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미소저(小姐)의 출전!
-매화의 춤
소년은 항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언제나 자신도 모르게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이었다. 그런 걸 적면증(赤面症)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고 치려고 해도 마음대로 고쳐지는 종류의 것은 아닌데다 상당히 중증이기까지 했다.
하늘이 내린 소심함은 천부적이었던 탓인지 쉽게 고쳐지지 않았고, 적극적이지 않다 보니 화산파의 동문 사형제들에게도 쉬이 깔보임을 당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직 동물의 본성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지 못한 처지라 약한 자를 보면 도와주기보다는 괴롭히거나 억누르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 드는 경향이 다분했다. 그래서 소년은 항상 날이면 날마다 괴롭힘을 당했다. 거기에는 적면증과 함께 타고 태어난 또 하나의 체질도 한몫 단단히 했는데, 그는 화산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매화 의 향기에 대해 두드러기가 나는 아주 특이한 체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모종의 기연을 얻어 그의 실력이 어느새 주위의 동문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친구에 대 한 모욕이었다. 보다 앞서나갔음에도 심적인 문제로 인해 여전히 왕따를 당했다. 아마 비류연이라는, 세상의 관습이란 관습은 모두 때려부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 는 인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여전히 변함없는 왕따 신세였을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비류연,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해 많은 회의를 품고 있었고, 그가 귀신이나 도깨비가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소년은 그를 만나고 비로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인정하고 반성하며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를 만나고서 비로소 소년은 자신이 먼저 바뀌어야 세상도 덩달아 바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조금 자신감을 가졌다 해서 고질적인 소심증이 완전히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연비라는 사람에 의해 모종의 협박과 회유에 의해 윤미라는 가공의 인물로 변모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비류연과 떨어진 이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괴상한 사건에 휘말려들 일은 없겠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때가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어느새 또 다른 사건에 휘말려 들어 있었다.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는 자는 바로 연비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연비라는 사람에 대해 잘 몰랐다. 그뿐만 아니라 사절단의 다른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신비한 호안석(石) 눈동자를 가진 검은 옷의 여인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 새로운 태풍의 눈이 되었다. 그와 그의 친구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연비라는 여인이 빙백봉 나예린과 무척 친하며 오랜 옛날부터 아는 사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원치 않는 복장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었다.
‘내 모습, 정말 괜찮은 걸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다행히 아직까지는 자신이 남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연비는 단호한 목소리로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요. 대중은 자기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보니까. 혼자일 때보다 더 차분하게 생각하지도 않아요. 꼭 남이 대신 생각해 주고 있으니 자기 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꼴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오히려 눈썰미 좋은 단 한 사람 앞에 있는 것보다 수만 명의 사람 앞에 있는 게 훨씬 들킬 확 률이 덜해요.”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대중은 눈뜬장님이라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들은 일의 본질은 보지도 않고 볼 생각도 없는 인종들이에요.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죠. 그러니 아~무 걱 정 말아요. 알겠죠?”
“그, 그렇군요…….?
첫 출전에 앞서 연비가 그렇게 말하며 기운을 북돋워 주었지만, 여전히 불안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소심한 성격 때문이리라. 어쨌든 지금은 싸워야 할 때이니 잡생 각은 빨리 접고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윤미는 약간 긴장된 손길로 자신의 애검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싸울 때마다 떨렸다. 상대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는 칼을 꼬나 든 상대가 보다 자신을 보고 있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이 더 두려웠다. 대기석에서 긴장 으로 떨고 있을 때 다가온 연비가 어깨에 턱 하고 손을 올리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걱정 말아요, 윤 미소저. 긴장할 거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저치들은 당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연비는 그를 부를 때면 언제나 ‘윤미 소저’라 부르지 않고, 언제나 ‘윤 미소저’라 불렀다. 고의가 분명했다. “절 보고 있지 않다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눈물이 글썽거릴 것 같은 눈동자로 연비를 바라보며 윤미가 울먹였다. 연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지금 윤 미소저라는 가공의 인물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전혀 떨 거 없고 긴장할 것도 없어요. 말했다시피 저들은 당신을 보고 있지 않으니까요. 보고 있지 않으니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죠.”
“나를 보고 있지 않다…….”
