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17화 – 몰아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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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17화 – 몰아붙이다

몰아붙이다

-칠상흔의 실수

‘강하다.’

그 사실이 연비는 무엇보다 놀라웠다. 이자는 이런 곳에서 관중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신세치고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았다.

‘하긴 어중이떠중이가 단목세가의 고수를 그런 식으로 수월히 도륙할 수는 없었겠지.’

자신이 직접 싸워본 상대 중에 이자보다 강한 사람은 몇몇이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다 백 살이 넘어서도 팔팔하게 날고 뛰는 괴물급 인사들이었다. 그 러나 이자는 아무리 봐도 오십도 안 돼 보였다. 화산에서 만났던 그 반질반질 공자 녀석도 이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직도 이자는 많은 부분을 속에 숨기고 있었다. 자신이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 않듯, 상대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상태 때문에―이게 다 사부 때문이다! ―이러고 있다면, 상대는 자신의 내력을 비밀로 붙이기 위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무엇을 그토록 감추고 있는 걸까?”

남한테 들키면 얼마만큼 큰일이 나는 비밀일까? 시합 전에 만났던 혁중노인이 떠올랐다.

‘그 노인은 뭘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무엇을 듣고 싶은 걸까? 자신의 비전절기까지 내걸면서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건 대체 뭘까??

얼마나 초(超) 대단한 비밀이기에 누군가는 이토록 필사적으로 숨기고,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알아내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다.”

모든 어마어마한 일의 동기는 대부분 이렇게 인간의 사소한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이 순간 강호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곳으로 방향 전환을 하고 있었다.

지금 현재 연비는 종이 한 장 차로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 있었지만, 피하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해서는 유효한 공격이 필수불가결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해서 몰리는 것도 취향은 아니었다.

화악!

퓨뷰뷰뷰!

접혀 있던 현천은린이 활짝 펴지며 우산살 끝으로부터 미세한 세침(細針)들이 튀어나갔다. 현천은린에 장착된 또 하나의 비밀 병기가 방금 작동한 것이다. 사실 좋게 말하면 숨겨진 병기고, 나쁘게 말하면 추잡한 암기였다.

“소용없다, 이런 암기 따위!”

칠상흔은 도를 그물처럼 휘둘러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세침들을 전부 튕겨냈다. 도강이 깃든 도를 도막을 펼치니 방어가 금성철벽처럼 단단해 어설픈 암기 따위로는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이런 장난감으로 내 도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칠상흔이 비웃으며 소리쳤다.

“물론 뚫고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렇게 종이 두 장 정도의 시간은 벌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연비의 손에는 어느새 분리된 현천은린의 우산 갓이 들려 있었다.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종이 한 장에서 한 장을 더 추가한 정도의 간합(間合)이 필요했다. 종이 한 장에서 전환하려면 정면으로 막는 수밖에 없는데, 지금 몸 상태로 볼 때 그 방법은 매우 위험했던 것이다.

“자, 선물이에요.”

취리리리리릭!

연비의 손을 떠난 현천은린의 우산 갓이 전차의 바퀴처럼 사납게 회전하며 칠상흔을 향해 날아갔다.

“두 동강 내주마!”

칠상흔은 대갈일성을 토하며 도를 일직선으로 내려쳤다. 아무리 특수 조치를 취한 묵린혈망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현천은린이라 해도, 저 정도 도강이 속도까지 더 해 날아온다면 절대 무사할 수 없었다.

쐐애애애애애액!

슈각!

그러나 칠상흔의 도강이 멋지게 가른 것은 빈 허공이었다. 어느새 현천은린은 그의 왼쪽으로 궤도를 바꾼 이후였다. 칠상흔은 어림도 없다는 듯 다시 몸을 왼쪽으 로 틀어 도를 내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현천은린은 미꾸라지처럼 그 도세를 빠져나갔다. 우산에 눈이라도 달렸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고 있기라 도 하는지, 그것은 그가 공격하려 하면 물러가고, 물러나려 하면 공격해 들어오며 그를 귀찮게 했다. 살살 약올리듯 움직이는 검은 달의 모습에 성질이 난 칠상흔은

대갈성을 터뜨리며 도를 휘둘렀다. 슈욱!

그 순간 칠상흔의 도강이 한 자 이상 더 뽑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 것이다.

“이런!”

연비의 대응은 그가 터뜨린 기함보다 빨랐다.

재빨리 현천은린를 뒤로 잡아 빼면서 동시에 들고 있던 우산대를 휘둘렀다.

