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15화 – 느닷없이 나타난 혁중노인

랜덤 이미지

비뢰도 24권 15화 – 느닷없이 나타난 혁중노인

느닷없이 나타난 혁중노인

-어떤 요구

예상 이상으로 격렬했던 싸움은 나예린에게서 모든 기력을 빼앗아가고 말았다. 지금 그녀는 제대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상처도 입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 도 목숨을 잃을 뻔한 상처였다. 급히 지혈을 해놨지만 당장 몸이 쾌유되길 바랄 수는 없었다. 몸의 상처든 마음의 상처든 상처를 입히는 건 순식간이지만, 그 상처가 낫는 데는 그 수십, 수백 배의 시간이 소요되게 마련이다. 그 순간만 생각하면 연비는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물론 연비는 나예린을 믿고 있었다. 그녀가 해낼 거라는 것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갑자기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툭!’ 하고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우연이라는 불특정 요소만큼은 아무리 신기에 가까운 예지력을 가진 이라 해도 피해가기 불가능했다. 만일 그 돌발적인 우연이 방금 전 싸움에서 일어났다면…… 그다음은 상상만으로도 두렵고 끔찍했다.

지금 나예린은 눈을 감은 채 대기실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숨 쉬기를 무척 힘겨워하던 처음보다는 훨씬 상태가 많이 나아져 있었다. 그 옆에서 윤미가 차가 운 수건을 든 채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었다.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 뻔한 연비도 진정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대담한 그도 이번만큼은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그래요. 시원한 차라도 좀 사 올게요, 린. 그걸 마시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예요.”

가만히 있자니 도저히 안정이 안 되는지 연비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누워 있던 나예린이 힘겹게 입을 열어 말렸다. 기력이 없이 누워 있었을 뿐이지 아까 전부 터 정신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연비, 그럴 필요 없어요. 곧 결승전이잖아요. 지금은 칠상흔과의 대결만 생각하세요. 전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해요.”

그러나 연비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예린은 여기서 전혀 미안할 일이 없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왜 린이 미안해해요? 내가 린한테 신경 써주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주겠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부담 가질 필요 전혀 없어요. 그리고 자 투리 시간에 정신 집중 좀 더 하고 명상 좀 더 한다고 해서 이기거나 지거나 할 만한 시합은 아니니까요.”

연비는 그녀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몸을 일으킬 만한 상태가 아니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나예린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그걸 보고 연비는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대놓고 미안해하면 더 부담스러워진다고요. 오히려 마음 안정에 안 좋아요. 괜찮아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해주고 싶어서 하는 건데 마음에 부담이 될 리 없잖아요? 오히려 린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면 그쪽이 더 마음에 걸릴 거예요.”

“그래도…….”

“이런, 걱정 말래두요. 난 언제 어디서 어느 순간에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요. 평상심이란 거죠, 평상심. 그러니 윤 미소저?”

“네, 넷? 저, 저요?”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리자 당황한 윤미가 말을 더듬자 연비를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이름 하나 불린 정도로 일일이 당황하지 말아요. 그 정도에 당황했다가는 앞으로 한도 끝도 없이 당황해야 하니까요.”

“하, 하지만…….?”

“당황만 하다가 죽을 순 없잖아요? 좀 더 당당해져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그거야 그렇지만…….”

윤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거참. 여기까지 온 건 윤 미소저의 힘이에요. 다른 누구의 힘도 아니라고요. 그러니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괜찮아요. 수백 명의 사람들 중에 오직 우리 세 명 만 이곳에 올라왔다고요. 다른 누구도 하지 못한 세 명 중 나와 린을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이 누군지 알아요?”

“그거야 바로 저죠.”

그건 사실이었다.

“것 봐요.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그런 사람이 자신감을 가지기 않으면, 당당해지지 않으면 밟고 올라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구요. 알겠습니까?” 연비가 마치 군영의 장군처럼 마지막 물음에 힘주어 묻자 윤미가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넵,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곤 연비가 씩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여긴 텅 비어 있지 않아요. 윤 미소저의 이 안엔 분명 당당함과 자신감이 들어 있어요. 그게 있다는 걸 당신이 인정하기만 하면, 그건 분명 거기에 존재할 거예요. 내가 보증하죠. 공짜로 보증까지 서주겠다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남의 보증을 서준다는 건 목숨을 내맡기는 일이라고요.”

