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6화 – 친절한 진령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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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6화 – 친절한 진령 씨

친절한 진령 씨

-바람과 뇌전의 싸움

“내가 검 이외의 것을 사랑하게 될 줄이야!’

진령에게 있어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예전에는 그녀 역시 대부분의 여자 아이가 그러하듯 남자 따위 는 불결하고 이 세상에서 필요없는 존재로 여겼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싸움과 폭력과 힘자랑밖에 모르는 그런 야만인들을 좋아하는 다른 여자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평범하고 그들은 이상하다!”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기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기적이라 한다면 그건 분명 기적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남궁상이라고 했다.

행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그녀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걸 알려준 그가 고마웠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녀가 존경하고 경외하는 고모와 싸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그 혹독하고 끔찍한 대사형의 특훈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내했다. 다들 죽을까 봐 꺼려하는 그 훈련은 자신을 위해 감내하다니. 그녀는 감격했다.

그리고 그는 이겼다.

그것은 그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장 큰 난관을 넘음으로 해서 이제 남은 과정은 하나뿐이었다. 그녀 자신은 물론이고 그도 분명 알고 있을 거라 생각 했다. 그날이 언제가 될까? 진령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언제가 갑작스럽게 찾아올 그날을 행복 속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어느 날, 벌컥 열린 문 저편에서 그녀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곳에는 절대 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 던 진령은 서둘러 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그는 방금 무슨 짓을 하려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기다림은 어떻게 된 것인가? 지금 그 가 그것에 대해 눈곱만큼이라도 생각하고 있을까?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행복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텅 빈 그 자리에 배신감이 밀물처럼 몰려들어 왔다.

그녀는 대부분의 여자가 그러하듯 복수를 맹세했다.

아직도 진령의 눈에는 반쯤 벗겨진 옷과 흩날리는 은발 머리카락, 그리고 드러나 새하얀 어깨, 그리고 그 옷을 잡고 있는 한 남자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뿌드드득!

“가만두지 않겠어요, 절대로.”

진령은 악귀처럼 싸웠다. 삼십만 냥이란 거금에 꼬여든 강자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귀신의 검이 된 아미(蛾眉)의 검을 막아내진 못했다. 그 무시무시한 패기에 그녀의 고모인 아미신녀 진소령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군요. 저 아이, 지금은 마치 복수를 향해 나아가는 나찰 같은 검을 휘두르는군요.”

그러나 지금 진소령은 조언자로서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런 쪽 일에는 문외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문외한이 탓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 점창제일 검 유은성은 옆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누군지 몰라도 참 불쌍하군요. 저 무서운 검의 표적이 되어야 하니 말입니다.”

누굴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불쌍한 자는?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남자이리라. 누군지 몰라도 앞날이 참으로 고달픈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진령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동료와 친구가 있었다. 특히 마하령은 이제 이 일에 대해 상당히 열을 올리며 적극 동조하고 있었다.

“맞아요. 가만둘 필요 없어요, 가만두지 말아요. 남자에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내가 응원할게요.”

여인의 한을 공감한 탓인가? 어느새 사이가 좋아진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현재 진령은 매우 불친절한 상태였다. 동료의 응원도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마 소저도 조심하세요, 남자는 다 늑대니깐. 다 늑대……. 늑대 고기가 먹고 싶어요.”

진령 자신은 늑대 고기에 굶주려 있었건만 마하령은 아직 용천명과 별 문제 없이 잘되고 있었다. 마하령도 그걸 알고 진령도 그걸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 슬펐 다. 지금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찮겠어, 진령아?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조심스러운 어조로 남궁산산이 물었다. 그녀 역시 동생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징벌하기 위해 진령의 한 팔을 거들기로 나선 것이었다.

“난 물론 괜찮아. 괜찮고…… 말고. 이 정도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사실 지금 진령은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복수였다. 남궁산산은 그런 친구의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궁상, 이 바보천치! 얼간이 자식!’

이 사태는 오직 그녀의 파렴치한 동생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게 남궁산산의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나로서(쌍둥이지만!) 응징하지 않으면 천하 의 도리가 바로 서지 않을 터였다. 이번이 바로 그 남궁상과의 시합이었다. 드디어 쌓인 한을 청산할 결전의 순간이 온 것이다.

