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14화 – 검각의 검

랜덤 이미지

비뢰도 24권 14화 – 검각의 검

검각의 검

-몸의 기억

“언니가 다른 모든 것을 잊어도 이 초식만은 잊을 수 없어!’

한상옥령신검의 기수식을 취하며 나예린은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치려고 하는 초식은 이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거대한 벽이었다. 이 초식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 그녀들은 그저 햇병아리였을 뿐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초식을 터득하 고 합격점을 받았을 때, 그녀들은 스스로의 날개로 날 수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와 무게를 지닌 초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배우고, 함께 고생하고, 함께 깨우치기 위해 몇 달을 고려해야 했던, 한상옥령신검의 오의 ‘한빙섬옥’을 떠올렸다. 그 초식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의 시간을 보냈던가. 보통 검초의 빠르기에 치중하면 정교함과 복잡함이 떨어지고, 정교함과 복잡함을 추구하면 빠르기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오 의(義) ‘한빙섬옥(寒氷閃玉)’은 초식의 정교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빠름을 극대화하는 초식이었다. 빠름과 정교함이 균형을 이루는 완벽한 균형 상태를 만들 어낼 수 있어야만 이 오의를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엄청난 반복 수련과 끝없는 도전이 필요했다. 이 초식은 일종의 관문으 로, 여기서 이걸 익히지 못하고 꺾이면 영원히 한상옥령신검을 전수받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야말로 사람의 능력을 한계까지 짜내게 만들어 더 이상 할 수 없다 는 곡소리가 나오게 만드는, 검각 내에서도 악명 높은 초식이었다. 그래서 붙은 별칭이 ‘통곡오의(痛哭奧義)’였다.

나예린은 그 통곡오의를 익히기 위해 과거 독고령과 함께 노력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독고령의 왼쪽 눈 사건이 있은 후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소 원해져 있던 때이기도 했다.

“린아, 넌 왜 혼자니?”

“전 혼자가 편합니다, 사부님.”

“쯧쯧, 마음을 좀 여는 듯하더니 다시 제자리로구나. 령아는?”

“독고 사자는 저 따위한테는 관심없어요. 사자의 마음은 지금 어두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직접 물어봤니?”

“…….”

“또 능력을 썼구나.”

“……”

“하아, 그럼 너희 둘 다 그 초식을 익히기는 그른 듯하구나.”

“어째서죠?”

“한 손으로 박수 소리가 나겠느냐? 그건 혼자서는 익힐 수 없는 초식이란다. 서로가 서로의 도약대가 되어주지 않는 이상 영원히!”

찰나의 회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예린은 힘껏 검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너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살짝 힘을 뺐다. “사부님, 저에게 힘을!’

한상옥령신검(霜玉靈神劍) 오의(奧義).

한빙섬옥(玉).

무수한 물새의 날갯짓 같은, 눈부시게 화려한 검기가 영령을 향해 압도적인 위력으로 펼쳐졌다.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검기의 위력에 기겁한 영령은 몽환사령검법 을 필사적으로 펼치며 날아오는 초식을 막아낸다. 나예린의 검초는 상대의 수를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 매우 정밀하고 복잡한 변화를 일으키며 조금씩 조금씩 영 령을 압박해 들어갔다. 영령은 나예린의 검세에 밀려 계속 뒷걸음질치기만 했다. 처음으로 자신이 생사의 경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영령은 자신의 등줄기 를 타고 한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 막을 수 있나요? 나의 검초를?”

쉴 새 없이 영령을 압박해 들어가며 나예린이 외쳤다. 복잡화려하면서도 정교한 검세에서 천지를 얼려 버릴 듯한 겨울의 한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막을 수 있나요?

영령은 뒷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맴돌았다다. 무언가가 뇌리 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생사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긴장 상태 때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참지 못한 영령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나예린의 검세를 막아내는 영령의 검초가 변했다.

쏴솨솨솨솨솨솨솨! 파바바바바바바밧!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섬광 같은 검기가 한상옥령신검의 화려한 검세를 찢으며, 거친 물살을 거스르는 물고기처럼 앞으로 나아왔다. 특정한 틀 속 에 갇힌 검초는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것이 빠르다는 사실에 대해 부정할 수 없었다.

“저, 저거 괘, 괜찮을까요?”

