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넘어
-연비, 마주치다
현재 연비는 돌로 만들어진 통로를 걷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결승 시합이 시작될 터였다. 그 시합에서 이긴 자만이 혈염제 칠상흔과 싸울 자격을 손에 넣을 수 있 었다. 그런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산책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 산책의 목적지는 바로 조금 후에 싸워야 할 상대가 대기하고 있는 대기실이었다. 전해줘야 할 전언이 있었다.
“전 지금 언니를 만날 수 없어요. 그러니 연비가 대신 제 말을 전해주세요.”
“결심을 굳혔군요, 린?”
“네.”
나예린, 그녀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움직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대화로 해결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연비가 생각하기에 아직 영 령은 본실력을 모두 보이지 않고 있었다. 곁에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과연 기본이 충실히 되어 있어서 그런지 영령은 모든 상대를 꺾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녀를 보좌하는 두 시녀 역시 시녀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중간에 약간 고전한 적도 있었지만, 승자는 언제나 그 녀가 속한 몽환삼영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선보인 검술들은 연비와 나예린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혹시나 영령의 검술에 검각의 특성이 묻어 나올까 유심히 지켜보던 두 사람은 허탕만 치고 말았다. 그리고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 시합을 맡을 사람은 나예린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연비 자신이 나설 곳은 없었다. 그래서도 안됐다.
연비는 버릇대로 몸의 기척을 죽인 채 걸었다. 대기실의 방문은 방문자를 거절하듯 굳게 닫혀 있었다. 물론 연비는 그걸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손을 들어 문 을 두드리려는 순간, 닫힌 문 저편에서 누군가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
연비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멈추고 호흡조차 느껴지지 않게 완전히 기척을 지웠다. 몽환삼영조는 세 사람 모두 여자였다. 게다가 영령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붙 어 있는 몽환쌍무는 윤 미소저 같은 여장 남자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연비는 청각을 극대화시켰다. 나무 문 한 겹으로는 자신의 귀를 막을 수 없었다.
‘칠상흔…… 반드시…… 비밀…….?
다른 건 전후 문맥을 알 수가 없어서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만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겠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사내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젊은.
‘누구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상당히 귀에 익숙했다. 그러나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을 기다립니다.”
이번 것은 영령의 목소리였다. 두 시녀는 인기척은 느껴지지만 침묵한 채다.
“요즘 들어 이상한 이야기들을 듣는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는 아가씨 이름이 분명 나예린이라고 했던가?”
나예린의 이름이 나오자 연비는 더욱 귀를 쫑긋 세웠다.
“……”
영령은 침묵했다. 그리고 말을 기다렸다. 다시 사내가 물었다.
“의심스러우냐?”
화들짝 놀란 영령이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당신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제 충성에 흔들림은 없습니다.”
“동요해도 할 수 없지, 인간의 마음이란 한없이 약하니까.”
낮은 한숨을 쉬는 듯했다. 그러자 영령의 안절부절못함이 문 너머까지 전해졌다.
“저의 마음은 강합니다. 그 정도 말에 흔들릴 일은 없습니다.”
“믿어도 되겠지, 영령?”
“물론입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영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주인으로서 명한다.”
“예, 당신의 종 영령이 명을 기다립니다.”
영령이 부복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잠시 침묵하더니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나예린을 죽여라!”
연비의 몸이 흠칫 굳었다.
“어느 놈이 감히!’
거대한 분노가 연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끓어올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이네 살리네 하며 날뛰는 얼치기 떨거지들은 그냥 코웃음 한 번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적당히 상황 봐가며 심심풀이로 손봐줄 수도 있었다. 그런 얼간이들에게는 분노조차 아까우니까. 하지만 나예린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용 납할 수 없었다.
“예린에게 상처를 주려는 자는 그 누구라도 해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신이나 부처나 악마라 해도.’
그것은 맹세와도 같은 결심이었다. 지금 당장 이 허약해 보이는 문을 반으로 쪼개고 안으로 쳐들어갈까 하는 마음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가까스로 억눌렀 다.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예린과 영령의 대결이 엉망이 되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영령도 흠칫한 듯했다.