“저 친절해지고 싶어요. 그러니 친절하게 없애주겠어요.”

진령의 눈동자 속에선 결연한 의지가, 그녀의 전신에선 숨 막힐 정도로 농후한 살기가 풍겨나며 사방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우리 모두 친절해지도록 하죠.”

***

‘왜지??

남궁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일이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배배 꼬였는지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 할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솔직한 심정으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왜?”

그러나 자신은 지금 준결승 참가 자격을 둔 준준결승 싸움을 앞두고 있었다. 지금 남궁상한테는 강호란도에서 도박으로 잃은 돈을 벌충하기 위해 상금 오만 냥이 어떻게든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투기제에서 삼위 안에 들어야 했다. 그 염원을 담아 조 이름도 ‘사채청산’이라 지었다. 그런데 얄궂게도 그 앞길을 태산처럼 가로막고 있는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정인(情人)인 진령과 그녀가 속한 ‘오뉴월 서리’ 조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아직도 뜨거운 분 노의 날개가 불꽃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은 흘낏 훔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날 밟고 지나가지 전엔 여길 순순히 통과할 순 없을 거예요!’라는 무언의 기세를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그 혼자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현금의 빚이 아닌 마 음의 빚을 받아내려 하고 있었다.

“일이 왜 여기까지 꼬인 거지? 왜??

다시 한 번 뇌리 한쪽 구석에 붙박여 있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쯧쯧, 그러게 왜 바람 같은 걸 피고 그랬나?”

옆에 있던 용천명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상대편 진영과는 십수 장이 떨어져 있는데도 느껴지는 원한이라니. 거기다 남궁산산은 개인적인 친분 관계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그렇게 사이 나쁘던 마하령까지 왜 한팔 거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더 무서웠다.

“누, 누, 누가 바, 바, 바람을 피웠다는 겁니까?”

남궁상은 흥분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렇잖아도 오해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선배라는 사람이 지금 옆에서 염장을 지르는데 그가 어찌 평상심을 유 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용천명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그야 바로 자네지.”

용천명의 손가락은 정확히 남궁상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궁상은 가슴이 철렁해져서 외쳤다.

“오, 오, 오해라니까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그러나 용천명은 별로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야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또 누가 아는가? 그때 누군가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지 누가 알겠 는가? 그때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는가? 당시 자네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자세였다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지, 마음이 동(動)하면 이미 행 (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아미타불. 자네 정말 ‘동(動)’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에 가서 얄밉게 사이비(似而非)스런 소림의 속가제자 티를 내니 더욱 열이 받았다. 게다가 계속 ‘동자를 강조하는 것은 놀리기 위한 의도가 분명했다. “그, 그건 억지입니다! 이상한 질문도 하지 마시구요. 그때 제 손이 위로 올라갈지 아래로 내려갈지 용 선배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제 마음속에 들어와 본 것도 아 니잖습니까?”

“경험으로 알 수 있지, 경험!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남자의 손은 아래로 내려간다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아미타불.”

반배합장하며 용천명이 나직이 불호를 외었다.

“자꾸 색색색 하지 마세요! 전 정말 억울하다고요. 게다가 색즉시공과 이 색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괜히 좋은 말, 나쁘게 망치지 마세요.” 물론 아무런 관계도 없고 전혀 의미도 다르지만 놀림거리가 되기에 의의가 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자네의 말은 진 소저에게 전혀 먹히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 그건 그렇지만……..”

그렇게 아픈 곳을 정면으로 찌르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경험경험 하시는데, 용 선배도 동정이지 않습니까? 설득력이 없어요.”

그러자 옆에서 입 꼭 다물고 있던 류은경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건 용천명도 다르지 않았다.

“누, 누, 누가 동정이라는 건가? 게, 게, 게다가 동정이면 또 어떤가? 나, 난 소림의 제자일세. 육욕을 멀리하는 건 당연한 일일세.”

예상외로 엄청 당황하는 모습에 남궁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동정이었군요.”

