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 대 의료미숙
-아픈 곳은 없습니다
윤미는 그때의 그 광경이 다시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자 온몸에 오싹한 오한이 돋았다. 그때 느낀 강렬한 혐오감은 짙은 혈향처럼 몸에 감긴 채 아직도 지워지지 않 고 있었다. 그런 자들을 자신이 직접 상대해야 하다니……. 그들과 대치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뱃가죽이 따끔따끔하고 속이 더부룩했다. 이미 그들의 소도가 그 의 배를 가르고, 그 벌어진 틈으로 먼지 하나 묻지 않은 흰 장갑을 쑤셔 넣고 이리저리 헤집고 있는 듯했다.
우웁,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는 구토를 윤미는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는 좀 더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때는 삼 대 삼으로 세 명이 동시에 붙었지만, 지 금은 일 대 일이었다. 이 시합은 쌍방의 합의하에 대전 방식을 바꿀 수 있었지만, 서로 의견이 다르다 보니 당연히 합의가 되지 않았고 제비뽑기까지 간 끝에 삼판 양승제가 채택되었다. 세 명이 동시에 덤벼들지 않으니 지난번 같은 참상은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역시 연비와 나예린의 도움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쪽에 신경 쓰다 보니 수만 개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잊을 수 있었다.
“윤 소… 저, 괜찮을까요?”
소협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얼른 소저로 바꾸며 나예린이 물었다.
“물론 괜찮고말고요. 걱정 말아요.”
연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두 사람은 투기장 좌우에 위치한 대기석에 앉아서 투기장 한가운데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기석은 벽 안쪽에 지면보다 약간 밑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의자에 앉아서도 경기장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아요.”
윤미는 그래서인지 좋게 말하면 정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금방금방 잘 긴장하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윤 미소저가 소심하긴 하지만, 본인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에요. 그동안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도 했고요. 저들이 특이하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괴이하긴 하지만 저런 상대에게 질 정도는 아니에요.”
“믿고 있군요, 윤소저를?”
나예린은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럼요. 그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동안 윤준호가 암중으로 많은 성장을 거듭해 왔음에도 그의 능력을 믿어주는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사실 그의 소심함과 자신감없는 태도는 타인의 신 뢰를 사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천무학관에 입관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연비의 입에서 믿는다는 대답이 망설임없이 나오니 깜짝 놀랐던 것이다. 나예린은 의아함이 담긴 시선으로 연비를 바라보았다.
“사실 이상해요. 윤 소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연비의 입에서 그렇게 쉽게 믿는다는 말이 나오다니 말이에요. 연비는 남을 쉽게 신뢰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 “거든요.”
그 말에 연비는 깜짝 놀랐다. 나예린의 말이 맞았다. 비류연이든 연비든 어느 쪽도 쉽게 사람을 믿지는 않았다. 나름의 기준대로 검증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믿을 지 안 믿을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상당히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쉽게 믿는다는 말을 내뱉고 말았던 것이다. “이거 좀 더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걸?”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심이 약해지면서 마음이 해이해지고 있었다.
“아, 아뇨.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니에요. 조금 알아본 정도죠. 그래도 같이 대회에 출전할 사람인데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적을 아는 만큼 우리 편도 잘 알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안 그래요?”
“그건 그렇네요.”
연비의 말이 나예린의 의혹을 완전히 씻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비는 나예린에게 속마음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설 수는 없어요, 린. 그러니 믿고 있는 수밖에 없잖아요, 저 친구와 예린을.’
현재 이런 몸 상태에서 내공을 함부로 운기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홍수로 불어난 물을, 저수지의 문을 억지로 닫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 다. 조금이라도 이변이 발생하면 아슬아슬하게 차 올라 있던 물은 당장에 흘러넘칠 게 분명했고, 한 번 흘러넘친 물은 걷잡을 수 없는 격류로 변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니 결승전까지는 최대한 힘을 아껴야 했다. 결승전도 아닌 시합에 나서는 것은 적이 아무리 비리비리해도 위험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사람을 믿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필이면 왜 저 사람이…….’
윤미에게 불행한 일은 하나가 아니었다.
지금 윤미 앞에 서 있는 상대는 바로 창랑조의 배를 갈랐던 장본인, 의호 하우수였다. 윤미는 저들 세 명 중 가장 강한 자와 맞붙게 된 것이다. 결코 좋은 대진운이 라고 할 수 없었다.