깜짝 놀란 윤미가 외쳤다. 그러나 연비는 침착했다. 아직 나예린에 대한 믿음은 흔들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난 오히려 린의 생각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요?”

“십중팔구. 저거 봐요, 저렇게 반격당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표정은 밝잖아요?”

연비의 지적은 정확했다. 나예린은 지금의 이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영령의 몸에 기억되어 있는 ‘과거이자 개인의 ‘역사’였다. 본인이 그렇게 힘겹 게 노력하여 쌓아놓은 공적(功績)은 비록 머리는 잊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는 법이다.

“독고 사자, 기억나요, 우리가 이 한빙섬옥을 연마했을 때를? 그때도 저는 정교함으로 빠름을, 사자는 빠름으로 정교함을 제압하기 위해 노력했었죠. 지금처럼 말 이에요. 비록 기억이 뒤바뀌었다 해도 언니의 몸은 그 피와 땀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어요! 이래도 자신이 검각의 제자 독고령이 아니라고 부정할 건가요? 이 수련법 을 아는 사람은 검각의 제자 중에서도 ‘신검(神劍)의 입문자(入門者)’들뿐이에요. 몽환산장의 몽영령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수련법이죠!”

나예린의 말이 뇌성벽력처럼 영령의 심신을 뒤흔들었다.

‘난 누구지?’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샘솟았다.

한상옥령신검 오의 ‘한빙섬옥’을 익히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했다. 한 사람은 정교함으로 빠름을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빠름으로 정교함을 공격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성질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균형’과 ‘조화’를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어려웠기에, 거의 포기할까 생각했던, 눈앞에 넘을 수 없는 벽이 가로막혀 있다고 느꼈던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초식이기에 두 사람의 추억이 가장 많이 배어 있던 초식이었다. 그리고 한때 소원해졌던, 마음이 갈라설 뻔한 두 사람의 우정을 다시 이어준 계기가 된 초식이기도 했다.

나예린은 이번에도 ‘한빙섬옥’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우정을 되찾아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나예린에겐 희망이 영령에게 절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움직일 때마다 점점 더 두려워졌다. “아냐! 아냐! 절대로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한 사람이 오히려 성내는 법이다. 마음에 찔리는 게 있으면 사람은 더욱 당황해서 그것을 무마하려 든다. 문제는 현 상황을 부정하기 위해 더욱 반대로 엇나 가며 발할 때다. 그럴 때는 참으로 골치 아픈 법이다. 게다가 답도 별로 없다.

“아냐, 난 검각의 제자가 아냐! 난 몽환산장의 몽영령이야!”

거의 발악적인 목소리로 영령이 외쳤다. 나예린은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당신의 검에 맺힌 그 검기는 뭐죠?”

깜짝 놀란 영령이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자기가 내뱉었던 모든 말을 부정할 만한 증거가 그곳에 새하얗게 맺혀 있었 다. 검날에 맺혀 있는 검기는 바로 차가운 한기였다. 몽환사령검법을 펼치던 영령의 검에서 보이지 않던 검기였다.

“그건 바로 검각의 독문무공이자 사부님이신 검후님의 비전절기인 한상옥령신검이에요. 그 정도 한기가 맺히려면 적어도 십 년 이상 수련해서 칠성 이상 성취해 야 가능한 경지예요. 절대로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 검기예요.”

어느새 나예린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예린 역시 그 검기를 보고 자신의 확신이 완전히 증명되었던 것이다.

“령 언니…….”

애틋한 정을 담아 그 이름을 불렀다.

“자기를 한번 보세요. 언니가 비록 기억을 잃었다 해도 언니의 몸은 우리 검각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래도 자신이 검각의 독고령이 아니라고 부정할 건가요?” 절실하게 외치는 나예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잃어버렸던 소중한 언니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녀의 검은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입으로는 부정하지만 어느샌가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것이 사실일지 모른다고 생각하 기 시작한 것이다.

“것 보세요. 언니도 그게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잖아요?”

“하지만.. 난… 난…… 몽환산장의 난 기억도 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그건 잘못된 기억이에요. 누군가가 언니한테서 기억을 빼앗아갔어요. 지금 언니가 가진 기억은 가짜예요.”

“하지만 나에겐 그분이…… 그분이…….”