사실 넘겨짚어 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게 나쁜가! 그러는 자네는? 설마 자네…….”

그러자 이번에는 남궁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비, 비밀입니다.”

그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이대로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을 너 나 할 것 없이 깨달은

탓이었다. 어색한 기운이 가시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다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용천명이었다.

“자넨 지금 진 소저에게 위축되어 있어. 지금 자네의 마음 상태로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우린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도박장에서 진 빚을 갚아야죠. 사채청산의 염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저흰 끝장입니다. 저는 그렇다 치고 용 선배는 마 소저한테 이길 자신 있습니까? 저번에도 한 번 졌잖습니까?”

복수심 때문일까? 남궁상이 용천명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

“그, 그건…..”

용천명도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승패가 명백한 시합이었고, 그는 승부를 잃는 대신에 다른 귀한 것을 얻었다.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 변명할 만한 거리도 없었기에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또다시 중단되었다. 영겁 같은 순간이 지난 후 용천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이길 수 있겠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확신이 아닌 의문이었다. 그러나 남궁상 역시 확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글쎄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류은경은 사건의 유발자인 만큼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쨌든 이 싸움을 피할 방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맞설 수밖에 없었 다, 싫든 좋든.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남궁상이 잠시 고민했다.

자칫하면 류은경의 명예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번 시합의 첫 번째 선수는 류은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느낌에 그녀의 상대는 딱 한 명뿐이었다.

“류 소저의 아마 상대는 산산이 될 겁니다.”

“그 사람의 성도 남궁 씨이더군요? 아시는 분인가요?”

“저랑 쌍둥이 남매입니다.”

그 말에 잠시 류은경이 깜짝 놀랐다.

“기권하십시오.”

잠시 고민하던 남궁상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왜요? 그 사람과 남매이기 때문인가요?”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례지만 지금 류 소저의 실력으로는 산산을 이기기 힘듭니다.”

남궁상이 냉정하게 말했다.

“승부는 겨뤄봐야 아는 거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만일 지더라도 힘 정도는 빼놓을 수 있어요.”

류은경도 지지 않고 대답했다.

“다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제일 못하는 게 남 사정 봐주는 녀석이니까요. 게다가 만일 류 소저가 기권하면 산산도 기권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죠?”

“이래봬도 이십 년 이상 함께 살아온 남매니까요.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권하세요. 아무도 소저를 책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원래 이 시합은 저랑 진령이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원인 제공자는 눈앞에 있는 류은경이긴 했지만 말이다.

“……”

류은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남궁상과 남궁산산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남궁산산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쌍둥이라서 그런가? 확실히 두 사람 사이에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다가 그녀의 시선이 살짝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에 진령이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매서운 눈으로 이곳을 바라

보았다. 류은경 자신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진령의 시선은 남궁상을 향하고 있었다. 다시 류은경의 시선이 남궁상을 향했다.

“싫어요.”

그녀의 의외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항상 고분고분하고 미안해하기만 하던 류은경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지 못할 정도로 의외의 대답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한 다음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투기장 한가운데에선 이미 남궁산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 했어?”

남궁산산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말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뭘요?”

마주 선 류은경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기권 말야. 하라고 했을 텐데?”

확신을 가진 어투였다.

“어떻게 그걸…….”

깜짝 놀란 류은경이 반문했다.

“그 정도는 알지. 왜냐하면…….”

“쌍둥이니까?”

류은경이 반문했다.

“맞아.”

남궁산산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스스럼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대사형에게 많이 물들어서 증세가 더 심해졌다. 하지만 편하 게 말을 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듣는 류은경도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보기보다 털털한 성격에 기인한 듯했다. 게다가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남궁상과 남매라는 사실에 그녀는 매우 강한 호의를 품고 있었다.

“사이좋은 남매네요?”

모친은 친모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남동생만 챙겼기 때문에 그녀와 남동생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아마 그 간극은 결코 메워지지 않을 터였다, 평 생.

남궁산산은 유쾌하듯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그 녀석에게 했다간 경기 일으킬걸?”

“그렇게 웃긴가요?”