“아가씨, 어디 아픈 곳은 없소?”
의호 하우수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에는 환자의 안위를 생각하는 열정이 가득했다. “어, 없는데요! 없습니다. 절대로 없어요!”
윤미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만일 아픈 곳이 있다고 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돋았다. “흠, 그것참 아쉽군.”
뭣 때문에 아쉬운지는 무서워서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진짜로 없소?”
의심이 많은지 하우수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치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윤미가 대답을 바꿀 리는 없었다.
“어, 없어요. 절대로. 맹세해요.”
왜 아픈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맹세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맹세하고 보는 윤미였다.
“흐음, 그런 것치고는 안색이 창백한데?”
사실 지금 윤미의 얼굴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다지 좋은 색이 아니었다.
“음, 안 되겠군. 진맥을 한번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소.”
“저, 진짜로 필요없거든요. 전 건강해요.”
그러나 의호 하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외로 사람들은 자기 몸이 지금 얼마나 나쁜 상태인지 모르고 살아간다오. 그게 얼마나 병을 키우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오. 하지만 아가씨는 운이 좋군. 이렇 게 나 같은 전문 의원에게 건강을 검진 받아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으니까 말이오.”
될 수 있으면 영원히 그런 기회는 안 왔으면 하는 게 윤미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챙!
너무 당황한 나머지 윤미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연비는 쯧쯧 혀를 찼다. 상대의 흐름에 휘말리는 것은 어떤 경우든 좋지 않았다. 윤미는 자신의 흐름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빨리 원래대로의 흐름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진맥 따윈 필요 없어요, 난 건강하니까. 다가오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환자들은 그렇게 항상 자신들이 멀쩡하다고 주장하지. 하지만 진정한 의원은 그런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오. 왜냐하면 환자들은 대부분 다 거짓말쟁 이이기 때문이오.”
확신에 찬 어조로 하우수가 말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아?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나요?”
“물론. 걱정 마시오, 병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줄 테니.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할 거요. 순식간에 끝나지. 아가씨가 할 일은 간단하오.”
“그게 뭔데요?”
어느새 그의 손에는 파랗게 날이 선 소도가 들려 있었다. 소도를 든 그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치자 윤미는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자기 내장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가만히 있는 거요,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럼, 진료를 시작하겠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호 하우수가 호랑이처럼 달려들었다.
비록 의호 하우수의 소도가 날카롭고 재빨랐지만, 윤미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기민했다. 윤미는 검끝으로 소도의 궤도를 막으며 몸을 뒤로 뺐다. 저들의 금나수 와 점혈법의 수준을 생각할 때 접근전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검의 간격을 유지해야만 했다.
윤준호가 익힌 칠매검은 화산파의 유명한 검법인 매화이십사수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보다 좀 더 압축된 검로였다. 그것은 한 천재가 이십사수 매화검의 검 로를 압축해서 만든 검법이었다. 오랜 고련 끝에 불필요한 동작을 줄이고, 흐름의 한 호흡 한 호흡을 뛰어넘어 만들어낸 걸작이었다. 검이 같은 속도로 휘둘러진다 면 보다 짧은 거리를 움직인 검초가 더 빨리 도착하는 법이다. 간단한 이치지만, 그것을 몸으로 체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수한 고난의 길이 었다.
최근 들어 윤준호는 자신이 익힌 칠매검의 진가를 깨달아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동안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경험들을 무수히 해오면서, 그와 다른 화산파 제자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격차가 생겨나 있었다. 단지 본인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투기장 한가운데서 서서, 한눈에 딱 보기에도 광기에 번들거리는 괴물들과 싸워야 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마 이 런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것은 화산파 제자 중에서, 아니, 강호의 젊은 후기지수를 통틀어서도 거의 없을 터였다. 이 경험이 배움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좀처럼 하기 힘든 것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자신감이 좀 더 필요했다. 그는 아직도 부끄러운지 자기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긴장을 풀면 좋을 텐데.
나예린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멀리서도 윤미의 몸이 굳어 있는 게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그럴 수만 있었으면 벌써 구룡이 십룡이 되었겠죠.”
약간 불안해하는 나예린과 다르게 연비의 어조는 태평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연비는 그에게 그 정도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있나요?”
그건 과대평가일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의미였다.