그때 대기석 쪽에서 커다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속아 넘어가시면 안 돼요, 아가씨! 아가씨는 지금 속고 있어요. 사악한 ‘환술(幻術)’을 걸고 있는 건 저쪽이에요. 저희들에겐 아가씨의 검에 맺힌 한기 따윈 보이 지 않아요! 그러니깐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세요! 아가씨에겐 그분이 있잖아…… 컥.”

갑자기 무언가가 번쩍하고 허공을 가르더니 그대로 몽무에게 직격했다. 범인은 연비였다. 작은 돌멩이 두 개를 공기돌처럼 공중에 던지며 가지고 놀며 연비가 말 했다.

“아, 걱정 말아요. 시끄러워서 잠깐 입을 다물게 한 것뿐이니까요. 기절했다가 깨어날 거예요.”

태연한 목소리로 연비가 말했다.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은 것 같으니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연비의 손속이 약했던 게 문제였다. 투기장 전체를 가로지르는 거리도 거리였지만, 지금 연비는 좀 전에 힘을 과도하게 사 용한 관계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때문에 약간의 제어 실수가 일어났고, 그 실수는 비극을 불렀다.

“으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몽무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멀쩡하냐?”

똑같이 쓰러진 환무가 얼굴도 들지 않은 채 물었다.

“안 멀쩡해.”

“그렇다면 멀쩡하단 얘기군.”

환무가 멋대로 해석하며 말했다.

“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몽무가 항의했다.

“그것보다 ‘붉은 피리[혈혼적]’는 가지고 있겠지?”

“서, 설마 그걸 사용하자고?”

화들짝 놀란 몽무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돌이 또 날아올까 봐 몸을 완전히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건 환무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급박하다. 이대로면 ‘금제가 풀릴지도 몰라. 공자님의 명령을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 기억하지.”

영령 모르게 두 사람에게 내려진 별도의 명령.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극단의 조치. 지금이 바로 그 명령을 시행해야 할 시점임이 분명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꺼내. 사용법은 알지?”

몽무는 얼른 품 안에 보관하고 있던 혈혼적을 꺼냈다. 다행히 아무런 손상은 없었다.

“불어!”

환무가 외쳤다.

“하, 하지만.

몽무는 약간 망설였다.

“어서! 이건 공자의 명이야!”

환무가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에잇!”

몽무는 눈을 질끈 감고 붉은 피리를 불었다. 그러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이 붉은 피리는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연주하는 피리였다. 이 들리 지 않는 피리음은 인간의 정신에 작용을 끼쳤다.

붉은 피리의 소리를 들은 영령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상함을 감지한 나예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언니, 왜 그러세요? 정신 차리세요, 언니!”

그러나 나예린의 안타까운 목소리도 이지를 상실한 영령은 원래대로 돌려주지는 못했다.

오직 공격 본능만이 남은 듯 영령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왜, 왜 저러죠?”

갑작스럽게 상황이 급변하자 깜짝 놀란 윤미가 외쳤다.

연비는 대꾸하는 대신 상황을 주시했다.

‘이거 좋지 않은데…….’

방금 전까지 영령의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몇 장 떨어진 이곳에 앉아서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듯 날뛴다? 아무리 생각 해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사람은 갑자기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제일 위험했다. 그리고 지금 영령의 저 붉은 눈을 보니 사리분별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 다.

“수업에서 들은 적이 있겠죠? 일종의 심령금제(心靈禁制) 같아요.”

가면을 벗어던지지 않은 채 연비가 말했다.

“수업이라면 그 필수 교양 과목인 ‘사이(邪異)한 술법(術法)의 종류와 그 방어법’ 시간 말인가요? 무공이라고는 전혀 가르치지 않는?”

과목 특성상 무공과는 거리가 멀고 술법들이 많았기에 천무학관 관도들이 무척이나 지루하게 들었던 과목이었다.

“맞아요. 바로 그거죠. 저런 종류의 것은 심층 최면을 걸어놓은 다음 특수한 신호를 발하는 도구나 특수한 말로 상대를 조종하는 ‘괴뢰술(傀儡術:꼭두각시술)’의 일종일 거예요.”

“그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제어 도구를 찾는 거군요?”

윤미치고는 상당히 재빠른 상황 판단이었다.

“정답. 분명 이 근처에 신호를 보내는 사람이 있을걸요. 그걸 ‘아작’낼 필요가 있어요.”

“아, 아작이오?”

사내 같은 과격한 발언에 윤미가 놀라 반문했다.

“네, 아작이오.”

