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상흔 대 연비
ᅳ시작된 결승전
“청(靑) 진영~ 무패의 제왕, 죽음의 사신, 패배를 모르는 자, 두려움을 모르는 자, 원통투기장의 살아 있는 신화, 일곱 상처의 사나이, 무적의 사내, 혈염제(血炎帝) 칠상흔~!!!”
소개가 끝나는 동시에 묵직한 철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투기장 안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이번에도 다른 사람처럼 대기석에서 나오지 않고, 자신만이 다닐 수 있는 제왕의 길을 통해 등장했다. 이 길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승자뿐이었다. 관중들은 자신의 승자를 향해 열광하며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홍진영~ 도전자~ 모든 이들의 예상을 깨고, 수많은 도박인들을 머리 싸매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며, 남성들에게는 황홀을, 여성들에게는 한숨을 안겨준 절 세미녀들의 군단, 미~소~저~ 연~대~!”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칠상흔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은 나예린과 윤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다. 연비의 이름은 두 사람에 비해 거의 거론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두 사람에 비해 지금까지 거의 활약다운 활약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몽환삼영 조와의 시합에서 보여준 짧은 활약과 그 생김새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일부 관중들이 가끔씩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외쳐 주는 것뿐이었다. 연비는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내 차례네요.”
‘영차!’라고 말하며 연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걱정 말아요, 린. 아무 문제 없으니까. 상금 나눠 받을 만큼은 일해야죠, 나도.”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말릴 도리가 없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연비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짧게 인사하고는 현천은린을 들어 올린 다음 전장으로 향했다.
칠상흔은 반대편 대기석에서 걸어나오는 연비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고랑처럼 파인 일곱 개의 상처가 뱀처럼 꿈틀거렸다.
“저건 또 뭐야? 저 우산은 또 뭐고?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에 피부가 상할 것이 저어됐는지 연비는 은실로 은룡이 수놓아진 밤처럼 새카만 우산을 어깨에 가볍게 걸쳐 멘 채 걸어오고 있었다. 사뿐사 뿐 경쾌하게 내딛는 그 걸음걸이는 마치 오후의 산책을 막 나서기라도 한 듯 긴장감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혼자였다. 그 점이 특히나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왜 혼자지?”
‘겨우 너 혼자서? 나를 상대해? 당치도 않다!’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연비를 쏘아보며 칠상흔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시선으로 상대를 압박하려 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로 담담하게 시선을 받아넘기며 연비는 태연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셋인데요?”
그러자 칠상흔의 미간 사이의 골이 깊게 파였다.
“헛소리! 넌 혼자지 않느냐?”
그러자 연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가벼운 농담 한번 해본 것뿐이에요. 보아하니 시력은 정상인 모양이네요. 이건 혹시 아쉬워할 일?”
상대의 오감 중 나쁜 곳이 하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연비는 별로 크게 낙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라고?! 내 시력은 멀쩡하다!”
칠상흔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난 또. 너무 당연한 걸 물어보길래 혹시 착시 현상이라도 있나 했죠.”
혹시나 눈이 삐었나 확인해 본 것뿐이라는 이야기에 칠상흔은 하마터면 눈이 뒤집힐 뻔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건 두 사람 덕분이니 셋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죠. 소중한 동료라고나 할까요. 당신한텐 없는 것이죠.”
윤미는 지금 나예린의 곁에서 그녀의 신변을 지키는 중이었다. 나예린의 미모는 항상 너무나 많은 재앙을 끌어들이기에, 그녀가 지금처럼 움직이지 못할 때는 특 별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윤 미소저’ 정도라면 소심해서 감히 무기력한 나예린을 건드릴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하여튼 남자들이란 언제나 문제가 많은 족속 이었다. 그런 면에선 윤미는 신뢰할 만한 천연숙맥이었다.
칠상흔은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감상적이고 안일한 마음으로 이 수라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라, 어떡하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저씨만 쓰러뜨리면 되잖아요? 뭐, 쉽네.”
“아, 아저씨!”
연비의 안하무인격인 발언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들은 칠상흔 앞에서 이토록 대담한 처자를 본 적이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엄청난 배짱입니다!”
해설을 담당하고 있던 미성공자 유진의 입에서 진심 어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네에, 정말 제대로 미친 것 같습니다.”