아직도 배꼽을 부여잡은 채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남궁산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류은경은 어느 부분에서 저렇게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겨우 웃음을 그친 남궁산산이 자세를 똑바로 했다. 좀 전처럼 가벼운 모습을 온데간데없고 전신에서 은은한 기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기운이 조용히 류은경을 압박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한 류은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천무학관 칠봉 중 한 명의 실력인가? 그렇다면 저 진령이란 사람도 이 사람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란 이야기겠지?”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저히 자기 또래로 보이지 않는 실력이었다.

“웃겨준 보답으로 나도 다시 한 번 권유하지. 기권해.”

확실히 그것은 솔깃한 권유였다. 한 번 큰소리치고 나온 류은경의 마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그러나 그녀도 나름대로 오기가 있었다.

“싫어요.”

류은경의 대답은 끝내 변하지 않았다.

“은근히 고집이 세네?”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항상 부정적이고 소심하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지라는 이야기만 사부님께 종종 들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모든 상황을 언제나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지금은 발동하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종종 듣게 될 거야.”

확신에 찬 어조로 남궁산산이 말했다.

챠랑!

“그럼 어쩔 수 없지.”

남궁산산은 조용히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조심해. 궁상이 녀석도 세 번 중 한 번은 나한테 엄청 깨지니까.”

남궁산산이 경고했다. 류은경은 긴장했다. 분명 허풍이 아니었다. 검을 뽑아 들고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강했다. 그리고 무척 자연스러 웠다. 전혀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강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워질 수 있는 건지, 자연스럽기 때문 에 강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스릉!

류은경도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맑은 방울 소리 같은 검음이 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녀의 검이 지난 며칠 사이에 부쩍 성장했다. 특히 강도 높은 실전을 통해 그동안 형태로만 알고 있던 검술의 상당 부분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녀는 성장했다. 억지 명령을 내린 그 사람한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신도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류은경의 몸 주위에서 바람이 일어나자 그녀의 은발 머리카락이 춤추듯 나부꼈다.

“재미있군.”

남궁산산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넣은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었다.

까딱! 휙!

가볍게 손목을 살짝 움직인 것처럼 보였는데도 산산의 검은 채찍처럼 날카롭게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특별한 초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산산의 칼은 남궁 상의 칼보다 얇고 가벼웠지만, 대신 훨씬 빨랐다. 처음에는 막거나 피할 만하던 검속이 횟수를 더해갈수록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너무 빠른 공격에 공기의 흐름을 읽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류은경은 유효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쏟아지는 공격들을 피해냈다. 검을 부딪치거나 반격해 들어오 는 일 없이 그녀는 피해내기만 했다. 세 번 검을 휘두른 다음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자 산산은 검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읽었어? 내 검의 궤적?”

“바람을 통해서.”

류은경이 짧게 대답했다.

“재미있는 능력이네.”

남궁산산은 꽤 흥미가 이는 모양이었다.

“모든 움직임은 공기를 진동시키죠. 당신의 움직임도 예외가 될 수 없어요.”

그것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연마된 재능이었다. 그녀는 몸 주변의 공기를 움직여 자신의 움직임을 돕거나 상대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흐음, 공기의 움직임이라……. 그건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된다는 건가?”

그 말에 류은경은 깜짝 놀라 외쳤다.

“그건 불가능해요.”

불가능이라는 말에 남궁산산은 피식 웃었다.

“그 말, 우리 대사형 앞에서는 안 하는 게 좋을걸?”

“왜죠?”

“분명 지옥을 경험할 테니까. 어떤 지옥을 보여주면 ‘불가능합니다’에서 ‘불(不)’ 자를 빼고 ‘가능합니다’라고 말하는지 실험하길 좋아하거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남궁산산의 대사형이란 존재엔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남궁산산이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가능해, 바람보다 빠른 검.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녀는 지금 바람보다 빠르게 검을 휘두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말했잖아, 불가능은 가능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고. 우리 대사형이 종종 하는 말이지.”

