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3권 2화 – 사부와의 조우, 피할 수 없는 만남
사부와의 조우, 피할 수 없는 만남
-벗어라! 그리고…… 맞아라!
일주일 전.
강호란도 최고의 시설과 친절봉사를 자랑한다는 신라각 후원 별채 삼층 일호실 안.
끼이이이이익!
파지지지직!
‘타격각성 정신봉’이란 급조된 명을 그 몸에 새긴 강철 막대기가 까칠까칠한 돌바닥을 긁으며 노란색 불꽃을 튀겼다. 봉을 움켜쥔 사람은 눈처럼 새하얀 백발백염 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시선은 시종일관 앞쪽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현의여인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풀어 내린 검은 머리카락, 화려하진 않지만 단아한 장신구, 한 듯 만 듯 옅게 살결을 돋보이게 해주는 은은한 화장, 나무랄 데 없는 옷맵시, 그리고 우아 함과 기품이 느껴지는 앉은 자태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속여도 이 노인은 속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걸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이 노인 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 진면목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노인에게 그건 일도 아니었다.
“……”
연비는 더 이상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만일 사부랑 다시 만날 때 쓰려고 했던 수많은 말들은 기억의 저편에 묻힌 채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고 있 었다. 이럴 예정이 아니었는데…… 이대로는 위험했다.
저벅저벅저벅!
끼이이이이익! 파바바바박!
노인의 무거운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어질 때마다 연비의 몸은 저절로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윽!
고개 숙인 연비의 시선 안에 사부의 발끝이 들어왔다. 그리고 우뚝 멈추었다. 동시에 그에 동조하기라도 하듯 흉험한 강철 막대기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연비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킨 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 자상하게 웃고 있는 사부. .는 물론 없었다.
““벗어라.”
무표정한 얼굴로 사부가 말했다. 흠칫 놀란 연비가 양손으로 황급히 옷깃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변태! 치한! 밝힘쟁이!”
이 정신 공격은 효과가 있었는지 평정심과 무관심의 대가인 사부도 약간 움찔했다. 저런 연기는 가르친 적이 없건만, 어디서 저딴 걸 배워온 것이란 말인가. “누가 변태 영감이라는 거냐?!”
당장 취소하라고 외치자, 연비는 상빈신을 오른쪽 뒤로 돌림과 동시에 옷고름으로 눈가를 훔치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시늉 을 했다. 그 모습은 어딜 봐도 치한을 만난 폭행 피해자의 자세였다.
“흑흑, 하지만 다짜고짜 숙녀한테 벗으라고 강요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변태라고요!”
오해와 억측을 조장하는 자세로 연비가 외쳤다. 사부가 버럭 소리쳤다.
“누가 빨가벗으랬냐? 옷 갈아입으란 얘기였다!”
연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왜 갈아입어야 하는 거죠? 지금 이 순간 갈아입어야 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만?”
연비가 지적했다.
“아니, 있다!”
단호한 목소리로 사부가 대답했다.
“아니 왜요?”
반문하는 연비의 목소리가 약간 위로 치솟는다. 하지만 사부도 양보 못할 이유가 있었다. 진지한 목소리로 사부가 말했다.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 좀 해봐라. 아무리 겉보기뿐이라지만 여자 아이를 패는 건 그리 보기 좋지 않지 않느냐. 내 비록 세상의 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고는 하 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한 점 거리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냥 기분상 가리고 싶은 것도 있는 법 아니겠느냐?”
사실 틀린 말은 없었다. 겉보기뿐이라지만 나이 먹은 노인네가 여자 아이를 팬다는 것은 어떻게 보아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좋게 보이지 않는 것뿐이면 다행이고, 사실 완전 범죄 중에서도 상범죄였다. 그래서 아직 매타작을 안 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 음… 그러니까 그 말씀은 절 패고 싶으니 저보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것이군요. 한마디로 정갈하게 목욕재계하고 얻어터지라는 그런 이야기 아닌가요?” 만면에 생글생글한 미소를 띄우며 연비가 말했다.
“뭐, 그런 이야기지. 너도 이제 이해를 한 것 같으니 기쁘구나!”
두 번 말하면 입 아프지. 사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음, 그렇군요.”
“어허, 그렇대도. 게다가 번거롭게 목욕재계까진 안 해도 된다. 옷 갈아입는 선에서 봐주마.”