그다지 좋은 쪽 감탄은 아니었다. 그러자 무박 선생이 대꾸했다.
“그 정도도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 칠상흔 앞에 설 수 있었겠나? 마음이 꺾이는 순간 이미 승부는 난 법이지. 자넨 평생 저 칠상흔과 붙어보지 못하겠군.”
“전 물론 그런 미친 짓 안 할 겁니다.”
당연한 걸 뭣 하러 물어보냐는 태도였다.
“그게 뭐 평범한 반응이란 것이겠지. 이해하네.”
“저…… 그건 무슨 뜻입니까?”
미묘한 어투를 느낀 유진이 반문했다. 말로 먹고사는 자답게 그는 말에 무척 민감했다.
“뭐, 별거 아닐세. 그저 자네가 평범한 사람이란 뜻이었네.”
유진은 멍한 표정으로 무박 선생을 바라보았다. 관중들의 입에서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와하하하하하하!”
그들의 목소리는 투기장 전체에 들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게졌다. 그러나 뭐라고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칠상흔은 웃지 않았다. 그는 지금 매우 기분이 나빴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간땡이가 부었느냐?”
으스스한 목소리였지만 연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 간이야말로 싱싱함이 자랑이죠. 한번 열어서 확인해 보실래요? 능력이 된다면 말이죠.”
연비가 쾌활한 어조로 도발했다. 자신이 새파랗게 어린 계집한테 희롱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칠상흔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좋다. 내 오늘 계집, 네년의 간이 얼마나 큰지 직접 열어 확인해 보겠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구름처럼 뭉실뭉실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연비는 쫄기는커녕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적이 냉정한 판단력을 잃고 침착함을 유 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좋은 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연비는 웃으며 현천은린을 장난스레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렸다. 그러나 아직 시기가 무르익은 기분이 들지 않아 연비는 조금 더 칠상흔의 마음을 흔들어보려고 했 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재미있는 노인 한 분을 만났어요.”
칠상흔은 이 뜬금없는 이야기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이 시합이랑 무슨 상관이냐?”
“자자, 그렇게 흥분하지 말고 들어보세요. 그 할아버지가 재미있는 말을 하더군요. 그 할아버지 말이,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더군요.”
연비와 칠상흔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칠상흔이 숨을 삼킨 것 같았다.
‘오호라?”
잉어 한 마리가 낚싯바늘을 덥석 물었을 때처럼 반응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나였던 모양이다.
“그 할아버지가 그러길, 내가 흥미만 있다면 나한테 그 약점을 가르쳐 줄 수 있다더군요. 그 약점만 알면 당신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요. 물론 공짜는 아니었어요. 세상에 공짜란 게 어디 있겠어요? 당연히 조건이 있었죠. 그러나 그렇게 엄청난 조건은 아니었어요. 충분히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던 부탁이더군요. 처음엔 나한테 큰 판돈을 건 할아버지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더군요.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운 점이 뭔지 아세요?”
“모른다.”
“그 할아버지는 당신을 ‘그 아이’라고 부르더군요. 서른도 훨씬 전에 넘은 사람을 ‘그 아이’라고 부르다니, 재미있지 않아요?”
연비가 쿡쿡 웃었다. 그러나 칠상흔은 웃지 않았다.
“하나도 재미없군.”
그는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한 채 대답했지만, 그다지 이성적이지는 않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동요를 감추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게 눈에 확연했다. 이럴 때 흔들지 언제 흔들겠는가. 연비는 좀 더 흔들기로 했다.
“무공의 약점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을 알려면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여야 할까요? 음, 역시 사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을 ‘그 아이’라고 부를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걸까요?”
“닥쳐라! 그만 지껄이지 못하겠느냐!”
참지 못한 그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더 듣고 싶지 않다! 싸우자! 넌 입으로 싸울 셈이냐?”
엄청난 투기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와중에도 연비는 웃었다. 그는 분노한 적보다 냉정하고 침착한 적이 언제나 더 껄끄러웠다.
“왜 그렇게 당황하죠? 더 이상 이야기하면 곤란할 일이라도 있나요?”
연비가 끈질기게 질문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꽉 닫힌 문을 열 수 없었다.
“닥치라고 했다!”