“일단 지나치게 성실하잖아요.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특히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말이죠.”
“그 힘이 지금 당장 발현될 수 있을까요?”
나예린의 질문에 연비는 살짝 웃었다.
“그건 윤 미소저 하기 나름이죠.”
상당히 무책임한 대답이었다.
화산검성(華山劍聖)이라 불리우는 태사부에게서 비급을 받은 이후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여러 번의 경험을 쌓으면서 조금씩이나마 자 신감을 가져가고 있었다. 그동안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될 만했다. 그리고 자신감은 전염성이 있는 지 안하무인 급을 뛰어넘어 천상천하유아독존 급의 자신감을 지닌 비류연 옆에 있다 보니 그 넘치는 자신감이 조금 자신에게 전염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일은 이 시합에서 지는 것이 아니었다. 윤미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실수로라도 옷이 베여서 자신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이었다. 여자인 줄 알았는데 갈라 보니 알맹이는 남자였다. 게다가 그 여장 취미의 변태남은 대화산파의 제자 윤 모모였다, 라는 충격적인 비사를 강호에 던져 줄 수는 없었다. 사문의 명성에 누 를 끼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른 법이고, 사해팔방을 향해 뻗어나가는 법이다. 그 사실이 화산에 전해지면, 그렇잖아도 그를 열심히 괴롭히던 동문사형제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그가 태사부님의 존안을 뵐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 미칠 것 같은 강박적인 하얀 옷을 입은 흰장갑인들은 그를 이기기보다 그의 속을 갈라보는 쪽에 훨씬 더 흥미가 있는 듯했다. 내장이 꼬이듯이 울렁거리 고 아파왔다. 만일 저들이 배를 가르면 자연히 옷이 갈라지게 되어 있었다. 저들이 옷이 찢지 않고 살도 가르지 않는 무슨 요상한 심령 수술이라도 배우지 않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백이면 백, 정체가 드러날 터였다. 그 사태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요! 이겨요, 윤 미소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면 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연비가 씨익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무슨 얘기죠?”
“정말 읽기 쉽다는 얘기였어요, 우리 윤 미소저는!”
“아, 그 얘기였군요. 확실히 연비 말대로예요. 그는 정말 순진하군요. 티없이.”
윤미는 상대를 앞에 두고도 적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자기 고민에 치여 이리저리 생각이 많았다. 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대기석까지 보여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읽기가 쉬웠다.
“그게 바로 매력의 핵심이죠, 나나 린이 관중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이런 유형의 여성이 한 명 끼어 있어야 인기가 더욱 올라가는 거예요. 같은 유형의 인물 셋이 면 조금 밋밋하니까요.”
“설마 그걸 노리고…….”
“글쎄요?”
연비는 그저 웃기만 할 뿐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나예린은 연비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갑갑해졌다.
“이런 점은 정말 그 사람이랑 꼭 닮았어.’
남매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아직도 연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감을 느끼면서도, 마치 의식의 사각에 있는 것처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나예린 이었다.
“태사부님! 저에게 힘을!’
화산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변태가 되지 않기 위해!
윤미는 전심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허공중에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매화가 피어오르며, 은은한 매화향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매화가 바람에 휘돌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칠매검의 진면목이 윤미의 검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아름답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검법에는 그동안 윤미가 쏟아 부었던 피와 땀이 어려 있었다.
춤을 추는 꽃잎들이 걷혔다. 그러자 의호 하우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얼굴 곳곳이 울긋불긋했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고 눈동자도 게슴츠레하게 풀려 있었다.
“왜 저러죠, 무박 선생님?”
“글쎄요? 이상하군요. 검에 베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저건 마치.. 음, 그렇군요. 병에 걸린 사람 같습니다.”
“듣고 보니 확실히 그렇군요. 지병이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자기 건강에 엄청 신경 쓸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만일 그렇다면 스스로의 병 하나 못 고친 것이 되겠지요.”
하우수는 헤벌어져서 침이 뚝뚝 떨어지는 입으로 연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웅! 안 돼…… 안 돼…… 난 꽃향기를 맡으면.. “부작용이…….”
아무래도 그는 매화향뿐만 아니라 모든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쭉쭉 빠져나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 증세의 정도는 윤준호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쓰려져서 괴로워하는 하우수를 보며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어라, 이겼네?”
