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돌아가지 않아요!
– 류은경의 폭탄선언!
남궁상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은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아직도 귀가 멍멍하고 시야가 흐릿했다. 온몸이 노곤하고 여기저기가 아릿아릿 쑤셔왔다. 내장이 진탕 된 듯 아직도 울렁거렸다. 한바탕 피라도 토해내고 나면 속이 좀 개운해질 것 같았다. 뿌옇던 시야에 초점이 맺히면서 두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익숙한 얼굴, 용 천명과 류은경이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류은경은 울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 가며 사과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모두 제 탓이에요.”
“괘… 괜찮소. 류 소저의 잘못만은 아니오. 따지고 보면 나도 공범이니까.”
물론 그녀가 진실을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진실을 말한다 해도 믿어줄 리는 거의 없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녀의 억지에 어 울려 준 건 남궁상 자신이었다. 그도 어찌 보면 공범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데, 왜 나쁜 면을 먼저 보는 것일까? 그건 인간이 약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기 때문일까? 좀 더 적극적으로 그녀의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픈 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다 보니 이제야 조금 머리가 시원해진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 는데 그녀가 모든 걸 알아주길 바라서는 안 됐다. 행동으로 보여달라는 말은 아마 그런 뜻이었으리라.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것 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그제야 대결의 승패에 생각이 미친 남궁상이 용천명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 어떻게 됐습니까, 용 선배?”
한마디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폐가 가시로 찌르는 듯 아파왔다. 말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몸 안의 기혈도 여기저기 엉켜서 엉망이었다. 용천명이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졌네.”
남궁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온갖 상념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상금 오만 냥은 우리 손을 떠났네. 우린 다시 오만 냥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하네.”
용천명의 목소리도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녀…… 령아는…… 무사합니까? 제가 졌다는 건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이겠죠?”
그러자 용천명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왜 자신한테 패배와 파산을 통고할 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거지? 남궁상은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졌다. 용천명은 말하기 괴로운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 설마?!”
남궁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길한 예감에 가슴이 얼음덩이를 얼려놓은 듯 서늘해졌다.
“확실히 싸움이 끝났을 때 최후까지 서 있었던 진 소저였다네. 자넨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지.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 역시 선 채로 기절했던 것뿐이었네. 그 런데 무리를 해서 그런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네. 하지만 걱정 말게, 그리 큰 상처는 아니니… 곧…….”
그러나 남궁상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것은 마음뿐이었다. 만신창이 된 그의 몸은 그의 의사를 거부했다. 현재 그의 몸은 그 명령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봐, 그만두게. 지금 자네 몸으론 손가락 까닥하는 것만으로도 장하단 소리 나올 정도란 말일세.”
남궁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독한 고통이 엄습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바람에 귀도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덕도 컸다. 어떻게든 그는 몸을 일으켜 보려 고 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빨리…….?”
울컥, 남궁상이 서둘러 몸을 일으키다가 그만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것 보게, 무모한 짓 좀 하지 말게.”
용천명은 다시 억지로 그를 눕힌 다음 아예 혈도를 짚어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강짜를 부릴 것 같았던 것이다. 그의 행동 대체는 매우 현명했다. 다만 아 혈을 짚지 않았기 때문에 말은 할 수 있었다. 남궁상이 필사적으로 용천명을 바라보며 처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 선배, 부탁이 있습니다.”
“뭔가?”
지금 그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절, 그녀 옆으로 데려다 주십시오.”
이 부탁만큼은 용천명도 거절할 수 없었다. “좋네.”
한순간에 마음을, 분노를 표출한 것은 당장은 시원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를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자니 남궁상은 결코 기뻐할 수가 없었다.
“엉엉엉! 미안하오. 내가 다 잘못했소. 백 번 천 번 만 번 잘못했소. 그러니 일어나 주시오, 령. 제발~”
혼수상태인 진령의 손을 부여잡고 남궁상은 무릎을 꿇은 채 눈물 콧물 흘려가며 울면서 사과했다. 그러나 사과를 받아줘야 할 당사자의 눈꺼풀은 열리지 않았다. 남궁산산과 마하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진령의 옆에 서 있었다. 그러나 달라붙어서 울고불고 난리치는 남궁상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직 진령의 의식은 혼탁한 암흑을 헤매고 있었다.