남궁산산 역시 남궁세가의 핏줄인 만큼 기본적으로 세가 독문검법인 뇌전검법을 익혔다. 하지만 이 뇌전검법은 너무 강맹하고 속도와 위력을 중시하기에 여성들 에게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같은 방식으로 배우면 여자가 남자에게 뒤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차별 이전의 선천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남궁산산은 다르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았다. 설령 힘은 남자보다 약할지라도 그녀에겐 다른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재능도 있고 눈썰미도 있었다. 그녀는 위력을 포기하는 대신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한 마리만으로도 확실히 잡는 게 쫄쫄 굶는 것보다 나았다. 한 마리를 완전히 잡을 수 있는 기술을 얻으면 조만간 또 한 마리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두 눈 멀뚱히 뜨고 멍하니 있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해 서 그녀의 뇌전은 비록 굵기가 가늘지만, 면도날처럼 날카롭고 빨라졌다. 흔들리며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베고, 전혀 바람을 일으키지 않은 채 매달린 종이를 수십 등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류은경은 확실히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천무학관에 그 정도 재능을 가진 자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게다 가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은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어떤 사람, ‘대사형’ 덕분에 경험의 횟수가 달랐다. 무슨 횟수기에 그렇게 생색내냐고 묻는 다면 그녀를 포함한 주작단 전원은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할 터였다.

‘지옥 경험 횟수!’

그리고 지옥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려온 것이 무엇인지 언제든지 만인 앞에 선보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검날이 파르르 세차게 떨리면 요란한 울음을 터 뜨렸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녀의 검날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한줄기 실 같은 섬광이 허공을 그었다.

바람은 느껴지지 않았다.

살랑!

몇 가닥,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이 정적 속에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때? 내 말 맞지?”

남궁산산이 웃으며 말했다. 류은경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자신의 목에 놓인 검날의 한기가 얇은 피부를 타고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전해져 왔던 것이 다.

“졌군.”

“네, 졌군요.”

“항복하겠어?”

“항복하겠습니다.”

이미 승부가 갈렸는데 집착하는 것은 좋은 버릇이 아니었다.

역시 예상대로의 광경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남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용천명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예, 상성이 너무 좋지 않았으니까요. 류 소저의 상대는 차라리 마 소저였으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것대로 곤란한 광경이 나올 수도 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자리를 비켜줘야지? 연인들이 대화하는데 눈치없이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안 되지. 게다가…….”

“게다가?”

“현명한 사람들은 부부 싸움 근처에 가지 않는 법이지.”

“부부요? 저 두 사람, 이미 혼인했나요?”

깜짝 놀란 얼굴로 류은경이 반문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는 얼굴로 남궁산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아마도.”

이 싸움에서 궁상이 살아남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라는 말은 생략했다.

“하긴 했어도 상관없긴 하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류은경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아뇨,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아참, 이 초식 이름이 뭐죠?”

자신의 바람 결계를 가르고 들어온 검을 바라보며 류은경이 물었다.

“아직 없어.”

이건 초식의 정묘함이나 변화무쌍함보다는 오로지 남궁산산 개인의 부단한 수련 성과에 의해 얻어지는 검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직 초식의 이름은 없었다.

“제가 이름을 지어줘도 될까요?”

“음.. 좋아.”

“번개처럼 빠른 검이 바람을 가르고 들어왔으니, ‘절풍섬뢰(切風閃雷)’가 어떨까요?”

“바람을 가르는 섬광 같은 번개라……. 우아함이 좀 부족하고 너무 사내의 것같이 강하지만 나쁘지 않은 이름이네. 고마워.”

“다음에는 섬뢰처럼 빠른 검에도 끊어지지 않는 바람을 보여 드릴게요.”

그동안의 류은경에게서 볼 수 없었던 적극적인 모습이었다. 이번 싸움을 거치면서 그녀의 마음 안에 뭔가 새로운 의지가 솟아난 모양이었다.

“기대하지.”

그리고는 잠시 궁리를 하더니 다시 한 번 류은경을 보며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할 말이 있는데?”

“뭐죠? 말씀하세요.”

“좋은 실력이었어, 재미도 있었고. 어때? 천무학관에 들어오는 게?”

“제, 제가 천무학관에요?”