두려워하던 것과 달리 시합은 스스로의 체질 개선에 성공한 윤미의 승리였다.
두 번째로 나선 사람은 바로 연비였다. 연비의 상대는 의료미숙조의 홍일점이라 할 수 있는 호원이었다. 그녀의 성은 ‘간’, 씨였다. 별거 아니게 보이던 상대에게 사 번대 서열 이위가 지는 바람에 한판을 빼앗긴 탓인지 호원의 분위기는 매우 긴장되고 흉흉했다. 절대로 이기고 말겠다는 의지가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창랑조와 의 시합에서 보여주었던 얼음처럼 차갑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시합 개시라는 선언이 울려 퍼졌다. 호원이 장침 세 개를 빼 들며 달려들려 했으나 연비가 더 빨랐다. 즉시 손을 치켜든 연비가 외쳤다.
“기권합니다!”
막 달려들려던 호원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반면 연비의 얼굴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연비는 곧장 몸을 홱 돌려 아무 런 미련도 없이 나예린이 기다리고 있는 대기석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 멈춰!”
굳이 저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한 번쯤 선심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왜 그러죠?”
뒤돌아보며 연비가 물었다.
“지금 무슨 짓이냐? 장난치는 거냐?”
심장이 나쁜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호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방금 한 말 못 들었어요? 기권한다는 말? 아니면 자기 귀가 먹은 건 자기 스스로 치료할 수가 없는 건가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군요.”
“난 귀먹지 않았어! 왜, 왜, 싸워보지도 않고 기권하는 거지? 내가 무서운 거냐?”
피식.
연비가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명백했다.
“재미있는 농담이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틀렸네요.”
“그럼 왜냐?”
연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해 주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호원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왜 필요가 없는 거냐?”
“그야 우린 이미 승리했으니까요. 굳이 드잡이질을 벌여 체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죠.”
그건 상당 부분 진심이었다.
“……”
말문이 막힌 호원은 뭐라고 한마디 제대로 쏘아붙이지도 못했다.
“그럼 이제 의문이 풀렸나요? 뭐, 풀리든 풀리지 않든 나랑은 상관없지만 말이에요.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돌아가겠어요.”
연비가 대기석으로 돌아와 나예린으로부터 한 일도 별로 없으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도 호원은 돌부처처럼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매우매우 기분 나쁘고 찝찝한 승리였다.
마침내 대장전이 시작되었다.
미소저연대의 대장은 당연히 나예린이었다. 빙백봉이라는 별호답게 그녀는 침착했다. 거의 감정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았다. 차갑고 기품있는 발걸음으로 걸어나 온 그녀는 투기장 한가운데 섰다. 눈동자는 맑은 겨울날의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했다. 정적은 아름다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숨죽인 탄성이 관중석에서 흘 러나왔다.
의료미숙조의 마지막 남은 사람은 문진 채이수였다. 그의 시선은 걸어오는 나예린의 얼굴에서 떨어질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 안에서는 지금 어떤 열망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갈라보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한지 그의 눈동자가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그는 멍한 눈으로 홀린 듯이 나예린을 바라보았다. 나예린이 이제까지 몇 번이나 보아왔던 익숙한 눈 빛이었다.
“이 사람은 의원인데도 저러니…… 어쩔 수가 없구나.’
자신의 업은 의원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빨리 정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표정을 시시각각으로 변화시키며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옆에 있는 사람까지 덩달아 불안하게 만드는 그 사람은 그다 지 젊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랑 수염 모두 눈처럼 새하얀 그였으나 지금 그의 몸짓 어디에도 세월 속에서 길러진 연륜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 고 그가 하찮은 신분의 소유자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려 백도무림맹의 맹주 신분이었던 것이다.
“쯧쯧. 왜 이러나, 정신 사납게? 호들갑 좀 그만 떨어. 맹주씩이나 되서 나잇값 좀 하게, 나잇값 좀 해. 옆에 있는 노부가 다 부끄럽군. 청아야, 이 녀석은 만날 이러 냐?”
혁중노인이 혀를 차며 예청에게 물었다. 그녀는 딸이라는 껌벅 죽는 팔불출 남편과 다르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많이 참고 있는 거예요. 아직 뛰쳐나가지는 않잖아요.”
예청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 역시 묘하게 안정이 안 된 모습이었다. 평소에 차가운 달, 빙월(氷月)이라고 불리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달은 약간 열에 들떠 있었다.