찰칵!

허공을 가르는 우산대의 끝에서 창날이 튀어나왔다. 그다음 순간 황금빛 창강이 허공을 격해 칠상흔을 향해 날아갔다.

“헉!”

설마 한쪽으로 톱날처럼 회전하는 우산 갓을 조종하며 다른 한편으로 허공을 격해 검기를 날릴 줄은 몰랐던 칠상흔은 깜짝 놀라 쫓던 것을 포기하고 날아오는 창 강을 향해 도강을 틀었다.

쾅!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순식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잠시 후 두 개의 벼락이 서로 격돌하기라도 한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도강이 창강을 상쇄시켰다. 선기는 창에 있었지만 베는 데 있어서 역시 창은 도에 미치지 못했다.

비록 기선은 제압했지만 의외의 공격에 당황하긴 칠상흔도 마찬가지라 차선을 잡지는 못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연비는 최고의 빠르기로 칠상흔을 향해 도약했다. 신법의 빠르기라면 나름 자신있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칠상흔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소거(去)한 연비의 손은 어느덧 날이 튀어나온 창 한 자루를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그 자 세는 마치 복날에 개를 뚜드려 잡는 듯한 과격한 몸짓이라 여인의 몸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다. 그런데도 그 자세는 이 연비라는 여인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위화감없이 잘 어울렸다. 한 모금 진기를 들이켜며 연비는 창도 아니고 봉도 아닌 우산대를 휘둘렀다.

우다다다다다다다다! 파바바바바바바바! 다다다다다다! 라라라라라라! 콰콰콰콰콰!

삼복구타봉창법(三伏毆打棒槍法).

오의(義).

말복(末伏).

천지무견(天地無자다봉창棒槍).

순간 봉의 그림자가 수백 개로 갈라지며 칠상흔의 사방을 압박해 들어갔다.

초식의 이치는 봉법을 따르고 있었지만 봉끝에 날이 달려 있는 관계로 창법이기도 했다. 사방의 옥죄어오듯 내려쳐지는 봉도 봉이었지만, 그 끝에 달린 날이 의외 의 순간마다 번뜩이며 칠상흔을 압박해 갔다. 이 초식은 화려하다기보다 끈질기고 집요하고 정신없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에는 일정한 규칙과 틀이 존재하지 않았 다.

쉴 새 없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몽둥이찜질 세례와 양념처럼 섞여 있는 창날 소나기에 칠상흔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좀 전까지의 초식은 그렇게 몸에 익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이 초식은 마치 이 연비라는 여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그 위력이 비할 바가 없었 다.

관중석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상 이하 주작단 단원들은 그 초식을 보고 무척 당황해했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본 초식 같지 않아?”

“저게 뭐지? 몰라, 무서워.”

“으으, 생각하고 싶지 않아.”

왠지 본능적인 오한이 드는 그들이었다. 저 광경엔 그들의 잠재적이고 내재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때리려는 거냐, 베려는 거냐! 하나만 해라, 하나만!’이라고 버럭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느덧 칠상흔은 연비의 봉세(棒勢)에 밀려 십여 걸음을 후퇴해 있었 다. 그가 뒷걸음쳐 온 발자국이 바닥에 한 치 깊이로 뚜렷이 패어 있었다. 그만큼 그가 필사적으로 이 초식을 막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좀 더 있으면 상대의 기운은 정상에서 굴러 내려가는 눈덩이처럼 커질 게 분명했다. 이 기세를 막지 못하면 자신의 패배는 확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가까스로 버티 고 있던 제방이 무너지면, 불어난 물은 일순간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법이다.

“어림없는 소리! 하압!”

칠상흔은 급박한 마음에 쓰지 않으려고 봉인해 두었던 금지기(禁止技)를 꺼내들고 말았다.

혈무막막血霧幕幕).

날아오는 봉의 세례를 막기 위해 급급했던 그의 반 토막 도에서 붉은 안개가 부스스 피어올랐다. 피어오른 혈무가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연비의 봉세 가 더 이상 그 막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거침없이 상대를 유린하며, 일부 아는 이들에게서는 ‘끝장기’라 불리던 ‘삼복구타법이 거의 최 초로 가로막힌 것이다.