“방해다. 그녀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자다. 반드시 죽여라. 다른 사람은 못 죽여도 빙백봉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할 수 있겠느냐?”
영령은 갈등하는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옛 마음이 남아 있는 건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정체불명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없다면 강요하지 않겠다.”
사내가 돌아서는 듯했다. 소리로 파악할 수 있었다.
‘강요하지 않긴. 그건 어딜 봐도 강요잖아! 나쁜 놈!’
협박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엄연히 협박은 성립된다. 은연중에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도 훌륭한 협박의 한 종류이며, 어떤 경우에는 더 악질적이기까지 하다. 안에 있는 사내놈은 진짜 못돼먹은 놈이었다. 연비는 이놈을 절대로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어찌하겠느냐?”
이 질문은 협박의 최종 마무리라 할 수 있었다. 이 협박에서 일종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이었다. 이제 영령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영령이 결심한 듯 대답했다.
“무엇을?”
사내가 반문했다.
“죽이겠습니다, 나예린을.”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허허…… 자, 이제 어쩔까나?”
이걸 조져 말어? 고민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문을 반쪽에 반쪽을 더해 네 쪽으로 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다시 인내를 발휘하고 손가락을 일곱 까지 꼽은 끝에 간신히 화를 억누를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이 끼어들 시기는 아니었다. 아직 나예린 스스로 매듭지을 일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정도로 아쉬울 뿐이었다.
그때 문 저편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 저 문이 열릴 터였다.
‘몸을 숨길까 말까??
연비는 잠시 갈등했다. 그러나 그 갈등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그냥 직접 면상을 보면 후려갈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한번 예의상 고민해 본 것뿐이었다.
“그래, 어디 낯짝 좀 보자.’
어떤 십장생인지 일단 봐둬야 나중에 빛을 정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지금 당장은 참지만 청산의 시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또다시 이성이 마 비되어 가는 것을 연비는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끼이이이익!
기분 나쁜 쇠 마찰음을 내며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를 호위하듯 반보 정도 떨어져 있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대동한 채. 그는 바로 ‘은명(隱名)’이었다.
끼이이이익!
녹슨 경첩이 마찰을 일으키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통로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 안으로부터 나온 두 명의 남자는 문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보란 듯이 당당히 서 있 는 검은 옷의 여인을 보고는 흠칫 몸을 굳혔다.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쏘아 보내는 시선에는 그런 내용이 담겨 있었다.
스윽!
은명은 애써 표정을 감추며 슬쩍 뒤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등에 헝겊으로 싸인 거대한 무기를 들쳐 메고 있는 사내는 바로 마검익 추명이었다. 지금 그의 얼굴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인이 중요한 기밀 이야기를 할 때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쫄따구 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볼 필요는 없어요. 그가 무능하다기보다 내가 너무 유능한 것뿐이니까.”
연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딱딱하게 굳어 있는 웃음이었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예의가 없는 분이시구려.”
잠자코 있던 은명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난 밖에 서 있었을 뿐인데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보기라도 했나요?”
“사람은 직접 보지 않아도 주변의 정황을 파악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추론 능력을 지니고 있소.”
“추론 능력은 무슨, 그냥 망상이겠죠.”
연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구시오?”
상당히 차분한 어조였다. 심적 당황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한 자제심이었다. 연비는 이 남자가 단순한 떨거지가 아니라고 판단 내렸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죠? 바보는 아닐 테니까.”
비꼬는 어투로 연비가 되물었다.
“감히!”
발끈해서 앞으로 나서려던 호위무사는 주인의 한 팔을 올라온 것을 보고는 다시 순한 양처럼 얌전해졌다. 저런 사나운 맹수를 손짓 하나로 부리다니. 그 훈련된 정 도와 즉각적인 복종을 본 연비의 눈에 잠시 이채가 어렸다.
“저건 그냥 떨거지네.”
연비가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별거 아니니까. 그것보다 정말 모르는 건 아니겠죠?”
잠시 고민하던 은명이 대답했다.