‘원래 그러기 위해 배웠던 것이 아니었는데…….’
몽롱한 의식 속에서 진령은 떠올렸다. 자신이 왜 비상련화를 배우기 위해 그렇게 몰래 노력했었는지……. 처음부터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이기기 위해 배웠 던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좀 더 순수했다.
‘그저 당당히 옆에 서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는데…….?
그의 현 실력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다. 점점 차이가 나는 그들 사이의 실력 차를 메우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비상련화를 펼쳐 남 궁상을 놀래켜 주고 싶었다. 그의 놀란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푸르죽죽하게 변한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어느새 처음의 의도는 변질되어 그것은 남궁상을 쓰러뜨리기 위한 기술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오래전부터 염원하고 목표로 하던 아미 최고의 검공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진령은 기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울먹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 소리는 무척 익숙하고 또 무척이나……
“ 시끄러…… 워… 요.”
감겨진 눈을 반쯤 뜨며 진령이 중얼거렸다. 들릴락말락한 작은 목소리였다. 기절해 있었던 탓인지 아직 목소리에 힘이 없었던 것이다.
“시끄러워요. 너무 시끄러워서 기절도 제대로 못하고 있겠네요.”
이제 진령의 의식은 거의 돌아와 있었다.
“괜찮소, 령? 날 알아보겠소? 나 궁상이가 보이시오?”
화들짝 놀란 남궁상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진령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솔직히 품위라고는 그 거취를 찾아볼 수 없는 궁상맞은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꼴사납고 볼썽사나웠다.
피식.
진령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
조용한 목소리로 진령이 그를 불렀다.
“왜, 왜 그러시오, 령?”
허둥지둥거리며 남궁상이 대답했다.
“웃겨요, 지금 그 얼굴.”
“그, 그렇소?”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며 남궁상은 얼굴을 붉혔다. 남에게 보일 만큼 좋은 얼굴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네, 무척.”
그러면서도 진령의 얼굴에는 그동안 지워져 있던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쌓인 감정은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왜 그동안 그렇게 그 일을 가지고 열을 올렸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진령의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과연 사소한 오해로 서로에게 칼을 휘두를 필요까지 있었는가, 역시 그건 너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있는 힘껏 부딪치고 보니 어딘가가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했다. 돌이켜 보면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까지 했나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그리고 그 결과, 류은경은 우승하지 못한 관계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류 소저. 집으로 돌아가질 못하게 됐네요.”
“아, 아뇨. 그렇게 사과하실 것 없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신걸요. 여기까지 내치지 않고 도와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존경하고 있습니다. 돌 아가지 못해도 좋습니다. 아니, 사실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요.”
“그럼?”
“전 독립하겠어요!”
류은경이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어, 어떻게 말입니까?”
이상한 기운이 풍겨나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자기만의 환상을 쫓고 있는 듯했다. 평소 같은 부정적인 생각은 아니지만, 범상한 것은 아닌 듯했다.
“남궁가가,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가가?’
갑자기 친근하게 가가(오라버니)라 불리자 남궁상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커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거라면 도와드리지요.”
사실 큰소리 탕탕 쳐놓고, 진령하고 대판 싸우기까지 했는데 삼위 안에 들지 못해서 미안해하던 참이었다. 화내지 않고 오히려 미안해한다는 점이 참으로 남궁상 다운 점이라 할 수 있었다.
“이건 남궁 가가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말해보세요, 류 소저.”
덥석, 류은경이 갑자기 남궁상의 두 손을 부여잡더니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가가, 저랑 결혼해 주세요! 일평생 따르겠어요!”
“겨…….?”
이건 남궁상의 말이었다.
“겨…….”
멀뚱히 지켜보던 진령의 입에서도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겨…….”
