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대검
-생소함과 익숙함
검을 빼어 든 영령의 모습은 너무나 생소해 보였다. 무인은 입으로보다 검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게 마련이다. 특히 검술을 비롯한 모든 무공은 하루아침에 이루 어지지 않는다.
검사의 검끝에는 그 사람의 세월이 축적되어 있게 마련. 검객의 검날은 세월로 벼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검을 뽑아 든 영령의 모습은 익숙 해야 함에도 너무나 달라 보였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이 처음 취한 자세처럼 굉장히 생소했다. 하지만 나예린은 자신의 추측을 없던 것으로 돌릴 마음이 추호도 없 었다. 검을 빼 든 영령의 자세는 굉장히 생소했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았다. 그녀의 기수식에는 쏟아 부은 세월로써 획득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지 않았다. ‘그것 역시 확인해 보면 될 일!’
만일 저 자세조차 덧씌워진 것이라면 그녀가 할 일은 단 하나, 그 꺼풀을 힘으로라도 벗겨내는 것뿐이었다.
영령은 나예린과 정반대였다.
나예린이 영령의 자세에서 생소함을 느끼며 당황하고 있을 때, 영령은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끼고는 당황하고 있었다. 검을 빼 든 나예린의 모습이 굉장히 익숙했 다. 단지 눈으로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몸 전체로 느끼고 있었다. 마치 눈앞 상대의 버릇마저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저 사람하고 싸우는 건 처음일 텐데? 처음 검을 나누는 것일 텐데 왜??
잡심을 털어내려는 듯 영령은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쳤다.
ᅳ첫 초식은 왼쪽 어깨 쪽.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나예린이 보법의 첫 보를 밟자마자 영령의 몸은 이미 반사적으로 왼쪽 어깨를 뒤로 빼고 있었다. 다음 순간, 차가운 한기를 품은 검날이 영령의 왼쪽 어깨가 있던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더없이 명징할 정도로 깔끔한 일검이었다.
영령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놀라기는 나예린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이 일초가 날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몸을 피했던 것이다.
“노, 놀랄 것 없어. 그런 허술한 일초 따윈 뻔히 보이니까!”
그러나 큰소리친 만큼의 자신감은 없어 보였다.
‘거짓말!”
영령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나예린은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나예린은 시험 삼아 다시 세 개의 초식을 연달아 펼쳤다. 자신이 독고령과의 비무에서 즐겨 쓰던 조합이었다. 영령은 마치 그 궤도를 예측하고 있기라도 하듯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나예린의 검을 피해냈다. 자신의 공격이 연속으로 실패했지만, 나예린은 기뻤다.
‘연비 말이 맞았어!’
“역시 당신은 독고 사자가 틀림없어요!”
나예린의 외침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아니요. 당신이 제 검을 그렇게 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는 게 바로 그 증거예요. 왠지 모르게 제 검이 파고들어 올 부분을 알고 있었죠?”
“그, 그걸 어떻게?”
확실히 어떤 예감 같은 감각을 본능적으로 따른 결과 영령은 나예린의 검초를 모두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해요. 방금 제가 사용한 초식은 독고 사자와의 대련에서 즐겨 사용하던 초식이었으니까요.”
검각의 검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었다.
검각의 제자로 입문하여 맨 처음 검을 들었을 때 배우는 ‘작은 새의 날갯짓’을 시작으로 한 소안검, 그리고 소안검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면 배울 수 있는 조금은 우아하고 시원시원한 ‘비홍검’, 그리고 그중에서 선택된 재능을 가진 극소수의 제자들만이 특별히 배움을 허락받는 검각의 독문검법이자 검후의 성명절기인 ‘한상 옥령신검’, 이렇게 총 세 단계였다.
소안검은 움직임 작은 대신 날렵하고 빈번하다. 비홍검은 움직임이 크고 시원시원하면서도 우아하다. 검을 한 번 움직일 때 크게 움직이며 그만큼 위력적이다. 이 세 종류의 검법에는 각각의 특징이 있다.
나이 어린 소녀들이 처음 배우기에는 소안검이 적당하다. 처음부터 성장기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검술을 배우다 보면 몸이 먼저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내아이보다 여자 아이의 몸이 더 섬세하게 마련이다. 때문에 검각에서는 검술을 세 단계로 나누어 차근차근 검에 몸이 적응하여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린 나이에 입문한 검각의 제자들이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배우는 것은 ‘소안검’이었다. 나예린과 독고령은 물론이거니와 검후조차도 이 소안검으로부터 검의 길을 시작했다. 이 소안검이야말로 검각의 기초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과거 상처 입고 검각에 들어온 어린 나예린에게 집 중적으로 소안검을 가르쳐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독고령이었다.
나예린의 손을 잡고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 주던 독고령의 손길, 그 따뜻함을 나예린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제발 기억해 내요, 언니! 제발! 이 검초들, 우리 두 사람의 추억이 어려 있는, 함께 시간을 공유했던 이 초식들을 기억해 내요. 이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 방향, 분 명 언니는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머리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몸은 절대로 이걸 잊을 수 없어요. 왜냐면 검각의 검을 그토록 사랑하던 언니니까요. 사부님을 그토 록 존경하던 언니니까요.’