그 조언 같지 않은 조언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어느새 거짓말처럼 손의 떨림이 멎어 있었다.
“어라? 괜찮네요? 진짜로 떨리지 않아요.”
본인 스스로도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연비가 웃으며 말했다.
“거봐요. 전혀 떨 필요 없잖아요. 긴장하지만 않으면 저런 상대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이제 나가서 화산의 검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는 살짝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매화의 춤을.”
윤미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세 명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바라보았다. 둘은 남자고 하나는 여자였는데 모두들 깡마른 몸에 눈빛이 뱀처럼 날카로웠다. 그들이 입고 있는 백의(白衣)는 순결하고 순수하다기보다는 병적이라는 느낌이 완연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뱀이나 개구리처럼 사람을 불쾌하게 하는 기운을 내뿜는 자 들이었다. 윤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그들의 하얀 옷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기분 나쁠 정도의 하얀색이란 바로 저런 색깔일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시합을 본 적이 있는 윤 미는 알고 있었다. 시합이 끝났을 때 저 백의에 묻어 있는 것은 먼지가 아닌 피라는 것을. 그러나 그 피를 부른 도구는 평범한 병장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작고 얇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수술용 소도였다. 그렇다. 저들은 의원이었다. 그것도 의료를 담당하는 마천십삼대 제사번대(第四番隊) 소속의 수뇌부들이었다. 분명 사 번을 택한 건 ‘사(四)’자가죽을 사(死)’자와 음이 동일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음을 관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마천각의 학생들에게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죽음을 줄 수도 있는 것은 바로 자기들뿐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윤미는 멀쩡한 사람도 순식간에 환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광기로 물들어 있 는 이자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아, 정말, 꼭, 싸워야 하나…….’
지금이라도 당장 등을 돌려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그들의 깡마른 몸에 걸친 새하얀 백의와 하얀 장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얼마 전 시합에 서 저 하얀 장갑에 들려 있던 것을 윤미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
‘의료미숙(醫療未熟)!’
그것이 저 새하얀 의원 지망생들이 속한 조의 이름이었다. 스스로를 겸양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면 최악의 이름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더욱더 최악이었다. 그들 조의 이름은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과 혐오를 느끼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시합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그들이 마천십삼대 제사번대의 핵심 수뇌부이 자 굉장한 실력의 소유자이니 꼭 눈여겨봐야 한다는 은설란의 상당히 과격한 귀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미친놈들의 시합은 꼭 봐두는 게 좋아요. 왜냐하면 엄청나게 위험한 놈들이거든요. 직접 보지 않으면 얼마나 미쳤는지 아마 알 수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 은 상상 이상으로 미쳤거든요.”
은설란이 덧붙이듯 해준 경고였다. 그렇게까지 말해주는데 안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윤미는 연비, 나예린과 함께 앞자리에 앉아 그들의 시합을 관전하 게 되었다. 참가자 특혜로 그들은 제일 좋은 자리에서 시합을 관전할 수 있었다. 은설란은 참가자는 아니었지만 너무나 손쉽게 선수 전용 자리로 들어와 함께 앉았 다.
“오호호호, 제가 그래도 여기선 한 가닥 한답니다.”
놀라는 사람들에게 은설란이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의료미숙조를 응원하러 온 사번대 대원들을 구분하는 건 무척 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들과 똑같이 모두들 먼지 하나 없이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저 사번대의 규율 중엔 저 백의에 먼지를 묻이면 사형이라는 조항이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연비는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나예린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저기 백의 구경꾼들 한가운데 있는 저 사람은 누구죠? 얼굴에 사선으로 큰 상처가 나 있는 사람 말이에요? 키가 굉장히 큰데요? 한 ‘구 척’은 되겠어요? 상당히 근육질이고, 외공고수인가?”
나예린의 손가락이 한곳을 가리켰다. 나이는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꼬맨 자국 같은 흉터가 얼굴을 사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어쩐지 사선의 위쪽 피부색과 아래쪽 피부색이 미묘하게 다른 듯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사번대 대장 ‘생사무허가(生死無可) 불락구척’이에요.”
은설란이 말했다.
“아, 저 사람이 바로!”
