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4권 7화 – 진령 대 남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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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4권 7화 – 진령 대 남궁상

진령 대 남궁상

-개막! 연인 사투(戀人死鬪)!

“어때요, 진령? 다시 한 번 생각해 볼래요?”

말없이 건너편을 노려보기만 하고 있는 진령을 향해 마하령이 물었다.

“아니요, 하령 선배. 필요없어요.”

진령이 딱 잘라 대답했다. 어느새 이름을 부르게 된 두 사람이었다.

“정말 싸울 셈?”

“물론이죠.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리며 여기까지 올라왔을 리 없잖아요?”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맞상대하는 성난 진령의 모습은 마치 나찰과도 같았다. 그녀는 오갈 데 없는 분노를 이 투기장에 쏟아 붓고 있는 듯했다. 여러 사내들이 그 녀의 손에 곤죽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녀의 이글거리는 분노는 꺼질 줄 몰랐다. 아무래도 ‘오뉴월 서리’라는 조 이름은 잘못 지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자꾸만 들 게 하는 대목이었다. 친구 남궁산산이 걱정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뭐, 나야 령이 네가 하는 일이니까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는데 사실 아직 좀 의심스럽긴 해. 그 궁상이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대범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거든? 그 녀석은 아직 령이 네 옷도…… 합!”

진령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은 남궁산산은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는 서둘러 입을 닫았다.

“그러니까 더 열받는 거야!”

날카로운 어조로 진령이 소리쳤다.

“아니, 그러니깐 내 말은 역시 오해가 있었던 게…….?”

남궁산산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난 아직 청혼도 못 받았단 말야!”

진령이 빽 소리쳤다.

‘아, 그래서 더 화난 거구나.’

그렇다면.

“너, 이미 알고 있었구나?”

미심쩍은 목소리로 남궁산산이 물었다.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이건 그런 문제가 아냐!”

진령이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치듯 대꾸했다.

“난 이미 한 줄 알았지. 설마 아직도 못했을 줄 몰랐어. 저번에 월영정에 있을 때 그때 한 줄 알았거든. 청혼.”

“그때 대사형의 방해로 무산됐어. 그리고는 다 대사형의 입으로 진행됐지, 본인의 입으로는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는 겁쟁이야.”

“그래서 어쩌려고?”

“대사형이 그랬다며?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도대체 무엇을 되게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게 령이 네 생각이야?”

남궁산산은 그게 뭔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

산산은 친구를 말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해! 네가 믿는 바대로. 그 녀석도 가끔 혼나봐야 정신이 번쩍 들지. 남자들은 대부분 바보야. 그러니 좀 더 확실히 말해주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 그들 은 여성들의 섬세한 무언의 말들을 들을 만큼 섬세하지 못하니까. 사내들은 다들 둔치거든.”

“그 사람의 그렇게 확실하지 못한 점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대사형도 항상 그게 문제라고 했지. 그나마 대사형 만나고 나서 지옥을 몇 번 겪은 후로 나름 그 녀석도 강해졌어.”

아마 주작단 중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룬 게 남궁상일 것이다. 최근 들어 서로 실력을 비교해 본 적은 없지만 그 사실만큼은 다들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아직도 우유부단하다고. 난 좀 더 확실히 말해주길 원하는데. 그렇게나 기다렸는데!”

“그래서 뭘 어쩌려고?”

“대답을 듣고 말겠어.”

단단한 결심이 배인 목소리로 진령이 대답했다.

“좋아. 내가 대화의 장은 만들어놨으니까 마음껏 퍼부어주고 와. 령이가 돌아온 후에 마 선배는 용 선배 쪽을 부탁해요.”

“내, 내가? 어떻게?”

너무나 단호한 진령의 태도에 마하령은 조금 당황했다.

“알아서 잘해봐요. 한 번 이겼잖아요. 두 번이 뭐 어렵겠어요?”

산산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여자를 덮치거나 바람을 피거나 그러지 않았는데?”