갈아입을 생각은 않고 시간 벌기에 들어간 것을 눈치 챘는지 사부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자, 이제 합당한 이유를 들었으니 갈아입고 오지 않겠느냐? 후속편은 그때 가서 계속하면 되고.”
친절한 목소리로 사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분부대로…….?”
연비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라고 할 줄 알았습니까? 그렇다면 소.녀. 더더욱 절대로 갈아입을 수 없사옵니다.”
연비가 정색하며 대답했다. 겉모습 탓인지 말투 또한 평소랑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굳이 자진해서 매를 벌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유를 들은 이상 더욱더 이 모습을 고수할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다.
“소녀는 무슨 얼어죽을. 그냥 갈아입을래, 맞고 갈아입을래?”
본인이 홧김에 내뱉긴 했지만 앞의 말과 논리적으로 모순된 말이었다.
“절대로 싫습니다.”
사람이 협박에 순순히 굴하고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때때로 사람은 의지를 관철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연비가 생각하기에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흐흐흐흐, 네가 오늘 매를 다발로 버는구나! 오냐! 네가 오늘 죽는 게 소원이라는데 사부가 돼서 제자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느냐? 걱정 마라, 그게 네 원이라면 원대로 해줘야지!”
차분하기만 하던 사부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아아아아악!
그 순간 정신봉에 서려 있던 검강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하얀빛을 내며 타오르더니 이윽고 그 빛이 점점 더 사그라져 갔다.
“저게 뭐지?”
환하게 타오르던 백광이 꺼지고 대신 은은하게 빛나는 정신봉 주위로 검은색 구슬과 흰색 구슬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듯 엇갈리는 나선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었 다. 하나의 구슬은 빛을 뭉쳐 놓은 백진주 같았고, 다른 하나는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는 흑진주 같았다. 검환(劍丸)? 작지만 왠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드 는 한 쌍의 구슬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려니 연비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건 위험해! 막아도 죽는다! 저건 막을 수 없어…….?
무언의 경고를 보며 본능적인 암담함을 느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어떠냐? 생각이 좀 바뀌었느냐?”
힘을 거두지 않은 채 사부가 말했다.
“아하하, 갑자기 옷이 좀 답답하네요. 얼른 갈아입고 오죠.”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결심이 허물어지는 데는 반 각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한 일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었다. 특히 그 상대가 사부 일 때는 더욱더 그러했다.
“갈아입을 옷은 있는 게냐?”
퉁명스런 목소리로 사부가 물었다. 옷이 없다며 가지러 간다고 하면 곤란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다 해도 그렇게 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죠. 겉옷 말고 안쪽은 조금만 변형하면 되니까 큰 무리는 없어요. 부피도 안 차지하고, 어차피 가지러 간다고 말해도 안 보내줄 거잖아요?” 입을 삐죽 내밀며 연비가 말했다.
“잘 아니 다행이구나. 이걸 쓸 일이 없을 것 같아 좀 아쉽긴 하다만.”
“그건 또 뭡니까, 싸부?”
어느새 사부의 손에는 기다란 하얀 띠 하나가 바람도 없는데 건방지게 나풀거리고 있었다.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 이거 말이냐? 사용법은 간단하다. 그저 눈에다 대고 빙빙 돌려 감으면 되거든.”
이렇게 말이다, 라고 말하며 자기의 눈에다가 가져다 대는 시늉을 했다.
“그런 다음에는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제자가 물었다.
“네가 옷 갈아입기를 계속 거부했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육신의 눈을 가리고 마음의 눈으로 진면목을 보며 패는 수밖에. 하긴 네가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더 이상 쓸 일은 없겠구나.”
평안한 어조로 사부가 말했다. 왠지 아쉽다는 듯한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설마 심안(心眼) 심검(劍)인 겁니까?”
무슨 매타작에 심안 심검까지 동원된다 말인가. 그러자 사부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거창하게 심검은 무슨. 고작 심타작(心打 가지고.”
겸양하며 말할 게 아닌 것을 겸양하며 말하니 그 나름의 으스스함이 있었다.
“후딱 갈아입고 오죠.”
연비가 재빨리 말했다. 아무래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아, 그리고 근육에 힘준 것도 잊지 말고 풀고 나와라.”