그때 연비의 눈에 정신을 차린 채 몸을 숙이고 있는 몽환쌍무와 몽무의 손에 들린 붉은 피리가 들어왔다. 모르긴 몰라도 저 붉은 피리가 심령 제어 도구임이 분명 했다. 그제야 자신의 손속이 너무 자비로웠음을 깨달은 연비는 한탄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감히!”

연비의 입에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박력에 화들짝 놀란 윤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미 금제가 발동했으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그 해제법이었다. “어쩌죠?”

뒤늦게 그녀들을 목격한 윤미가 물었다.

“일단 저걸 부숴봐야죠.”

지금 자리를 비우면 실격 처리를 당할 수 있었다. 아까처럼 돌을 던지려 해도 저렇게 바싹 몸을 숙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저쪽도 언제 날아 올지 모를 공격을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비뢰도만 내 수중에 있었어도!’

만일 그렇다면 저 정도 적을 초전박살 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고개를 숙여 숨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비뢰도를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 사는 망할 사 부 덕분에 지금 수중에는 단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없는 것 가지고 징징거리는 취미는 없었다.

영령이 눈이 붉게 변한 이후 나예린은 계속해서 영령에게 밀리고 있었다. 너무 생명을 돌보지 않고 달려들다 보니, 오히려 영령의 몸이 걱정되어 뒷걸음질치게 되 는 것은 나예린 쪽이었다. 각오가 흐트러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상처 입는 것은 나예린 쪽이었다.

두 눈이 붉게 변한 영령의 검에서 새하얀 검기가 연신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칼날을 휘두를 때마다 차가운 서리가 흩뿌려지며 주위를 얼리고 있었다. 검각 특유의 검기인 ‘한빙기(寒氷氣)’였다. 그러나 두 눈을 뜨고도 영령은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다. 명백한 증거가 지금은 전혀 소용이 없었다. 연비는 타계책을 생각해 내기 위 해 머리를 굴렸다.

‘직선이 안 되면 곡선이 있지.’

그럴려면 일단 도구가 필요했다.

‘하나쯤 만들어서 갖고 있을걸.’

요즘 들어 자꾸만 가정하는 버릇이 늘었다. 별로 좋지 않은 버릇이었다. 준비가 덜되어 있다는 의미밖에 되어 있지 않으니까. 반성은 나중에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마침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망할 사부가 쓰라고 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 바로 ‘타격각성 정신봉’이었다. ‘일단 재료 확보.’

연비는 정신봉을 들어 올린 다음 윤미 앞에 내밀며 말했다.

“윤 미소저, 이 쇠 봉, 한 뼘 정도만 잘라줘요. 빨리.”

윤미는 얼떨결에 검을 휘둘렀다.

서걱.

강철봉이 단일검에 깨끗하게 잘라졌다.

“잘했어요.”

연비는 윤미의 솜씨를 칭찬한 다음 진기를 일으킨 손가락으로 그 쇠막대를 동그랗게 말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손바닥 사이에 넣고 돌돌돌 동그랗게 빗기 시작했 다. 점입가경의 모습에 윤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뭘 만드는 거죠?”

“나비.”

“나비요?”

“일단 고양이는 아니죠.”

윤미는 동그랗게 말린 쇠 공을 다시 만두피를 펴듯 펼치기 시작했다. 쇠 공은 점점 더 얇고 넓게 변해갔다. 안 좋은 몸 상태로 진기 소모가 큰 작업을 하려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나예린을 구하기도 전에 연비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손재주가 필요한 거라 윤미에게 맡겨둘 수도 없었다. 직접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만듦새가 나오지 않았다.

“완성!”

어느새 연비의 손에는 매미 날개처럼 얇아진 동그란 원반이 들려 있었다. 연비는 그것을 살짝 흔들어보았다. 원반이 낭창낭창하게 휘며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연 비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저…… 아무리 봐도 나비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그러자 연비는 씨익 웃었다.

“곧 알게 돼요.”

연비는 상대편 대기석에서 여전히 붉은 피리를 불어대고 있는 몽환쌍무를 쏘아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박살을 내고 싶었다. 죽음과 반죽음, 선택은 두 가지뿐이었 다. 여자라고 별로 봐주는 건 없었다. 잘못한 거에 남녀가 어딨는가. 인간이라면 자기 잘못에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을 죽여서는 반칙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연비는 급조한 동그란 원반을 셋째 손가락이 밑으로 가도록 하며 둘째 넷째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손목 을 튕기며 날려 보냈다.