“왜? 청아야, 너도 뛰쳐나가고 싶은 게냐?”
미심쩍은 목소리로 혁중노인이 물었다. 그러자 예청이 살짝 씁쓸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엄마니까요.”
단순명쾌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의 딸, 나예린이 제대로 싸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그것이 실감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딸 아이가 강한지 그녀는 몰랐다. 때문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더 참고 내색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자기마저 불안한 모습을 보이면 남편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으로 마음은 이미 뛰쳐나가 있지만 몸까지 진짜로 뛰쳐나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안 뛰쳐나가고?”
예청은 다른 물음에 같은 말로 답했다.
“엄마니까요.”
두 번 모두 똑같은 대답이었지만 의미는 서로 달랐다. 엄마니까 직접 달려가 지켜주고 싶지만, 엄마로서 그저 묵묵히 자식이 혼자 서기를 지켜봐 줘야 할 때도 있 는 것이었기에. 둘 모두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거냐?”
“그런 거죠.”
혁중노인은 허허 하고 웃었다.
“그렇게 말괄량이였던 너도 이제는 한 아이의 부모가 되었구나. 그때는 네가 철들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허허허.”
노인은 감개가 무량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전 할아버지랑 다르게 사람인걸요.”
“허허, 꼭 누가 괴물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어머, 아니셨어요?”
예청은 마치 수십 년 만에 처음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떽끼. 이제는 어른을 놀리기까지 하는구나.”
혁중노인이 장난스럽게 호통쳤다. 이 정도 애교는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위였다. 혁중노인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백천을 째려보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넨 나이는 배 이상 처먹어서 철이 훨씬 덜 들었군. 자네도 자네 아내를 본받아 좀 참고 지켜보게.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라잖아? 낄 데 안 낄 데 구별 못하고 팔불출처럼 촐랑촐랑거리는 게 부모 노릇 잘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애지중지하니, 자네 옆에서 저 아이가 컸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네. 검각의 ‘옥상(玉霜)’에게 맡긴 건 천만 억만 잘한 일이야.”
나백천은 매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빠의 마음과 엄마의 마음은 다르다니까요. 대형은 모릅니다, 몰라요.”
반성이라는 걸 모르는 태도에 혁중노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자네, 운 좋은 줄 알아. 맹주 같은 것만 아니었으면 한 대 쥐어박았어!”
“빨리 결판을 짓고 돌아가겠어요. 계속 서 있기가 불편하군요.”
이유는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탐욕 어린 시선들 때문이었다. 약속 때문에 면사를 하지 않은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이런 불편한 장소에서 오래 서 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삼초 안에 끝내겠어요.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마음이 약간 급해진 나예린이 발검했다.
“난 당신의 배를 갈라..”
그러나 채이수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쉬익!
싸늘한 섬광이 반원을 그리며 날아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검에 당황한 채이수가 보법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나예린의 검술은 한 번 몰아친 상대에게는 반격의 틈을 주지 않았다. 물러난 거리만큼 다시 거리를 좁혀 들어가며 압박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나예린은 몸도 가볍고 물새처럼 재빨랐다.
채이수는 소도를 휘둘러 검기를 날렸다. 작은 칼날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검기가 나예린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 예리함에서 하우수에 미치 지 못했다. 그의 장기는 사실 금나수와 관절기와 안마였다. 그러나 최절정의 수준에 검술을 상대하는 데는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두 번째 검이 휘둘러졌다.
검각 비홍검의 한 초식이었다. 물 위를 나는 기러기의 움직임을 본딴 검초였다.
날개편 기러기가 검풍을 갈랐다. 너무나 우아하고 매끄러운 동작은 보는 이의 심혼을 뒤흔들 정도였다.
팔랑!
채이수가 쓰고 있던 하얀 복면이 반 토막 되어 떨어졌다. 나예린의 검끝은 이미 채이수의 코끝에서 멈춰 있었다.
“져, 졌소.”
검끝을 타고 전해지는 싸늘한 냉기에 멍했던 채이수의 눈빛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수리 끝에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었다. 굳이 채이수가 입 밖으 로 내뱉지 않더라도 나예린은 그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예린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나예린이 발산한 싸늘한 분노에 정신을 번쩍 차린 채이수는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다.