“별걸 다 신경 쓰십니다. 어련히 알아서 안 할까 봐요.”
연비는 투덜거리며 마지못해 객실 안에 딸려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정말로 오랜만에 원래의 모습이 되어 나왔다.
“다시 한 번, 오랜만이다, 제자야.”
굳이 다시 한 번 인사를 한다.
“오랜만에 뵙네요. 반갑진 않지만요.”
비류연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좀처럼 주도권은 잡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이 무척 갑갑하게 느껴졌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지만 역시 능구렁이 사부는 못 보던 사 이에 더 많은 구렁이들을 잡아먹었는지 쉽사리 파고들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 사부? 방금 그건 뭐였죠? 처음 보는 기술인데요?”
“흥, 지금까지 보여준 적이 없으니 당연히 처음 봤겠지.”
시큰둥한 목소리로 사부가 대답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비뢰문 무공은 일단 다 가르쳤다고 그때 그랬잖아요. 지금 당장 구현하게 할 순 없어도 이론상으로는 다 가르쳤다고. 그럼 그때 제자한테 구라 치신 겁니까?”
딱!
“이놈아! 구라를 치긴 누가 구라를 쳤다는 거냐! 이건 비뢰문 무공이 아니다. 그러니 네놈이 못 배웠을 수밖에! 문파의 비전 이외의 것을 가르치든 가르치지 않든 그건 이 싸부님 마음 아니겠냐?”
약 올리는 투로 사부가 말했다. 마음이라 쓰고 제멋대로라고 읽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그럼 그 괴상한 기술은 누구한테 배운 건데요?”
“배우긴 누가 배워, 익혔을 뿐이다. 누가 감히 노부를 가르칠 수 있겠느냐.”
“그거나 그거나.”
입을 닷 발이나 내밀며 비류연이 궁싯거렸다.
“엄연히 다른 거다, 이놈아!”
딱!
다시 한 번 회피불능의 꿀밤이 날아왔다.
“그래, 딴 놈 거였지. 이름이 태극 뭐시기였는데 그놈이 그때 쓰던 무공이었다.”
“그놈께선 어떻게 됐는데요?”
궁금해진 비류연이 물었다.
“죽었지.”
사부는 딱 한마디만 했다.
“누구한테요?”
질문이라기보단 확인이었다.
“나한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사부가 말했다.
‘역시…….’
비류연은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음을 확인했다.
“근데 왜요?”
“댐볐거든.”
당연한 걸 뭘 물어보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 그러셔요…….?”
그 이상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결말이 필묵으로 그려지듯 눈에 선했다.
‘참 많이 아팠겠지…….’
남의 얘기 같지 않은 게 어쩐지 동병상련의 정마저 느껴졌다.
“그럼 어떻게 익혔는데요? 그 사람, 뒤졌다면서요?”
“당연히 비급 보고 배웠지. 책은 지혜의 보고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약간의 비웃음이 담긴 핀잔이었지만, 비류연에겐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럼, 그 비급은 어디서 났는데요?”
아무래도 출처가 수상했다.
“어디서 났을 것 같으냐?”
사부가 씨익 의미심장 벌렁한 웃음을 음흉하게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런 귀한 비급을 흘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기대는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 면 결론은 딱 하나뿐이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하아, 뭐어…… 대충 짐작이 갑니다요.”
잠시 이름도 까먹힌 그 사람을 위해 묵념했다. 그러기에 이런 노괴물한테는 어쩌자고 덤벼서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잠깐만요. 전엔 상승무공은 비급만 가지곤 안 된다면서요? 종이 위에 적힌 글자와 썰렁한 낙서만 가지고는 동작 하나하나에 깃든 이치를 표현하지 못한다고 했잖 아요? 배움에 있어 비급이 이 할이고, 나머지 팔할은 스승의 가르침이라고요.”
“그랬지. 그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방금 전에 비급 보고 배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누가 상승무공 배웠다고 그랬냐?”
“그, 그럼..
“상승무공은 안 돼도, 하승무공은 비급만 보고도 배울 수 있어. 원래 만류귀종이란 말도 있잖느냐? 높이 올라가면 아랜 자연히 보이는 법이다.”