그제야 비로소 연비도 그에게 흥미가 생겼는지 시선을 옮겼다. 일단 마천십삼대 대장급은 될 수 있는 한 일단 기억해 두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누구죠? 저들도 마천각 사람인가요?”
은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푸른 늑대들이에요.”
“푸른 늑대요?”
“마천십삼대 제구번대, 일명 ‘창랑대(蒼狼隊)의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들 조의 이름도 ‘창랑조였다. 시간을 별로 들이지 않았을 것 같은 간단한 작명이었다.
사번대 의료미숙조와 구번대 창랑조의 대결은 일 대 일 삼판양승이 아닌 삼대 삼 한판승으로 결정되었다. 이 삼십만 냥 투기제는 하나씩 나와 싸우든 셋셋이 동시 에 싸우든, 하나가 계속 셋과 싸우든 그건 서로가 합의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합의가 안 되면 뽑기로 결정했다. 양쪽 모두 서로 호흡을 맞추는 데 무척 익숙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개인전보다는 단체전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특히 ‘창조’는 서로 무기의 길이가 다르면서도 서로의 장점을 해치지 않는 것을 보니 합격술을 전문으로 익힌 자들 같았다. 합격술이란 건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설프게 대가리 수만 믿고 합격술을 펼칠 경우 동료의 칼에 상처를 입는 경우도 비 일비재했다. 하지만 저 ‘창랑조’는 무리를 이룬 늑대처럼 호흡이 딱딱 맞고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도 남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니, 서 있는 모습만 봐도 한눈에 강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자인 늑대는 무섭지 않더라도 무리를 이룬 늑대는 무섭지요. 과연 늑대는 늑대군요.”
그들의 가슴 섶에 새겨진 푸른 늑대 문양을 보며 은설란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무서운 자들인가요, 저들이?”
그들의 등에 새겨진 아홉 구(九)자를 보며 윤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늑대의 무리만큼 집요하고 끈질긴 무리도 드물지요. 특히 저 푸른 늑대들은요.”
은설란의 말에 따르면 저들은 마천십삼대 중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합격술에 집착하는 자들이었다. 저들이 합격술을 쓸 수 없을 때는 혼자일 때뿐이라는 이야기까 지 돌고 있는 것만 봐도 그 집착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들은 혼자 다니는 법이 결코 없었던 것 이다. 두 명 이상일 때 저들은 언제든지 구번대 누구와도 합격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 수가 늘어나 넷이 되고 다섯이 되고 여덟이 되고 아홉이 되어도 전혀 문제없 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구번대 전체 인원을 총동원해 펼치는 ‘대합격진’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날마다 본대 회의청에 모여 타 문파의 진법을 연구하는데, 그 중에 파훼 요망 일순위 진법이 소림의 백팔나한진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백팔나한진을 파훼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구번대 대장이 계속해서 바뀌는데도 그 순위에 변동은 없었다. 그리고 이론상의 파진법이 실제로도 적용되는지는 직접 몸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자들은 기 회가 오기만 한다면 언제든 응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얼마나 강하죠? 합격술이라면 이골이 난 자들에게 합격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순순히 넘겨주다니…… 상당한 자신감이 없 고는 불가능할 텐데요?”
연비의 말에 틀린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저들은…… 광인들이에요.”
“광인이요?”
“네, 의술에 미친 광인이죠.”
은설란의 아미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렇다면 저 구번대 사람들이 유리하겠군요.”
아무래도 의원이라는 것은 약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을 상처 주기보다 상처를 치유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 사번대 대장만 예외적으로 상대를 흠씬 두들겨 팬 후, ‘넌 이미 죽어 있다’라고 말할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나머지는 하나같이 약골들이었다. 그러나 은설란은 윤미의 말에 동의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은설란이 반문했다.
“당연히 저들이 무력 담당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그에 대한 훈련과 실전도 훨씬 많이 겪어보지 않았을까요? 생긴 것도 훨씬 강하게 생겼고요. 반면 저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은 겨우 의술을 익혔을 뿐이잖아요?”
누가 봐도 무력적인 우세는 명백했다. 저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이 강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요?”
은설란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요? 아마 이번 시합을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한 번 더 은설란은 직접 보는 것을 강조했다.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보여줄지 기대하며 그들은 투기장의 중심을 주목했다. 조금 후 그들은 확실히 저 백의인들이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 만 그것은 끔찍한 쪽으로 대단했다.