“그, 그런가요?”

“그럼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연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서 윤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린을 잘 부탁해요, 아리따운 윤. 미소.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슝~!”

일부러 입으로 소리를 내며 연비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윤미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려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보기라도 할 기세로.

“평평하네…”

보이는 건 절벽뿐이었다.

당연했다.

다음 시합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나예린이 지난 시합의 여파로 아직 힘겨워하고 있는데, 이럴 때 시원하고 향기로운 차라도 한잔 마시면 한결 기분이 좋아질 게 분명했다.

연비는 투기장 내의 찻집으로 가서 시원한 냉차를 산 다음 오는 길에 화병과 꿀과자 같은 간단한 간식거리도 몇 개 더 구입했다. 중요한 대결을 앞둔 순간이니 그 전에 간단하게 요기를 해두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다. 살짝 사치를 부리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될 터였다. 물론 다음 시합에서는 혼자 나설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통로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좀 전의 시합, 훌륭한 시합이었네.”

걸어가던 연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별 과찬의 말씀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연비가 말했다. 박수와 칭찬을 받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박수와 목소리는 여섯 방위에서 일제히 동시에 들리고 있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육합전성인가?”

꽤 시끄럽고 웅웅거려 귀에 거슬리지만, 자신의 위치를 숨기는 데는 상당히 유용한 기술이었다. 게다가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존재감 은 뚜렷이 느껴졌다. 존재감이 이 공간을 집어삼키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혼란을 더 가중시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보다는 덧칠하는 것으로 자신 의 존재를 연비의 오감으로부터 감추고 있었다.

“누구시죠? 같이 차 마실 시간은 없는데요? 보시다시피 좀 많이 바쁘거든요. 선약도 있고요.”

그러자 등 뒤쪽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전히 방향은 알쏭달쏭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린데?”

연비는 잠시 생각했다.

‘설마 사부??

라고 생각했지만, 아닐 터였다. 사부는 이런 식으로 번거롭게 움직이진 않는다.

“허허허, 맹랑한 아이구나. 하지만 노부의 기세 속에서도 태연히 말을 할 수 있다니. 하긴 그러니 여기 결승까지 올라올 수 있었겠지.”

이상하게도 무척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요즘은 칭찬도 몸을 숨기고 하는 게 유행인가 보죠?”

연비는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어수룩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온몸의 감각 기관을 열어 감각을 일제히 팽창시켰다.

“노부가 좀 수줍음이 많아서 말일세. 젊은 처자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니, 어디 심장에 안 좋아서 살 수가 있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모습을 감 추고 있는 거라네.”

“한마디로 고의가 아니라는 거군요?”

“맞아. 노부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라네. 젊은 처자가 똑똑하기까지 하군.”

그러나 목소리에는 전혀 수줍음이나 두근거림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런 황당무계한 말을 믿을 만큼 연비는 순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꾸 숨어 있기만 하면 ‘방구석 폐인’이 될 뿐이라고…… 욧.”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비의 몸이 빙그르르 반 바퀴 회전했다.

쉐애애애액!

연비의 손에 들려 있던 현천은린이 한 장소를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곳은 특별히 몸을 숨길 만한 데도 없는, 그저 그림자만 져 있는 복도의 한켠이었다. 정상이 라면 현천은린은 아무것도 없는 벽에 쓸데없이 구멍이나 하나 더 추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현천은린은 우뚝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는 그림자 속에서.

우우우우우웅!

검은 우산의 꼭지를 중심으로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군.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이야.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처자?”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인물을 본 연비는 깜짝 놀랐다. 나타날 때까지는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한 번 모습을 드러내자 태산이 우뚝 솟아 있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소리없이 자신의 등을 잡은 것만 해도 놀라운데 이런 존재감이라니, 범상한 자일 리 없었다. 마천각주 마진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무림맹주 나백천의 기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연비는 순간 몸을 피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선은 위압감은 있지만 살기가 없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함부로 과하게 신법을 사용하다 보면 몸에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점이 연비도 아는 얼굴이란 것이었다.

