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전
-패다. 맞다
“이번 시합의 대장은 바로 린이에요. 전 이번에 차선을 맡겠어요.”
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연비는 ‘미소저 연대’의 우승을 위해 그렇다할 만한 활약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대기석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가끔 투기장 한 가운데 나가는 일은 있었어도 간단하게 항복하고 들어오는 게 다였다. 묵룡환의 한쪽 봉인이 풀린 관계로 되도록 힘을 쓰지 않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도 탈락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과 감각을 노력으로 연마하여 이제는 검술이 경지에 이른 빙백봉 나예린과 최근 몇 년 사이 수많은 경험을 거치며 많은 발전을 이룬 윤미가 노력해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조금 전 상대편 대기실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도 있는지라 가만히 있을 수 가 없었다.
“괜찮겠어요?”
이번 시합 방식은 삼판이승제가 아니라 상대편을 모조리 패퇴시키는 쪽이 이기는 생존전이었다.
“물론 괜찮고말고요. 날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연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무대를 만들어놓겠어요. 그러니 린은 오직 전력을 다할 생각만 하세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연비? 만일 제가 지면요?”
그 전법을 택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나예린의 검, 하나에 건다는 것이었다.
“제가 여기서 지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가요.”
“어머, 질 생각이었어요, 린?”
“아뇨. 물론 그건 아니죠.”
그녀는 연비는 물론이고 영령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길 생각이었다. 검으로 먼저 영령을 꺾지 않는 이상 자신의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잃어 버린 영령의 기억을 이번 싸움을 통해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품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요. 여기서 지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몰라요. 린이 좋아하는 독고 사자의 기억을 되찾을 기회가 말이에요.”
“그건 그렇지만.
그러자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연비가 나예린을 꼬옥 끌어안았다.
“난 린을 믿어요. 그러니 린도 자신을 믿어요.”
이렇게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연비가 너무나 고마웠다. 감동한 나예린이 와락 연비의 몸을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연비. 정말 고마워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연비가 약간 당황한 어조로 대답했다.
“답답해요?”
“뭘요. 이건 이것대로 좋네요. 하나도 안 답답해요, 하나도.”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며 연비는 나예린의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그자들의 뜻대로 일이 풀리게 둘 수는 없지. 그들이 무슨 계책을 쓰든 그들은 절대로 린에게 해를 끼칠 수 없어.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아.’
그러기 위해서라도 청소는 필수였다. 안 그래도 유난히 긴장되고 심적 부담이 많은 싸움이었다. 무슨 실수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승패의 향방이 전적으로 검술 실력에 달려 있는 시합이 아니라 더욱 그러했다. 영령과 싸우기 전에 예린이 쓸데없는 힘을 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불안 요소는 최대한 배제해 놓는 게 좋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안한 말이지만 윤 미소저는 조금 안심이 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만났던 은명이란 사내의 일도 있고, 이 일만큼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자, 그럼 대망의 준결승전을 시작하겠습니다. 특이하게도 준결승에 오른 두 조 모두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조입니다. 아아, 같은 사내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강호에 새로운 여고수의 바람이 불어닥칠 것인가? 우리는 그 현장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시합에서 이긴 조가 그와의 대결에서 살아남 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 시합에서 이긴 조는 드디어 그 무시무시한 혈염제 칠상흔과 대결할 자격을 손에 넣게 됩니다!”
해설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원통투기장 안 역시 떠나갈 듯한 함성에 묻혀 옆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사실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뜨거워진 열기에 취해 소리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요. 저곳에 언니가 있어요.”
상대 쪽 대기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예린이 말했다. 드디어 조금 있으면 독고 사자와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독고령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전히 의심치
않고 있었다. 이제 그것을 증명할 때였다, 독고령 본인에게.
“그럼 제가 먼저……”
먼저 일어선 것은 언제나 그렇듯 여장한 윤준호, 윤미 소저였다. 그러나 윤미는 두 발자국째를 떼지 못했다. 제지한 사람은 연비였다. 이런 일이 없었기에 윤미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이 선두에 서서 사람들의 힘을 빼고 사실 거의 그 혼자서 해결했다 그다음 어쩔 수 없을 때는 나예린이 나섰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시합 내내 안색이 좋지 않던 연비는 조용히 대기석에 앉아 있었을 뿐이다. 많은 강자들을 오직 두 사람의 힘으로 꺾어온 것이다. “윤 미소저는 좀 쉬어요.”