저 혈무는 멀리서 보면 마치 피안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대한 강기덩어리였다. 도막을 펼침과 동시에 특수한 방식으로 강기를 펼쳐 자신을 보호하는 수법이었 다. 일종의 호신강기류였지만, 그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저 안개가 공격도 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 안개는 마치 늪처럼 자신의 공격을 흡수하고 끌어들 이고 빨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저 혈무를 두드렸을 때 손끝에서 느껴졌던 불쾌한 감촉을 연비는 잊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연비는 손을 거두 고 한 발짝 물러났다.

“피처럼 끈적끈적한 기술이군요.”

연비가 솔직한 감상을 피력했다.

“감이 대단하구나.”

칠상흔은 연비의 유연한 대처에 꽤 놀란 모양이었다. 억지로 피안개를 뚫고 들어오려 했다면 그의 붉은 강기가 단숨에 연비를 먹어치웠을 것이다. 그런데 연비의 치명적인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도 그는 별로 기뻐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죠?”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칠상흔은 속으로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의식중에,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하지만 그 기술을 쓰고 말다니……. “내가 미친건가? 분명 알아볼 사람이 나올 텐데…….?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 강호상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초식을 알아볼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그분의 성명절기나 다름 없는 기술을 쓰다니…… 그동안 쌓아뒀던 적공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방금 그게 뭐였죠, 무박 선생님? 마치 피안개 같았는데요?”

“…..”

대답 대신 이어진 것은 무거운 침묵이었다.

“무박 선생님?”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

미성공자는 의아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 무박 선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박 선생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쩍 벌린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심장마비 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무박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손을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해도 반응이 없고, 옆에서 입김을 불어넣어도 무반응이던 무박 선생이 비로소 움직인 것은 미성공자가 그의 수염을 세 가닥째 꼬았을 때 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난 괜찮습니다.”

“전 또 기절이라도 하신 줄 알았죠.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을? 방금 전 칠상흔이 보인 피안개 초식에 대해 아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음…… 설마…… 하지만 그건…… 그는…… 그가…… 그럴 리가…….”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직도 무박 선생의 머리는 너무 혼란스러워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으시군요.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놀라셨을 리가 없으니깐요.”

“사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사실이라 함부로 말씀드리기가 힘들군요. 제가 짐작하는 사실이 맞다면 그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니까요. 강호에 한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까지 겁을 주시는지요? 살이 떨려서 해설도 못하겠군요. 짐작이라도 좋으니 살짝만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무박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랬다간 저 자신의 생명 역시 보장하지 못하니까요. 호기심에 비밀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부나방처럼 날개가 타서 추락할 수도 있지요.”

“그럼 조금 맛보기만이라도 보여주십시오.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는 궁금증에 미쳐 버린 관중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칠상흔의 정체가 너무 위험하다면 그건 제쳐두고, 저 초식이 무엇인지만이라도 가르쳐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토대로 예측해 보는 것도 재미니까요.”

무박 선생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유진의 수완 좋은 말솜씨에 걸려들고 말았다. 무박 선생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여전히 갈등 의 잔재가 남은 탓인지 말하는 게 무척 힘겨워 보였다.

“방금 그가 보여준 초식은 바로…… 바로…… ‘굉천도’ 중 하나였습니다.”

“괴, 굉천도라면 설마…”

“굉천혈영도법 혈류십이도, 맞습니다. 바로 무신마님의 독문도법입니다.”

쿵!

커다란 충격이 장내에 떨어져 내렸다. 사람들은 순간 숨을 삼켰다.

“서… 설마…….?

“……”

경악한 미성공자의 눈동자는, 그 사실을 내가 재촉해서 내뱉었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는데 목줄기가 서늘했다. 그들은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방금 건드린 건지도 몰랐다.

구업(業)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서로 실력을 한 자락씩 보여준 두 사람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은 채 대치했다. 이런 경우 무조건적인 선공이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너는 왜 싸우지?”

“시시한 이유죠. 그냥 돈 때문이거든요.”

그리고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게 사부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 안 보인다 해도 사실은 사실이에요. 제가 좀 정직하고 겸손하고 검소하게 보이기는 하죠.”

“다른 이유는 없단 말이냐?”

“그럼요.”

“그렇다면 넌 날 이길 수 없다. 그런 천박한 마음으로는 나의 이상을 꺾을 수 없다, 결코.”

“아뇨, 난 이겨요!”