구번대 창랑조는 삼각형 모양으로 포진했고, 사번대 의료미숙조는 일자로 포진했다. 창랑조 세 명이 각기 검, 도, 창을 들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면, 의료미숙조
는 눈처럼 흰 장갑을 낀 채 두 손을 모두 가슴까지 들어 올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여섯 손 모두 빈손이었다.
“왜 저런 이상한 자세를 취하는 거죠?”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윤미가 물었다. 이 중에서 그 궁금증에 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쳐다보며. 은설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 주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다만 병기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칼이나 검 같은 병기로부터요? 어떻게요? 엄청 취약해 보이는데요?”
윤미에게는 저들의 자세가 꼭 자기 손을 잘라달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이나 저들의 자세는 무도의 상도에 심히 어긋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병기(兵器)가 아니라 병의 기운인 병기(病氣)예요. 저들은 우리 외부의 모든 것은 더러운 병기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병기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항상 깨끗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하더군요.”
“뭘 위해서?”
이 짧은 물음은 연비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은설란은 대답을 해주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조금 고민하다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사람의 배를 가르기 위해서라더군요.”
두 조 중 먼저 움직인 쪽은 구번대 창랑조 쪽이었다. 이들 푸른 늑대들은 먹이를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깊지는 못했다.
“삼련마랑진(三連魔狼陣)을 펼쳐라!”
셋 중 가장 우두머리 늑대인 혈삼랑(血三狼) 마성진이 외쳤다. 그는 구번대 서열 삼위로 패도적인 검술의 달인이었다. 그의 명에 따라 서열 사위 흑사랑 도명과 서 열 오위인 적오랑 여위가 자기 위치로 가서 섰다. 이들 구번대는 별호에까지 서열을 매겨 넣는 특이한 전통이 있었다. 그만큼 늑대들이 서열을 중시하기 때문이었는 데, 서열이 바뀌면 별호 가운데 들어가는 숫자도 바뀌었다.
세 사람은 삼각형 모양으로 포진했다. 삼각형의 꼭지를 담당하며 전면에 선 이는 바로 혈삼랑 마성진이었다.
“저런 기분 나쁜 놈들이랑 오랜 시간 끌 필요 없다. 단숨에 끝장낸다. 알겠나?”
“예!”
동시에 대답이 들려왔다.
“어차피 의원 나부랭이들이다. 서로서로 실컷 치료하게 만들어주자! 마음껏 두들겨라.”
“알겠습니다.”
혈삼랑이 명령했다.
제삼(第三)진형’으로 움직인다.”
진형이란 미리 약속된 합격진의 운용법으로, 합격술에서는 이런 약속이 없으면 동작이 엉클어져 자칫 잘못하면 진세가 무너지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저놈들에게 푸른 늑대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여주자!”
세 명의 늑대가 대형을 유지한 채 일제히 자리를 박차며 울부짖었다. “돌격!”
합벽진(合臂陣), 합벽술(合臂術), 혹은 합격술(合擊術)이라 불리는 것들은 쉽게 말해서, 여러 사람으로 한 사람을 효과적으로 조질 수 있는 방법을 총칭한다. 적어 도 흑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흑도의 합벽진은 백도의 합벽진과는 모든 면에서 궤를 달리한다. 음양, 오행, 삼재, 구궁, 그런 골 아픈 것들은 다 필요 없다. 자연의 운행이니 오행의 상생상극이니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고리타분하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론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실 전성(實戰性)이었다. 얼마나 적을 쉽고 빠르게 단시간 안에 쓰러뜨릴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합벽진의 처음이자 끝이었다. 이들 창랑조의 합벽진 역시 마찬가지였 다. 그들 역시 어떻게 하면 목표를 가장 쉽고 빠르게 물어뜯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빠르고 군더더기 하나 없고, 탐욕스러웠다.
이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백의인 쪽에서도 드디어 움직임이 있었다. 이들 역시 그냥 서서 늑대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자, 그럼 진단을 시작한다. 문진 개시!”
의료미숙조 중 맨 뒤에 자리한 자가 외쳤다. 그는 바로 사번대 서열 이위인 의호(醫虎) 하우수였다.