“연비, 괜찮겠어요? 당신도 쉬어야 돼요. 아직 내상이 다 낫지도 않았잖아요?”
“어, 눈치 채고 있었어요, 린?”
“그 정도는 당연히 누구나 예상할 수 있어요. 안색도 굉장히 안 좋고 땀도 조금씩 흘리고 있잖아요. 전혀 평소의 연비답지 않아요.”
“이런이런, 들켜 버렸네. 아직 연기가 많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별로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의 어머니 빙월선자 예청과 싸울 때의 후유중인지 연비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오른팔은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도 왼손으로 오른팔을 움켜잡고 있었다. 분명 괜찮을 리 없었다. 단지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내가……?”
그러나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리며 나예린의 입술을 막은 연비는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예린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싸움에 집중해요. 그 무대는, 그곳으로의 길은 내가 뚫어놓을 테니까요. 뭐, 왼팔 하나로도 충분해요. 오히려 넘칠 정 도인걸요. 오른팔을 쓸 일은 없을 거예요.”
연비는 현천은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투기장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갔다. 그곳엔 이미 몽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이었다. 자기 자리에 도착한 연비는 몽무를 한번 보고 다시 한 번 대기석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무와 영령을 바라보았다. 잠시 영령에게 시선을 맞추던 연비는 이윽 고 환무를 본 다음 다시 몽무를 바라보았다. 왜 저럴까? 몽무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아가씨, 아가씨 혼자선 불가능해요. 그러니 친구 한 명 더 부르도록 해요.”
연비가 웃으며 조언해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찮으니깐 한꺼번에 덤비라는 얘기예요.”
“왔네요, 큭큭.”
연비는 환무가 올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그 모습은 무척 태평해 보였다.
“우릴 무시하는 겁니까?”
몽환쌍무 중 냉정한 축에 속하는 환무가 물었다.
“아니, 난 단지 린의 싸움에 아무도 방해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한 번 휘둘러서 해결할 일을 두 번 휘두르고 싶지도 않고.”
“우릴 단 일 초에 제압할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돼. 웃기지 마!”
성질 급한 몽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채통을 지켜라, 몽무.”
옆에서 환무가 한마디 했다.
“어라, 그렇게 들었어요? 의외로 이해력이 좋은데요? 아, 이거 분명 칭찬이니깐 좋아해도 좋아요.”
연비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몽환쌍무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기쁠 리가 없으니까.
“후회하지 말아요.”
“아, 그건 너무 진부한 대사네요.”
원래 흑도의 사람들은 효율을 중시하기 때문에 둘이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어리석게 차버리거나 하지 않았다. 건방지게 군다면 둘이서 본때를 보여주면 될 일이 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고 목을 조르겠다는데 못 도와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파놓은 무덤을 흙을 덮고 목매달 줄의 탄성을 보다 팽팽하게 하는 일을 못 도와줄 이 유가 없었다. 그녀들은 그 일들에 대해 언제나 적극적으로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제안을 하나 하죠. 그쪽이 둘 기권하면 이쪽도 마지막 한 명만 남기고 둘은 모두 기권하죠. 어때요, 이 조건이?”
연비가 기발한 생각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웃기지 마! 우리가 왜 그래야 되지?”
성격 급한 몽무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그야 내가 지금 좀 귀찮으니까 그렇죠. 사실 지금 몸이 안 좋아서요. 싸우기 매우 귀찮거든요.”
함부로 진기를 사용하면 좋지 않았다. 찰랑찰랑 지금 연비의 몸은 주둥이까지 꽉 찬 술잔처럼 넘치기 반의 반보 직전이었다.
“뭐야? 달거리 중이야?”
사실 월경은 무슨 중요한 행사 날이라거나 결승전이라는 이유로 비켜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고통은 아마 연비는 평생 알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라, 여자들이 못하는 말이 없네요. 부끄럽게.”
“뭐, 어때서. 너도 여자잖아?”
“어쨌든 내 제안 어때요? 빨리 답변을 줬으면 좋겠는데요?”
연비가 대답을 재촉했다.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줘야지. 하지만 역시 안 되겠어.”
“왜죠?”
“우린 아가씨의 충실한 시녀이기 때문이지.”
“호오? 충실한 시녀라? 성실한 감시자가 아니라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연비가 물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몽무가 버럭 소리쳤다.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죠? 어디 찔리는 데라도 있나요?”