연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일반론으로 날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에요. 그리고 돈 무시하지 마세요. 돈은 좋은 거라구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땅 위에 발 을 딛고 사는 주제에 자신이 인간임을 잊으면 안 되죠. 인간은 먹고, 입고, 잘 공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것들은 공짜가 아니에요. 꼭 삐까번쩍한 걸로 만들지 않아 도 무언가가 대가로 필요하죠.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 있어야 하거든요. 설마 당신 먹고 입는 모든 게 공짜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니다. 하지만 난 돈이 목표는 아니다. 나에겐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을 이루기 전에 절대로 죽을 순 없다.”

그러자 연비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어라, 나도 돈이 목표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다만 돈은 좋은 거고, 많을수록 좋다는 것뿐이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도구와 수단이 필요한 법 아니겠어요? 세 상에 공짜는 없잖아요? 게다가 난 내 목표를 위해 돈을 수단으로 삼지만 당신은 뭐죠? 당신은 당신의 그 잘난 사명을 위해 ‘타인의 피’를 수단으로 삼고 있잖아요!” 연비의 검지손가락이 검처럼 칠상흔의 미간을 향했다. 칠상흔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연비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어느 쪽이 더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안 그래요?”

“날 모욕할 셈이냐?”

연비의 손가락이 그의 미간에서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그 등 뒤에 짊어지고 있는 관은 뭐죠? 쇠사슬로 그렇게 꽁꽁 묶고 있으면 무겁지 않나요? 당신 시신이 들어가기엔 좀 좁은 것 같은데요?”

그의 몸이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지금보다 세 배는 압축되어야 할 터였다.

“넌 그걸 알 자격이 없다. 알려고 하면 죽인다.”

연비는 어머 무서워라, 라고 말하기보다 실소를 터뜨리는 쪽을 택했다.

“풋, 재미있는 말이네요. 알려고 해도 죽이고, 알려고 하지 않아도 어차피 죽이고. 어떤 짓을 해도 죽이려고 하는 것엔 변함없으니 기왕지사 관심을 가지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요? 호기심이란 것은 인간의 지혜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 잖아요?”

사실 호기심이란 게 없었다면, 세상에 대한 질문을 품지 않았다면 인간은 이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덜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돌로 만든 도 끼로 타인의 머리를 ‘으깰 때보다는 많이 발전했다. 적어도 지금은 쇠로 만든 도끼로 타인의 머리를 ‘쪼갤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틀렸다. 호기심은 명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지.”

잠시 침묵하던 연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자기를 벌주고 싶어요?”

연비는 이대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할 말은 끝까지 다 한다, 그 말이 끝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해도 말이다.

“무, 무슨 소리냐!”

발끈한 칠상흔이 버럭 소리쳤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도망치고 싶나요?”

“난 도망치고 있지 않아!”

“아니, 당신은 겁쟁이예요.”

그 말에 칠상흔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그는 부정하지만 그의 마음은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그 부러진 도.”

연비가 한 손가락으로 칠상흔의 손에 들린 도를 가리켰다.

“당신의 도법은 원래 그런 반 토막짜리 도로 펼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당신은 잃어버린 길이를 보충하기 위해 항상 남들보다 반보 더 들어오죠. 순간적으로 상 대와의 거리를 영으로 만드는 당신의 보법은 그 부족한 부분을 메우기 위한 것이기도 하죠.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하는 도강 역시 부족한 길이를 메우기 위한 다른 방 편일 뿐이고요.”

“그, 그걸 어떻게?”

그러나 연비의 말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등 뒤의 관과 그걸 고정하기 위해 온몸에 휘두르고 있는 쇠사슬은요? 마치 죄인을 묶는 족쇄 같군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벌주고 싶었나요?”

“……”

칠상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치명적인 살초를 맞기라도 한 듯 백지장처럼 새하얗다.

“벌주는 방법치고는 무척 특이한 방법이라는 데는 동의해요. 타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자신을 벌주다니. 아니, 그건 아니죠. 그건 도망이었어요. 자신이 버리고 온 것을 상기하지 않기 위해. 때문에 당신은 이런 곳에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죠.”

칠상흔의 표정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런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비는 청산유수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 관 안에 있는 게 뭔지 말해줄 필요도 없어요. 난 이미 알고 있으니까!”

연비가 자신만만한 선언에 칠상흔의 몸이 벼락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헛소리!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따위가 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리가 없어! 그러니, 닥쳐라! 더 말하면 죽이겠다.”

“죽일 수 있다면 죽여보시죠. 하지만 내 입을 막을 수 없을걸요?”

칠상흔은 힘줄이 불끈 튀어나올 정도로 힘껏 손잡이를 움켜잡았지만 끝내 휘두르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칠상흔을 향해 연비는 손가락을 쫙 뻗었다. 그리 고 선언하듯 외쳤다.