“소문은 과장되게 마련이라는데 이건 오히려 축소된 감이 있군요. 나 소저의 승리입니다. 과연 검각의 검술은 명불허전이었습니다.”
“과찬의 말씀이에요. 그럼 전 이만.”
여전히 관객들의 시선이 불편했던 나예린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미소저연대는 팔강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수월하게 사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윤미만은 ‘수월하게’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절대로.
나백천과 예청의 걱정과 다르게 시합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 버렸다.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강해졌을까요?”
시합을 지켜보았던 예청의 눈동자 속에서 무한한 긍지와 샘솟는 기쁨과 진한 아쉬움이 한데 뒤섞였다.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는 어른이 되어 있는 법이지. 어떻게 부정한다 해도 말이야.”
혁중노인이 한마디 했다. 부모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어느새 아이는 훌쩍 커버렸다. 이제 더 이상 작고 연약해서 보호해 주지 않으면 안 됐던 어린아이가 아 니었다. 이제 자신의 두 발에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어른이었다.
“허허, 이거 잘못하면 당신보다 더 강할 수도 있소이다?”
나백천이 감탄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흠, 그래도 괜찮아요. 어차피 당신은 저한테 못 당하잖아요.”
사실 나백천의 무공이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강해져도 그가 부인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건 무공의 고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인, 난 감히 그런 무서운 생각을 품어본 적도 없다오. 하지만 내 생각엔 내가 예린이한테도 질지도 모르겠구려. 허허허.”
“당신이 그렇죠 뭐.”
예청이 자포자기한 듯한 한숨 소리를 흘려들으며 나백천은 나예린이 있는 대기석 쪽으로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야에 검은 옷을 입을 여인이 들어왔다. “다 끝났는데 왜 아직도 그렇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인가?”
그의 시선이 범상하지 않은 것을 본 혁중노인이 물었다. 대무림맹주를 이렇게 아이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전 무림을 통틀어 이 사람 하나뿐일 것이다.
“연비라는 아이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왜? 저기 대기석에 앉아 있지 않는가?”
“예, 편하게 앉아 있지요. 저도 잘 보입니다. 예린이가 저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아직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자리만 지켰지 않습니까?”
“두 번째 시합에 나갔잖는가?”
뭐가 불만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냥 나갔다가 기권하고 들어온 걸 싸웠다고 하지는 않지요.”
나백천은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자기 딸만 위험한 일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순진한 자기 딸을 꼬신 모든 원흉은 바로 저 연비라는 계집아이였다.
“그나마 여자 아이이기에 참고 있는 거지 만일 남자였다면 참지 않았을 겁니다.”
“흐음, 남자 아이면 참지 않았을 거라고?”
확인이라도 하는 어조로 혁중노인이 물었다.
“당연하지요. 그런 놈팡이라면 단숨에 달려가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렸을 겁니다.”
“자넨 아직 철들려면 먼 것 같군. 아직도 여전히 팔불출이야.”
“대형은 딸아이를 안 가져 봐서 이 기분 모릅니다. 딸 가진 아빠의 마음이라는 것을요.”
그 말에는 은근한 자부심과 자랑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부분이 혁중은 못마땅했다.
“그야 노부는 시커먼 사내 녀석밖에 못 낳았지. 그래서 지금 자네, 노부한테 자랑하는 건가? 같은 말도 한두 번 이어야지. 아주 입에 붙었어요, 입에.”
“당연하지요. 부럽지요?”
혁중노인은 기가 막힌 듯 ‘허허!’ 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하는 꼴을 보니 부러운지 한심한 건지 헷갈리는군.”
딸아이가 없어서 다행인지 안 다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전 무림에서 신마라 칭송받는 그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과거에 예청이나 그의 언니처럼 아끼고 귀여워하던 여자 아이 몇 명을 생각하며 짐작하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화낼 일만이 아니지.”
“저 연비라는 아이, 듣자 하니 청아랑 싸우면서 좀 다쳤다며? 피를 토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내상을 입었다는 건데, 얼마나 회복됐는지 알 수 없지. 차라리 지금 별 거 아닌 시합에서 힘을 축적해 놓고 큰 시합에서 활약하면 될 일 아니겠나?”
“큰 시합이라면 어떤 시합 말씀입니까?”
지금 이 노인에게 중요한 시합은 딱 하나뿐이었다.
“당연히 그 녀석…… 아니, 칠상흔과의 대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