“음…… 물론 아니오. 하지만 본인이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내가 짐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 않겠소?”
그러자 연비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보단 나은 편이군요. 난 당신이 누군지도 짐작이 잘 가지 않으니까.”
“우린 초면이니 당연하오.”
차분한 어조로 은명이 대답했다.
“초면? 정말 초면인가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연비가 반문했다.
“물론이오. 왜, 이상하오?”
“분명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지금 유혹하는 거라면 바쁘니 그냥 포기하시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은명이 말했다. 그 말에 연비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그런 말 종종 듣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은명이 대답했다.
“그럼 저 안엔 무슨 볼일이 있었던 거죠?”
“아무 볼일도 없었소.”
“농담만 못하는 게 아니라 거짓말도 잘 못하는군요.”
“있었다 해도 말해줄 의무는 없소.”
그건 그렇군요, 라고 연비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누군지 물으면 알려줄 건가요?”
날카로운 시선으로 연비가 물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당연하오. 본인은 남에게 숨길 만한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소.”
“호오? 지은 죄가 없다라? 참으로 흥미로운 발언이군요. 정말 흥미로워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비는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도 여전히 은명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통성명이나 하죠. 천무학관에서 온 연비예요. 이번 결승전에서 저쪽 문 뒤에 있는 분과 싸워야 될 가련한 운명에 처한 사람이죠.”
“마천십삼대 제삼번대 대장 은명이오.”
그 말에 연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호, 소문의 대장님 중 하나를 이런 신기한 자리에서 다 만나게 되네요. 지금 이 순간 만나서 영광이라고 말해야 정확한 용법인가요?”
“꼭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소.”
“그것참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욕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있거든요. 좀 부끄럼이 많아서 항상 그런 말을 하려면 욕부터 나오게 되네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 연비도 웃고 은명도 웃었다. 하지만 공기만은 팽팽하게 당긴 활의 시위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들은 적이 있어요. 사천왕의 한 명인 북해왕이 바로 삼번대 대장 은명이라고요.”
하도 사천왕 사천왕이라고 해서 조사해 둔 바였다. 실력 위주의 마천각에서 대부분의 대장직을 무사부 급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대장 직을 맡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이 미욱한 자의 이름을 다 알아주다니 영광이오.”
은명이 짐짓 겸손한 어조로 인사했다.
“그래도 당신은 조금은 정상인 것 같군요? 난 사천왕이라 불리는 인간들은 다 변태에 미치광이인 줄 알았거든요?”
“동해왕의 일 말이오? 이야기는 들었소. 그 친구가 좀 이상하긴 하오. 인정하지. 그런데 직접 보니 확실히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려. 마천각에도 드세고 강 한 여자들이 많이 있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오.”
“원, 별말씀을.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뭐든지 물어보시오.”
선심 쓰는 얼굴로 은명이 말했다.
“우리 역시 구면 아닌가요?”
생글생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연비가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초면이오.”
시침을 뚝 뗐다. 그러나 연비는 물러나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 더 도발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아참, 내 입을 막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대환영이니까.”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 속에서 금빛이 요동치며,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건 지금 유혹이오?”
은명이 맞받아쳤다. 그러나 상대가 나빴다.
“해석이야 본인의 자유죠.”
여전히 입가에 맺힌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연비가 말했다.
“뭐, 하긴 댁은 여자 취향은 좀 유별난 데가 있는 것 같지만 말이에요. 예를 들면 한쪽 눈이 없는 미인이라던가, 아니면 원래 눈 두 개인 미녀의 한쪽 눈을 빼앗는 게 취미이던가?”
흠칫, 은명이 처음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반응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비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은명 안 에서 소용돌이치던 매서운 살기를.
그러나 상대가 살기 정도 뿜었다 해서 ‘앗, 뜨거라!’ 비명을 지를 연비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결판 봐도 좋아요.”
도발에는 도발로 대응하는 게 오히려 연비의 적성에 잘 맞았다.
“너무 자만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소? 보아하니 그렇게 상태가 좋은 것 같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오.”
‘쳇!’