“찌, 찔리는 데 따윈…….”
그러나 몽무의 말을 자르며 환무가 앞으로 나서며 짧게 말했다.
“없다.”
시끈거리는 몽무가 뭐라 더 쏘아붙여 주고 싶은 듯했으나 환무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우린 기권하지 않아. 아가씨까지 나설 것도 없지! 너뿐만 아니라 저기 남은 두 사람까지 모두 우리가 처리해 주마!”
몽무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건 절대절대절대 불가능해요. 그러니 말하지 않는 편이 나아요. 자기 주제 정도는 알고 있어야 생활에 불편함이 없지 않겠어요? 너무 이것저것 재지도 않고 기 분 따라 큰소리 떵떵치는 것은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요.”
사람 좋아 보이는 방긋방긋한 미소를 지으며 연비가 말했다.
““너, 너, 너…….”
몽무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어머, 내가 너무 정확한 말을 해서 반박할 말도 찾지 못했나 보네요? 하긴 그러니 옆에 머리 좋아 보이는 친구가 따라붙어 있는 거겠지. 당신 주인도 정말 골치 아 프겠어요. 한 짝으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일일이 두 짝을 맞춰서 내보내야 하니 말이에요. 마치 젓가락 같군요.”
연비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한마디 한마디가 몽무의 속을 긁어놓는 것이었다. 연비가 입을 열 때마다 몽무의 얼굴을 붉게 변했다 푸르게 변했다를 반복했 다. 더 이상 몽무에게 맡겨놓았다가는 되는 일도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다시 환무가 앞으로 나섰다.
“와라!”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 짧았다.
“정말 기권 안 하는 거예요? 후회할 텐데?”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하아, 정말 유감이에요. 아아, 힘쓰기 싫었는데…. 적당히 할 수 있을지도 장담 못하겠고.. 유능한 사람은 참 이래저래 고민거리가 많단 말이죠.” 하지만 앞으로 무대에 오를 린을 위해 청소는 꼭 해두고 싶었다.
“방금 그 선택 후회하게 될 거예요.”
“누가 후회할지는 두고 봐야겠지.”
“두고 볼 필요도 없어요. 못 믿나 본데 틀림없어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리고 누구의 말마따나 기적은 세상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겉으로는 태연한 척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연비의 가슴속에는 지금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만일 예린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존재라면 비록 여자라 해도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싸움은 연비 자신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린의 싸움이었다. 자신은 이 싸움에 약간의 조언 이외에는 어떠한 개입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전적으로
사자매 간의 문제였다. 두 사람의 풀 매듭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약간 무리를 한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살짝만 힘을 쓰면 괜찮을 거야, 살짝만.’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긴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은 기만이라는 것을. 이럴 때는 너무나 냉정한 판단력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그냥 대충대 충 묻어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역시 괜찮진 않겠지.’
“가자, 몽무! 몽환쌍무진이다.”
그때 환무가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물론이지. 그것밖에 없지. 박살 내버리자고, 환무!”
신이 난 몽무가 외쳤다. 상대 역시 준결승까지 올라온 강자. 힘을 아껴두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 오른손을 제대로 못 쓰는 상태라 어찌 될지 모르거든요.”
연비가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팔병신이 왜 나온거야?”
몽무가 거칠게 소리쳤다. 좀 더 우아하게 말하라는 환무의 주의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어라, 말을 참 발랄하게 하시는 아가씨네. 봐요, 오른팔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어요. 다만 조절이 안 될 뿐이지. 그러니 죽지 않게 조심해 줘요. 자칫 잘못하면 진 짜로 죽여 버릴 것 같거든요.”
순간 몽환쌍무는 오싹한 살기에 전율했다. 그 무형은 살기는 번쩍이는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드러났다가 환상처럼 사라졌지만, 그 살기에 순간적으로 노출된 것만 으로도 두 사람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살기의 진원지는 지금 짙은 웃음을 머금으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자비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 본인으로서도 확신이 서지 않거든요.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연비가 보기에 유일한 피해자는 영령뿐이었다. 그 나머지는 다 공범자이자 가해자일 뿐이었다. 가해자에게 베풀 아량 따위는 연비에게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지금은 겉보기엔 확실히 여자. 사정을 두지 않아도 거리낄 게 별로 없었다.