칠상흔은 붉은 혈강을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옴마야, 초반부터 도강이라니……. 기운도 좋으셔라.”
말을 그렇게 했지만 얕잡아볼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연비의 몸 상태는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엉망진창, 오리무중, 일촉즉발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렇게 많은 기술을 쓸 수는 없었다.
힘에 힘으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상대의 힘에 격발받아 자신의 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연비도 알 수 없었다. 연비는 일단 피하기로 했다.
붉은 도강이 횡으로 베어 들어오는 궤적을 가볍게 피하며 연비가 몸을 뒤로 날렸다. 특별한 기술은 없었다. 그저 눈썰미로 붉은 혈강의 궤도를 읽고 발로 가볍게 땅을 박차며 몸을 피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워낙 절묘한 순간에 몸을 날린 터라 붉은 혈강은 헛되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설명은 길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 어진 일이었다. 현재는 묵룡환 하나가 상시적으로 풀려 있는 상태라 어떻게 보면 몸은 평소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었다.
‘날뛰는 내공만 아니라면 말이지…….’
비뢰문의 독문운신법인 봉황무(鳳凰舞)를 지금 써도 괜찮을까? 쓸 수 있다면 어느 수준까지, 몇 번이나 쓸 수 있을까? 쓰고 싶을 때마다 쓸 수 없는 것만은 명백했 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기전은 불가능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것 없지.’
어떻게든… 어떻게든 활로를 뚫어야 했다.
연비가 벌여놓았던 거리를 칠상흔이 단숨에 좁혀왔다. 그가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뒤축에서는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듯 흙먼지가 솟구쳐 올랐다. 그 반동으로 그의 몸이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파괴적인 보법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과시하는 듯했다. 연비는 내공을 어떻게든 쓰지 않으려고 아끼고 있는 반면, 칠상 흔은 아까울 것 없다는 듯이 펑펑 써대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일격 일격은 위력이 철철 흘러넘쳤다.
“이거 참 불공평하네.
하지만 연비는 그런 문제로 항의하는 꼴불견을 보이지 않았다. 원래 싸움은 불공평한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상대에게 불리하도록 만드는 것이 싸움이란 것이 었다. 적어도 연비는 사부한테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제자를 불리하게 만든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부를 원망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유불리(有不利) 가 상관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과 기술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것이야말로 비뢰문의 정신이라고 외쳤으면서, 하나뿐인 왕창 사랑스런 제자를 이런 불리한 지경에 빠뜨리다니, 정말 못돼먹은 사부였다.
‘하긴, 사부가 못돼먹었던 게 어디 하루 이틀이었나. 백 년 전에도, 아니, 삼백 년 전에도 분명 그랬을 거야!’
아니, 태극에서 음양이 나눠지던 그때부터도 사부는 분명 못돼먹고 인정머리없는 망할 존재로 ‘진리(眞理)’의 한쪽 귀퉁이에 ‘사부, 못돼먹었음, 주의할 것’이라고 정자체로 새겨져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것은 깨달음과 같은 확신이었다.
사부가 착해진다는 것은 ‘진리’에 반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연비는 천지개벽해도 바뀌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깨끗이 포기하고 현재 자기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기로 했다. 세상이 끝장나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면서도 연비는 칠상흔의 도강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내서 칠상흔의 약을 올리고 있었다.
칠상흔의 도세는 무수한 싸움에서 튄 피로 벼리어진 탓인지 지극히 실전적이었다. 모든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오직 적을 베어 피를 보기 위한 도세. 저 반 토막짜리 도에 맺힌 석 자짜리 붉은 도강 역시 그저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하기 위한 보조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직선적이었다. 이런 직선적이고 실전적인 초식 의 최고 경지는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경지인데, 다행히 칠상흔의 수준은 그런 지극한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아직은 연비의 간파(看破)가 아 슬아슬하게 통하고 있었다. 그 격차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칠상흔의 도가 종이 한 장 거리만큼을 좁혀오거나, 연비의 움직임이 종이 한 장 차이만큼 늦춰지면 연비 는 그 즉시 저 붉은 도강에 반 토막이 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이라는 미세한 차이가 지금 이 순간 생과 사, 있음과 없음을 가르고 있었다.
그 치열함이 보는 관중들에게도 전해졌는지,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