“그 안에 가둬져 있는 건 바로 당신의 ‘과거(過去)예요!”

그 말에 칠상흔은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가 계속해서 도망쳐 왔던 과거가, 계속 외면해 왔던 자신의 죄가 한순간에 그를 덮쳤던 것이다. 그의 사고는 일순간 마비되었고, 무엇도 할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수년간의 회한이 담긴 그 비명은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지고 가슴이 묵직해지는 비명이었다. 지금 혈염제라고까 지 불리우던 그 무패의 제왕이 무명의 여인 앞에 그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러나 연비는 생각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자! 용기가 있다면 여기 이 수많은 관중들이 모인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선언해 봐요.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나요? 내가 누구누구라고. 내가 바로 너희들이 알던 바로 그 누구라고. 그런 용기가 있다면 한번 해보시죠. 그 관 안에 파묻어두었던 자신의 시체를 꺼내 들어봐요. 자기를 자기라고 증명할 그 증거를 이 세상의 빛 아 래 다시 들이밀어 봐요. 그렇게 못하겠으면 차라리 그냥 패배나 인정하시죠. 난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겁쟁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자, 선택해요!”

연비가 당당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칠상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그 모습 어디에도 전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싸울 의사를 완전히 박탈당한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연비의 호박색 눈동자 속에 어떤 동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그때 침묵하던 칠상흔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겁쟁이…… 겁쟁이…… 겁쟁이…….”

“응?”

연비는 다시 시선을 칠상흔에게로 옮겼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완전히 김빠진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몸 깊숙한 곳에서 힘이 뜨거운 용암처럼 들끓어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벌떡 일어난 칠상흔이 외쳤다.

“크아아아아아아! 지금 누구보고 겁쟁이라는 거냐? 감히 이 몸을 보고 겁쟁이라고 했느냐?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 리, 헛소리, 헛소리, 헛소리!”

칠상흔은 달궈진 주전자 안의 물처럼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던 감정이 아무래도 이성이란 뚜껑을 날려 버린 모양이었다. 모든 것에 무심하던, 자신을 죽이려 하는 적에게조차 무심하기 그지없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뭘 두려워하는 거죠?”

연비는 무엇에 분노하느냐고 묻지 않고 무엇을 두려워하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칠상흔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단순히 묻어둔 과거를 무덤 속에서 꺼내 관 뚜껑을 열었다는 것에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군요.”

“……”

칠상흔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단한 접착제로 입을 꼭 붙여놓은 것 같았다.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거죠?”

연비는 다시 한 번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어느새 칠상흔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싸울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아니, 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두려운 것 따윈 없다! 두려워해야 할 건 너다!”

칠상흔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아뇨. 자신의 과거를 마주치지 못하고 도망치는 사람한테 그딴 말 듣고 싶지 않아요. 뭘 두려워하는 거죠?”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을 칠상흔은 참아내지 못했다.

“크허어어어어엉!”

사자의 포효 같은 함성과 함께 칠상흔이 질풍처럼 달려들며 외쳤다.

“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칠상흔의 공격에서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이었다. 연비로선 감사할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이럴 때는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어는 안 되면서 속도 하나는 빠르다. 이미 현천은린의 간격 안이었다. 그러나 아직 주먹이 있었다. 힘껏 주먹을 쥔 다. 이제 칠상흔은 지척에 있었다.

““감사!”

연비는 있는 힘껏 면상을 향해 주먹을 후려갈겼다.

시원한 격타음과 함께 칠상흔이 거의 땅바닥에서 물수제비가 튀기듯 세 번 튕긴 다음 네 바퀴를 굴렀다.

“엄청 꼴사납게 굴렀군요.”

나백천이 눈살을 찌푸리며 감상을 피력했다.

“엄청 아파 보이네요.”

보고 있는 쪽이 다 아파 보일 정도였다.

“멍청한 녀석!”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혁중노인이 한마디 했다.

“죽었을까요?”

“아마 안 죽었겠죠.”

유진의 물음에 무박 선생이 대꾸했다.

“하지만 이런 무참한 꼴을 당한 건 처음이니 아마 본인도 무척 부끄러울 겁니다. 아, 마침 저기 일어나는군요.”

“제 착각일까요? 얼굴이 좀 붉어 보이는데요? 방금 전에 얻어맞았기 때문일까요?”

“뭐, 부끄럽기 때문이겠죠.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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