자기는 싸울 이유가 없다는 투였다. 진령과 어울린 건 어디까지나 여자로서의 분노였으나, 그 분노 안에 자기까지 휩쓸리고 싶지는 않았다. 용천명 옆에 생판 처음 보는 계집애가 붙어 있는 게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아직 그들에겐 대화로 풀어나갈 여지가 있었다. 더구나 분노에 불타며 나찰처럼 사납게 날뛰는 진령을 보고 있으니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자기가 망가지기 전에 망가진 남에게서 배운다. 이런 게 ‘반면교사’의 묘리인 모양이다.

‘인간은 타인의 성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듯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것이겠지.’

이 경우 실패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게 그렇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진령은 드디어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전장을 향해 걸어갔다. 저 건너편에서 문제의 그가 걸어오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춰졌다.

그를 처음 눈 안에 담게 된 때는 언제일까? 아마 아미산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전에는 그저 한 사람의 경쟁자였을 뿐이다.

구룡칠봉(九龍七鳳), 그 안에서 남자도 여자도 없었다. 진령은 남자, 여자를 떠나서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남궁세가의 셋째 아들은 여러 경쟁 상대로서 주의 대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터 다른 사람과 구분되게 되었을까?

검에 몰두하는 그는 무척이나 멋있었다. 여자에게 말을 걸 때는 숙맥도 이런 숙맥이 따로 없고 어리버리하기까지 한데 검을 들면 저렇게 멋있어 보이니 참으로 신 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진령은 남자는 한 면만 보고는 모른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덮쳐 오는 호랑이로부터 자기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가 등에 상처를 입은 그를 그녀는 사랑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의 등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었 다.

자신의 남은 인생에는 항상 그의 모습이 곁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것은 확신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믿음이 깨지고 말았다. 그녀는 지독한 배신감을 느꼈고, 어떻게든 그것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투기장 한가운데서 마주 선 운명의 두 사람에게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 당장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두 사람 사 이의 공기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멀리 떨어져서 보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짜릿할 정도로 확실하게 느껴졌다. 투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관중들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 모종의 느낌에 대해 상당한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이 긴장하는 것도 그 익숙함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런 감각을 평소에 자주 느꼈고, 그때는 언제나 연인이나 부인과 불화가 있었을 때였던 것이다. 그때마다 독특하게 풍겨지던 긴장의 기운을 그들은 동물 적인 감각으로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유사한 감각을 의외의 장소에서 느낌으로써,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던 그 느낌이 밖으로 끄집어내어졌 다. 지금 사람들이 절로 긴장하는 것은 그 탓이었다.

“괜찮을까요, 저 두 사람?”

약간 걱정스런 어조로 나예린의 물었다. 용안의 소유자인 그녀의 감각은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재 두 사람 사이에 풍겨져 나오는 긴장 의 기운이 범상치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휘몰아치는 감정은 마치 폭풍우 치는 바다에 발생한 사나운 소용돌이 같았다. 평범한 대 결 사이에서 자주 느껴지는 순도 높은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분노, 오해, 실망, 애정, 후회, 억울 등등의 오만 가지 감정들이 한데 모여 그 안에서 한 뭉텅이 가 되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어, 연인끼리 싸우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라던데요? 사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잖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아닌가요?”

얌전히 앉아 있던 윤미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이었으니까. 일종의 상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자 연비가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 그걸 누가 정했죠? 싸우는 게 당연하다는 걸요? 안 싸울 수도 있죠. 충분히 가능해요. 그러려고 하고자 하면요. 그렇다면 신경 쓰이게, 힘 빠지고 덤으로 기 분도 나빠지고, 감정도 상하게 싸우며 사는 것보다 안 싸우면서 사는 게 훨씬 행복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대다수는 싸우잖아요?”

“그렇다는 건 ‘모두’가 다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굳이 다수에 자기를 넣을 필요는 없지 않아요? 어차피 절대적인 소수만이 행복을 손에 쥘 수 있다면 그 소수에 들 어가려고 하는 게 훨씬 더 이득 아니겠어요?”

“반박할 말이 없군요.”

“그러니까 남들도 다 싸운다는 건 변명일 뿐이에요. 사실 연인끼리 부부끼리 싸우면서 사는 게 잘못된 세상이라고요. 게다가 그럴 수 없다고 단정 짓고 한계 지어 버리면 영원히 그렇게 될 수 없어요. 부정한다는 것은 자기 세계에서 그 사실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운다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뭐라뭐라 해도 싸우지 않고 알콩달콩 살면 좋잖아요? 재미있고!”