그 말인즉, 자기 수준보다 낮은 건 책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나오니 비류연도 할 말이 없었다. 좀 더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가르침에 대한 일관성 부족이라는 논리적 약점을 잡아 사부를 수세에 몰아넣어 공세를 계속해서 정신을 딴 데로 뺀다는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 제자야! 이제 대화 소재도 다 끝나가는 것 같은데, 그럼 슬슬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
좀 더 대화를 끌어갈 소재가 없을까 이리저리 염두를 굴리던 비류연의 상념을 끊으며 사부가 자상하게 말했다. 비류연이 쳐다보니 어느새 정신봉은 다시금 하늘을 보며 높이 치켜 들려져 있는 게 아닌가!
“아이참, 얼렁뚱땅 넘어가면 안 됩니까?”
은근슬쩍 넘어가려던 계획이 실패한 비류연이 귀엽게 항의했다. 당연히 그 귀염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안하던 짓 자꾸 하면 수명 단축된다고 이 사부가 가르쳐 주지 않았니? 이 사부의 대답은 당연히…….”
비류연은 다급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안 돼’다!”
부우우우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타격각성 정신봉이 벼락불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사부의 수공 주물럭식 연금술에 의해 급연성(?)된 강철의 연금 막대기는 목표물을 작살낸다는 본래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했다. 목표물이 파괴에 실패한 이유는 목 표물의 무단 회피가 아니었다. 이유는 바로 비류연이 빛의 속도로 불쑥 내민 비단 보자기 때문이었다. 강철 몽둥이의 궤도 안에 그 비단 보자기가 들어오는 순간 사 부의 손길이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엄청난 속도였는데도 멈추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니, 가히 신의 구타 솜씨라 아니할 수 없다. 저것이 바로 뜻이 일어나면 저절 로 몸이 움직인다는 ‘의발(意)’의 경지였다.
“그것은 설마!”
사부의 심안이 보자기 안에 감싸인 존재를 정확히 잡아냈다. 반사적으로 코가 벌름거린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비류연이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그러나 아직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엔 일렀다. 아직 쇠몽둥이는 두개골 위쪽 손가락 하나 들어갈 자리에 고 스란히 올려져 있었다. 마음의 눈으로 보자기 안을 꿰뚫어 보고 이리저리 살펴본 다음에야 비로소 사부가 물었다.
“그건…… 술이구나!”
의문이 아닌 확신을 담아 사부가 말했다. 의심이 있었다면 몽둥이는 멈추지 못했으리라. 연비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보통 술이 아니죠.”
사부가 잠시 코끝을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잠시 음미하듯 침묵했다.
“이 공기 중에 녹아 있는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는 확실히 범상치 않군. 그건 상당히 이름있는 비싼 고급 술인 것 같구나.”
아무래도 사부는 술 냄새라면 이 이중 삼중의 엄중한 봉인을 뚫고 공기 중에 미량으로 새어나간 향기까지 맡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부터가 연비로서는 승부 였다. 잠시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연비는 엄중하게 쌓여진 비단 보자기를 벗겼다.
비단 보자기가 여인의 옷처럼 스르륵 벗겨지며 ‘달의 이슬’이 그 눈부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공기 중에 감돌던 주향이 한층 더 농후해졌다. 그 냄새를 맡은 사 부의 얼굴에 잠시 황홀한 표정이 떠올랐다.
“바로 맞히셨어요. 역시 사시사철 위 속에 술벌레를 키우고 다니시는 분답군요. 이 술은 ‘달의 이슬[眞月露]’라 불리우는 희대의 명주죠. 이곳 강호란도에서는 이 것보다 더 좋은 술은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희귀한 술을 보관하고 있는 술 창고가 모종의 습격을 당해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군요.” “그 말인즉슨?”
흠칫한 사부는 연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아챘다.
“역시 사부, 눈치가 빠르시네요. 맞아요. 제 손에 든 이것이 마지막 남은 ‘달의 이슬이라 그런 뜻이죠.”
“어쩔 셈인 게냐?”
사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이미 그는 이 술을 마시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이럴 셈이죠!”
휘익!
재빨리 등 뒤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내 든 연비가 그 예리한 날 끝을 백옥으로 만든 술병에 갖다 댔다. “무, 무슨 짓이냐!”
아까운 술의 생명이 위협받게 되자 당황한 사부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비류연이 소리쳤다.
사부의 움직임이 순간 정지했다.