팔랑팔랑.

빛살 같은 빠름,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 그런 건 없었다. 얇고 동그란 회선표는 마치 나비처럼 천천히, 그리고 우아하게 상대편 대기석으로 날아갔다.

“설마 회, 회접(回蝶)?”

방금 연비가 선보인 기술은 ‘회’ 또는 ‘나비 날리기’라 불리는 고도의 암기 수법으로 암기의 명가인 사천당가에서도 익힌 이가 거의 없다는 절정의 암기술이었 다. 서서히 소리없이 날아가 상대를 소리 소문 없이 격살할 수 있는 우아하지만 위력적인 수법이었다. 특히 시전자의 공력에 따라 그 움직임이 실로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윤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 멀리 날아가는 철접을 바라보았다.

공기를 타고 상대편 대기석까지 날아간 철나비에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우아하게 날고 있던 나비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더니 그 속도가 점점 빨 라졌다.

파라라라락!

그리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급격히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벽에 부딪쳐 방향을 감지하기 힘들었다. 그제야 이상을 눈치 챈 몽무와 환무가 피하려 했으나, 철나비는 목표를 놓치지 않고 갈지자로 날아들어 막아서는 환무의 팔에 상처를 입힌 다음 몽무의 손에 들린 붉은 피리로 달려들었다.

“안 돼에에에에!”

몽무는 서둘러 붉은 피리를 사수하려 했지만 이미 철나비의 날개가 피리의 몸뚱어리를 스치고 지나간 이후였다. 몽무의 손에서 혈혼적이 ‘뚝!’ 하고 반으로 쪼개 졌다. 몽무와 환무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이 핏기가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혈혼적이 부러지자 동시에 영령의 몸이 우뚝 멈추었다.

영령의 변화에 나예린은 물러나던 걸 멈추고 물었다.

“언니……?”

대답은 없었다. 영령은 석상처럼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손엔 여전히 검을 들고 있는 그대로였다. 고개는 푹 아래로 떨구어져 있어 표정을 살펴볼 수는 없었다. 나예린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발짝 두 발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반보도 채 되지 않는 지근거리까지 접근해도 영령은 그대로였다. 윤미는 초조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연비는 계속 침묵한 채 뚫 어져라 영령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막아서고 싶었다. 그러나 독고령을 구하고 싶은 나예린의 마음을 알기에 참았다. 실로 막대한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없으니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믿는다고 한 이상 지켜봐 줘야 했다.

“독고 사자, 괜찮으세요? 사자? 언니?”

번쩍!

그 순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영령의 손이 움직였다. 섬광처럼 빠른 찌르기가 나예린을 꿰뚫었다.

새하얀 나예린의 백의 위로 붉은 피가 서서히 번져 나갔다.

“리이이이이이이인!”

연비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예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눈이 찢어져라 부릅뜬 나백천과 빙월선자 예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들의 딸이 칼에 찔렸으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백천은 시합이고 뭐고 간에 당장 투기장 안으로 뛰어들 기세였다. 혁중노인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뜯어말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혁중노인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눈이 날카로웠 다.

“진정하게. 자네 딸, 아직 안 죽었어. 그리고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안 끝났다고요?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당장 말려야겠습니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구요!”

“아니, 아직 안 끝났어. 자네 딸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네! 보게!”

그 순간 나예린의 몸이 희뿌옇게 변하며 눈보라로 화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붉은 꽃이 뒤섞여 있었다.

해설을 맡고 있던 두 사람은 물론 관중들도 깜짝 놀랐다. 마치 신기루처럼 나예린의 신형이 일순간에 사라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라진 나예린의 신형이 영령의 등 뒤에 나타났다.

한상옥령신검(寒霜玉靈神劍) 오의(奧義).

•비설보(飛雪).

본능적으로 펼친 비설보가 나예린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상처 입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옆구리가 베였는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결판은 나 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누를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독고령은 계속해서 미친 듯이 공격을 반복할 터였다. 저 상태로는 진기가 고갈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었다. 제어하는 도구는 망가졌고, 본인 스스 로도 제어할 수 없으니 남은 것은 폭주뿐이었다. 단 일합으로 제압해야 했다. 지금 자신의 몸 상태로 일초 이상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을 쓰는 수밖에 없나??