그녀가 지금 펼치는 소안검은 저게 진짜 기초 검법인 소안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서려 있었다.
일부러 평소의 약속 대련 때처럼 똑같이 공격해 보라고 그녀에게 조언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연비였다. 그런 다음 유심히 반응을 살펴보라고 했다. 만일 상대가 진짜 독고령이라면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고. 연비의 말대로 영령의 몸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비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더욱 부정하겠죠.”
나예린의 검초에서 너무나 익숙하고 정겨운 느낌을 발견한 영령은 당황했다. 증오스러워야 마땅한 검각의 검법에서 정겨움을 느낀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이 야기인가! 그런데도 이 지독하게 익숙한 감각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파악되는 검의 흐름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령은 다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이건 함정이야, 나를 속여 넘기려는. 그러니 넘어가면 안 돼!’
영령은 자신의 느낌을 부정했다.
“흥, 말도 안 돼! 그런 속임수 따윈 믿지 않아!”
“믿어야 해요, 그게 사실이니까.”
“흥, 아무런 증거도 없는 사실 따윈 사실이 아니야!”
어떤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의 영령에겐 아무 소용도 없어 보였다. 영령은 강경하고 또 완고했다. 왜 아직도 미혹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인가! 너무나 안 타까운 나머지 나예린은 화가 났다. 화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 때를 놓치지 않고 영령이 검초를 전개했다.
기묘한 검초였다. 소리가 들리는 쪽에서 검이 날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리로 궤적을 파악하려던 나예린은 그만 낭패를 보고 말았다. 몇 군데 옷자락이 잘려 나 간 것이다. 천부적인 예민함이 없었다면 베인 옷자락에 이미 피가 스며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 검법의 이름이 뭐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나예린이 물었다.
“몽환산장의 비전 ‘몽환사령검법’이다! 결코 너희 검각의 검에 뒤지지 않는 검법이지.”
‘너희’라는 말에 나예린은 가슴이 아릿했다.
“너희라니요. 그런 슬픈 말씀 하지 마세요! 검각의 검은 저의 검일 뿐만 아니라 언니의 검이기도 해요.”
“그럴 리 없다. 난 검각을 증오해. 왜냐하면 나의 한쪽 눈을 빼앗아간 것은 바로 너희 검각 사람들이니까.”
“아니에요, 언니. 그건 오해예요.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요. 언니는 지금 속고 있어요, 바로 저들에게!”
나예린이 손가락으로 몽환쌍무를 가리키며 외쳤다.
“닥쳐! 더 이상 산장을 모욕하면 용서치 않겠다!”
분노에 찬 영령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 지르며 삼 초를 연거푸 펼쳤다. 나예린은 계속 물러나기만 했다.
평소의 대응보다 반 호흡 정도가 늦는 것을 본 연비는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는 좋지 않았다. 빨리 본래의 나예린, 그녀 자신의 호흡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나예린은 예전에 알고 있던 독고령을 자꾸만 지금의 영령에게 대입하려고 하는 바람에, 그 차이에 의해서 대처가 조금씩 늦어지고 있었다. 나예린이 알고 있는 그 녀와 지금의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달랐다.
‘과거의 그림자에 맞춰봤자 현재를 이길 수는 없어.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맞는 대처가 필요해!’
나예린은 잠시 예전의 독고령은 잊기로 했다. 그리고는 지금 눈앞에 있는 영령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수많은 정보들이 나예린의 용안을 통해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영령이 검을 잡는 방법, 검의 궤적,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가슴의 움직임, 호흡, 땅을 딛 고 있는 발자국의 모양, 미세한 무게 중심의 변화 등등등. 그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며 지금의 영령에 대한 ‘상(像)’을 잡아갔다. 그것은 곧 영령이란 대상에 대한 정 밀한 분석이기도 했다.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써서라도 나예린은 이길 생각이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영령이 펼치고 있는 ‘몽환사령검법은 허초와 실초의 구분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검초였다. 특히 소리와 검의 궤도가 괴리되어 있는게 그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기묘막측한 검법이긴 했으나 잡스러움이 많았다. 무엇보다 잔재주에 의지하는 경향이 짙었다. 소리의 속임수는 아무래도 검에 만들어 넣은 특수한 장치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속성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올릴 수 있는,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결코 올라갈 수 없는 그런 검법이었다. 분석이 끝났다.
“좋아요. 증명하라면 해드리죠. 바로 언니 자신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나예린은 하얀 검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에 진기를 더욱 강하게 주입시켰다. 그녀의 애검 ‘빙루’에서 차가운 빙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예린이 본격적으로 검을 개방한 것이다.
“갑니다.”
새하얀 얼음 깃털을 가진 봉황의 춤이 시작되었다. 백색의 검날이 춤을 췄다. 아름다운 춤사위였지만, 그 위력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