“옙! 의료장님!”
첫 번째 백의남자 ‘문진 채이수’가 포진한 세 명의 푸른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푸른 늑대도 달려오는 먹이를 그냥 둘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삼각형의 오른쪽 날개에 서 있던 적오랑이 움직였다. 그의 무기는 양손으로 휘두르는 거대한 대도였다. 한 손보다는 양손에서 나오는 힘이 강한 법. 그의 역할은 이 한 수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봉쇄하는 것이었기에 상대를 막기만 하면 그 뒤는 자신의 일신 거력을 발휘하여 충분히 상대를 붙잡아둘 수 있었다. 그러나 채이수는 엄청난 빠르기로 보법을 밟으며 매섭게 떨어지는 일도를 피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그의 손목을 잡아챈 후, 뒤로 관절을 비틀 어 꺾은 다음 발로 무릎 뒤를 지긋이 밟아 다리를 봉쇄했다.
적오랑이 너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혈삼랑과 흑사랑은 어안이 벙벙하여 달려들 호흡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 그들의 대장이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돌아가 서경을 칠 일이었다. 그들의 대장 늑대는 용서란 것을 모르는 잔인한 마랑(魔狼)이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 대장이 지금 저기 앞줄에서 이 시합을 지켜보고 있
다는 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세 늑대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으하아아아압!”
높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흑사랑이 기다란 장창을 벼락같이 찔러갔다. 원래대로라면 대도로 봉쇄된 상대의 배를 꿰뚫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마취 개시!”
그때 의호 하우수가 다시 외쳤다.
“예!”
그러자 두 번째 백의인이 달려들었다. 그 백의인은 놀랍게도 여자였다. 백의녀의 손에서 커다란 침이 여럿 튀어나오더니 장창을 찔러오는 흑사랑을 향해 던졌다. 흑사랑은 하는 수 없이 창의 방향을 바꿔 날아오는 침들을 튕겨냈다.
챙챙챙! 푹!
흑사랑은 세 번째 침까지는 튕겨냈지만 네 번째 침까지는 막지 못했다. 마혈을 침에 찔린 흑사랑은 순간 석상처럼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자 혈삼랑이 부하 를 돕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우수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백의녀 호원을 믿고 있었다.
백의여인의 왼손이 활짝 펴졌다. 그러자 그녀의 하얀 장갑에서 뿌연 연막 같은 것이 피어올라 순식간에 사방 삼장을 뒤덮었다.
“독(毒)?!”
깜짝 놀란 혈삼랑은 즉시 호흡을 멈추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세 발짝 이상 뒷걸음질칠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분명 호흡을 멈추었는데…….’
원래 ‘독무(毒霧)’는 생각보다 살상력이 높은 종류의 하독술이 아니었다. 특히 이렇게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격전 중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상대의 호흡 기로 들어가기 전에 흩어져 버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효과가 없어야 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서서히 감각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설마 피부독!’
혈삼랑은 경악했다. 그렇다면 숨을 멈추었는데도 몸이 뻣뻣해지는 이 현상이 설명이 됐다. 그는 내막을 알 수 없었지만 사실 침에 묻어 있던 ‘마산’과 피부로 흡 수된 독무가 상호작용을 일으켜 더욱 빨리 약효가 돌게 된 것이었다.
“앗, 독입니다! 독! 독은 규칙 위반 아닙니까?”
미성공자 유진이 경악하며 외쳤다.
“아, 독이면 규칙 위반이죠. 하지만 독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무박 선생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대답은 백의여자 본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독이 아니라 마비산의 일종입니다. 피부 흡수용이죠. 침에 묻어 있는 건 근육용이고요.”
백의여자가 무식한 소리 그만 하라는 눈빛으로 싸늘하게 외쳤다.
“하지만 왜…….”
옴짝달싹 못하게 된 세 사람의 전신을 첫 번째 백의남자와 두 번째 백의녀가 빠른 손놀림으로 훑었다.
“증상은?”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하얀 복면의 남자, 의호 하우수가 물었다.
“넵. 속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문진 채이수의 대답을 들은 하우수의 두 눈이 날카로운 섬광을 발휘했다.