나예린은 잠시 망설였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싸움 중에 사용하진 말거라. 잘못하면 너 자신을 해칠 수도 있으니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기술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현재의 영령은 물론 과거의 독고령도 모르는 기술이어야 했다.

“에이, 싸움에서 최선의 상태로, 언제나 만전인 채 싸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해요. 물론 평소에 준비를 철저히 해놓는 건 좋지만 말이에요. 싸움이란 건 생물 같은 거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 는 거잖아요?”

“그럼 어떡하죠, 류연?”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한판 붙어보는 수밖에 없죠. 평소에 철저히 쌓아놓았다면 그 보답이 있겠죠. 여유가 있을 땐 누구나 잘할 수 있어요. 그 여유가 모두 사라지고,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때, 그 바닥을 박차고 다시 솟아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그 사람의 진가(眞價)는 결정돼요. 아니, 그때 결정되는 건 ‘미래’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수렁 같은 밑바닥이야말로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오는 ‘인생 의 기로’, ‘운명의 분기점일 테니까 말이에요.”

나예린은 망설임을 접었다.

“아직 미완성이긴 하지만…….’

칼날에 베인 옆구리에서 피가 뭉클뭉클 흘러나오고, 입 안이 깔깔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무리하게 비설보를 운용한 탓에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다.

“지금이 바로 한계라면.”

나예린은 자신의 애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외쳤다.

“난 한계를 뛰어넘어 보겠어!”

그리고는 힘껏 검의 손잡이를 움켜 잡으며 선언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미래를, 이손으로!”

나예린의 검에서 북극광 같은 오색의 빛이 일렁이며 신기루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동시에 하얀 얼음의 봉황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한상옥령신검霜玉靈神劍) 비전오의(秘傳奧義).

해상비조천참절(海上飛鳥千斬切).

섬섬옥수에 들린 순백의 검이 아롱아롱 아름답고 현란한 검기를 뿜어냈다. 검후가 화산에서 펼쳤을 때처럼 빠르고 위력적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지극히 아름답고 고아했다. 공기를 밟듯 사뿐히 움직이던 나예린의 신형이 현란하게 펼쳐지는 검광 속을 노닐었다. 검이 차가운 눈보라를 뿜어냈다. 붉은 꽃이 하얀 눈발 위에 점점 뿌려졌다. 그러나 나예린의 표정에는 어떤 고통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검무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천상의 선녀가 강림한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그 광경에 사람들은 모두 입에 벌리고 그저 빠져들어 갈 뿐이었다.

검무 속에 취한 듯 빠져든 것은 비단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미친 듯이 날뛰던 영령도 어느샌가 검을 멈춘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검은 축 늘어져 있었다. 현란한 검기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붉게 물들었던 눈빛이 서서히 제 색깔을 찾아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영령의 입에서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사부님…….”

다음 순간, 천 마리 새의 날갯짓 같은 검기가 순식간에 영령의 몸을 휘감았다.

새하얀 봉황의 날갯짓 같은 검무가 지나간 자리에 나예린만이 홀로 서 있었다. 관중들은 침묵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 들이 방금 본 것이 과연 환상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우뚝 서 있던 나예린의 몸이 휘청 하며 무너졌다. 연비가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어어’ 소리만 내고 있던 윤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릴 지경이었다. 달려간 연 비는 쓰러지는 나예린을 재빨리 품에 받아 들었다.

“어떻게 됐죠, 사자는?”

연비의 품에 안긴 채 나예린이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냈어요. 그러니 이제 쉬어도 돼요. 수고했어요, 예린.”

나예린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피곤에 치진 눈을 천천히 감으며 나예린이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고마워요… 류연…….”

그 말에 연비는 흠칫 놀랐다. 다시 살펴보니 이미 나예린은 의식이 없었다. 출혈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기를 너무 많이 소모해서 기절하고 만 것이다.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 되뇌이며 연비는 나예린을 안아 들고는 천천히 대기석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그들의 승리를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승리가 아니라 나예린 그녀의 승리였다.

그들은 승리했다. 그 사실은 명명백백해서 바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은 승리였다. 아직은 영령은 적의 수중에 있었다. 게다가 의식을 잃어버려 기 억이 돌아왔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강제로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본래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더 큰 소란이 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겐 아직 최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싸움이 하나 남아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