그런 제안을 받을 줄 생각지도 못했던 류은경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래, 너 정도 재능이라면 충분히 들어올 수 있어. 거기 들어가면 사 년 동안 그곳에서 머물러야 되지만.”

“사 년 동안이나요?”

“물론이지, 거긴 기숙사제니까. 왜, 너무 길어? 사 년이 좀 길어 보여도 금방이야. 일 년에 두 번 휴가 때는 집도 방문할 수 있고.”

집으로의 방문? 그딴 건 필요없었다. 그녀에게 이 제의가 너무나 매력적인 부분은 다른 부분이었다.

“아뇨, 길다니요, 너무 짧을 정도인걸요. 사 년이 아니라 십 년이라도 상관없어요. 전 그 집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아무도 절 무시할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요!”

류은경이 선언하듯 외쳤다.

“괜찮겠어?”

그 질문을 듣자 류은경은 자신에게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망설임을 끊어줄 결단력이었다.

“괜찮냐고요? 물론이죠. 전 이제 독립하겠어요.”

어차피 그녀에겐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 말마따나 독립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혼자 살 수도 있었다.

“그걸 왜 이제까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방법을 궁리하다 보면 해결책은 나오는 것을. 그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요.”

진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각오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길 수 있겠어?”

남궁산산이 물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남궁상의 쌍둥이 남매가 아니라 진령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그 친구를 친구로서 응원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검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줄 거야!”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어조로 진령이 대답했다. 아직도 그녀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각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질문이 오가고 있었다.

“이길 수 있겠나?”

조용한 목소리로 용천명이 물었다.

“선배님이 령아를 상대로 힘을 좀 빼놓아주시면 이길 수 있었겠죠.”

약간 원망하는 투로 남궁상이 말했다.

“내가 정말로 그랬길 원하나?”

용천명이 남궁상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숨김없이 대답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잠시 생각하던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마 그랬다면 마음이 더 아팠겠죠.”

“그걸 알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겠나?”

“미안합니다, 선배. 하지만 솔직히 나가기 무섭네요.”

나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싸워서 이긴다고 해서 이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일은 힘으로 찍어누른다 해서 해결될 문제 가 아니었다. 솔직히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그 솔직한 말에 잠시 침묵하던 용천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음…… 사실 나도 무섭네.”

그리고는 얄밉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마디 더 덧붙였다. “죽지 말게.”

남궁상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군요.”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확실히 이 싸움은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힘이 없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을 수 있는 위험이 도사 리고 있었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가 끔찍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저게 바로 고대로부터 면면부절이 내려왔다는 유서 깊은 대혈투인 ‘연인들의 대결이군요. 이거 참 흥미진진한데요.”

연비는 이 광경이 끔찍하다기보다 오히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설산 꼭대기에서 굴린 눈덩이가 어떻게 부풀려졌는지 궁금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게 그렇게 흥미진진한 건가요?”라고 묻는 나예린의 물음에 연비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물론이죠!’라고 대답했다.

“그동안은 그 유서 깊은 혈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서 그저 남의 일만 같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생겨 버렸어요. 실감이 안 났던 거죠. 하지만 이번에는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보니 실감난다고 해야 할까요? 좀 더 감정 이입이 잘 되는군요. 누가 이길까요? 정말 콩닥콩닥거리는데 요.”

연비가 두근거려 하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전부터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했어요. 오늘 드디어 그 답을 알 수 있겠네요. 그런데 누가 이길지 미리 알면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요?”

“그 말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분석하려 드는 것이 무인들의 본능이죠.”

나예린이 대답했다.

“두 사람의 실력은 막상막하예요. 아니, 객관적인 실력은 저 궁상 대장이 조금 더 우위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승패를 결정하는 게 반드시 객관적인 무력만이 아니라는 건 린도 잘 알잖아요?”

승부라는 것은 생물처럼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변하는 법이었다.

“그럼 알 수 없다는 건가요?”

연비는 다시 한 번 볼을 긁으며 잠시 고민했다.

“글쎄요. 아마 마음이 더 강한 사람이 이기겠지요.”

그렇다면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진령 앞에 선 남궁상은 형장에 이송된 죄인처럼 기를 못 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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