“설마 아는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그러자 노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응?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 한데 왜 기억이 안 나지?”

금시초문이라는 노인의 얼굴을 본 연비는 아차 싶었다. 전에 화산의 밑자락에서 저 노인을 만났을 때 연비는 지금의 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 노인이 저런 표정 을 짓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황하면 짓는 것이기 때문에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걸 치매라고 하죠. 걱정 마세요. 나이가 들면 자주 걸리는 병이니까. 흔한 일이죠.”

“떽끼! 노부는 아직 젊어! 아직 한창이란 말이지.”

“어머나, 요즘은 젊다는 말이 이상하게 오용되고 있군요. 노인장이 삼사백 년 사는 거북이라면 지금 그 나이에 젊다고 할 수도 있겠죠.”

노인의 덥수룩한 하얀 눈썹 밑에 박혀 있던 두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허허허, 참으로 겁도 없구나. 지금 노부더러 거북이라고 놀리는 게냐?”

이런 일은 수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그 누구도 자신의 면전에서 자신을 놀리는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다들 그것이 미친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요? 그냥 일종의 비유죠. 언어적인 기교라고나 할까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노인의 전신에서 더욱 강력한 기세가 솟아올랐지만 연비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태연스레 대꾸했다. 혁중노인은 약간 재미가 없어졌다.

“자네 심장도 보통 물건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군.”

아무래도 말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비록 말만으로라도 패배감을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신기했다.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 을 이었다.

“그런데 용케도 내가 있는 곳을 알았구나? 소리를 듣고 판단한 건 아닌 듯한데?”

‘육합전성(六合全聲)’이란 게 괜히 육합전성이 아니었다. 동서남북상하, 여섯 방향[合]에서 전부[全] 일제히 울려 퍼지듯[聲] 들려오기에 육합전성이었고, 그 특 성상 소리를 발한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연히 소리로 찾았죠.”

그러나 연비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당연한 의문이었다.

“모든 것에는 중심이 있게 마련이죠. 아무리 커다란 파문이라도 그 중심은 한 점이듯이 말이에요.”

“과연 노부의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혁중노인은 무슨 일인지 상당히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왠일이시죠? 어디선가 나타난 의문의 할아버지?”

나타난 거대한 존재감의 주인은 바로 혁중이었다.

“자네한테 부탁이 있어서 왔네.”

“고백은 안 되는데요?”

그러자 혁중은 매우 실망이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왜? 벌써 임자가 있는 겐가?”

“물론이죠.”

연비가 딱 잘라서 대답했다.

“거참, 애석하군. 하지만 할 수 없군. 그럼 다음 용건으로 넘어가지.”

“뭔데요?”

“처자, 자네 칠상흔을 이기고 싶지 않나?”

“당연한 소리를 굳이 말하는 유행은 번거롭다고 이미 지나간 줄 알고 있었는데요?”

“그러니깐 이기고 싶은 거군?”

“물론이죠. 그런데 그건 왜요?”

이유도 없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내가 자네를 이기게 해주겠네, 그 칠상흔이란 사내에게.”

“대가는요?”

이런 일이 공짜로 들어올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있지는 않았다.

“간단하네. 그 대신 내 요구를 하나 들어주면 되네. 어떤가? 정말 간단하지?”

연비는 잠시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고민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싫어요!”

별로 망설임이 없는 걸 보니 처음부터 이 대답을 낼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왜?”

“상금은 더 이상 나눌 수 없거든요.”

연비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다.

“상금? 천만에. 노부는 하찮은 푼돈에 관심없네.”

“우와! 굉장한 부자인가 봐요?”

“글쎄? 노부도 안 세봐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난하진 않을거야. 지금 별로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럼 뭘 원하시는 거죠? 칠상흔의 목숨? 원한 관계?”

혁중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숨이라고? 오히려 그 반대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아이가 죽어서는 곤란하다네.”

“그 아이? 그 아이가 누군데요? 설마 칠상흔이요?”

방금 칠상흔을 그 아이’라고 칭한 것을 연비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노부는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거든.”