연비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무리하게 기세를 끌어올린 탓인지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혀 나왔다. 보통 때라면 겨우 이 정도에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었다. 이게 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게 다 망할 사부 때문이라 생각하니 복장이 뒤집혀졌다.
그때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무슨 일로 남의 대기실 앞에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죠?”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바로 영령이었다. 그녀는 드러난 오른쪽 눈으로 매섭게 연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자신의 주인을 건드리느냐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볼일이 있는 건 나한테 있는 거 아니었나요? 저분하고는 볼일이 없었을 텐데요?”
“원래 그랬었죠. 다만 중간에 조금 다른 볼일이 생긴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빨리 용건을 끝내고 사라져 주겠어요? 다음 시합을 앞두고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군요. 아니면 이길 자신이 없어서 일부러 정신 사납게 하러 온 건가요?”
“물론 아니죠. 나한텐 확실히 처리해야 할 용건이 있어요. 걱정 말아요. 용건만 마치고 돌아갈 거니까.”
“용건?”
연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드시 돌려놓겠어요, 언니!’라고 전해달라더군요.”
연비와 영령의 시선이 허공에서 한데 뒤엉켰다.
“누구의 전언이죠?”
영령은 알면서도 물었다. 연비는 그녀가 알고 있다는 걸 알지만 말해주었다.
“당신이 죽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죠.”
그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어 순식간에 영령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연비는 다시 은명과 그의 호위를 바라보았다. 그 호위는 연신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명령 만 내리면 언제든지 저 건방진 계집을 토막 내버리겠다고 너무 티나게 외치고 있었다.
“이거 하나만 말해두죠.”
“하시오.”
침착한 어조로 은명이 대꾸했다.
“당신들은 절대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을 거예요, 절대로.”
그러자 은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구려.”
“모르겠다고요?”
“모르겠소.”
은명은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연비가 못 박듯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우리 둘 모두.”
그리고는 깜빡 잊었다는 듯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참, 그리고 밤에 조심하세요.”
은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검익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그건 무슨 의미요? 설마 나 삼번대 대장 은명에 대한 협박이오?”
그러자 연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저 이불에 지도를 그릴까 봐 그런 것뿐이에요.”
“……?”
그러자 연비의 입가에 ‘씨익’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왜 옛말에도 있잖아요? 불놀이를 좋아하면 밤에 자다가 오줌 싼다, 등등등의 이야기요.”
살짝 움찔했다. 연비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지켜보았다.
“여전히 남이 못 알아먹을 말만 하는 사람이구려.”
다만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마검익만이 사나운 눈초리로 연비를 노려봤을 뿐이었다.
“그럼 실례.”
연비는 그 말만을 마치고 뒤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 등은 마치 용기가 있으면 찔러보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마검익은 그 유혹을 이기기 힘든 모양이었다. 여기서 처리한다 해도 문제없었다. 시체 처리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었다.
“주군!”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위험합니다, 허가를 그의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아서라. 저 무방비한 등을 보고도 모르겠나? 먼저 움직이면 죽는 건 자네가 될지도 몰라. 그리고 난 주군이 아니라 대장님이다.”
“예, 대장님!”
은명은 이제는 통로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 연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을 빛냈다.
“연비라…… 기억할 만한 이름이 하나 더 늘었군. 도대체 누구지? 저런 실력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사문을 짐작할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알기로 저렇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실력자는 화산에서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그 재수없는 ‘앞머리 치 렁치렁’뿐이었다.
“철저히 감시하도록.”
“존명.”
대답은 바로 돌아왔다.
“저…… 그런데 대장님?”
거의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마검익이 은명을 불렀다.
“뭐냐?”
많은 사념이 왔다 갔다 하던 은명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여자…….”
슬쩍 돌아본 마검익은 무척 심각한 얼굴이었다.
“뭐라도 아는 바가 있느냐?”
그러자 마검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게 저…… 예쁘네요.성깔도 있고.”
딱 제 취향입니다, 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진 은명이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니 그의 눈은 어느새 약간 맛이 가 있었다.
“……”
은명은 자신의 부하 복과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잠시 고민하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 취향 한번 고약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