그리고는 단호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이 정도에 깨질 인연이면 원래 그것밖에 안 됐다는 거예요. 의지가 있다면 계속 그 끈을 붙잡겠죠. 그러지 못하면 헤어지는 거고.”

“냉정하군요, 연비는.”

이 모든 일의 사실상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금 더 순화시키면 원인 제공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극히 냉정하고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발언이었다. 물론 연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냥 정직한 거죠. 그것보다 린이 그런 일에 신경 쓴다는 게 더 놀랍네요. 예전에는 그렇게까지 타인의 일에 관심 가지지 않았잖아요? 관심을 가진다 해도 주위의 두세 사람에 한정될 뿐이었는데?”

“만물유전. 변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없죠. 기왕이면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바뀌면 더 좋잖아요? 아, 이건 제 말은 아니에요. 제가 아는 사람, 지금 이곳에 없는 사람이 말해준 거죠.”

“그러니까 린은 그 사람의 그 생각에 동의한 거라 그 말인가요?”

“그렇죠. 그래서 바뀌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조금은 자기 세계 밖으로 나가보려고 노력도 해보고요.”

그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움츠려 있기만 하던 나예린이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용기를 가지고 변화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자기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자기 세계를 더 확장하는 거죠.”

“맞아요. 확실히 그렇게 덧붙였어요. 그걸..

그러자 연비는 나예린이 말을 이을 기회를 빼앗으며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확실히 처음 봤을 때의 린과는 확연히 달라요. 당신이 그렇게 변해줘서 기뻐요.”

연비가 웃었다.

“다행이에요, 연비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나예린도 따라 웃었다.

“물론 내가 실망할 리 있겠어요. 십 년 만에 만난 린은 몰라볼 정도로 최고의 미인이 되어 있었는데, 내가 어찌 실망할 수 있었겠어요. 그때의 꾀죄죄하고 볼품없던 소녀라고 누가 믿을 수 있었겠어요. 우왓, 깜짝이야! 이 말밖에 안 나오죠.”

“절 놀리는군요.”

나예린이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이런 허물없는 모습 역시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빙백봉의 전혀 다른 면모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행운 을 누리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연비는 그중에 한 명이었다. 수백, 수천 명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전혀 미안 해하는 기색도 없이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해와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투기장을 조용히 바라보며 나예린이 입을 열었다.

“나도 누군가와 알콩달콩 사는 게 가능할까요?”

연비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린, 그럴 사람이라도 있어요? 정말 놀라워요.”

연비의 호들갑스런 반응에 나예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겨우 별거 아닌 말 한마디에 놀라다니, 연비답지 않은걸요?”

그러나 확실히 연비는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동요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마음이 혼란스 러웠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가 방아쇠가 된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연비는 진정하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뇨, 확실히 놀랄 만한 일이에요. 예전에는 혼인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잖아요? 예전에 린에게 그건 결코 자기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을, 절대 있 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하지만 조금 전 린의 말은..”

얼마나 동요했는지 연비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나예린이 살짝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라면서요? 저도 좀 변한 것이겠죠.”

그녀는 담담히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그런 모습 역시 약간 충격이었다.

“정말 깜짝 놀랄 일이에요.”

“그냥 그런 일도 나쁘지 않을 수 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물론 생각뿐이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심도 들고요.”

“그럼 그 대상이라도 있어요?”

이 질문은 약간 핵심을 찔렀던 모양이다. 나예린이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살짝 얼굴을 붉히고 당황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연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된 자세로 나예린의 붉은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예린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막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중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 속에 그 말은 묻혀 버리고 말았다. 아니, 나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오오옷! 격돌! 대격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눈에 호강하시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궁세가와 아미파의 진산절기를 구경하는 것은 정말 드문드문한 호강이지요. 멋집니다. 젊은이들 중의 기수답게 다들 굉장한 실력입니다아아아아아아아아!”

연비는 시선을 돌려 날카롭게 격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은 연비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나중에 두고 보자!’

꾹 다물어져 있던 연비의 입이 열리며 조용한 외침이 새어 나왔다.

“둘 다 죽어버려!”

그 호안석 같은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황금빛 속에는 일말의 용서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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