“더 이상 가까이 오시면 이 술병의 목숨은 없습니다.”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심각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마지막 남은 생명줄을 그리 쉽게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손을 내려놓으시죠. 허공섭물로 술 형태를 고정하시려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사부라면 허공섭물을 응용해 깨진 술병 안의 술을 그 형태 그대로 고정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자신의 행동을 읽힌 사 부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짓눌렀다. 서로를 노려보기만 할 뿐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치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진심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해 지는 모양이었다. 먼저 물러난 쪽은 놀랍게도 사부였다.
“좋다, 이번만큼은 노부가 양보토록 하마. 노부가 어쨌으면 좋겠느냐?”
“우선 그 흉험한 막대기부터 내려놓으시는 게 어떨까요?”
비류연이 제안했다. 그러나 결코 손에 들린 비수는 놓지 않았다. 약간만 방심해도 상황은 빛살보다 빠르게 역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 이다.
“쩝, 아직 만들고 한 번도 안 썼는데 좀 아깝지 않겠느냐?”
무척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사부가 말했다.
“전혀요.”
비류연이 대답했다. 저런 건 강호 평화를 위해서도 폐기시키는 게 옳았다.
“자, 버렸다. 이제 어쩌면 되겠느냐?”
납치범에게서 납치당한 술병을 구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부였지만, 좀처럼 빈틈이 나지 않았다. 범인은 두들겨 팰 수 있어도 술병의 안전까진 보장 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어떤 상태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텐데… 자신의 제자가 안 보이던 삼 년간 강해졌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가셔서 원래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세요.”
“앉았다.”
술을 코로만 마시는 사태만은 피하기 위해 사부는 시키는 대로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자, 이제 어쩌면 되느냐?”
“이렇게 하시면 되지요.”
어느새 주워 든 술잔 하나를 날려 보낸다. 천천히 느릿느릿한 속도로 허공을 날아간 술잔이 사부 앞에 놓인 탁상 위에 정확히 가서 멈추었다. 퐁!
어느새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간 비류연이 마개를 따고 술잔에다 술을 따랐다.
“……”
바로 옆에까지 다가갔지만 사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술잔에 차 오르는 황금빛 술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술잔이 빈틈없이 차자 사부는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최근 들어 마셔본 술 중 가장 맛있는 술이었다.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그 느낌. 천상의 물방울 같은 액체가 입 안 가득히 휘감기는 강렬한 자취를 남기며 목구멍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눈을 감은 채 사부는 그 맛과 향을 마음껏 음미했다.
탁!
한 방울도 남겨 있지 않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사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케도 노부 앞에 나타날 생각을 했구나?”
비스듬하게 앉은 채 시선조차 주지 않고서 노사부가 물었다. 물론 칭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피할 수 없으면 부딪치라고 가르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부셨죠.”
“그랬냐?”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인지 노사부가 반문했다. 그런 걸 귀찮게 일일이 어떻게 기억하냐는 얼굴이다. 저런 태평한 얼굴을 보면 왠지 모르게 열받고 마는 비류연 이었다. 남들한테 자신 또한 그렇게 비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자각하지 않는 게 또 비류연다웠다.
“그랬어요, 아마.도.”
그제야 노사부는 비스듬하던 자세를 바로 하며 제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비류연은 흠칫했다. 왜 그렇게 실실 웃고 계신 겁니까라고 묻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러야 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라는 속담에 대한 신뢰도를 다시 한 번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이지 않냐, 이 망할 제자야?”
뭐가 그리 좋은지, 좋을 것 하나도 없는데도 싱글거리며 사부가 말했다. 비류연이 말없이 아미산을 떠난 지 거진 삼 년 만의 일이었다. 역시 ‘웃는 얼굴에 침 뱉으 랴’라는 속담은 이제부터 ‘웃는 얼굴에 한 방 시원하게!’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맞지 않을 한 방을 날려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소치. 아 쉽지만 용천수처럼 솟아오르는 욕구를 억눌러야만 했다. 그러나 의지는 나가는 주먹은 멈출 수 있어도 움직이는 입은 멈출 수 없었다.
“안 반갑다니까요, 하나도!”
어쩐지 노안에 떠오른 그 미소에 약간 배알이 뒤틀린 비류연이 다시 한 번 퉁명스레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