러움은 감출 수 없었다.

‘하양이의 포효라는 변수가 새롭게 추가되었기 때문일까?’

역시 세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음부턴 그 부분을 예상 변수 안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드디어 사부가 자신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이제 자신은 그동안 수백 번을 검토한 몇 가지 안(案)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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