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의 고백
-돈이 필요해!
“연비, 괜찮아요? 배에서 내린 이후에도 계속 안색이 안 좋아요.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혹시 멀미라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넘실대어 정신이 없던 연비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원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이 가득한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예린이었 다. 평소 무표정해서 얼음 조각이라고까지 불리는 나예린의 얼굴엔 지금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그 걱정이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의기양양한 마음이 조금 들었다
“린한테 그 정도로 긴 걱정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상당한 호강이네요.”
나예린의 평소 성격을 보면 이런 반응은 특단의 조치라 할 만했다. 괜히 빙백봉이라는 별호가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그런가요?”
아무래도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그건 그렇고, 나 그렇게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
“네, 무척이나요.”
“린한테 걱정을 끼치고… 아무래도 아직 수행이 부족한 모양이네요.”
그러나 이미 들켜 버린 후라 후회해 봤자 때는 이미 늦었다.
“오랜만에 동요란 걸 해봤더니 아직 적응이 돼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곧 괜찮아질 테니.”
정말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던 동요라는 감정을 오늘에야 되찾을 수 있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후우…….”
연비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먼저 육체를 통제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정신을 통제하는 기본 원칙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신은 형체가 없지 만 육체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무형의 것보다는 유형의 것이 훨씬 더 제어하기 쉬운 법이다.
곧 호흡이 조용히 가라앉자 눈동자의 흔들림도 멈추었다. 다시 고요한 호수 같은 눈동자 빛이 돌아왔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이제야 좀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네요.”
“혹시 걱정거리가 있다면 저와 함께 나누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혼자서 짊어지는 것보단 가벼워지지 않겠어요?”
마음은 고맙지만 이 일은 자신이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업이었다. 여기에 나예린을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애초에 망할 인연을 맺은 것이 잘못일 뿐이다. 하지만 나예린의 눈을 보니 물러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비, 당신은 제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주었어요. 만약 제가 당신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거예요. 그리고 만일 일부러 그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저를 속인다면 전 무척 실망하게 되겠죠. 제가 아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이렇군요. 차용 관계는 확실히! 빚은 갚을 기회가 생겼을 때를 놓치지 마라!” 물론 그 말을 연비도 알고 있는 말이었다. 왜냐면 그것은 또 하나의 자신이 해주었던 말이니까. 연비는 나예린의 보석 같은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든 고민을 들어야겠다고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사실을 말할까? 아니면 얼버무릴까?
기인가 부인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만 연비였다.
“린의 도움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에요. 그러니 안 듣는 게 좋겠어요.”
나예린은 납득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죠? 그 판단은 제가 하는 겁니다. 연비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그렇겠죠?”
자신이 했던 말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 그 말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잃고 마는 모양이다. 쉽게 말해 자신만은 그 말에서 예외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건 연비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마음이 꺾이고 만다.
한 번 꺾인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 자신을 속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무엇이든 첫 한 발짝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무에서
‘그것은 또한 자기를 속이는 행위니까…….’
유가 되는 거랑 마찬가지다. 한 번 유가 되면 두 번 다시 무(無)이던 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제가 졌군요, 린. 좋아요. 말할게요. 그리고 당신의 판단을 기다리죠.”
“좋아요. 경청하겠어요.”
“그렇게 정색하면서 들을 필요는 없어요. 이건 어찌 보면 돈 문제거든요.”
“돈 문제요?”
“예, 갑자기 막대한 목돈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 말이죠.”
“……?”
하나씩 차근차근 설명해 나가기엔 무척 애매한 문제였다.
“도대체 얼마가 필요하길래 그러죠? 만 냥 정도 되나요?”
그 말에 연비는 빙긋 웃었다.
“아니에요? 그럼…….”
흠, 하며 잠시 계산해 보던 연비가 대답했다.
“글쎄요, 한 삼십만 냥 정도?”
연비는 그 말을 하며 웃었지만 나예린은 그 말을 듣고 웃을 수 없었다.
“연비, 어, 언제 그렇게 많은 빚을 진 거예요? 악덕 고리대금업자에게 걸리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면 사기?”
그 말에 연비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아, 차라리 그랬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걸 해결하는 데는 반나절도 필요없을 테니깐요. 고민할 필요도 없죠. 애초에 그런 데에 걸리지도 않고.” 연비의 말은 넋두리에 가까웠다.
“그럼 도대체……?”
“역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을 현금화해야 한다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에요. 한두 푼의 무게로는 도저히 그것을 계량할 수 없으니까요.”
과거에도 그렇고 다시 재회한 이후로도 그렇고 연비의 얼굴에 저런 표정이 나타나는 것을 나예린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돈 문 제가 아니라는 것을.
“제가 도와줄게요.”
나예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린이요?”
그건 연비로서는 무척 뜻밖의 얘기였다. 항상 수동적인 줄 알았던 그녀가 웬일로 이런 일을 자청하다니. 돈 문제라고 하면 더 이상 도와준다는 말을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것이다.
“예전에 전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죠. 이 기회에 갚을 수 있다면 무척 다행이겠어요.”
“흠…..”
“왜요? 싫어요?”
“아니요, 싫긴요. 그런 소리 했다가는 천벌받죠. 난 가식적으로 사양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그런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사양 따윈 오히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었다. 받고 싶었으면 받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면 된다.
“도와준다면 사양하진 않겠어요. 철저히 도움을 요청해도 되겠죠?”
“물론이죠.”
이미 도와주겠다고 말을 내뱉은 이상 연비의 손에 맡길 뿐이었다.
“린…….”
“왜요?”
그러자 연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곧 후회하게 될 거예요.”
나예린이 놀란 새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연비는 나예린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자신을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따뜻한 손길에 나예린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황금보다 값진 빙백봉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