마하령, 남궁산산도 마찬가지였다.
“겨…….”
소림사의 제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결혼~!!”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다들 경악으로 입이 떡 벌어진 와중에 오직 태연한 사람은 류은경 한 사람뿐이었다. 또 다시금, 진령의 전신에서 무시 무시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그 기세는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하, 하, 하지만 나한테는 진령이 있소. 그러니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 없소.”
두 번 다시 이번 같은 일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류은경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그건 매우 발랄하고 상큼한 외침이었다.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상관없다니? 당연히 상관있지요!!”
‘저 죽을지도 모르거든요? 이 짧은 인생 아직 하직하고 싶지 않거든요??
류은경을 바라보는 남궁상의 눈빛에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류은경은 남궁상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본부인이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류은경은 막무가내였다.
“그, 그럼?”
남궁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자 류은경의 입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폭탄선언이 터져 나왔다.
“절 첩으로 삼아주세요!”
순간 모든 사람이 쩌저적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처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업!”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금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예!”
너무나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죠? 대세가의 직계이잖아요? 첩 한둘 정도야 상관없잖아요? 영웅은 삼처사첩이 기본이라면서요? 하지만 역시 세 명 이상은 너무 많은 것 같으니까, 두 명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아요. 어때요, 가가? 좋은 생각이죠?”
방긋 웃으며 류은경이 말했다. 남궁상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나 황당한 사태에 머릿속 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것이다. 지금 그는 백치나 바보랑 진배없었다.
“그..그..그..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던 진령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기가 본부인이 되어도 상관없다는데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때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대응은 류은경 쪽이 더 빨랐다. 그녀는 진령의 두 손을 꼭 잡더니 존경 어린 눈빛으로 진령을 똘망똘망하게 바라보며 말했 다.
“잘 부탁해요, 진 큰언니!”
마치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 같은 얼굴이라 진령은 차마 내칠 수가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이 이 경우 문제였다.
“어버버버버!”
열린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였다. 진령은 혀가 꼬였는지, 머리가 꼬였는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남궁상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울고 싶어졌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불행하다는, 홀아비나 노총각이나 외톨이 부대가 들었으면 경을 칠 불평을 터뜨렸다. 그는 한없이 울적했다.
“이제 다섯 남았군. 열심히 하게!”
용천명이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 주었다.
“지금 그걸 격려라고 하는 겁니까?”
남궁상이 버럭 소리쳤다.
“안 기쁜가?”
“전혀! 게다가 다섯은 무슨 얼어죽을 다섯입니까?”
“삼 더하기 사 빼기 이로 나온 결과일세.”
무슨 심오한 우주의 진리라도 말하는 듯한 자세로 용천명이 말했다.
“삼처사첩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자넨 과연 대장감일세.”
용천명이 최고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남궁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바람둥이!
무언의 비난이 바늘처럼 고막을 쿡쿡 찌르는 듯했다. 바라보는 여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껄끄러운 거지??
남궁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의 눈길에 점점 더 위축되었다.
“걱정 말게. 사내가 여러 부인을 두는 것은 법으로써 보장되어 있는 일일세.”
용천명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흥, 법법법법! 이래서 남자들이란.”
마하령이 투덜거렸다.
“뭐가 잘못됐소?”
“어차피 그 법을 만든 건 남자들이잖아요. 남자들, 늑대들한테 유리한 법을 만드는 게 당연하죠. 아마 법을 만든 게 여자였으면 이부, 삼부 기타 등등의 한 여자가 여러 남편을 가져도 상관없도록 했을지도 모르죠.”
“그건 가정일 뿐이오.”
용천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그 주장을 일축했다.
“법이 사랑의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의 감정 개입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 법이니까요.”
남궁상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양손에 꽃을 쥐게 될 것인가? 아니면 양손 다 빈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땅에 파묻힐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으나, 입 무거운 하늘이 실없이 천기누설해 줄 일은 결코 없을 듯했다.
아직도 남궁상의 수난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고 있었다.
남궁상은 죽을 맛이었다.
울고 싶었다.