“이야기를 좋아하는 할아버지군요.”

연비가 약간 비아냥 조로 말했다.

“어쩌겠나, 그게 삶의 낙인 것을.”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쳤다.

“하지만 그것도 시합에서 이길 수나 있는 다음의 이야기 아닌가요? 우리 쪽 승률은 사실 별로 높지 않아요. 물론 도박사들 생각이지만 말이에요.”

도박사들의 대부분 칠상흔에게 걸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럼 질 생각이었나?”

“물론 이길 생각이죠. 또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혁중노인이 씩 하고 웃었다.

“그 이기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걸세. 도박사들이 모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고 말하는 일을 말일세. 노부만은 가능하다!”

혁중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우와, 정말 대단하시네요. 승리의 비책이라도 있나요?”

연비는 살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있지. 노부는 그 아이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 그것만 알고, 노부가 한 가지 수법만 알려주면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노부가 보장 하마.”

“그렇게 확신하고 있지는 못하신 것 같은데요?”

“믿어도 된다.”

별로 확신이 들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어떠냐, 노부의 장밋빛 조건이? 만일 이긴다면 노부가 천하의 비공이라 불리는 무공을 몇 수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굉천도(轟天刀)’랑 같은 급의 무공을 말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꽤 대단한 것이거든. 손해 보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어쩐지 수상한데요? 본인 스스로 장밋빛을 강조하는 게 특히 더요.”

의심쩍은 목소리로 연비가 말했다. 원래 그렇게 사람의 말을 넙죽넙죽 잘 믿는 이는 아니었다. 노인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천하의 기연을 마다하다

니,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통을 생각해서 울화통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쌍방 다 득이 되는 일이다. 자, 이제부터 노부가 그 아이의 약점을 알려주마.”

그러자 연비는 재빨리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말했다.

“아뇨, 듣지 않을래요.”

“뭐라고? 듣지 않겠다고?”

혁중노인의 언성이 자기도 모르게 높아졌다. 설마 여기서 거절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별로 들을 필요성은 없는 것 같거든요.”

귀를 막고도 들을 건 다 듣는 연비였다.

“이건 실로 유용한 정보다. 안 들으면 분명 후회할 텐데?”

은근한 협박으로 불안감을 조성시키며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연비는 그런 심리적인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약점이 몇 년 전 것인지도 모르고요. 그 정보 몇 년 전 건데요? 아직도 충분히 신선한 정보인가요?”

“음…… 한 구 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자신감이 많이 희석된 목소리였다.

“십 년 이상 묵은 정보면 이미 유통기한도 지났다고요.”

“구 년이라니까.”

“구 년이나 십 년이나.”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겠다는 거냐?”

“그게 유일무이한 기회라는 법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 도움이 없어도 난 이겨요. 반드시! 왜냐하면 난 우주홍황천상천하지상지하제일이니까요!”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연비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 선언이 어찌나 광오한지 노인은 순간 멍해져서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헛… 허…….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게다가 혀도 안 꼬이고. 하지만 그 칠상흔의 정체를 듣고도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혁중노인의 말에는 은근한 압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압박 넣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물론이죠. 그게 딱 한 사람만 아니면 돼요.”

연비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게 누군가?”

“있어요, 천하제일의 사기꾼에 술주정뱅이인 그런 사람이. 자린고비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 사람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게다가 옛날에 약점까지 갖고 있던 사람 인데 지면 말이 안 되죠.”

“후회하게 될 텐데?”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란 얘기였지만 이미 연비는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후회 안 해요, 절대로. 약점 따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이깁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죽이진 않을 테니.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듣게 해드리죠. 그게 무슨 이야긴 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거참, 고맙다는 말은 이긴 다음에 하도록 하지.”

노인은 여전히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미리 해도 손해날 건 없어요.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대가는 톡톡히 받아내겠어요.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그럼 이만 가봐야겠군요. 기다리 는 사람이 있어서요. 냉차가 미지근해지면 맛이 없거든요.”

연비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한 다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이기게, 연비 ‘군’!”

연비가 질풍처럼 몸을 홱 돌렸을 때 그곳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