“채이수, 인간의 속에 몇 가지 장기가 들어가 있으며, 몇 가지 근육과 몇 개의 뼈가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겨우 그 정도로 환자를 고칠 수 있겠나? 정확한 부 위는?”
“죄,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아마 소장 쪽인 것 같습니다.”
“아마? 같습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어조로 의호 하우수가 반문했다. 손으로 만져서 진찰하던 채이수의 얼굴이 급박해졌다.
“아닙니다. 소장이 확실합니다. 소장이 경색되어 극심한 소화불량을 앓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확신에 찬 어조로 채이수가 대답했다.
“좋다! 그럼 환자의 증상을 개선하기 위한 들어간다. 어떤 처치가 필요한가, 호원?”
하우스가 이번에는 백의녀 호원에게 물었다.
“시급한 개복 처치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개복이란 말 그대로 배를 갈라 여는 것을 말했다.
“좋다, 지금부터 개복수술을 시작하겠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호 하우수가 움직였다. 질풍 같은 보법을 밟으며 날랜 호랑이처럼 단숨에 거리를 좁힌 그의 하얀 장갑에는 어느새 날카롭게 빛나는 소도 가 들려 있었다. 날에 푸른빛이 감돌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지만, 무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아무리 크게 봐줘도 조그만 붓 정도의 크기였다. 아무리 날 카롭게 벼려져 있다 해도 저런 칼로는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걱!
좌아아아악!
그러나 순식간에 사람들의 예상은 모두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하우수의 손에 들린 소도가 한 번 번뜩이자 순식간에 선 채로 굳어져 있던 창랑조의 푸른 늑대 적오 랑의 배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오히려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상처에 비해 피는 생각보 다 많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무래도 이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푸욱!
갈라진 틈을 향해 하우수의 하얀 장갑이 망설임없이 파고들었다.
“히익!”
그 끔찍하고 기괴한 광경을 본 윤미의 입에서 괴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연비랑 나예린도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은설란은 시선을 외면했다. 다음에 벌어질 끔찍 한 일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루룩!
적오랑의 배에 박혔던 하얀 장갑이 가차없이 뽑혀 나왔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내장이 들려 있었다. 바로 상대의 소장이었다.
“흠, 색깔에 붉은 기운이 도는 걸 보니 상태는 생각보다 건강한 것 같군. 이 소장의 색깔이 보이나?”
하우수는 채이수와 호원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네, 보입니다.”
“예, 보입니다.”
나머지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이런 소장이 건강한 소장이다. 이 탄력과 색상을 잘 기억해 두도록. 알겠나?”
“네.”
“예.”
방금 전 채이수의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점은 전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속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뿐이었다. 하얀 두건의 남자는 지체없이 내장을 다시 배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돌아서며 말했다.
“문진, 이번엔 네가 봉합해 보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의료장님!”
채이수는 기쁜 어조로 대답하고는 어딘가에서부터 바늘과 실을 꺼내더니, 빠른 솜씨로 개복된 배를 꼬매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혹여나 내장이 꼬이거나 먼지가 묻 지 않도록 집어넣은 다음, 수술 부위를 닫고 실이 꿰인 바늘로 일정한 간격으로 단단하게 봉합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동작이 무척 재빨랐다.
“사람의 배는 다른 부위와 달리 근육이 강하고 두께가 두껍기 때문에 제대로 봉합하지 않으면 금방 벌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봉합 시엔 항상 주의하도록.” 의호 하우수가 열심히 봉합하는 채이수를 보며 세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갔다. 투기제의 팔강 진출 시합이 벌어지고 있는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진지하게 의도를 탐구하는 이들의 대화로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비무 중이었다. 그러니 이들의 태도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봉합이 끝났습니다.”
그 말에 사번대 부대장인 하얀 두건은 그 봉합 상태를 찬찬히 살핀 다음 환자의 눈동자와 입 안을 살폈다.
“음, 이상없군. 잘했다.”
“감사합니다.”
채이수가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인사했다.
“뭐하면 자네들도 진료해 줄까? 아직 시간도 많으니 우린 상관없는데? 마천각 친구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니까.”
하우수가 천천히 남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흑사랑과 혈삼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거친 늑대 무리들 속에서 싸움을 거듭했다지만, 방금 본 광경은 정말로 견디기 힘든 지옥 같은 광경이었다. 그 둘을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목은 움직일 수가 있었다.