몽환쌍무 두 사람이 함께 펼치는 합격술인 몽환쌍영무에는 독특한 최면 효과가 있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특수한 가루를 사용하고, 특수한 동작과 특수한 소리를 이용해 상대의 정신을 교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협공에 걸려든 사람은 혼란 속에서 자신이 언제 당한지도 모르고 당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 차려보니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라는 상황이 전개되어야 보통인데 이번 상대는 달랐다. 연비는 두 사람의 끈질긴 환영술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 고환무의 침술이나 몽무의 관절기가 먹혔나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라, 지금 장난치는 건가요? 좀 더 진지하게 해보~아~요.”
연비는 손바닥에 묻힌 흙이라도 터는 듯한 동작으로 두 사람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몽환쌍무가 아무리 용을 쓰고 공격해도 연비의 주변에 펼쳐진 보이지 않 은 간합 안으론 진입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그들의 발길, 손길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몰래 사용하는 꼼수도 지금은 통하지 않았다.
“벌써 밑천이 드러난 거면 재미없는데.”
연비가 씨익 웃었다. 무서운 웃음이었다. 연비의 입가에 짙게 번져 나가는 미소에 깃든 살기를 두 사람도 읽은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두 사람 이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들을 가지고 논 사람은 연비였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비는 굉장히 분노하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몰라!’
생생한 위기감이 느껴지자 두 사람은 부르르 떨었다.
“자, 용케도 아직 자비가 남아 있군요. 여자로 태어난 걸 행운으로 여겨요. 보통 이런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여전히 쏟아지는 몽환쌍무의 연환공격을 튕겨내며 연비가 말했다.
“무슨 소리냐?”
그건 다음과 같은 소리였다.
“이지선다예요.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되거든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본인들의 선택을 존중하도록 하죠. 이토록 친절한 자비는 드물다고요. 자, 그럼 보기 나갑니다. 아프진 않지만 뒤지실래요, 아니면 뒤지게 많이 아파도 살래요?”
둘 다 뒤짐이지만 선택할 수 있는 뒤짐은 하나뿐이었다.
“그야 물론 뒤쪽.”
이라는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연비의 몸이 움직였다. 어느새 접힌 현천은린이 두 사람의 몽환쌍무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는 공포의 매타작이 시작됐다. “주먹으로 때리는 건 너무 야만적이니깐.”
나름대로의 배려였는 모양이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은 배려였다.
투닥투닥! 퍽퍽퍽!
옆에서 보기에도 상당한 장면이었는데, 만일 때리는 쪽이 남자였다면 주변에서 맹비난이 쏟아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성이 여성을 때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그들은 잘 몰랐다. 그래서 연비는 잠깐 동안이지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매타작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얼굴은 때리지 않았어요. 많이 아파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억수로 뒤지게 아팠다.
“어버버버.”
바닥에서 벼락 맞은 새우처럼 허리를 접은 채 꿈틀거리고 있는 두 사람은 그런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못할 지경인 것이다. 연비도 멀쩡하지 는 못했다. 순간적으로 내공을 격발해 쓰는 바람에 기혈이 제멋대로 뒤엉키려 하고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훔쳐 내며 연비가 차갑게 말했다. “지금 그 고통, 잘 기억해 둬요. 만일 예린의 몸에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지금 느낀 그 고통의 천 배, 만 배, 억 배 느끼게 해줄 테니까. 물론 당신 둘만이 아니에요. 그 은명이라는 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그 위에 또 누가 있다면 그놈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현명하게 행동해요. 다음번 택할 행동이 당신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최후통첩 겸 마지막 경고였다. 그 말을 끝으로 연비는 파리한 안색을 한 채 자신의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나중에 퍼뜩 정신을 차린 미성공자 유진이 연비의 승리를 높이 외칠 때까지 말이다.
뒤늦게 울려 퍼진 함성을 뒤로한 채 연비는 나예린과 연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앉아 있는 대기석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새총 맞은 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어요?”
“그게 저…….?”
“그, 글쎄요, 그게 왜 그럴까요?”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두 사람 역시 연비가 보인 과격한 행동에 깜짝 놀란 모양이다. 솔직히 이번 연비의 손속에 우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었을까요?”
조심스러운 어조로 나예린이 물었다.
“전혀요.”
연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조용히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연비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두 사람은 알 수 없었 고, 연비도 말하지 않았다.
“자, 이제 린 차례예요. 가서 자신의 손으로 매듭짓고 와요. 난 여기서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