“이번 개복은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부의료장님!”
열의에 가득한 눈으로 채이수가 말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사람의 배를 갈라볼 수 있는 이런 멋진 기회를 그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닙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저도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호원, 넌 저번에 환자 배에다가 칼을 넣은 채 봉합했잖아!”
“흥, 그러는 채이수 넌 장갑을 넣은 채 꼬맸잖아. 이틀 뒤에 그 봉합된 부위가 튼튼하지 않아 다시 상처가 벌어져 내장이 쏟아질 뻔한 걸 벌써 잊었어?”
채이수와 호원의 말다툼이 격해질수록 혈삼랑과 흑사랑의 얼굴에서 점점 더 핏기가 빠져나갔다.
“우…… 우리가…… 졌다.”
마침내 혈삼랑의 입에서 패배를 시인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미친놈들이라면 호기심 하나로 자신의 배를 가르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대 장 늑대에게 물어뜯기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다.
채이수와 호원의 다툼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하우수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붓으로 무언가를 빠른 속도로 휘갈겨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방금 전 아무 렇지도 않은 얼굴로 배가 갈린 적오랑의 품을 향해 던졌다. 종이에는 내공이 실려 있는 듯, 허공을 날아 정확히 배에 커다란 개복수술 자국이 나 있는 창백한 얼굴의 적오랑 품 안으로 들어갔다.
“처방전이다.”
그 말을 끝으로 새하얀 백의인 세 명은 몸을 돌려 자신의 대기실로 향해 걸어갔다. 새하얗던 그들의 장갑은 지금 모두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바, 방금 뭐 한 거죠?”
떨리는 목소리로 윤미가 물었다.
“건강진단이요.”
“뭘 진단한다고요?”
“저 사람 내장의 건강을 진단한 거예요. 다행히 병은 없는 모양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은설란의 표정은 가히 편치 않았다.
“그, 그걸 위해서 멀쩡한 사람의 배를 가른단 말입니까?”
“오진(診)이었던 모양이죠. 그래서 말했잖아요, 저들은 미쳤다고.”
“저 무자비한 진료를 받다가 죽는 사람도 있나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은설란이 윤미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반문했다.
“아, 아뇨.”
식은땀을 흘리며 윤미가 대답했다. 하긴 없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당장 죽지는 않지만, 세 번 중 한 번 꼴이라고 하더군요. 저 부대의 대장인 생사무허가 불락구척도 열 번에 한 번은 실패해요.”
그나마 거의 ‘신기(神技)’에 가깝기 때문에 그 정도 성공률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계속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깐 계속해야 한다더군요. 백 번을 가르고 봉해도 실패가 없을 때까지 말이에요. 저번에 보니깐 이번에 일흔일곱 명까지 성공했다고 자랑하더군요. 앞으로 서른세 번밖에 안 남았다고.”
윤미는 그 뻔뻔함과 따라갈 수 없는 광기에 멍해져서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윤미는 하마터면 구토할 뻔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자신의 내장을 구경한 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기라도 하듯, 혹은 그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실전적인 연습을 하기라도 하듯 재빠른 솜씨로 내장을 밀어 넣고, 실과 바늘로 절개 부위를 신속하게 봉합했다. 모든 봉합실의 간격이 단 한 치의 오차 도 없이 일정하게 꿰매진, 실로 기분 나쁠 정도로 깔끔하기 짝이 없는 솜씨였다.
그제야 연비와 나예린과 윤미는 은설란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광경을 말로 표현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확실히 무척이나 잔인한 일이 었다.
“확실히 적당히 미친 건 아닌 것 같군요.”
연비가 살짝 찡그린 얼굴로 감상을 피력했다. 불쾌한 기색이 물씬 풍겨나는 어투였다.
“추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돼서 정말 기쁘군요.”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은설란이 말했다. 이번이 첫 번째가 아니었음에도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에 속이 메스꺼웠다. 아마 수백 번을 다시 본다 해도 결 코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만일 저 광경이 익숙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자기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의심해 보기로 하고 오늘 본 광경은 그만 잊기 위해 지그 시 눈을 감았다. 꽤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진한 혈향이 후각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